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6장(1)
‘곧 농사를 시작할 수 있겠구나.’
길리안은 빠르게 본래의 모습을 갖춰가는 농지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뭐든 시작이 어렵지 일단 시작하게 되면 어떻게든 하게 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농지를 개간해서 소작을 주고 관리하는 것은 아버지 밑에서 보고 배운 것이 있어서 크게 어려울 것은 없었다.
‘수도에 사람이 많기는 많네.’
영지에서와는 다르게 사람을 구하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사람이 적어 땅을 놀리는 작은 영지이다 보니, 큰 공사를 하거나 사람이 많이 필요한 일을 하려면 이웃영지에서 사람을 모아 와야 했다.
때로는 이웃영주들에게서 농노나 노예를 빌려오는 경우도 있었고, 그러려면 적어도 며칠의 시간은 필요했다.
그런데 수도는 확실히 달랐다.
관청에서 일자리에 관한 것을 게시해주는 것이 있다.
게시하고 다음날 모인사람의 수를 보고 길리안이 놀랐을 정도니까.
버려졌던 농지를 다시 제 모습을 갖추게 하는데 인력이 많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지원자가 너무 많아서 모두 다 쓸 수는 없었다.
길리안은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열심히 일하는 한스를 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충분한 사람들이 쉽게 모인 덕에 일이 빠르게 진행된 것도 있었지만 한스의 공도 컸다.
노예로 있었던 세월동안 힘든 일이란 힘든 일은 거의 다 해봤다고 믿고 맡겨 달라고 해서 그러라고 했더니,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일하는 게 장난이 아니었다.
일만 잘하는 게 아니었다.
노예들 중 조장을 맡아 그들을 관리했었다고 하더니 제법 사람을 부릴 줄도 알았다.
그렇게 사람들과 함께 땀 흘려 일하며 작업지시도 하고 꼼꼼하게 체크도 하는 한스가 있어, 딱히 길리안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
농사에 관해서도 꽤 아는 것이 많아, 소작농을 관리하는 일과 따로 몇 가지 일을 맡겨도 충분할 것 같았다.
물론 한스에 대해 아직 잘 아는 것은 아니었다. 아직 어리기에 스스로가 사람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일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대략 알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 건 다 아버지 밑에서 농사일을 하며 보고 듣고 배운 것이었다.
한스의 경우는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스타일이었다. 시킨 일은 확실히 하고, 지켜보던 그렇지 않던 요령을 부리거나 하질 않았다.
어차피 노예와 주인의 관계가 아니고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다. 한스가 아무리 따르겠다고 해도 길리안이 필요 없으면 데리고 있을 이유가 없는 것.
그건 한스도 이해를 했다.
그래서 시험 삼아 일을 맡겨본 것인데 자신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지금 증명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길리안도 그가 마음에 들었다.
이제는 한스도 정당한 대가를 받고 일을 하게 된 것이고, 길리안은 믿고 일을 맡길 사람이 생긴 것이니 서로 좋은 것이었다.
‘그나저나 일을 너무 크게 벌였나?’
길리안이 구매한 토지는 엄청 넓은 편이었다.
저택구입에 들어간 돈이 3500골드. 그리고 토지와 상점가에 있는 빵집이 있는 2층 건물까지 해서 총 2500골드가량이 들어, 총 6000골드 정도를 썼다.
그 정도 거래를 하게 되니 마크 폰 그레드라는 귀족이 직접 와서 거래를 하게 됐다.
그가 어려운 상황에 있어 급매로 내 놓은 것들인데 구매자가 없어 힘들어 하던 중이었고, 그걸 고맙게도 길리안이 많이 사주는 거라 조금 더 깎을 수가 있었다.
저택에 농지에 가게건물까지 다 합치면 시세보다 1000골드이상은 이익을 본 거라고는 하는데, 딱히 와 닿지 않을 만큼 길리안의 입장에선 정말 많은 돈을 쓴 것이었다.
‘확실히 수도가 비싸.’
수도는 영지에 비해서 모든 것이 비쌌다.
기본 물가, 임금, 토지의 가격 등등. 눈 씻고 찾아봐도 싼 건 없었다. 기본이 거의 두 배정도에 많게는 십여 배나 비싼 것들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게 꼭 나쁜 것은 아니었다.
파는 입장이 되었을 땐 그만큼 비싸게 받을 수 있다는 말이고, 그만큼의 수익도 있을 거란 말이니까.
그래도 역시 조금은 아깝기도 했다.
여기서 쓴 돈을 영지에 들고 가면 정말 헉 소리 날정도 많은 땅을 살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러면서도 자기 땅을 가진 것은 처음이라 기분은 좋았다.
‘농지는 그렇다 치고, 빵집은 괜히 샀나?’
농지의 정리가 끝나면 콩과 밀로 2모작을 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봄이라 밀은 파종시기가 지나서, 콩을 먼저 심어 수확하고 추운 겨울이 되기 전에 밀을 파종하면 된다.
이맘때 심어 가을에 수확하는 밀종자도 있지만 땅을 놀리지 않는 방법으론 콩과 밀의 이모작이 제일 나았다. 고향에서 아버지가 그렇게 농사를 지었고, 그 방법을 그대로 쓸 생각이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생각해 놓은 것이 있었다.
아무튼 대부분의 땅에 밀농사를 지을 거니 그걸 직접파는 것도 좋지만 자체적으로 소비를 하는 것도 괜찮아 보여 욕심을 부려본 것인데 조금은 후회가 되기도 했다.
심지도 않은 밀을 수확하려면 1년도 넘게 걸리고, 또 빵을 만드는 밀이 주재료이기는 하지만 그 외에도 이것저것 필요한 게 많았으니까.
‘뭐 그냥 둬도 손해는 안 보던 곳이니까.’
무턱대고 산 것은 아니었다.
나름 따질 것은 따져보고 라첼등에게 조언도 구한 후에 내린 결정이었으니까.
그리고 혹시라도 손해가 나고 유지가 힘들다싶으면 매각하면 되는 것이니까.
아직 8천 골드나 남아있고, 쓴 돈보다 많은 금액이다.
지금 상태를 유지하기엔 충분하고도 남았고, 손해를 감수하고 경험삼아 해보기에도 충분한 자금이었으니까.
농지는 정리만 되면 크게 신경 쓸 것은 없었다.
농사는 손이 많이 가기 때문에 보통 소작농들은 식구전체가 그 일에 매달린다. 그래봐야 부부 둘이서 하는 경우가 많고 아이들은 조금 거들 뿐이지만, 어쨌든 자신이 구매한 땅 정도면 30가구 이상은 필요할 것 같았다.
문제 될 것은 없었다.
하겠다는 사람은 줄을 섰고, 그중에 골라 계약을 맺고 추수한 후에 계약한 만큼만 받으면 된다.
그 정도면 작은 마을 정도는 구성해야 할 테지만 행정적인 처리는 라첼의 도움으로 신속하게 진행 되서 일의 진행도 빠르고 편했다.
물론 집을 새로 짓고, 그들이 수확하기 전까지 어느 정도 생활을 보조해줘야 할 것 같았지만, 어떤 일이든 초반에 투자비용은 드는 것이니까.
그리고 라첼의 말대로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그나저나 빵집이 계속 걸리네. 쩝. 괜히 샀어.”
“일어나셨습니까. 도련님.”
이른 새벽, 해가 뜨려면 한참 남은 시간에 나와서 인사를 하는 집사를 보면서 깜짝 놀랐다.
저택과 땅을 구매하고 며칠이 지났다.
집을 샀으니 당연히 여관에서 나와 거처를 옮겼다.
말을 건 이는 이틀 전에 고용한 집사였다.
그의 이름은 스티브.
60이 넘은 나이에 백발이 성성한 그는 2년 전까지 어느 평 귀족의 집에서 집사로 일했다고 했다. 모시던 늙은 귀족이 죽고 아들에 의해 해고 될 때까지 거의 평생 동안 이쪽 일을 해온 이었다.
집사후보로 몇 명을 만나봤지만 그의 인상과 인품이 가장마음에 들었다.
자식들은 다 키웠고, 거동이 불편해서 일을 하기 힘들기 전까지는 이일을 하고 싶다는 말과 이전주인에 대해서는 함구하는 무거운 입이 마음에 들었다.
평생 수도에서 살았기에 이곳에 대한 사정도 잘 알았고, 경험이 많아서인지 일을 시작하자마자 마치 계속 자신을 모셨던 사람처럼 편하게 해주었다.
문제는 호칭이었다.
말끝마다 주인님, 주인님 하는데 그 소리가 도무지 적응이 안됐다.
집주인이 맞기는 하지만 그래도 듣기 거슬려서 말했더니 다른 호칭 몇 개를 제시해주었다.
로드 마스터 등등.
그중에서 그나마 들어줄만한 게 도련님이었다. 그나마 고향에 있을 때도 농노들이나 소작농들에게서 듣던 말이었으니까.
한스에게는 아저씨라고 하는 것을 듣고 관계를 묻기에 대답해줬더니 오히려 한소리 들었다.
물론 나무라듯 말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정립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들어야만 했다.
“조금 더 주무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건 제가 하고 싶은 말이군요. 저 때문에 일찍 일어나시는 거라면 그러지 마세요. 원래 많이 자는 편이 아니니까요.”
“나이가 들어서인지 점점 새벽잠이 없어집니다. 원래도 많이 자는 편이 아니니 걱정 마십시오.”
그 말에 웃으면서 걸음을 옮겼다.
반걸음 정도 뒤에서 따르는 집사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이틀밖에는 안됐지만 뭐 불편하지는 않으신가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비어있던 집이라 그런지 손볼 곳이 상당히 많습니다.”
“아 일할사람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제가 일차적으로 추리기는 했습니다만 오늘 다시 올 테니 시간이 되신다면 직접 봐주셨으면 합니다.”
“어차피 집사가 부려야 할 사람들이니 알아서 하세요.”
“그들을 고용하고 부리시는 건 도련님이십니다. 저는 단지 도련님을 대신해 일을 시키고 관리하는 것뿐입니다. 앞으로 계속 봐야 할 이들이니 직접 보시고....”
말을 하는 집사를 보면서 길리안이 웃으면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식으로 어리고 경험이 없어 미숙한 집주인에게 할 말은 하고 조언도 해주는 그였다.
“그러죠.”
“수련이 끝나시면 바로 씻으시고 식사를 하실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는 집사를 보던 길리안이 웃으며 검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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