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5장(2)
“시작 됐구나···.”
미네르바는 중얼거리듯 말하며 피식 웃었다.
어이가 없어서였다.
저택을 향해 쏟아지는 화살들.
잘 보이지 않아 확실하지는 않지만 수백 발은 될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담을 넘는 이들.
생각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다.
이곳은 수도다.
아무리 외성 밖이라지만 거리도 그리 멀지는 않은 곳.
저쪽에서 동원한 인원은 자신의 예상 밖이었다.
‘그렇다고 달라질 건 없지만.’
저택 안에는 드겔과 루퍼드 아이작이 있었다.
넘버즈 3명과 50명의 기사 250의 병사.
병사들도 모두 근위대였다.
100명의 기사가 빠져나간 자리를 일반 병사들로 대신하면 너무 허술 해 보일까봐, 일부러 근위대를 투입했고 복장도 그대로였다.
적의 수가 몇 배 더 많다고 해도 달라질 것이 없었다.
그때 하늘을 날듯이 저택으로 쏘아져 들어가는 자들이 보였다.
“설마 나는 건가?”
“아마 줄을 이용했을 겁니다.”
길리안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 그를 툭 쳤다.
“대충 저쪽도 다 움직인 것 같으니 우리도 움직여야지?”
“그래야죠.”
“이제 넘버즈니까 슬슬 명령도 내려 봐. 익숙해져야 할 거야.”
“따로 행동하실 겁니까?”
“같이 가. 추적하는 기술은 약하거든. 이참에 좀 배워두지 뭐.”
그 말에 웃어 보인 길리안이 탑 밑을 보며 손가락을 입에 대고휘파람을 불었다.
밑에 대기하고 있는 기사는 25명.
손가락 4개를 펴 보인 길리안이 손짓을 하자, 20명의 기사들이 5명씩 나눠져 말을 달렸다.
저택으로 통하는 길은 많다.
사방에서 들이쳐서 적들을 치고, 도망치는 자들을 쫓아 성 밖에 있을 지도 모를 적의 근거지를 찾는 것이 목적.
“그럼 내려가시죠.”
그렇게 말한 길리안이 미리 묶어놓은 밧줄을 잡고 몸을 날렸다. 순식간에 땅에 내려서 말에 오르는 길리안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하여간. 계단으로 내려가도 시간은 충분하다고.”
미네르바도 밧줄을 잡고 밑으로 내려갔다.
밧줄을 잡고 탑의 벽면을 차며 밑으로 내려가다 휘파람을 불자 말이 달려왔다.
적당한 높이에서 안장위로 뛰어 내려 말에 탄 미네르바가 길리안을 보며 웃었다.
“가볼까?”
“직접 공격이라···.”
“그만큼 자신 있단 말이겠지.”
유인이나 양동작전 같은 것도 생각했지만 적들은 그냥 공격을 시작했다. 불화살을 쏘면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을 텐데 그렇게 하지도 않았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
그렇게 말한 로렌스가 오른 손을 들어 손짓을 하자, 뒤에 있던 기사들이 저택을 향해 말을 달렸다.
기사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로렌스가 천천히 말머리를 돌렸다.
“우리가 가는 곳이 정말 적들의 근거지가 맞는 건가?”
드레드의 물음에 루퍼드는 어깨를 으쓱 해 보일뿐.
“확실하지 않다면 기다렸다가 추격하는 편이 좋지 않겠나?”
“시작은 추격이겠지만 나중에 가면 추적이 될 거다. 그건 너나 나나 전문이 아니야. 직접 쫓는 건 길리안과 미네르바에게 맡기고 우리는 계획대로 조사를 한다.”
“음.”
드레드는 말없이 로렌스의 옆으로 말을 몰았다.
“왜 별로인가?”
드레드는 대답 없이 저택 쪽을 돌아봤다.
그런 그의 어깨를 로렌스가 툭 쳤다.
“어차피 우리가 가도 별로 할 일이 없을 거다. 지금 가는 곳이 적의 근거지가 맞으면 신나게 일할 수 있을 거다.”
그 말에 뒤를 보던 드레드가 고개를 돌려 앞을 봤다.
“제발 그랬으면 좋겠군.”
루퍼드는 창밖을 보며 씨익 웃었다.
활을 날리고 이어진 적의 난입.
기사들과 병사들의 대처는 좋았다.
그리고 밖에서 그들을 지휘하는 것은 아이작. 어차피 저들은 적의 주력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때 나는 듯이 저택을 향해 쏘아져오는 자들이 보였다.
그들의 등 뒤에 보이는 긴 선.
언제 밧줄을 걸었는지 그걸 타고 곧바로 저택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저들이 바로 주력 일 것이다.
“이곳은 경에게 맡기네.”
그 말에 뒤를 돌아보니 드겔은 벌써 지붕을 뚫고 나간 다음.
“이런···.”
선수를 뺏겨버렸다.
루퍼드는 구석에서 창문을 향해 활을 겨누고 있는 19호에게 말했다.
“자기 몸 정도는 스스로 지킬 수 있지 않나?”
그 말에 고개를 젓는 19호.
“후~. 어쩔 수 없군.”
그리고 드겔이 앉아있던 자리로 가서 앉았다.
검을 뽑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고개를 젖혀 지붕에 뚫린 구멍을 봤다.
맑고 파란 하늘이 보였다.
밖에선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고함 소리 비명소리 등이 한 대 섞여 소란스러운데, 이곳은 더없이 평화롭다고 해야 할까?
가장 중요한 임무이긴 한데 가장 심심한 임무를 맡아버렸다.
저택 안에도 기사들이 배치돼 있으니, 창을 통해 바로 들어오지 않는 한 이방으로 올 수 있는 이는 몇 없다고 봐야했다.
어쩌면 한명도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괜히 입맛이 썼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나?”
19호는 의자에 앉아 있는 루퍼드를 봤다.
활을 창 쪽으로 겨누고 있지만 ‘방향만 틀어 시위를 놓으면.’ 하는 생각을 잠깐 해봤다.
거리가 가까워서 어떻게 할 수 있을 것도 같았지만, 자신도 없었고 그렇게 해서 여기서 도망쳐도 어차피 늦었다.
돌아가도 죽을 테니까.
조직에선 잡힌 자나 배신자를 살려두지 않는다.
자신도 그런 척살 임무를 수행한 적이 있었고 모두 성공했다.
저런 기사라면 자신과 비슷한 이가 10명 정도 있으면 노려볼만 하다.
물론 암습으로.
20명 정도면 확실히 잡을 수 있을 것 같긴 했다.
절반 정도는 죽을 각오를 해야겠지만.
밑에서 소란스럽게 싸우는 자들은 돈에 목숨을 판 자들.
그런 자들은 그냥 시간끌기용이었다.
지금 가장 궁금한 것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 몇 명이나 투입했냐는 것이다.
자신 같은 이가 몇 명이나 있는지는 확실히 모른다. 20명 이상 한자리에 모여본 적이 없었으니까.
불안하긴 했지만 이상하게 죽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단 저 눈앞에 있는 넘버즈의 기사에게서 긴장감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지금도 창을 통해 몇 발의 화살이 그를 노렸지만, 일어서기는커녕 고개도 돌리지도 않고 귀찮다는 듯이 검으로 쳐 낼뿐.
기사들도 많이 죽여 봤지만 이곳에서 만난 기사들은 급이 다르긴 달랐다.
눈앞의 루퍼드를 비롯해서 몇 명은 두려울 정도로 무서웠다.
처음 만난 길리안이라는 자.
정말 괴물이었다.
그날 임무는 간단했다.
그저 먼 거리에서 활을 쏴 위협하고 철수하는 것이 다였다. 이유는 몰랐고 그저 시키니 당연히 하는 것이었다.
자신도 잡힐 걸 예상하지 못했지만, 지시를 내린 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추격을 뿌리치고 추적을 피해 흔적을 지우는 것은 늘 하던 일.
하지만 가장 자신 있던 부분에서 깊은 절망감을 맛봤다.
비슷한 훈련을 받은 이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았고 거기에 기사도 아닌 생도라고 해서 더 놀랐었다.
무척 이상하게 생각했었는데, 어제 검은 갑옷의 기사가 그가 넘버즈가 됐다고 해서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눈에서 붉은 빛이 나오는 기사.
로렌스라는 그의 이름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은 정말 두려운 일이었고, 그의 앞에서 거짓말이 통하지 않는 다는 걸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머릿속을 꿰뚫어 보는 것 같은 그의 눈.
두려웠다.
죽는 것을 포기하고 협력하기로 한건 그의 영향이 컸다.
차라리 고문이라면 버틸 수 있었을 텐데, 그의 앞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협력하고 자신에 대한 비밀만 지키면 편히 살 수 있을 거란 말에 그러겠다고 했었다.
그리고 밤낮으로 자신을 지키는 검은 갑옷의 말없는 기사와 붉은 갑옷의 미녀 여기사 그 둘도 무섭기는 마찬가지.
특히 은발의 여기사는 그날 자신이 상처를 입혀서인지 볼 때마다 살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리고 오늘 만난 드겔이라는 기사.
두렵다고 생각하는 그들과 비교해도 급이 다르게 느껴졌다.
자신의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서는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창문을 깨고 들어온 화살은 내부를 관찰하기 위함이다. 이 저택의 모든 창은 색유리로 돼있었으니까. 아마 저택의 모든 창문이 깨졌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절대 대충 활을 쏘진 않는다.
그런 화살을 두 개나 앉은자리에서 잡아버렸다.
어지간한 갑옷도 뚫는 위력을 가진 화살을 말이다.
그런 기사들이 오늘 모두 나섰다고 하니 안심이 됐다.
조직에도 자신보다 뛰어난 자들이 있겠지만, 저들을 모두 잡으려면 몇 명이나 필요할지 감도 오지 않았으니까.
근접해서 이길 수 있는 상대들이 절대 아니었다.
오늘만 넘기면 약속받은 대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할 때, 갑자기 창문으로 뭔가 들어오는 것 같아 활시위를 놓았다.
푹 소리가 나며 화살에 맞았지만 상대는 쓰러지지 않았다.
어느새 그 앞에 서있는 루퍼드.
그리고 등 뒤로 삐죽 나와 있는 그의 검.
그가 검을 뽑자 침입자의 시체가 바닥에 쓰러졌다.
“이럴 거면 굳이 내가 있을 필요가 없지 않나?”
검에 뭍은 피를 털며 말하는 그를 향해 고개를 저어보였다.
확실히 살기 위해선 그가 필요했으니까.
드겔은 지붕에 올라서자마자 날아온 화살들을 쳐내며 주변을 둘러봤다.
지붕에 내려선 자들이 20여명.
담장 밖 큰 나무에 몸을 숨기고 활을 쏘는 자들까지 하면 30명 이상.
몇 명은 저택 안으로 들어간 것 같았다.
잠시 둘러보는 동안 사방에서 날아오는 화살이 수십 발.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모두 쳐낸 드겔이 미소를 지었다.
저들이 쓰는 활과 화살은 특별하다.
19호가 쓰던 활은 보통 병사들은 활시위를 조금 당기는 것도 힘들어 했었고 기사들도 혀를 내두를 정도.
50미터 안쪽에선 어지간한 갑옷은 뚫을 수 있다는 걸 이미 확인한 상태.
넘버즈급 기사들도 넋 놓고 있다가는 당하기 십상.
지금 입고 있는 근위병의 갑옷은 저 공격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맞혔을 때의 얘기다.
드겔이 움직이자 수많은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목표를 향해 빠르게 직선으로 움직이는 게 아닌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피할 것은 피하고 쳐낼 건 쳐냈다.
드겔이 목표로 삼았던 자가 거리가 가까워지자 화살을 날리고 바로 단검을 뽑아 들고 덤벼들었다.
꽤 빠르고 날카로운 공격.
하지만 그보다 빠른 것은 그자를 뚫고 나온 화살들.
막 그자를 베려던 드겔도 깜짝 놀라 급하게 피했지만 뺨이 화끈거렸다.
그 느낌에 피식 웃었지만 눈빛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때부터 드겔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졌다.
일곱 명 째를 처리하고 날아오는 화살을 잡고 몸을 회전하며 놓았다.
방향이 바뀐 화살이 적에게 박히는 것을 보며 다시 움직였다.
하지만 생각보다 만만치가 않았다.
처음에는 빠른 움직임 때문에 조준에 곤란을 겪던 적들이 어느새 적응했는지 정확하게 자신을 노렸다.
거기에 몇 명 당하고 나자 노리고 접근하면 재빨리 도망쳤다.
수십 명이 각기 다른 거리에서 활을 쏴대니 알아서 시간차 공격이 되고, 그중에는 예측사격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거기에 동료의 안위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는 공격.
죽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위험한 상황은 처음 한번 뿐이었지만, 생각한 것보다 적들을 처리하는데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이정도로 애를 먹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었으니까.
그런 드겔의 눈에 멀리 있던 적이 지붕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음?”
하는 사이 또다시 날아온 화살에 맞은 적 하나가 굴러 떨어졌다. 두 명이 당하자 자리를 잡고 활을 쏘던 적들이 재빨리 움직였다.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슬쩍 고개 돌려보니 말에 탄 이가 활을 쏘고 있었다.
어림잡아도 300미터 이상.
거기에
‘허허 달리면서?’
말을 달리며 활을 쏘는 것도 쉽지 않지만, 정확하게 목표를 맞추는 것은 더 힘들다.
거기에 거리가 저 정도라면 거의 안 맞는다고 봐야했다.
지붕에 박히는 화살을 본 드겔이 웃으며 움직였다.
적들이 눈치 채고 움직여서 그렇지 저기 있던 자도 그대로 있었으면 몸에 화살구멍이 났을 테니까.
활을 쏜 이가 누군지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오늘 활과 수많은 화살을 들고 나타난 이는 단 한명밖에 없었으니까.
길리안 덕에 움직이기 훨씬 수월해진 드겔은 빠르게 적들을 처리해 나갔다.
그러다 밖에서 날아오는 화살이 없어 둘러보니 저택 밖에 도착한 기사들이 보였다.
지붕위에 있던 적들도 상황이 불리한걸 알고 몸을 빼기 시작했다.
드겔은 눈에 띈 적에게 검을 던졌다.
다른 적들이 도망가는 것을 막지 않고 그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어차피 다 죽일 생각은 없었다.
도망친 자들은 밖에 있는 넘버즈들이 추격할 테니.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그자의 목덜미를 잡아들었다.
복면을 벗기니 나타나는 흉측한 얼굴, 피를 게워내며 벌어진 입안을 보니 역시나 혀가 보이질 않았다.
이런 자들이 몇 명도 아니고 수십이면 절대 쉽게 키울 수 있는 전력이 아니다. 어쩌면 수백이 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런 자들을 키우려면 비밀유지도 해야 하고 돈도 많이 들지만, 무엇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런 전력은 무한대로 찍어낼 수가 없다는 거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 키운 전력을 함정일지도 모를 일에 이렇게 대거 투입할 만한 이가 누가 있을까?
백작이상의 대 귀족들을 떠올려 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왕국 내부보단 외부 세력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생각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던 드겔의 시선이 멀리 있는 길리안에게 향했다.
적들이 빠져나간 것을 확인했는지 말을 달려 멀어지고 있었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다가 저택의 정원을 내려다봤다.
거의 정리가 끝나가고 있었다.
지붕으로 올라온 자들의 목적은 원래 자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이 지붕에 올라오지 않았다면, 그들의 공격에 밑에 있는 기사와 병사들의 피해가 상당히 컸을 것이다.
드겔이 밑을 보며 소리쳤다.
“오늘은 할 일이 많다. 내가 내려갈 때까지 모두 정리하도록.”
그리고 숨이 끊어진 적에게서 검을 뽑아내고 시체를 던졌다.
오늘은 할 일도 많았고 피도 많이 봐야 할 것 같았다.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음 이번장도 좀 길어질 것 같네요.
이번 편 이후에 전투가 두 군데서 일어날 것 같아서...
그리고 두 편을 올리려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직 다 쓰질 못했습니다.
어제는 어머니 제사준비 도와드리고, 일끝나고 와서 쓰다가 제사지네고 ㅠㅜ
조금 전에 제사 끝나고 한번 읽어보고 올리는 겁니다.
12시 전에는 힘들것 같네요.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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