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6장(6)
두두두두두
말을 달려온 두 사람이 틸드배리어를 사이에 두고 교차한 순간.
콰직!
들고 있던 랜스가 서로의 방패를 타격하고 부러져나갔다. 둘은 사방으로 튀는 나무파편을 뒤로하고 멀어졌다.
크리스가 출발했던 자리로 온 길리안이 안면가리개를 올리고 랜스를 건네는 안톤에게 웃어보였다.
“너희가 굳이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좋아서 하는 일이다. 그리고 기사를 목표로 한 이상 넘버즈 간의 대결에서 랜스를 건네는 것도 영광이지.”
“영광은 무슨.”
그러면서 피식 웃은 길리안이 다시 말했다.
“곧 기사 충원이 있을 거야. 이번에 지원해봐.”
“난 아직···.”
“내가 아는 안톤 너라면 충분하다.”
길리안의 말에 안톤은 씁쓸하게 웃었다.
원래 왕실기사를 뽑을 때는 아니다.
하지만 왕실 기사 수가 200이 넘게 줄었고, 앞으로 더 줄어들 수도 있는 상황.
인원 충원이 필요하긴 했고, 전에 없이 많은 인원을 뽑을 테니 좋은 기회이기는 했다.
충분히는 아니어도 가능성이 있을 것 같기는 했다.
하지만 문제는 몸이 불편한 동생.
기사가 된다면 형편은 좀 나아지겠지만 지금보다 훨씬 자주 집을 비우게 될 테고, 지금처럼 비상시라면 집에 들어갈 생각은 버려야 했다.
돌봐줄 사람을 구하면 되긴 하지만 아무래도 불안했다.
안톤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게 신경 쓰지 말고 경기에 집중해라. 상대가 넘버즈라는 걸 잊지 마라.”
“알아. 충분히 집중하고 있어. 그리고 즐기고 있고.”
말을 몰아 돌아선 그의 등을 멍한 눈으로 보던 안톤이 피식 웃었다.
길리안이 변했다.
아니 변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감을 표출 했을 뿐이다.
항상 담담하고 겸손한 모습만 봐서 저런 모습이 익숙하지 않을 뿐.
자신감에 찬 지금의 길리안은 무척 보기 좋았다.
“저긴 무슨 일이 있나?”
길리안의 말에 안톤은 케빈들이 있는 쪽을 봤다.
뒤돌아 랜스를 케빈에게 겨누고 있는 크리스의 모습.
“열심히 입을 놀리고 있는 모양이군.”
“랜스!”
말을 멈추자마자 랜스를 찾은 크리스에게 시종이 랜스를 건넸다.
“우아~ 역시 넘버즈는 목소리도 크구나. 그런데 어깨에 붙은 저건 뭐냐?”
그렉의 물음에 케빈이 당연히 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저건 목을 보호하기 위해 부착한 거다. 아무리 경기용 랜스라도 그런데 맞으면 위험하거든. 몸 사리는 놈들이 쓰는 도구지. 겁은 더럽게 많아서 오래는 살겠다.”
“그렇구나. 그런데 원래 순백의 기사가 저런 투구를 썼던가?”
“순백의 기사는 무슨··· 속은 아주 시커멓지. 겉만 하얗다고 순백이 아니다. 속을 봐야지 속을. 사람은 내면이 중요한 거야. 암.”
“저 투구 뭐냐고.”
계속 된 그렉의 물음에 케빈이 그것도 모르냐는 눈빛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일명 개구리 투구라고 하는 건데···”
아주 작고 여러 개의 눈구멍이 이마위쪽에 있다.
상체를 살짝 숙이면 전방을 주시할 수 있고, 타격과 동시에 자세를 바로하면 전방이 가려져 파편 때문에 잘못될 일이 거의 없었다.
“저것도 겁 많은 놈들이 쓰는 거지 암.”
“왜?”
“어쨌든 타격할 때 파편이 튀지 않냐? 그럼 보통 눈감고 고개 돌리고 뭐 그러거든. 그런데 그러면 겁먹은 게 엄청 티 나잖아. 그러니까···.”
케빈의 말은 목에 닿아있는 랜스 때문에 멈췄다.
슬쩍 랜스를 보고 다시 크리스를 본 케빈이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닦으며 말했다.
“무슨 짓입니까?”
“네놈이 한말은 날 두고 한 말이겠지?”
“목 보호구에 개구리 투구 쓴 게 당신이니 아마도 그럴 것이오.”
“당신?”
“너라고 할 수는 없잖소.”
“네 녀석···.”
“아아, 거 같은 귀족끼리 말 더럽게 짧으시네. 녀석이라니.”
“너 따위와 내가 같은 귀족이라 생각하느냐?”
“다를 건 또 뭐 있소? 작위를 가진 거도 아니고, 물려받을 것도 아닌데. 어? 깃발 올라갔다.”
그 말에 크리스가 고개를 돌렸다.
중앙에서 출발 신호를 보내는 이가 들고 있는 큰 깃발.
그건 양쪽이 준비가 된 것 같으면 내려서 출발을 알리는 신호다.
그런데 아직 그대로였다.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을 노려보는 크리스를 의식하고 피식 웃었다.
“바보요? 내가 올라갔다고 하지 않았소? 내려가야 시작인데, 이직도 그걸 모르나.”
“이!!”
“어? 내려갔다.”
옆에 있던 그렉의 말에 크리스의 고개가 다시 뒤로 돌아갔다.
“꺼억~. 아~ 아까 뭐가 얹힌 거 같았는데 이제야 내려갔네. 시원하다.”
“감히 너희 따위가···.”
“뭘 어쩌시려고 그러시오? 설마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또 왕비님도 계신데, 무기도 안든 아카데미 생도를 넘버즈인 기사가 랜스로 찌르시려고?”
잠시 케빈을 내려다보던 크리스가 랜스를 거두고 말 머리를 돌렸다.
“저 천한 것을 믿고 까부는 듯하니 보여주마. 얼마나 부질없는 짓인가를. 경기가 끝나면 네놈들을 죽여주마.”
“그러시던가. 개구리 기사님.”
그 말에 살기어린 눈으로 다시 케빈을 본 크리스가 안면가리개를 내렸다.
그와 동시에 깃발이 내려갔고, 크리스가 말을 달렸다.
“야, 너 너무 심했던 거 아니냐?”
그렉의 말에 케빈은 계속해서 안경을 닦기만 할 뿐.
“나중에 어떡하려고?”
“어떡하긴. 어차피 길리안이 이기면 끝날 놈이다.”
“지면?”
“지면?”
그러면서 안경을 쓰며 다시 말했다.
“그건 생각 안 해봤다.”
그 말에 그렉이 피식 웃었다.
“아무튼 너 되게 용감해졌다.”
“나 원래 용감하다. 안경 벗으면 눈에 뵈는 게 없거든.”
“무슨 일 있었어?”
다시 돌아온 길리안의 물음에 케빈이 씨익 웃었다.
“약을 조금 올려줬지. 원래 저런 놈들이 참을성이 없거든. 아마 자극을 좀 더 주면 화가 폭발해서 자멸할거다.”
“그를 잘 알아?”
“내가 누구냐? 소문만 들어도 저런 놈은 어떤 놈인지 바로 답이 나온다는 거지. 하하하.”
“그래도 더 이상은 그러지 마. 내 싸움이야. 너희까지 말려드는 건 싫으니까.”
“그래. 그냥 저자식이 마음에 안 들어서 몇 마디 했을 뿐이니까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이겨버려라.”
“응.”
그렇게 말한 길리안이 랜스를 받아들고 출발준비를 했다.
콰직!
랜스가 서로의 방패를 가격하고 난 후 크리스의 몸이 휘청했다.
‘이런 개자식.’
마창시합은 대회마다 다르기는 해도 보통 3점을 먼저 획득한 쪽이 이긴다.
몸통은 1점, 머리는 2점, 낙마를 시키면 바로 승리다.
몇 점을 먼저 얻어 이기는 경기든 낙마를 하면 몰수 패.
방패를 든 마창시합의 경우 점수를 주는 것은 똑같다.
대신 방패를 맞춰도 몸통을 맞춘 것처럼 1점을 준다.
그리고 방패를 떨어트리게 하면 3점을 준다.
어차피 방패 때문에 다른 부위는 노리기 힘드니 서로의 방패에 죽어라 창을 꽂아 넣는다.
방패를 떨어트리게 하면 점수를 많이 얻고 낙마를 시킬 수 있다면 더 좋았으니까.
지금 이 경기는 15점을 먼저 획득하면 이긴다.
점수 표시는 1점에 깃발 1개가 꽂힌다.
벌써 깃발이 15개씩 꽂혀서 다시 점수를 내기 위해 그걸 뽑는 중.
그보다 길리안의 타격방법이 자신을 기분 나쁘게 했다.
보통의 기사들은 서로 지나칠 때 랜스를 한번 꽂아 넣고 끝이다.
자신은 첫 번째 타격 후에 한번을 더 찌른다.
부서지고 남은 부분으로 타격을 한 번 더 주는 것이다.
그 짧은 순간에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효과도 좋다.
그런데 저자가 자신과 같은 기술을 쓰고 있다는 것이 무척 기분 나빴다.
그리고 힘이 좋다는 말은 들었지만 겪어보니 생각이상.
왼팔과 어깨에 타격이 누적되고 있었다.
평민 따위에게 밀린다는 생각이 들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았다.
그때 심판으로 중앙에 앉아있던 원로기사의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열을 가릴 수 없어 방패를 빼고 진행하도록 하겠소. 이의 있는 기사는 말하시오.”
큰 소리로 하는 말에 크리스는 웃으며 방패를 던졌다.
길리안도 아무 말 없이 방패를 빼서 케빈에게 건넸다.
“양측 다 이의가 없는 것으로 알고 경기를 속개하겠소.”
그리고 다시 시작된 경기.
둘의 랜스가 서로의 몸에 적중해 파편이 튈 때마다 사람들이 열광했다.
“그는 눈을 감지 않는 군요.”
말론의 말에 카스트로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눈도 감지 않고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
타격하고 난 후에도 상대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다.
보통의 투구를 쓴 상태에서 길리안처럼 할 수 있는 이는 드물다.
아무리 나무라지만 눈을 감는 것만으로 날아드는 뾰족한 파편을 막을 수는 없으니까. 강하고 약하고를 떠나서 다치기 싫으니 다들 그렇게 한다.
“그런데 아까부터 보니, 왼쪽 어깨와 팔이 좀 불편하신 모양입니다.”
말론의 말에 카스트로가 자신의 왼팔을 보며 말했다.
“그렇소. 어제 하도 시달렸더니.”
“시달리다니요?”
그의 물음에 카스트로가 턱으로 길리안을 가리켰다.
“어제 녀석과··· 아니 길리안 경과 수백 번을 맞붙었더니 이 모양이오.”
“이길 거라고 보십니까?”
“이긴다고 했으니 이기겠지.”
그 대답에 말론은 피식 웃었다.
카스트로와는 친분이 좀 있다.
그도 내로라하는 유명기사 중 하나.
그가 당연하다는 듯 길리안에게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하긴.’
지금껏 그를 오랜 시간 관찰했다.
자신에게 물어도 당연히 길리안에게 손을 들어 줄 것이다. 그가 가진 것은 힘이 전부가 아니다.
그게 눈에 잘 띄고 부각 돼서 그렇지 그저 힘만 센 기사로 알고 상대했다가는 큰일 난다.
‘지금처럼 말이지.’
서로 다섯 번을 부딪쳤다.
크리스도 이제는 진지하게 상대하고 있었다.
그래도 자신이 있었다.
일단 갑옷에서 차이가 크다.
녀석의 갑옷은 벌써 조금 찌그러진 것이 보였다.
자신의 갑옷은 멀쩡하고 아까 방패로 녀석의 랜스를 받을 때보다 더 나았다.
물론 녀석의 힘을 무시해서는 안됐다.
자칫 실수했다가는 그 힘에 밀려 낙마할 수도 있었으니까. 그래서 최대한 신경을 쓰며 되도록 공격은 어깨로 받아내고 있었다.
‘이번에야 말로.’
여섯 번째 대결.
이번에는 녀석의 머리를 노려볼 생각이었다.
물론 지금까지와 같이 녀석의 가슴 부위를 노리는 것처럼 하면서 살짝 방향을 트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지금까지 자신이 이겨온 기사를 셀 수 없을 정도니까.
크리스는 길리안과 가까워지자 웃으며 랜스를 뻗었다.
길리안은 찔러오는 크리스의 랜스를 보고 뒤로 몸을 뉘였다.
그러면서 오른손에 든 랜스를 뻗었다.
콰직!
자신의 랜스가 상대의 몸에 맞는 것을 느끼고 다시 자세를 바로 세웠다.
그와 함께 경기장이 떠나가라 사람들의 환호가 울려 퍼졌다.
그렉과 케빈이 엄지를 세우며 반겨줬다.
랜스를 받아 돌아서니 자신의 깃발이 하나 더 세워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크리스가 랜스를 바닥에 거칠게 내려찍는 것도 보였다.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이군.’
투구 속에서 씨익 웃었다.
어차피 가을에 있을 무투회에는 참가할 생각이었고, 카스트로에게 지도를 받으면서 마창시합 연습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아니 따로 시합용 기술도 전수를 받았고 계속 연습했었다.
어제는 카스트로에게 부탁해서 그걸 다시 점검 했을 뿐.
그리고 조언도 많이 들었다.
크리스는 마창시합을 무척 좋아해서 이런저런 대회에 빠지지 않고 참가했고, 우승이력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카스트로는 그의 경기를 많이 봤고, 직접 상대해본 적도 있다고 했다.
카스트로가 크리스가 돼서 상대를 해줬다.
막상 겪어보니 크게 다르지 않았고 오히려 진지하게 상대해준 카스트로가 훨씬 나았다.
솔직히 이런 것보다 속편하게 전투용 랜스들고 서로 부딪치고 마상 전투를 하다가 다른 무기를 써서 싸우는 실전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게 아니어도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보여 줘야 하는 자리라면 그러면 될 뿐.
길리안은 들고 있던 랜스를 높이 치켜들었다.
또다시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그러면서 크리스를 봤다.
신경질적으로 랜스를 받아들고 준비를 하는 모습. 멀리 있는 대도 그의 살기가 느껴질 정도.
그를 보는 길리안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화가 많이 난 모양인데 자신은 아주 오래 전부터 화가 나있었으니까.
이런 랜스로는 그를 죽이기도 힘드니.
‘밑바닥까지 끌어내리는 수밖에.’
길리안은 출발 신호에 말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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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아 피로가...
죄송합니다. 오탈자 수정은 역시 내일로...
전 쓰러지러.. 쿨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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