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1장(3)
에스토 왕국의 수도 아라네스의 남쪽 성문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왕성으로 이어지는 대로 양옆에 모여든 수많은 사람을 통제하기 위해 경비병들이 줄줄이 늘어서 삼엄한 경비를 펼치고 있었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칼랜베르크 왕국의 사신 행렬을 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사신단을 호위하고 있는 넘버즈들을 보기 위함이기도 했다.
자이젠 대륙에는 2개의 제국과 두 제국에 속한 4개의 제후국, 그리고 13개의 왕국과 8개의 공국 등 수많은 나라가 있다.
칼랜베르크 왕국은 2개의 제국을 제외하고, 왕국 중에는 4강이라 꼽히는 강국 중 하나였다. 군사력, 경제력, 인구 등 모든 것이 에스토 왕국보다는 위에 있는 왕국이었다.
에스토 왕국도 칼랜배르크 보단 못하지만 4강 다음으로 손에 꼽힐 힘을 가지고 있었다.
칼랜베르크 왕국은 인접한 사라센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인접 왕국들과는 친선과 동맹을 유지하고 있었고, 에스토 왕국과는 주기적으로 서로 사신단을 교환하며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매년 정기적으로 오는 사신단에 칼랜베르크의 공주가 함께 온다고 해서, 혹시라도 그 모습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호기심에 더욱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다.
“우와~ 사람이 엄청나게 많군요.”
많은 사람을 본 길리안은 솔직히 놀라고 있었다.
고향인 라이라프 영지야 산맥을 끼고 있어 영지의 크기는 백작령에 견줄 만큼 크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은 영주 성 근방이었다.
그나마 몇 년 사이 정책적으로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몇 개의 마을을 만들었지만, 그래 봐야 그 넓은 땅에 사는 인구가 1만도 안 되는 작은 영지이다.
그런데 이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언뜻 봐도 라이라프 영지의 모든 사람을 모아놓은 것보다도 몇 배는 많아 보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은 솔직히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이 친구 촌에서 올라온 티를 내는군. 이 도시의 인구가 얼만지나 아는가? 30만이 넘는다네. 여기 모인 사람들이라고 해봐야 그 반의반도 안 되는 숫자지.”
“그렇군요.”
수많은 사람이 운집해 있는 것도, 길 양쪽으로 번뜩이는 갑주를 걸친 기사들과 병사들이 늘어서 있는 것도 장관이었다.
“이래서야 뭘 볼 수나 있겠나. 따라오게 내가 아주 기가 막힌 자리에서 구경시켜줄 테니까.”
알버트가 붙여준 이는 그나마 말을 섞어본 게릭이었다. 길리안은 게릭의 뒤를 따라 사람들을 헤치며 이동했다.
게릭이 안내해준 장소는 병사들이 통제하던 곳인데 그가 몇 마디 하자 순순히 길을 열어줬다.
“어때? 이만하면 잘 보이겠지?”
“네. 감사합니다.”
“뭘 이 정도 가지고. 아는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었어. 그나저나 공주님 얼굴이 아주 예쁘다던데 한번 볼 수 있으려나? 아 얼핏 들으니 자네 꿈이 넘버즈라고?”
“예.”
길리안의 대답에 게릭은 고개를 저었다.
“힘들 거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꿈이지 않습니까.”
“꿈 좋지. 하긴 넘버즈면 모든 기사의 꿈이라지? 자네 정도 나이라면 한번 품어볼 만하겠지. 하지만···”
말끝을 흐리던 게릭이 쓰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고 다시 입을 열었다.
“평민은 힘들어.”
그 말에 길리안이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봤다. 그와 눈이 마주친 게릭이 쓰게 웃었다.
“그게 현실이란 거야. 평민이 기사가 되는 건 요즘에는 그래도 흔한 일이지. 돈 많은 평민도 많고, 기사아카데미도 있으니 뭐 기사까진 될 수 있어. 그런데 딱 거기까지네. 뭐 전쟁이라도 나서 공이라도 세우면 운 좋게 하급귀족도 될 수 있겠지.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넘버즈는 특별한 자리야. 근 백 년 동안 평민 출신 기사가 넘버즈가 된 적은 없을걸? 아니 백 년이 뭐야? 아마 훨씬 더 오래됐을 거야.”
게릭의 말에 길리안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밝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저도 더욱 도전해 보고 싶은 꿈입니다.”
해맑게 웃으며 말하는 길리안을 보면서 게릭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게릭이 길리안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래 해봐. 그 나이에 무슨 꿈인들 못 품어보겠나. 꼭 넘버즈가 돼서 귀족 놈들 코를 납작하게 해주라고.”
그 말에 길리안은 씨익 웃었다.
넘버즈.
에스토 왕국의 힘의 상징이며 최고의 기사들을 말한다.
수많은 기사 중 단 10명에게만 허락된 자리.
넘버즈의 시작은 300여 년 전 에스토 왕국의 독립전쟁 당시 항상 선봉을 맡았던 최강의 기사단이 서로의 실력을 가려 서열을 정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독립을 이루고 왕국의 깃발을 다시 세웠을 땐, 200여 명이 넘었던 기사단 중 단 10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들은 공을 인정받아 최고의 권력과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그것이 넘버즈의 시작이었다.
아직도 우수한 기사들에게 10번 이후의 번호를 매긴다고는 하는데, 실질적으로 인정받고 넘버즈라 칭해지는 것은 1~10까지의 넘버뿐이다.
길리안은 아직 한 번도 넘버즈를 본적이 없었다.
그가 아는 최고의 기사는 영지의 기사장인 엘런 후드였다.
그에게 검을 배웠고 그의 얘기를 들으며 꿈을 키웠다. 그가 제일 존경하는 엘런 경이 존경과 경의를 표하는 상대.
그것이 넘버즈다.
지금까지 들려오는 소문과 과거의 전설들만 무수히 들었을 뿐. 그런 이들을 멀리서나마 직접 눈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흥분됐다.
와아~ 하는 사람들의 함성에 생각에 빠져있었던 길리안의 시선이 성문 쪽을 향했다.
지금의 함성은 사신단을 환영하는 의미보단 선두에 서 있는 넘버즈들을 향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맞았다.
“오오, 금발의 사자인가? 저 맨 앞에 황금 갑옷 보이지?”
“금발의 사자···.”
행렬의 선두를 이끄는 이는 금발의 사자, 루퍼드 폰 히스클리프.
넘버즈의 No.2로 현재 나이는 23살이었다.
20살의 나이로 넘버즈의 대열에 합류한 검의 천재. 그 후 단 2년 만에 상위 넘버들을 끌어내리고 No.2에 오른 경이로운 실력자였다.
그의 실력에 대한 소문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부풀리고 부풀려져, 말만 들어보면 천국의 문을 지키는 기사들의 신 슈발리에의 재림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에 대한 소문이 부풀려진 것은 사실이지만 확실히 대단한 것은 인정해 줘야 했다.
예전에는 귀족 가에 태어나 기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고 자란 이들도 25살 정도에 기사가 되면 빠르다고 할 수 있었다.
약 100여 년 전부터 설립된 기사아카데미가 전국적으로 활성화된 현재에 이르러선, 23살~25살 사이면 기사가 되는 것이 일반화되기는 했지만 루퍼드는 그것도 남들보다 빨랐다.
15살에 아카데미에 들어가 단 2년이 지난 17살의 나이에 아카데미에서는 더 가르칠 것이 없다고 했고, 그해 왕실에서 기사서임을 받아 기대와 관심을 집중적으로 받았다.
그리고 사람들의 생각처럼 모든 기록을 갈아치우며 최연소의 나이로 넘버즈가 되었다.
앞으로 수십 년간의 그의 시대나 다름이 없다고 말하는 이들이 대부분일 정도니까.
길리안도 그의 소문과 얘기는 귀가 따갑게 들었고, 나이 차이가 크지 않은 만큼 관심도 많았다.
그의 시선은 다가오는 금발의 사자에게 고정돼 있었다.
루퍼드가 지날 때마다 늘어서 있던 기사들이 고개를 숙여 예를 취하는 것이 보였다.
마치 왕의 행차를 보는 듯했다.
기사들에게는 그만큼 존경과 흠모의 대상이라 할 수 있었다.
‘나와, 나와 고작 여섯 살 차이다. 내가 저 나이가 됐을 때 저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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