넘버즈. 23장(7)
“잘 보았소. 그래 가르쳐보니 어떻소?”
“엘런 경이 부러웠습니다. 이미 완성에 가까운 기사이니 조금만 다듬으면 될 것 같습니다.”
드겔의 말에 왕은 흡족한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면 가르치는지 몰랐다.
수준 높은 기사들의 대결이었고 그동안 드겔이 싸우는 모습도 많이 봤지만, 그 정도를 판단할 만큼의 실력은 없었으니까.
무력이 강하고 기사로서 실력이 최고인 왕도 있었지만 자신은 그렇지 못했다.
그저 다른 기사들처럼 감탄하며 봤을 뿐.
그걸 안 것은 루퍼드와 로렌스가 하는 대화를 들어서였다.
그 둘도 왕의 옆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할 만큼 대결에 집중해서 한 말이겠지만.
에런 왕은 옆에 있는 크락시스를 보고 작게 말했다.
“경도 드겔에게 배운 것이오?”
“배운 것은 많으나 친절하게 가르치는 기사는 아니지요. 그리고 그건 배운다기보다는···.”
크락시스의 말에 피식 웃음이 났다.
드겔이 무료한 궁정 생활에서 찾은 재미가 두 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시종장과의 체스요, 다른 하나는 크락시스와 검을 섞는 것이다.
말이 좋아 대련이지 보고 있으면 크락시스가 불쌍하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지금 길리안과 대결한 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버텨낸 것도 대단하다 생각했는데 더 놀라운 것은 드겔을 물러서게 한 것.
이제 길리안을 비롯한 젊은 넘버즈들에게 오라는 것을 보면 크락시스에게 하던 것을 그들에게 할 생각인 것 같았다.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그러고 보니 항상 무료해 보이던 드겔이 지금은 활기차 보인다고 할까?
“앞으론 경이 좀 편해지겠소.”
“그럴지도 모르지만 드겔 경에게 양보할 생각은 없습니다.”
크락시스의 대답에 왕은 허허 웃으며 길리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가만 보면 참 신기했다.
갓 성인이 된 평민 출신의 기사를 신기할 정도로 사람들이 탐을 낸다.
엘런이 그를 키웠다고는 하나 그와는 또 다르다. 엘런이 왕실기사일 때 다른 이들에 비해 뛰어나긴 했어도 특출 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의 길리안은 과거 엘런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특출 나다.
그건 자신도 인정하는 부분.
‘그러고 보니.’
잠시 생각하던 에런 왕이 루퍼드를 보며 말했다.
“경이 넘버즈가 된 것이 언제였는가?”
“20세가 되었을 때이니 이제 4년 정도 되었습니다.”
곧 24세가 되는 루퍼드.
넘버즈가 되고 지금의 자리에 오르는데 2년이 걸리지 않았다.
그가 좀 더 빨리 넘버즈가 되려 했다면 기사 서임을 받고 얼마 되지 않아서도 가능 했을 것이다.
“좀 더 빨리 넘버즈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겠군.”
“그리 생각해 본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아카데미를 빨리 졸업한 것이 더 아쉽습니다.”
“허허.”
아카데미라면 자신도 다녔었지만 그리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러고 보면 길리안도 기사가 됐음에도 계속 아카데미를 다니겠다고 했었다.
요즘 아카데미는 예전에 자신이 다니던 때와 뭐가 다른지 궁금할 정도.
“그래. 경이 보기에는 어떠한가? 그가 넘버즈에 오를 자격이 충분하다 생각하는가?”
“이미 로렌스 경과 드겔 경이 인정하였습니다. 저 또한 그에겐 충분한 자격이 있다 생각합니다. 그는 이미 모두의 앞에서 증명했습니다. 이곳에 있는 기사들 대부분이 그리 생각할 것입니다.”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여러 사람에게 인정받는 것도 쉽지 않다. 아니 본적이 거의 없었다.
거기에 이미 드겔이 그의 수준을 못 박아 버렸다.
카스트로나 그 윗줄의 기사를 죽일 수 있는 기사라고. 넘버즈의 5번 밑은 다 포함된다고 봐야 했다.
아니 드겔 밑으로는 그가 죽일 수 있는 범위 안에 들어간다.
거기에 드겔 급의 기사와 목숨을 맞바꿀 정도라면 정말 대단한 것이다.
얼마 전 그의 기사 서임과 자신이 해줬고 그날 성인식도 겸했다. 그 나이를 생각하면 지금의 수준이 정말 대단한 것임을 다시 느낄 수가 있었다.
성인인 된 18세에 바로 넘버즈가 된 기사는 생각해보니 없었다.
모든 것이 최초였던 루퍼드 보다도 빠르다.
‘최초라.’
에런 왕은 다시 길리안을 보고 입을 열었다.
“길리안 경은 가까이 오라.”
그가 몇 걸음 떨어진 곳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치료가 우선이겠군.”
“이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멀리 있을 때는 그런 줄 알았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너덜너덜한 상의는 거의 피에 젖어 있었고 바닥에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고 표정도 그랬다.
왕은 옆에 다가온 드겔을 봤다.
로렌스와 루퍼드의 말을 듣고 가르치는 것이니 어느 정도 봐주며 한 줄 알았는데 이건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
크락시스의 말처럼 그는 친절하게 가르치는 기사는 아니었다.
“너무 심한 것이 아니요?”
“죄송합니다. 신이 나서 그만.”
그러고 웃는 드겔에게 더 뭐라 할 수도 없어 치료를 하도록 했다.
의사와 신관들이 상의를 벗어야 한다는 말에 왕비에게 양해를 얻고 그러라고 했다.
“음.”
드겔의 검에 입은 상처는 꽤 많았고 심해 보이기도 했다.
여기저기 쩍쩍 벌어져 피가 흐르는 몸.
저런 상처를 입고 그만큼 싸운 것이 신기할 정도.
거기에 흐르는 피가 닦여질 때마다 나타나는 수많은 흉터.
왕은 물론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이 놀라고 있었다.
거기에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포션을 뿌리며 피를 닦는데 표정하나 변하질 않았다.
“경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고문이라도 당했던 건가?”
“그저 제가 미숙해서 생긴 상처들입니다.”
“허허.”
할 말이 없었다.
드겔을 보자 그가 작게 말했다.
“저 정도면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겪었을 겁니다. 보통 죽음의 문턱에 발을 디뎠던 자들은 그 공포를 극복하지 못하고 다시 검을 잡기 힘든 경우가 많습니다. 그걸 여러 번 겪었음에도 아직 검을 잡고 있는 이라면 그 용기는 다른 이와 비교할 수 없겠지요.”
에런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암살의 위협을 많이 받았고 그 때문에 궁이 틀어박혀 있었던 것도 인정하는 바다.
죽는 것이 두렵지 않다는 자들은 대부분 죽음의 공포를 모르는 자들.
자신이 이례적으로 이렇게 나온 것은 곁에 드겔과 크락시스를 비롯한 기사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비를 무시하는 자들을 그냥 두면 왕가를 무시하는 자들은 더욱 늘어날 테고 왕권은 땅에 떨어질 것이다.
그건 왕에겐 죽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보여주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
용감한 왕은 아니지만 겁쟁이 왕이 되기는 싫었으니까.
왕은 생각을 접고 길리안에게 말했다.
“치료를 받으며 들으라. 내 길리안 후버 경에게···. 음 후버라···.”
갑자기 말끝을 흐리던 왕이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경의 집안은 후버라는 성을 오래 썼는가?”
“그렇습니다. 고향에 뿌리를 내린 것이 왕국의 역사와 비슷하다 들었습니다.”
그 정도면 평민치고는 나름 있는 집안이다.
당시만 해도 성을 쓰는 평민이 거의 없었고, 지금도 평민의 수에 비하면 많지 않다.
“후버라···.”
“왜 그러십니까?”
옆에서 묻는 드겔에게 왕이 속삭이듯 말했다.
“너무 흔한 성이 아니오?”
“그렇기는 하지요.”
드겔은 대답을 하면서 왕이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다.
길리안이 결투에서 보여준 능력도 있고 자신이 직접 나선 이유도 그의 능력을 확실히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야 왕의 체면이 설 테니.
물론 귀족들에게 무력시위를 하기 위함도 있었다.
어쨌든 오늘의 일은 금방 소문이 퍼질 것이다.
이제 길리안에게 포상을 하고나면 일단은 마무리 되고, 정의의 기사가 왕을 일깨운 일화로 미화 될 것이다.
지금 평민들에게 그는 영웅이고 그만큼 현재 그의 가치는 특별하다.
내일이면 널리 퍼질 길리안이라는 그의 이름은 몰라도 후버라는 성은 특별하지가 않다.
무척이나 평민다운 성이라고 할까?
그만큼 평민 중에 쓰는 자도 많고 흔한 성이다. 그가 유명해지는 만큼 문제를 일으킬 소지도 있다.
드겔은 앞으로 나서서 사람들을 보고 크게 말했다.
“이 자리에 후버라는 성을 쓰는 이가 있는가? 있으면 손을 들라.”
수많은 이들 중 이십 여명이 넘는 이들이 손을 들었다. 그중에는 기사도 한 명 있었다.
“길리안 경. 혹시 같은 집안인가?”
그들을 본 길리안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대대로 라이라프 영지에 살았고 친척들도 모두 그곳에 있었다.
그 말을 들은 왕이 말했다.
“후버라는 성을 쓰는 이들이 너무 많다. 그러니 우선 경에게 어울리는 새로운 성을 하사하겠다.”
“저는···.”
“거부하지 말라.”
“예.”
말을 꺼낸 왕이 드겔과 작은 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크락시스와 다른 넘버즈들도 왕의 부름에 곁에 다가가 얘기를 나눴고 꽤 오래 계속 됐다.
“그것도 좋겠지.”
왕이 고개를 돌려 길리안에게 말했다.
“경은 페트릭 폰 클라우드 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가?”
“예. 알고 있습니다.”
그는 초대 넘버즈 중 일인으로 큰 검을 사용했다고 한다. 그가 쓰던 검은 너무 무거워 아무나 들지 못하였다고 한다.
독립전쟁 당시 항상 전장에서 선봉 섰을 만큼 용맹했고 그 무용은 적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고 전해진다.
적들에게 학살자 페트릭이라 불리던 기사.
물론 과장 된 면은 있겠지만 에스토 왕국의 영웅으로 아직까지 기사들의 추앙을 받는 이였다.
“영웅의 가문이나 아쉽게도 지금은 이어지지 않고 있다. 해서 내 경에게 클라우드의 성을 하사한다.”
왕의 말에 모두가 놀랐다.
그건 길리안도 마찬가지.
솔직히 왕에게 새로운 성만 하사 받아도 큰 명예.
기사라지만 평민 출신이다.
그런 자신에게 귀족가문이 쓰던, 그것도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의 성을 주었다.
“제겐 너무 과분합니다.”
“경에게 작위를 준 것도 아니고 귀족이 된 것도 아니다. 단지 성을 새로 부여해준 것뿐. 과분하다 생각한다면 그 성에 맞는 기사가 될 수 있도록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라.”
“저는···.”
“그리고 클라우드의 성은 경의 집안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을 세워 작위를 받고 귀족이 되며 새로운 성을 부여받아도 그 가족이나 친척들까지 귀족이 되는 것은 아니다.
왕에게 작위를 받은 이만이 새로운 귀족이 되어 자신의 가문을 만들어가는 것.
상으로 성만 받아도 마찬가지로 본인과 그 후대만 쓸 수 있었다.
“단 경의 형제와 아비에게는 허락한다. 그들과 그 후대만이 그 성을 사용할 수 있다.”
이 또한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다.
파격적이라고 봐도 좋았다.
“경의 형이 크롬의 영웅인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용맹한 기사를 두 명이나 키운 경의 아비 또한 자격이 있다. 그에겐 내 따로 사람을 보내줄 것이다. 형제가 나와 왕가를 위해 충성한 대가라 생각하라.”
“분에 넘치는 영광입니다.”
“감사라면 아직 이르다.”
그렇게 말한 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에스토 왕국의 국왕인! 타노스 에런 밀케인 폰 에스토의 이름으로 길리안 클라우드 경에게 한시적 예외넘버 11을 부여하고 넘버즈에 임명한다.”
파격적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정도.
하지만 환호도 박수도 없었다.
그저 모두가 놀란 눈으로 왕만 쳐다보고 있을 뿐.
그건 길리안도 마찬가지였다.
이번일이 좋게 끝나면 미네르바와의 약속대로 다시 기사의 길을 가려고 했다.
방금 왕의 의지도 확인해서 마음이 편했었다.
로렌스가 넘버즈에 어울리는 기사라고 했을 때도 아직 이라 생각했다.
물론 넘버즈가 될 것이다. 이번 가을에 무투회에서 최선을 다해 자격을 부여받고 도전할 생각이었다.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넘버즈에 임명됐다.
그것도 지금까지 없었던 번호인 11번으로.
이번 일에 대해서는 자신도 그리 잘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영광스러운 성을 하사 받고 넘버즈도 된 것이다.
“허허 모두 나의 말을 듣지 못한 것인가?”
왕의 목소리에 그때서야 정신이 들었다.
길리안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드겔이 앞으로 나서 검을 높이 들었다.
“새로운 넘버즈에게 영광을!”
그 말에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높이 들고 외쳤다.
“새로운 넘버즈에게 영광을!”
“왕께 영광을!”
“왕께 영광을!”
뒤를 이어 사람들의 환호가 이어졌고 길리안의 이름을 연이어 외쳤다.
“일어나도록 하라. 넘버즈의 기사여.”
길리안은 일어서서 고개를 숙였다.
감사를 해야 하는데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그리고 말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나에게 말로 감사를 표할 필요 없다. 경은 그 위치에 맞는 기사가 되어 최선을 다하라. 나의 검이 되고 왕가의 방패가 되어 왕국을 수호하는 기사가 되도록 하라.”
“예. 그리하겠습니다.”
“또한 이는 한시적 넘버다. 경의 번호는 스스로 찾도록 하라.”
왕의 말에 길리안은 또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 하겠습니다.”
“이제 사람들의 환호에 보답하라.”
그 말에 로렌스가 길리안에게 검을 던졌다.
그걸 받아든 길리안이 돌아서서 검을 치켜들었다.
왕국 최초로 11번의 넘버를 받은 넘버즈의 탄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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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길리안에게 새로운 성을 줬습니다.
그리고 넘버즈가 됐습니다.
이로서 넘버즈는 끄~~~~~읏.... 이 아닙니다.
이제 시작이죠;
이제....
120편이 넘었는데... 앞으로 얼마나 써야 끝날지 ;
글만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 년이면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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