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31장(6)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아버님. 이제 인정해 주실 때도 되지 않으셨습니까?”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미네르바 말입니다.”
그 말에 더글라스 백작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 모습을 본 마틴이 고개를 저으며 앞으로 말을 몰았다.
“미네르바.”
“말씀하십시오.”
딱딱한 그녀의 말투에 마틴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나까지 그리 대할 생각이냐?”
“지금은 공무를 수행 중이니까요. 다음 대 백작이 되실 분께 예를 갖출 뿐입니다.”
그녀의 말에 마틴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지금 내가 네게 예나 받자고 이러고 있는 것 같으냐? 아버님이나 너나 둘 다 똑같구나. 그래서 피는 속일 수 없다고 하나 보다.”
그의 말에 투구에 가려진 미네르바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옆에 와서 말을 건네는 이는 마틴 폰 발렌슈타인.
백작 가의 장남이자 다음 대 백작이 될 큰오빠였다.
꽉 막힌 아버지와는 말이 통하지 않아도 형제자매들은 자신의 뜻을 이해해 주는 편이었다.
특히 큰오빠는 뒤에서 자신을 응원해주며 가장 큰 힘이 돼주었었다.
둘만 있었다면 웃으며 편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었겠지만, 아버지 앞이라 그러지 못하는 것도 있었다.
그런 모습을 이상하게 아버지에겐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인연을 거의 끊다시피 한 지금에 이르러선 아버지와 할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없었다.
아니 있어도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기에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루퍼드가 넘버즈들에게 각 가문을 설득해 보라고 했고 노력해 보겠다고 했었지만, 아버지와 얼굴을 마주치자마자 그 생각을 접었다.
노력이라면 자신도 할 만큼 했고 어차피 자신의 말에 생각이 변할 아버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역효과나 나지 않으면 다행.
“미네르바.”
“예.”
“하아~. 난 네 오라비로 동생과 얘기를 나누고 싶을 뿐이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얼굴도 보여주지 않을 생각이냐?”
대답 없이 묵묵히 말을 몰던 미네르바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투구를 벗고 머리를 흔들었다.
찰랑대던 은발이 정리되자 미네르바가 마틴을 보며 말했다.
“됐습니까?”
“머리가 많이 길었구나. 어깨까지 내려오는 걸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만, 무척 잘 어울린다.”
“신경 쓸 시간이 없었을 뿐입니다.”
“역시 내 동생은 아름답구나. 왕국 제일의 미인이지. 암.”
“오라버니!”
큰 소리로 말하는 마틴을 보며 인상을 썼지만, 그는 호탕하게 웃을 뿐.
“돌아가신 어머니를 가장 많이 닮은 것이 너다. 어머니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구나.”
미네르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는 눈만 없다면 예쁜 내 동생을 안아 들고 몇 바퀴 돌고 싶지만···.”
“오라버니! 내가 몇 살인 줄 알고 그러세요?”
“네가 할머니가 돼도 내 동생이고 어머니와 아버지의 딸이며 발렌슈타인 백작 가의 사람이다. 그건 변하지 않는 것이지.”
“음.”
“너야말로 내 나이가 몇인 줄 아느냐?”
“알아요.”
큰 오빠인 마틴의 나이는 45세.
아버지인 더글라스 백작은 성인이 되자마자 두 살 어린 어머니와 결혼을 하셨고 다음 해에 바로 큰 오빠를 낳았다.
오빠 둘과 언니 셋이 더 있고 원래는 동생도 한 명 있었지만 어릴 때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막내인 네가 벌써 서른이 되어가는구나. 너와 내가 나이를 먹는 만큼 아버지도 늙으셨단다. 이제는 예전 같지 않으시지.”
미네르바의 미간에 주름이 잡히는 것을 본 마틴이 다시 말했다.
“보통 때라면 영지를 지키고 있을 내가 함께 왔다는 게 무슨 뜻인지 넌 알겠지.”
“그건. 음···.”
모든 영주가 모이는 영주 회의는 다음 대 발렌슈타인 백작이 누구인지 알리기 좋은 자리였다.
그리고 어쩌면 그 이유만 있는 건 아닐지 몰랐다.
“이번 회의에 내가 아버지를 대신해 참석할 것이다. 모든 결정권을 내게 주셨고 작위 수여식도 있을 것이다.”
미네르바가 놀란 눈으로 마틴을 봤다.
“건강이 좋지 않으시다.”
미네르바가 뒤를 돌아봤다.
갑옷을 입은 채 말을 모는 아버지의 모습은 예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이제는 백발도 많으시고 주름도 많으시지. 투구를 계속 쓰고 계신 걸 보면 네게 보여주고 싶지 않으신가 보다.”
“힘드시면 마차를 타시면 될 것을···.”
“하하, 내일 죽을 것을 안다고 해도 약한 모습을 보일 분이 아님을 네가 더 잘 알지 않으냐? 그런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은 것도 너니까.”
“음.”
“형제자매 중에 이제 너 하나 남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결혼. 언제쯤 할 생각이냐?”
“그건···.”
“설마 조카들보다 늦게 할 생각은 아니겠지?”
“벌써 그렇게 됐나요?”
그 말에 미소를 지은 마틴이 뒤를 보고 소리쳤다.
“바바라, 아델.”
마틴의 부름에 뒤쪽에서 두 명이 말을 달려왔다.
“고모가 너희를 보고 싶다는구나.”
그 말에 투구를 벗은 둘이 웃는 얼굴로 인사를 건네자 미네르바가 미소를 지었다.
“못 본 사이에 많이들 컸구나. 바바라 너는 갑옷을···.”
“고모님처럼 기사가 될 생각입니다. 내년에는 아카데미에 들어갈 생각이고요.”
바바라의 말에 미네르바가 마틴을 봤다.
“하고 싶다는데 굳이 말리고 싶지 않더구나.”
“아버지가 반대하지 않으시던가요?”
“내 아이들이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길을 선택할지는 내가 결정한다. 스스로 정한 목표가 확실하다면 난 존중해줄 생각이란다. 아버지의 말을 잘 듣는 아들이지만 그것만은 나도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었으니까.”
“그렇군요.”
“바바라가 열일곱, 아델이 열다섯이다. 열아홉이 된 샤를은 아가씨가 다 되었지. 아내와 함께 동생들을 데리고 마차에 있단다.”
“온 가족이 모두 왔군요.”
“네가 오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얼굴을 봐야지. 다른 형제들에게도 연락을 취했다. 시집간 누이들도 모두 올 것이다. 오랜만에 발렌슈타인 가문의 직계가 모두 모이는 거지.”
“미리 말씀 좀 해주시지.”
“어차피 수도에서 모일 거니까. 이번에 아이들의 혼처도 정할 생각이다. 그러니 너도 서두르는 것이 좋을 거다.”
“예?”
“할머니가 돼서 결혼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다.”
“하, 할머니라니···.”
“샤를도 그렇고 바바라도 혼담이 꽤 들어왔단다.”
“아버님 저는 아직.”
바바라의 말에 마틴이 웃으며 말했다.
“너희를 무작정 시집보낼 생각은 없다. 이번에 서로 얼굴도 익히고 마음에 든다면 보낼 생각이다만. 그래도 너무 오래 기다려 줄 수는 없다. 스물다섯 전에 넘버즈가 못되면 그때는 아비의 말에 따르는 거다.”
“예. 약속했으니까요. 고모님께 배우면 가능할 겁니다. 아니 꼭 가능하게 만들 겁니다.”
그런 딸을 보고 미소를 지은 마틴이 미네르바를 봤다.
“녀석이 저러는 건 다 너 때문이니 네가 좀 돌봐주길 바란다.”
미네르바가 바바라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가르쳐 줄 수는 있지만 죽도록 노력해야 할 거야.”
“예.”
그런 둘을 보며 마틴이 말했다.
“어릴 때 생각하면 큰코다친다. 내 딸이라서가 아니라 백작 가의 기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니까.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실력이 뛰어난 것도 집안 내력이려나?”
그런 마틴을 보고 다들 크게 웃었다.
“가문을 이을 아델은 아카데미를 경험만 시킬 생각이다. 수도에 애들이 있는 동안에는 네게 부탁 좀 하마.”
“네.”
“고모님.”
바바라의 부름에 미네르바가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 넘버즈가 된 길리안 경은 어떤 사람입니까? 오는 동안 온통 그의 이야기뿐이라서 너무 궁금합니다. 열여덟 살에 넘버즈라니. 70명이 넘는 기사를 이기고 크리스 경도 이겼다고 들었습니다. 그 대결 직접 보셨습니까?”
“응. 직접 봤지.”
“일대 일의 대결은 몰라도 기사단 하나에 가까운 숫자를 이길 수 있다니. 소문이 거짓이 아니었군요. 평민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정말 놀랍습니다.”
“그를 직접 보면 알 수 있을 거야. 이번에 승급 결투도 있으니까.”
“정말 기대 됩니다. 그리고 고모님의 결투도요. 이기 실 수 있으십니까?”
미네르바가 웃으며 말했다.
“글쎄. 승부를 장담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까. 최선을 다할 거야.”
“꼭 이기시길 바랍니다.”
둘의 대화를 듣던 마틴이 고개를 저었다.
“바바라, 고모랑 결혼에 관한 이야기 중이었단다. 기사들의 대화는 나중에 해줬으면 한다만.”
바바라가 웃으며 물러나자 마틴이 미네르바를 봤다.
“왜 그렇게 보세요?”
“아직 대답을 못 들었다만.”
“뭘 바라세요?”
“네가 행복하길 바란다.”
“지금도 행복해요.”
“이제 와서 드레스를 입고 가문의 위해 정략결혼을 하라는 건 아니다. 그러기에는 나이도 좀 있고, 곧 할머니가 될지도 모르고···.”
“오라버니!”
“아아, 농담이다. 그래도 나이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 요즘 결혼이 늦어졌다고 해도 내일모레면 서른이 아니냐?”
“제 결혼은 제가 알아서 한다고요.”
“한 가지만 말해다오.”
“말해 보세요.”
“하긴 할 생각이냐?”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어요.”
“오~ 마음에 드는 남자는 있는 모양이구나. 누구냐?”
“오라버니!”
“그것만 말해다오. 마음에 드는 남자는 있는 거냐?”
바로 대답하지 않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미네르바가 한숨을 내쉬며 작게 말했다.
“이, 있어요.”
“누구냐? 내 동생의 마음을 훔쳐간 것이?”
“목소리가 커요.”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는 거냐?”
“일단은요.”
“와하하하하하.”
크게 웃던 마틴이 말을 세우고 말머리를 돌리고 크게 외쳤다.
“내 동생 미네르바가 결혼을 한다!”
그 말에 백작 가의 기사들이 환호하며 휘파람을 불어댔다.
“오라버닛!”
미네르바가 얼굴을 붉히며 소리쳤지만, 마틴은 들리지 않는지 또다시 크게 말했다.
축하의 말이 들려왔고 내일이라도 당장 결혼을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
그런 백작 가의 기사들과 달리 제10 중앙기사단의 기사들은 멍하니 미네르바를 쳐다볼 뿐.
그런 휘하기사들을 본 미네르바가 한숨을 내쉬며 마틴에게 말했다.
“결혼한다는 말은 안 했잖아요. 갑자기 이러면 곤란하다고요.”
“미안하구나. 하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네가 결정을 미룰 것이 뻔하니까.”
“으.”
“누구냐.”
큰 목소리도 아닌데 더글라스 백작이 말을 하자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누구냐고 물었다.”
아버지의 재촉에 미네르바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디 가문이냐?”
계속된 물음에 미네르바가 말머리를 돌리고 멈춰선 기사들에게 출발 신호를 했다.
휘하 기사들은 명에 따랐지만, 백작 가의 기사들은 움직이질 않았다.
더글라스 백작이 말을 멈춘 채 있었기 때문.
“가문을 물었다.”
“귀에 익은 가문일 겁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귀에 들릴 가문입니다. 사적인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는 것이 어떠십니까? 백작님.”
그녀의 말에 더글라스 백작이 고개를 끄덕하고는 말을 출발시켰다.
다시 돌아선 미네르바가 마틴을 보고 말했다.
“괜한 짓을 하셨어요. 오라버니.”
“나는 네가 행복하길 바라기에 이러는 것뿐이다.”
“이건 곤란하게 만드는 거라고요.”
“더 곤란해질 것이 있을까? 지금 상태로는 뭘 하든 마음이 편치 않을 거다. 아버지와의 관계도 풀고 결혼도 하고 네가 가고 싶은 길도 가거라.”
그 말에 미네르바가 피식 웃었다.
“그게 가능할까요?”
“아무도 아버지의 말을 거역하지 못했다. 하지만 넌 너의 길을 갈 만큼 용기가 있었지. 그런 너를 형제들 모두 뒤에서 응원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도와주겠다는 말이다.”
“고마워요.”
“아버지와의 관계를 풀 수 있는 건 너뿐이다. 네가 먼저 용기를 내줬으면 한단다. 부탁하마.”
미네르바가 다시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봤다.
“네가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는 말을 기억하길 바란다. 지금 네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일 테니까.”
“그럴 리가요.”
“너도 풀고 싶기는 하지?”
미네르바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동생의 어깨를 다독이며 마틴이 말했다.
“그럼 이번에는 오라비의 말을 들어다오. 그래 주겠니?”
“노력은 해볼게요.”
그 말에 마틴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뿌우~
조금 멀리서 들리는 뿔 나팔 소리에 다들 고개를 돌렸고, 미네르바 휘하의 기사가 뿔 나팔을 불어 답했다.
“저건 베이어드 백작 가군.”
“네. 그리고 제9 중앙기사단이네요.”
그렇게 말하는 미네르바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길리안과 미네르바가 잘 될까요?
저도 잘...
Comment '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