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6장(8)
“와~ 정말 대단하다. 넘버즈라는 놈이 저러고 싶을까? 오늘 저놈을 보면서 느끼는 게 많다.”
길리안은 케빈의 말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경기는 진행되지 않고 있었다.
이유는 크리스가 항의 중이었기 때문.
이번대결의 규칙은 이미 숙지하고 있었다.
솔직히 장비에 대한 것을 제외하면, 규칙은 간단하다.
상대에게 랜스를 맞히고 랜스가 부러지면 점수를 얻는 거니까.
피하지 말라는 말도 없고, 상대의 랜스를 막거나 잡지 말라는 말도 없었다.
그럼 가능하다면 해도 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맞지 않고 상대를 맞히면 점수를 얻을 수 있고, 투구를 노린 공격은 고개를 숙여 피하기도하니까.
전투는 기세 싸움이지만 이런 경기는 기술과 머리싸움이라고 카스트로에게 귀가 따갑게 들었다.
피하고 막는 것 또한 기술.
어제 카스트로에게 그 얘기를 했는데, 카스트로도 그래 본 적은 없다고 했다.
가능하고 말고를 떠나 굳이 그럴만한 이유도 없었고 그래서 그렇게 해볼 생각을 못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재밌겠구나.”
라고 말하며 웃었다.
연습할 때 몇 번 해봤지만, 카스트로에게는 통하지 않았고 기회를 만드는 것도 불가능했다.
하지만 크리스는 달랐다.
쉽진 않았어도 자신을 무시하는 태도와 냉정하지 못한 면이 그런 기회를 준 것이니까.
“확실히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지만, 이렇게 지는 건 그도 이해 할 수 없는 모양이다.”
“어차피 점수로 인정됐으니 저자가 인정하고 말고는 상관없는 거지.”
“그렇기는 하지만 나도 이런 대결에서 이긴다고 기쁠 거 같지는 않아.”
“뭐?”
“잘하면 따로 결투는 안 해도 되겠다.”
그렇게 말한 길리안이 말을 몰아 중앙 쪽으로 갔다.
“야야! 너 뭐 하려고? 길리안!”
케빈이 그를 불렀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아, 불안한데···.”
“뭐가?”
옆에 있던 그렉의 물음에 케빈은 인상을 쓴 채로 말했다.
“아까부터 뭐 들었냐? 저 녀석 계속 결투 운운하잖아.”
“그래서?”
“저 녀석한테 결투가 뭐냐? 죽고 죽이는 싸움이다.”
“뭐, 자신 있나 보지.”
그렉의 말에 고개를 획 돌려 잠시 노려보던 케빈이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이건 자신감의 문제가 아니다.
이 대결에서 길리안이 진다고 해도 손해 볼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이기고 있다.
그것도 딱 한 번 남았다.
낙마만 당하지 않으면 승리의 영광과 넘버승급의 명예까지 한 번에 거머쥘 수 있었다.
크리스의 처리는 왕에게 맡겨도 된다.
그 처벌이 약한 것 같으면 그때 나서도 되고, 그냥 넘어가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 하나 없었다.
‘세상 모든 짐을 네가 다 짊어질 필요는 없다고!’
그렇게 소리쳐 말하고 싶었다.
물론 자신이 그런 말을 한다고 들을 녀석도 아니다. 다른 말은 잘 들어줘도 이런 일에 대해서는 절대 양보할 녀석이 아니었으니까.쉬운 길이 눈앞에 있는데도 굳이 위험을 감수하려 한다.
“에잇!”
케빈이 땅바닥을 찼다.
“왜 그래?”
“화가 나서 그런다.”
“왜? 누구한테?”
케빈은 대답하지 않고 길리안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뭔가 해주고 싶은데 당장은 랜스나 건네주고 응원하는 것밖에는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나한테, 내가 한심해서 화가 난다.’
“지금까지 없었던 경우라 해도, 이미 결정된 사안이니 경은 그리 알고 돌아가시오.”
“내가 그리 할 줄 몰라서 안하고 있었다고 생각하시오?”
크리스의 말에 원로기사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 할 수 있으면 경도 하면 될 것이 아니오?”
“맞소. 피하건 막건 잡건 그 또한 전투의 기술이니. 넘버즈라는 이름에 걸맞게 기술을 보여주면 될 것이 아니오?”
“이이!”
노기사는 험악하게 인상을 쓰는 크리스를 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솔직히 이런 경우를 보는 것은 자신들도 처음이었고 들어본 적도 없다. 어디서 누군가는 시도했을지 몰라도 성공하지 못했으니 들어보지 못한 것일 테니까.
머리도 아니고, 가슴을 노리는 랜스를 말에 눕다시피 해서 피하며 상대에게 랜스를 정확히 맞히는 길리안의 기술을 보고 감탄해 모두가 기립해서 박수를 보냈다.
랜스로 랜스를 빗겨나게 하며 때린 것도 그렇다.
찌른 것이었으면 점수를 줬을 테니까.
상대의 랜스 끝을 맞히는 것도 가끔 나오는 일이지만, 노렸다고 생각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길리안은 몇 번이나 그런 모습을 보여줬고, 그건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승마술이나 마창기술 모두 나무랄 곳이 없었다.
마창시합은 기사의 무용과 기술을 뽐내는 것이고, 길리안은 그걸 모두 보여주고 있었다.
마지막에 상대의 랜스를 잡은 것도 그랬다.
아무나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누가 그렇게 과감한 시도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
랜스를 잡히고 낙마를 면하기 위해 무기를 놓은 눈앞의 크리스는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모든 것이 걸린 중요한 경기라는 것은 알지만, 승부에서 졌을 때 패배를 인정할 줄 아는 것도 기사의 덕목.
그런데 오히려 달려와서 따지는 중이었고, 다른 기사들과 크리스의 언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때 길리안이 말을 타고 다가왔다.
“그럼 마지막 경기는 조금 바꿔서 해보는 것 어떻습니까?”
그 말에 모두가 길리안을 봤다.
“길리안 경. 무엇을 바꾼다는 말이오?”
“아직 승부가 끝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이긴다 해도 상대가 인정하지 못한다면 저 또한 마음이 편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크리스를 보며 말하는 길리안.
그도 길리안을 노려보며 말했다.
“마치 이긴 것처럼 말하는군.”
“조금 유리한 것도 사실이고, 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길리안을 보며 크리스의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크리스 경은 자중하시오. 그래 길리안 경. 어떤 방법을 말하는 것이오?”
노기사의 물음에 길리안은 들고 있던 랜스의 끝을 올려다봤다.
“지금 상태에서 랜스만 바꿔서 틸드베리어 없이, 어떻습니까?”
“전투용 랜스를 들고 실전을 벌이겠단 말이오?”
“실전과 같은 대결이라면 이긴 사람도 진 사람도 수긍할 수
있을 겁니다. 후회도 남지 않을 테고요.”
“허허.”
길리안의 말에 노기사가 헛웃음을 흘릴 때.
“큭, 크크큭. 크하하하하. 좋군. 아주 좋아. 하하하.”
크리스가 크게 웃었다.
“음, 이건 경들만 좋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니오. 실전이라니.”
그러면서 뒤쪽에 앉아있는 왕비를 쳐다봤다.
“길리안 경. 지금 경은 유리한 상황입니다. 정말 그렇게 하고 싶은 건가요?”
“예.”
망설이지 않고 나온 대답에 왕비가 낮은 한숨을 쉬고 크리스를 봤다.
“저 또한 아무런 불만이 없습니다.”
“음···.”
왕비가 옆에 앉아있는 이베트를 봤다.
미소를 머금고 길리안을 보고 있는 그녀.
시선을 돌려 두 기사를 번갈아 보던 왕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넘버즈 간의 대결은 두 기사의 합의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두 기사의 뜻이 그러하다면 승낙합니다. 단 랜스로만 승부를 가리고 낙마 후에 위해를 가하는 것은 안 됩니다. 두 기사는 결과에 승복할 것을 맹세합니까?”
“예.”
“그러겠습니다.”
길리안과 크리스의 대답에 왕비가 주변을 둘러보고 다시 말했다.
“이후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것을 문제 삼는 자는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단호하게 말한 왕비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전투용 랜스가 준비되지 않았다는 말에 크리스는 자신의 것을 쓰겠다고 했다.
“카스트로 경. 저 갑옷을 뚫을 수 있는 랜스를 준비해주세요.”
이베트의 말에 카스트로가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떴다.
“말리셔야 했던 것 아닙니까?”
라데카의 말에 이베트가 고개를 저었다.
“넘버즈 간의 대결을 내가 막을 수는 없지요.”
“그럼 가셔서 무슨 말이라도 하셔야···.”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그··· 하아~.”
라데카는 뭔가 말하려다 그냥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으니까.
이베트의 옆에 앉아서 그녀의 새로운 모습을 많이 봤다.
중간에 위기가 있을 때는 움찔움찔하는데 같이 움찔거리는 처지지만 그런 자신이 봐도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러다가도 길리안이 이쪽을 본다 싶으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옆에서 보면서도 놀랄 정도.
또 길리안이 점수를 얻을 때는 소녀처럼 뛰며 좋아했다. 그렇게 환하게 웃으며 좋아하는 모습은 솔직히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를 얼마나 사랑하고 걱정하는지 알 수가 있었다.
‘그런데 저 인간은!’
이렇게 걱정하는 사람들은 생각도 안 하고 자기 길만 가고 있다.
‘나쁜 남자였어. 나쁜 놈!’
직접 나쁜 짓은 하나도 안 하는데 알고 보면 나쁜 남자.
바로 그가 그랬다.
길리안은 카스트로가 건네는 랜스를 받아들었다.
“이건···.”
“편하게 써라. 랜스는 어차피 소모품이니까.”
“네.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이는 길리안에게 카스트로가 말했다.
“여러 말 하지 않으마. 이겨라.”
“예.”
그런 길리안의 어깨를 툭툭 친 카스트로가 말머리를 돌렸다.
“야, 꼭 이럴 필요는 없잖아.”
케빈의 말에 길리안이 랜스를 살피며 말했다.
“뭐가?”
“지금 네가 하는 이거! 꼭 네가 나서서 죽일 필요는 없다고.”
그 말에 길리안이 웃으며 말했다.
“이건 꼭 그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야. 나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서 이러는 거니까. 그리고 이젠 무를 수도 없어.”
“하아~. 너란 녀석은 정말.”
“아직 랜스를 들고 실전을 치러 본 적이 없어. 좋은 경험이 될 거야.”
“살아야 좋은 경험이 되겠지.”
케빈의 말에 길리안이 씨익 웃었다.
“그렇지. 목숨을 건다고 꼭 죽겠다는 건 아니야. 난 죽고 싶지 않아. 그리고 아직 어머니를 만날 용기가 없거든.”
“너···. 후우~ 끝나고 보자.”
“너무 그러지 마. 너 말고도 날 혼낼 사람이 너무 많거든.”
길리안의 말에 피식 웃은 케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된 거 이겨라. 아주 밟아버려.”
고개를 끄덕인 길리안이 안면 가리개를 내리고 말의 목을 쓰다듬었다.
“마지막이다. 잘 부탁한다.”
그리고 멀리 있는 크리스를 봤다.
크리스는 새하얀 랜스를 받아들고 살폈다.
끝에 달린 촉만 검은색.
그것이 햇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특별히 주문해서 만든 랜스였다.
왕실에서 지급해 주는 것보다 더 길고, 더 가볍고, 더 단단하다.
이런 일에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상관없었다.
이 대결을 위해 투구도 바꿨다. 일반 시합과는 다르니까.
지금은 녀석을 꼭 이기고, 아니 죽이고 자신의 실력을 확실히 보여야 했다.
크리스는 랜스를 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었다.
사람들의 환호는 없었다.
그래도 미소를 지우지 않고 안면 가리개를 내렸다.
얼굴이 가려지자마자 그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멀리 있는 길리안을 보는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기회를 준 것은 고맙지만 죽어줘야겠다. 어차피 죽일 생각이었으니.’
오늘 경기결과에 상관없이 나중에라도 반드시 죽이려 했는데, 솔직히 일이 이렇게 풀릴 줄은 몰랐다.
출발 신호를 기다리는 크리스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경기 준비에 시간이 꽤 걸렸지만, 자리를 뜨는 사람은 없었다.
출발 신호가 올랐을 때도 환호성은 없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두 넘버즈의 대결에 집중했다.
양쪽 끝에서 출발한 둘이 빠르게 말을 몰았다.
이제 틸드배리어는 없다.
딱 한 번의 격돌로 모든 게 결정 나는 승부.
길리안은 자세를 낮추고 크리스의 정면으로 말을 몰았다.
크리스가 말의 방향을 조금씩 틀었지만, 그냥 두지 않았다.
이대로 정면으로 부딪칠 생각.
자신은 괜찮지만, 말이 걱정이긴 했다.
‘부탁한다.’
크리스의 모습이 빠르게 다가왔다.
목을 노릴 생각이었다.
목 보호구는 목의 절반만 가리고 있었고 방향은 왼쪽.
틸드배리어 때문에 오른쪽에서 찌를 때면 몰라도 지금은 아니었다.
그래서 비어있는 왼쪽을 노릴 생각.
호흡을 고르며 타이밍을 재던 길리안이 랜스를 쭉 뻗었다.
‘같이 죽겠다는 거냐?’
정면에서 전속으로 달려오는 길리안.
그를 보며 크리스는 이를 악물었다.
설마 부딪치겠냐 하는 생각을 했지만, 정말 같이 죽겠다는 듯 피하지 않았다.
‘이런 미친!’
크리스는 고삐를 왼쪽으로 당기며 랜스를 쭉 뻗었다.
둘의 랜스가 허공을 가르고 서로를 노렸다.
순식간에 서로를 지나쳤다.
시합처럼 큰 타격음도 비산하는 나무 파편도 없었다.
그리고 사람들의 환호성도 없었다.
길리안은 오른손으로 말의 고삐를 당기며 속력을 줄였다.
랜스는 크리스를 찌르고 난 후에 놓아버렸다.
말머리를 돌리면서 왼쪽 어깨를 봤다.
크리스의 랜스가 부러진 채 박혀있었다.
‘생각보다.’
아픈 건 둘째 치고 타격을 받을 때 하마터면 낙마할 뻔했다. 그만큼 충격이 컸다.
왼팔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랜스를 뽑으려다 그러면 출혈이 클 것 같아서 잠시 두기로 했다.
뒤로 돌아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비어있는 크리스의 말.
시선을 내리니 바닥에 널브러진 그가 보였다.
그의 목을 관통한 부러진 랜스.
바닥을 적시는 붉은 피.
길리안은 주먹을 쥔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한때는 존경했던 그다.
단지 넘버즈라는 이유로.
‘절대 당신처럼 되지는 않을 겁니다.’
고개를 든 길리안이 중앙을 향해 말을 몰았다.
그때야 사람들의 환호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길리안은 그저 천천히 말을 몰았다.
그가 중앙에서 도착하자 왕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들었다.
사람들이 조용해지자 왕비가 입을 말했다.
“길리안 클라우드 경을 넘버즈 No.9에 임명합니다. 어서 그를 치료해주세요.”
길리안은 왕비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 이베트와 형을 봤다.
그리고 안면 가리개를 올리려 했다.
형과 이베트에게는 웃는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어?’
갑자기 어지러웠다.
시야도 뿌옇게 흐려졌다.
길리안은 급히 오른손으로 왼쪽 어깨에 박힌 랜스를 뽑았다.
검은 피가 확 튀었다.
‘독인가?’
그 생각을 끝으로 정신을 잃고 앞으로 쓰러졌다.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이제 길리안을 회귀 시키면...
어?
그럴 리가~
어제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었습니다.
쉬니까 피로도 좀 풀리고 훨씬 낫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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