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4장(2)
“다 큰 것 같은데 아직도 어머니가 많이 그리운가요?”
그 말에 머리로 손을 올리려던 길리안이 주먹을 쥐고 손을 내렸다.
그리고 가슴을 펴고 자세를 똑바로 하고 앉아 입을 열었다.
“제게 어머니는 언제나 그리운 분입니다. 이 세상에 계시지 않기에, 만날 수가 없기에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으면 어머니 얘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요?”
그녀의 말에 길리안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그에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이제 많이 희미해져있었다. 6살의 어린나이에 돌아가셨기에 그런 것도 있었다.
슬펐던 순간과 생각하기 싫은 그날의 기억이 더 강했지만 그럼에도 좋은 기억은 있었으니까.
그 얘기를 이베트에게 들려주었다.
길리안의 얘기가 끝났을 때 이베트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그리 슬픈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안 좋은 부분은 다 각색하고 한 얘기인데도 지금 그녀는 너무 슬퍼보였다.
“공교롭군요. 당신은 11년 전에 어머니를 잃었고, 나는 11년 전에 하나뿐인 아들을 잃었답니다.”
그 말에 그녀가 왜 슬퍼보였는지 이해가 됐다.
길리안도 그런 적이 있었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예전에는 어떤 얘기를 하거나, 또 듣다가 갑작스레 그때를 떠올릴 때가 있어 감정의 기복을 겪기도 했었으니까.
비슷한 시기에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
그것이 그녀의 감정을 건드렸나보다.
“내가 울고 있을 때 당신도 울고 있었겠군요.”
소중한 사람을 잃은 슬픔의 공감.
그녀의 말에 그때가 떠올라 길리안도 가슴이 먹먹해졌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먼저 입을 연 것은 이베트였다.
“이런 내가 괜한 말을 꺼냈군요. 참. 아카데미에 입학한다고 했지요?”
그렇게 말하며 애써 미소를 지어보이며 화제를 돌렸다.
그녀의 물음에 길리안도 옛 생각에서 벗어났다.
“네. 슈발리에 아카데미입니다.”
“음... 그렇군요. 꿈을 위해선 골든로드나 드니로프가 더 낫지 않을까요?”
“음...”
전국적으로 20여개의 아카데미가 존재했고 그중에 반 이상이 수도에 밀집해있었다.
그중에서도 역사와 전통, 배출해낸 우수한 기사들로 인해 유명한 4대 아카데미가 있었다.
그중 사람들이 첫손가락에 꼽는 것은 골든로드 였다.
크시펠 공작가가 소유하고 있고 매년 유명귀족들의 자제와 그 가신들이 입학하는 곳이었다. 거의 공작 가와 그 지지 세력의 모임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였다.
실력도 실력이지만 가문과 추천도 중요한 요인이라서 일반 평민은 들어가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라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일단 들어가서 졸업만 하면 아카데미의 이름처럼 황금의 길을 걷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출세에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유명귀족가의 기사가 되어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현재 넘버즈의 4명이 골든로드 출신이기도 했다.
그 다음이 드니로프 기사아카데미였다.
히스클리프 후작가의 소유이고 이곳 역시 상황은 골든로드와 비슷했다.
최근에는 금발의 사자 루퍼드 때문에 더욱 명성이 높아져, 표면적으론 골든로드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따지고 보면 두 아카데미가 왕국에 존재하는 아카데미 중 양대 산맥이라 할 수 있었다.
세 번째가 베네딕트 아카데미였다.
골든로드와 드니로프에 들어가지 못한 이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것이 세간의 평이었다. 대부분 지방귀족이나 평 귀족 위주이고, 기사가문 출신들도 많았다.
그리고 네 번째가 슈발리에 아카데미였다.
에스토 왕국 최초의 아카데미로 모든 아카데미의 모태가 된 곳인 만큼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곳이다.
100여 년 전 수많은 개혁을 추진했던 타노스 3세가 아카데미를 세우며, 기사들의 신인 슈발리에의 이름을 붙인 곳으로 왕실에서 직접 운영을 하던 곳이었다.
타노스 3세의 개혁은 사회전반에 걸쳐 이루어졌다.
하지만 너무 무리한 개혁의 추진과 과도하게 여러 사업을 벌이며 왕실의 재정악화만 가져왔다는 것이 전반적인 평가였다.
결국 50여 년 전쯤에 왕실의 재정 악화를 이유로 매각을 하게 되고 미슬라로프 백작가가 아카데미의 소유권을 넘겨받게 되었다.
다행히도 미슬라로프 백작 가는 타노스 3세가 추진했던 개혁의 뜻을 이어받아 신분보단 실력으로 입학생을 받아들이고 진정한 기사를 길러내는 교육에 힘썼다.
아직도 4대 아카데미라 꼽히고는 있지만 처음의 명성에 비한다면 점점 그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 세간의 평이었다.
“신분 때문인가요?”
이베트의 물음에 길리안은 고개를 저었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제가 제일 존경하는 기사님과 제 형이 다녔던 곳입니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슈발리에 아카데미에 다니고 싶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래도 당신의 꿈을 위해선 내가 언급한 곳들이 더 나을 거란 생각이 드는군요. 그 두 곳도 평민의 입학을 허락한답니다. 다만 추천인이 필요하죠. 원한다면 내가 후견인이 되어줄 수도 있어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말씀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전 어릴 때부터 동경하던 곳에서 배우고 싶습니다.”
길리안의 말에 이베트는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하지만 슈발리에는 입학시험이 상당히 어렵다고 하더군요. 자신은 있는 거겠죠?”
“물론입니다.”
타노스 3세의 개혁은 실패라고들 한다.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 성공한 것을 꼽으라면 바로 교육이다.
개혁을 추진하며 여러 교육기관을 만들었고, 아카데미는 그 교육의 마지막 단계로 인식된다.
처음에는 우수한 기사들을 길러내기 위한 교육기관으로 탄생했던 아카데미가 지금은 기사들 외에도 인문 사회 행정 등의 교육을 겸해 지식층을 길러내는 종합 교육기관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전문적인 교육과정을 모두 밟는 이들도 있지만 길리안처럼 마지막 단계인 아카데미에만 지원하는 경우도 있었다.
교육의 마지막단계인 만큼 수준이 높을 수밖에 없었고, 대부분의 아카데미들이 그 수준에 맞는 입학생을 뽑기 위해 시험을 치른다.
하지만 수용할 수 있는 정원을 채우기 위해 과하게 걸러내지는 않았다. 땅 파서 가르치는 것도 아니고 그들도 수익을 내야 계속 운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슈발리에 아카데미는 조금 달랐다.
처음 세워졌을 때의 방식을 그대로 적용해 엄격한 시험을 치르고 통과하지 못하면 입학이 불가했다.
때문에 힘 있는 귀족들에게는 외면 받는 곳이기도 했다.
괜히 시험에 떨어지면 가문의 망신이고, 더 좋은 수준의 아카데미들도 있으니 굳이 슈발리에를 고집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40여 년 동안 넘버즈를 배출하지 못 한 것도 알고 있나요?”
이베트의 말에 길리안은 웃으며 답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슈발리에가 귀족들에게 외면 받는 또 하나의 이유 중 하나였다.
힘든 입학시험만큼 교육과정 또한 힘든 것으로 유명하지만, 40여 년 동안 넘버즈에 든 기사를 배출하지 못한 것도 크게 작용했다.
“힘든 길을 가려고 하는군요.”
“제 꿈 자체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노력할 겁니다. 그리고 제게 허락된, 제 능력에 알맞은 시작을 하려는 생각일 뿐입니다. 그렇게 한걸음씩 조금씩이라도 나아가다보면 언젠가는 손에 닿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길리안의 말에 이베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하지만 나중에 손에 닿지 않는 다면요?”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죽도록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은 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제 모든 것을 쏟아 부어도 오를 수 없는 자리라면 제자리가 아닌 것이겠지요.”
“부디 지금의 마음을 끝까지 잃지 않길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오늘 바쁜 일이 있나요?”
“아닙니다. 길도 익히고 적응도 할 겸 여유 있게 도착한 거라서...”
“그럼. 적응하는 걸 좀 도와줘야 되겠군요.”
“네? 아하하하. 그러실 필요까지는...”
“앞으로는 귀족들과 접할 기회가 많을 거예요. 초대받는 일도 생길지 모르죠.”
“그건...”
“그러니 저녁식사도 하고 자고 가도록해요.”
“예. 네?”
자고가라는 말에 놀라는 길리안을 보면서 이베트가 웃으며 말했다.
“뭘 그렇게 당황하나요?”
“아니 전....”
“걱정하지 말아요. 같이 자자는 말은 아니니까요.”
“헉... 전 그게 아니라...”
“흐음... 설마 그런 걸 상상했던 건가요?”
“절대 아닙니다. 전 다만...”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당황하는 그를 보며 이베트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한참을 웃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미안해요. 너무 재미있어서. 거절해서 날 무안하게 만들지는 말아요.”
“아... 예...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을 하는 길리안을 보며 이베트가 미소를 지었다.
“저녁식사 전까지는 시간이 남았으니... 카스트로 경이 좋은 경험을 시켜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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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댓글 감사합니다. 힘이 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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