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넘버즈. 30장(4)

“하아~.”

걸음을 옮기던 에런 왕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경은 그 결투를 꼭 해야겠소?”

에런 왕의 말에 아이작이 대답했다.

“도전을 받았으니 그에 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허허, 그 도전을 부추긴 게 경이 아닌가?”

“하하하. 그렇기는 하지요.”

태연하게 말하는 아이작을 본 에런 왕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웃을 일이 아니오. 지금상황을 알지 않소? 크리스는 그렇다 쳐도 볼란트와 티란테를 내쳐야 하는 상황이오. 그나마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던 이들이 그 모양이니···.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군. 내 그나마 드겔이 건재하고 젊은 넘버즈들이 있고 또 경이 있어 힘을 낼 수 있는 것이라오. 어차피 공표한 일이니 적당히···.”

“적당히는 못 합니다.”

“음?”

“넘버즈의 대결을 적당히 하라니요. 왕께서 하실 말씀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 걱정이 돼서 그러오. 둘 중 하나를 잃거나 둘 다 잃을 수도 있소. 어떤 결과가 나오든 내게도 왕국에도 큰 손실이 아니오?”

그 말에 아이작이 웃으며 말했다.

“왕께선 잊으신 모양입니다.”

“무엇을 말이오?”

“제가 누구인지. 누구의 기사인지를 잊고 계신 것 같습니다.”

“그야, 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에런 왕을 보며 아이작이 말했다.

“저는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지금까지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제자리로 돌아갈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돌아간다 하였소?”

“그렇습니다. 제가 지켜야 할 분 곁으로 돌아가려 합니다.”

“그 자리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오. 아니 지금까지도 그래오지 않았소?”

“글쎄요. 저는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제 기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흐음, 그랬군.”

“왕께선 세상에 영원한 비밀이 있다 생각하십니까?”

“그야 나름 아니겠소?”

“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처음 넘버즈에 올랐을 때도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지 않습니까? 외국 여행을 오래 하다 온 기사라는 게 언제까지 통할 것 같으십니까? 젊은 넘버즈들이 저와 휘하 기사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건 제가 변화에 동조하기 때문일 겁니다.”

“음.”

“저 혼자라면 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전 혼자가 아닙니다. 칼랜베르크에 가 있어서 티가 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시간이 지나면 기안 인이라는 걸 알게 될 겁니다.”

“그렇기는 하겠군.”

“그리고 넘버즈는 왕께 충성을 바치는 기사가 올라야 할 자리입니다. 전 왕께 충성을 바치는 기사가 아니니 처음부터 자격이 없는 자였지요.”

“그럼 미네르바 경에게 자리를 내어주겠다는 말이오?”

“하하, 그냥 주지는 않을 겁니다. 저도 나름 목숨을 걸고 오른 자리입니다. 당시에는 생각했던 것보다 실망스러웠지만 말입니다.”

“그랬소?”

“예. 기안에는 ‘싸우지 않으려는 기사는 기사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제가 에스토에 왔을 당시 이곳의 기사들이 딱 그랬습니다. 그래도 그 당시의 넘버즈들 보다는 지금의 넘버즈들이 나은 것 같습니다. 다른 기사들의 눈빛도 기세도 그때보다 훨씬 낫습니다. 그러니 그리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허허 이것 참. 기사들에 대한 칭찬이 칭찬처럼 들리지 않소. 그래도 경이 그리 평가한다니 다행이오.”

“미네르바 경과의 대결은 실전에 가깝게 치를 겁니다.”

말을 하며 미소를 짓는 아이작을 보며 에런 왕이 고개를 저었다.

“미네르바 경보다 그대가 더 기대하고 있는 것 같군.”

“하하, 물론입니다. 에스토 전설 중 하나를 직접 경험해 볼 기회이지 않습니까.”

“음?”

“에스토의 전설의 여기사 카렌 경. 미네르바 경이 그녀의 검을 익힌 걸 모르셨습니까?”

“들은 적은 있소. 그녀 말고도 몇 명이 더 있다는 것도.”

“제 몸속에는 카렌 경의 피가 조금 흐르고 있습니다. 물론 직계 쪽은 아니지만 그래도 관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지요. 그래서 더 기대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허허.”

“이기고 지고를 떠나 서로에게 좋은 경험이 되고 좋은 승부가 될 겁니다. 그리고 승패를 떠나 전 이 자리에서 물러날 생각입니다.”

아이작의 말에 에런 왕이 고개를 끄덕했다.

“이미 결심이 선 것 같으니 경의 뜻대로 하시게. 내 타국의 기사에게 그동안 많은 신세를 졌소.”

“하하하, 타국의 기사라니요. 공주님, 아 이런. 아직도 제겐 그저 공주님이신 왕비님께서 에스토의 사람이라 하셨습니다. 저도 이제는 에스토의 사람입니다.”

“기안에 변화가 있을 거라더군. 전쟁이 날 가능성이 크오. 그때는···.”

“당연히 왕비님의 명에 따를 겁니다. 영주가 왕에게 검을 겨누면 같이 검을 겨누는 것이 기사입니다. 저 또한 기사. 왕비님의 적은 저에게도 적입니다.”

“그리 말해주어 고맙소.”

그렇게 말한 에런 왕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 말없이 따라오던 드겔에게 말했다.

“루퍼드 경과 로렌스 경은 어떻소? 둘이 볼란트와 티란테를 이길 수 있겠소?”

“그야 붙어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허허, 루퍼드 경의 명예를 운운하며 판을 만든 것은 경이 아니오?”

“허락하신 건 왕이시지요.”

미소를 머금고 말하는 드겔을 보고 에런 왕이 인상을 썼다.

아이작만 없었으면 뭐라고 한소리 했을 것 같은 표정.

드겔이 웃으며 말했다.

“정 그리 걱정되시면 그곳을 여심이 어떻습니까?”

“그곳이라면?”

“왕국의 지하에 있는 왕가의 무덤을 여는 겁니다.”

“음···.”

“그곳엔 귀한 것들이 많이 있지요. 모아 놓고 먼지가 앉지 않게 관리만 하면 무슨 소용입니까? 쓸 수 있는 것은 써야지요.”

대답 없이 고민하는 에런 왕을 한동안 보던 드겔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뒀다가 후대에 물려주시렵니까? 아니면 왕국이 망한 후에 다른 자들의 손에 넘기시렵니까? 예전에 들은 말이 있는데 그 말을 듣고 참으로 맞는 말이라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어디 왕께서도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말해 보시오.”

“아끼다 똥 된다.”

“허허.”

헛웃음을 흘리는 에런 왕에게 드겔이 다시 말했다.

“그런 말을 못 들어보셨나 봅니다. 평민들이 종종 쓰는 말인데 상스러워도 딱 맞는 말이지 않습니까? 내 죽어서 보물을 지고 가는 이를 한 명도 보지 못하였는데 혹여 왕께서는 보셨습니까?”

“그야···.”

“넘버즈들에게 좋은 동기부여가 될 겁니다. 아마 그곳이 열리면 아이작 경도 제대로 된 전설을 경험할 수 있겠지.”

“오~ 그것참 마음에 드는군요.”

“혹시 기안은 어떤가? 우리보다 역사도 오래됐고 전쟁도 많이 해서 왕궁에 보물이 넘쳐나겠군.”

“기안의 왕은 배포가 커서 충성을 바치는 기사와 영주에게 상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

“크흠!”

에런 왕의 헛기침에 아이작이 입을 다물었다.

“증조부께서도 여섰는데 나라고 못 열 것도 없지.”

그 말에 드겔이 피식 웃었다.

에런 왕의 증조부는 타노스 3세.

사람들에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자신은 알고 있었다.

그가 왕가의 무덤을 열고 무얼 했는지.

“경이 넘버즈들과 들어가 쓸만한 게 있나 보시오.”

드겔에게 말한 에런 왕이 아이작을 봤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나저나 넘버즈의 자리가 세 자리나 비게 생겼습니다. 그 자리를 누가 채울지 기대가 되는군요.”

“경과 같은 기사라면 걱정이 없겠네만.”

드겔의 말에 아이작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 높이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길리안 경과 같은 기사가 또 나올 겁니다. 그러고 보니 클라우드의 성을 받은 길리안 경은 페트릭 경의 전설을 이은 것이 되겠군요.”

그 말에 드겔이 고개를 저었다.

“그저 성을 받았을 뿐이네. 그는 그만의 전설을 만들겠지.”

“그렇겠지요. 그 나이에 그런 실력과 굳은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당연히 그럴 겁니다. 다른 넘버즈들도 저는 무척 높게 보고 있습니다.”

“그들 또한 자기만의 전설을 만들어 가겠지. 단 평화로운 세상에서는 전설을 쓸 수가 없네. 전설은 좋은 이야깃거리가 되지만,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고난과 슬픔은 전설에 묻힌다네.”

“하지만 전설이 되는 이들은 그 시대의 희망이라 할 수 있지요.”

“그것도 그렇군.”

“그리고 드겔 경은 평화의 시대에 전설이 되지 않으셨습니까? 이미 살아있는 전설이십니다.”

“나는 살아있는 농노 같은 기사지. 이주의 자유가 없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도 없지.”

“크흠!”

에런 왕의 헛기침에 드겔과 아이작의 대화가 끊겼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 당장 넘버즈들을 부르시오. 드겔 경!”

그 말에 드겔이 살짝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럼 전 왕비님을 뵈러 가겠습니다.”

그런 아이작을 보고 에런 왕이 말했다.

“프란트는 경이 계속 지도해 주시오.”

“물론입니다. 실전 경험만 조금 쌓는다면 어디에 내놓아도 자기 몫을 다하는 기사가 될 겁니다. 그럼.”

예를 표한 아이작이 물러가자 드겔이 에런 왕에게 말했다.

“넘버즈들을 데려갈 테니 지하에서 기다리게. 주어도 왕이 주는 것이 돼야지 내가 주는 것처럼 되면 안 되니 말일세.”

“곧 회의가 시작되는데 어딜 가시는 겁니까?”

루퍼드의 물음에 드겔이 성큼성큼 걸으며 말했다.

“따라오게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아, 그리고 회의 시간은 좀 늦춰졌다네.”

그 말에 루퍼드가 옆에 있는 로렌스를 봤지만, 그저 어깨를 으쓱 해 보일 뿐.

로렌스도 궁금한 눈빛이었다.

궁금한 건 둘 만이 아니었다.

뒤따르는 드레드, 미네르바, 길리안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기사회의가 정기적으로 열릴 것이다.

넘버즈를 비롯한 각 기사단의 단장과 부단장이 참석하는 기사들의 회의.

그 첫 회의가 시작되기 전 드겔이 넘버즈들을 불러 모은 것이었다.

솔직히 시간이 늦춰졌다는 말도 그들은 듣지 못했다.

얼마나 급한 일인지 궁금했지만 드겔이 답을 해주질 않아 참으며 왕궁의 지하까지 따라 내려갔다.

그곳에는 에런 왕과 크락시스가 있었다.

넘버즈들이 왕에게 예를 표하자 왕이 고개를 끄덕였고 그가 손짓을 하자 크락시스가 커다란 문을 열었다.

“다들 이곳은 처음 와봤겠군. 여긴 왕가의 무덤으로 선왕들께서 잠든 곳이네. 그러니 경건한 마음으로 나를 따르게.”

그렇게 말한 에런 왕이 걸음을 옮기자 넘버즈들도 뒤를 따랐다.

“이곳은 무덤이기도 하지만 다르게 보면 왕실에서 모은 보물들이 있는 보고라네.”

그 말에 넘버즈들이 서로를 봤다.

왕가의 무덤은 물론 보고에 자신들을 왜 데려왔는지가 궁금해서였다.

하지만 쉽게 물어볼 수가 없었다.

엄숙한 표정의 에런 왕.

뒤따르는 크락시스와 드겔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에런 왕이 석실 하나를 열고 들어가 예를 갖췄다.

뒤따르던 넘버즈들도 그를 따라 예를 취했고 그런 넘버즈들을 돌아본 에런 왕이 말했다.

“이곳은 바로 선대왕께서 잠든 곳이네.”

넓은 석실 한가운데 놓여 있는 석관.

벽에는 초상화와 수많은 그림들이 걸려있었고 왕의 조각상도 보였다.

“이곳에 왕들이 잠들어 있는 이유는 초대 건국왕의 유지 때문이지. 죽어서도 왕국을 지키겠다는 의지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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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아이작은 기안 사람이었습니다. 방패 얘기가 몇 번 나왔지요.

아무튼, 주인공만 한다는 보물창고 탐방~

여기선 단체 관광으로~

보물창고에는 무엇이?

다음 편에~

전 자러 갑니다. 

[NEOshin]

득템~!!ㅋ 담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대원(大遠)]

득템 ㅊㅋㅊㅋ.... 텨~

[MidD]

경심이 -> 결심이

[대원(大遠)]

경심이는 누굴까요? ㅠㅜ 수정했습니다.

[MidD]

여 섰는데 -> 여셨는데

[MidD]

드디어 제대로 된 무기를 장착??! ㅎㅎㅎ 기안 이미지가 점점 좋아져요 첨엔 왕비 이젠 아이작까지..! 그나저나 왕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막말을 해대는 왕의 친구들.. ㅎㅎㅎ 웃기면서 훈훈하다는..

[대원(大遠)]

어디고 마음에 드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죠ㅎㅎ 드겔의 막말은 앞으로도 계속 됩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쟈드린]

마장기?

[대원(大遠)]

음 그정도는 아닐 겁니다...

[쟈드린]

신의검?

[대원(大遠)]

음... 검도 나올거 같기는... 텨~

[은색의왕]

왕이랑 측근들만 나오면 만담이야 무슨ㅋㅋㅋㅋㅋㅋ

[대원(大遠)]

아하하하....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