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넘버즈. 27장(5)

“미네르바 경도 있는데 말이 너무 과했던 건 아닌가요?”

마차를 타자마자 이베트가 하는 말에 카라얀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괜찮을 겁니다.”

이베트는 길리안만 보고 있어서 보지 못했겠지만, 자신은 볼 수 있었다.

길리안을 보는 미네르바의 눈을.

그건 그냥 동료기사를 걱정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는 이베트가 길리안을 보는 눈과 비슷했으니까.

“길리안 경은 이런저런 상황을 다 고려해가며 행동할 사람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의식은 하고 있어야 하기에 그런 말을 한 겁니다. 그리고 확실히는 그는 정치와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적어도 지금 당장에는 그렇게 보이더군요. 세력을 모으고 그 힘으로 뭔가를 도모할 것 같은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이베트는 말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길리안에게 가장 아쉬운 부분이 그거였다.

이번에 길리안을 위해 손을 쓰기는 했지만, 그건 그가 계속 기사의 길을 갈 수 있게 해주기 위해서였다.

기사들도 조금 움직여 보려고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넘버즈들을 비롯한 많은 기사가 길리안의 행동에 동조해 줘서 고마울 정도.

거기까지는 좋았다.

그런데 왕이 보여준 행동이 너무 파격적이었고, 솔직히 길리안을 넘버즈에 임명할 줄은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기사들이나 관료들의 부패가 심각하긴 했고 정리가 필요하긴 했다. 하지만 지금 보여주는 왕의 결정은 거의 물갈이 수준.

브루스 자작과 상황을 예상하고 논의를 할 때도 그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왕의 결정이고 모든 것은 왕의 입을 통해 벌어졌지만, 모든 비난과 원망의 화살은 길리안에게 향할 것이다.

걱정되는 부분이 그거였다.

생각보다 적이 너무 많이 생겼고 앞으로 더 늘어날 게 분명했다.

이 정도면 자신이 후견인으로 뒤에서 손을 써주는 것도 한계가 있다.

길리안이 좀 더 야망이 있다면 세력을 만들어 주는 것은 어렵지가 않다. 그런 욕심을 부리지 않는 지금의 길리안이 무척 마음에 들긴 하지만, 그건 또 다른 것이니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똑똑한 편이고 그 위치에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도는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옆에서 가르치고 조언을 해주면 자신에게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그것에 맞게 변하는 모습도 보여줄 거로 생각했다.

문제는 시간은 사람이 변할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거다. 그래서 급한 대로 자신의 양자로 만들 생각을 다시 하게 된 것.

곧 처녀 때의 성을 쓰게 될 거고, 백작인 오라버니를 만나면 길리안의 후견인이 돼주길 부탁할 생각이었다.

이제 성인이니 딱히 후견인은 필요 없지만, 그 정도면 백작 가의 사람으로 인정받는 거고 좋은 배경이 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카라얀의 말에 이베트는 생각을 접고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길리안 경은 몰라도 다른 넘버즈들은 다릅니다. 어차피 편 가르기 싸움입니다. 왕의 곁에서 힘이 되려고 마음먹었다면 그들이 움직일 겁니다. 아무래도 대귀족의 자제들이니까, 정치적인 식견이나 지금 상황에 대처할 능력은 그들이 길리안 경보다 뛰어날 겁니다. 그래서 미네르바 경이 있는 자리에서 그런 말을 한 겁니다.”

“자작의 말대로 그랬으면 좋겠군요.”

“그리고 미력하지만 저도 힘이 되겠습니다.”

“고마워요.”

미소를 짓는 이베트를 보며 카라얀도 미소를 지었다.

물론 길리안과는 오늘 처음 만나봤기 때문에 그의 힘이 되고 싶다거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은혜를 입은 것은 눈앞에 있는 이베트다.

그녀를 위해서 그를 돕겠다는 것일 뿐.

그렇다고 길리안에게 아주 감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때문에 자신에게 기회가 돌아왔고 그것에 대해 고맙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그리고 왕실에는 지금 인재가 부족하다.

자리가 많이 비었고 조금만 능력을 인정받아도 쉽게 올라갈 수 있는 상황.

이건 다시없는 기회였다.

“저택의 일은 고마워요. 새로운 자작 가의 저택은 알아보고 있으니···.”

“그건 신경 쓰지 마십시오. 이미 충분한 재산을 양도받았습니다. 제가 천천히 알아보겠습니다.”

“그래요. 그래도 자작 위를 받으면 파티는 열어야 할 테니 그건 이곳에서 열도록 하죠.”

“그것도 천천히 생각해보겠습니다. 넘버즈의 정식 임명도 뒤로 미뤄질 만큼 바쁜 상황에 파티나 하고 있을 수는 없지요. 그것보다 급하고 중요한 일이 훨씬 많습니다.”

카라얀의 말에 이베트가 웃으며 말했다.

“자작의 그런 면이 좋아요. 나 때문에 멈춰있던 마르샤 가문이 자작을 통해 다시 영광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겁니다. 다만 생각을 너무 드러내지는 말도록 해요. 자작의 생각은 내가 봐도 너무 급진적일 때가 있으니까.”

“하하,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전 능력을 갖춘 자가 그에 맞는 대우를 받는 세상. 그런 세상을 원할 뿐입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바꿀 수 있을 거로 생각합니다. 딱 좋은 상황도 만들어져 있으니까요.”

“너무 서두르지는 말아요.”

“알겠습니다.”

“자작이 알아서 잘 처신할 거로 믿어요.”

“그 믿음 절대 져버리지 않겠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그냥. 재미있는 사람이다 싶어서.”

미네르바의 말에 길리안은 피식 웃었다.

그가 쏟아내는 말들이 꽤 심각한 것들이어서 자신은 미네르바처럼 생각할 수가 없었다. 처음 봐서 딱 어떤 사람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확실히 보통의 귀족과는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는 했다.

“그래 길리안 경께서는 자작의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장난 끼 섞인 미네르바의 물음에 길리안이 답했다.

“앞으로 좀 더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그 말에 미네르바가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으십니까?”

“하하, 아니야. 왜 자작이 내게 들으란 듯이 그런 말들을 했는지 알겠어서.”

“음.”

“그리고 너무 신경 쓸 것 없어. 어차피 그런 자들의 질시나 모략을 신경 쓰지도 않잖아. 조금 조심할 필요는 있지만, 걱정하지 마. 그렇게 두지도 않을 테니까.”

“저 때문에 굳이···.”

“너 때문이 아니야. 어차피 우리가 하려고 했던 일들이었어. 다만 조심스럽게 진행하고 있었을 뿐이고, 기사들에 국한된 거였지만. 믿을만한 기사들을 추리고 있었던 건 알고 있었잖아?”

“네.”

“조용히 처리하려고 했던 일이 수면위로 올라온 거고 생각보다 조금 커졌을 뿐이야. 우리가 했어야 할 일을 네가 나서서 해서 미안한 마음도 있었거든. 그리고 이제 같은 넘버즈니까 우리랑 같이 해야 할 일을 하면 돼. 그러니까 앞으론 혼자 나서지 말고 나랑 상의할 것!”

미네르바의 말에 길리안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정말 어머니와 아들이 됐나보네?”

“네.”

“정말 말 잘 듣는 아이구나. 아직도 그렇게 누워있는 걸 보면.”

“아~.”

그때야 길리안이 몸을 일으켜 침대에 기댔다.

“생각보다 말 잘 듣는 아이는 아닙니다.”

“응. 그런데 정말 괜찮은 거지?”

“네. 확실히 신관들의 치료는 좋네요.”

붕대를 감은 어깨를 만지작거리며 말하는 길리안을 보고 미네르바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빨리 치유가 된다고 꼭 좋은 건 아니야. 괜찮아 보인다고 막 움직이고 그러면 안 돼. 너에겐 정말 휴식이 필요해 보이니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십니까?”

“정말 흉터가 많네.”

길리안의 벗은 상체를 처음 봤는데 흉터가 정말 많았다.

기사들의 벗은 몸이야 하루 이틀 본 건 아니지만, 이렇게 많은 흉터를 가진 기사는 없었다.

던전에서 로렌스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직접 보니 알 것 같았다.

“정말 많이 아팠겠다.”

미네르바의 말에 길리안이 몸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당시에는 정말 죽을 것같이 아팠는데, 지금은 괜찮습니다. 덕분에 어지간한 고통도 참을 수 있게 됐고요.”

“만져··· 봐도 돼?”

“네.”

미네르바가 다가와서 가슴에 길게 새겨진 흉터에 손을 댔다.

“이건 누구에게 당한 거야?”

“사람에게 당한 게 아닙니다. 그리고 정말 죽을 뻔한 상처 몇 개 빼고는 기억 못 합니다. 그리 자랑할 것도 못 되고요.”

미네르바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흉터를 만졌다. 그녀의 손길이 큰 흉터에 닿아 움직일 때마다 길리안의 표정이 조금씩 변했다.

“음···.”

“왜 아파?”

미네르바가 손을 떼며 묻자 길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간지러워서요.”

“뭐? 어깨에 랜스가 박혀도 태연하게 말을 몰던 기사가 간지러운 걸 못 참는 거야?”

“그게 꼭 간지럽다기보다는··· 조금 이상하기도 하고.”

“하하하.”

어색한 표정으로 말하는 길리안을 보고 크게 웃은 미네르바가 웃음을 그치고 그를 봤다.

“아무래도 인제 와서 날 기사로만 대해달라고 하면 내가 너무 이기적인 것 같고, 나도 그러기 싫고.”

말을 마친 미네르바가 길리안에게 입맞춤을 했다.

“이건 고마워서 해 주는 거야. 던전에서 구해줘서 고마워.”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같은 상황에서 절 그냥 두고 가시지 않을 것 아닙니까? 저도 마찬가집니다.”

“그래도 빚진 건 빚진 거니까. 이 정도로 목숨을 구해준 보답은 못 되겠지만 지금은 만족해줘.”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가 이러는 게 싫어?”

“싫을 리가 없지요.”

“하여간.”

미네르바가 검지로 길리안의 코끝을 콕 찔렀다.

“나랑 마주 볼 위치까지 오느라 고생하셨어요. 기사님.”

그 말에 길리안이 씨익 웃었다.

“그런데 미안. 지금은 내가 생각이 많아서 아무것도 못 해주겠어.”

“괜찮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번엔 내가 다가갈 테니까 그 자리에서 조금만 기다려줘. 알았지?”

길리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길리안의 뺨을 쓰다듬던 미네르바가 다시 입맞춤하고 일어섰다.

“완전한 여자가 돼줄 수는 없지만, 고민이 끝나면 조금 더 노력해 볼게. 하지만 기사로선 절대 지지 않을 거야.”

“저도 져달라고 할 생각도 없고, 지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그런 길리안을 보고 씨익 웃은 미네르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좀 쉬면서 회복에 전념해. 나머진 다른 넘버즈들과 처리할 테니까.”

“저도 넘버즈입니다만.”

“알아. 하지만 지금 넌 너무 주목받고 있어. 모든 화살이 너에게 향하게 두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까 잔말 말고 쉬도록!”

길리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주 웃은 미네르바가 몸을 돌려 문으로 걸어가다가 다시 돌아섰다.

“아, 내가 다가갈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다른 여자랑 키스하는 것 정도는 봐줄게.”

“네?”

“나 말고도 키스 정도 한 여자는 있을 거 아냐?”

그 말에 길리안은 어색하게 웃었다.

“아마 다른 여자도 만나보게 될 거야. 부인이 가만히 있을 것 같지도 않으니까. 단, 그 이상 하면 죽여 버릴 거야.”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만···.”

“그럼 됐어.”

그러곤 몸을 획 돌려서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녀가 나간 문을 잠시 쳐다보던 길리안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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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쉬고 있어서 오늘이 일요일인 줄 알았습니다. 흑흑...

다음주 월, 화도 일이 잡혀있고...

아 내 연휴...

추석연휴 때도 하루 한편은 올릴 겁니다. 아마도...요.

다들 즐거운 추석연휴 되시길~

[NEOshin]

그래도 이번 주말은 쉬시나 보네요~ㅎ 축하드립니다~^^ 길리안 부럽네요ㅋㅋㅋ

[대원(大遠)]

감사합니다 ^^ 일단 오늘은 또 시체가 될 생각입니다 ㅎ

[은색의왕]

것은 눈앞에 이베트→눈 앞의 이베트/눈 앞에 있는 이베트

[대원(大遠)]

감사합니다 수정했습니다.^^

[은색의왕]

잘 보고 가요

[대원(大遠)]

늘 감사드려요~ 즐거운 추석연휴 보내시길~

[코드명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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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댓글입니다.

[대원(大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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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댓글입니다.

[NEOshin]

다음편은 언제?!?!?

[대원(大遠)]

일요일엔 시체처럼 누워있다가... 어제 오늘은 일하고 ㅎㅎ 으악!! 이제 집에 왔습니다 ㅎ 써야죠 ㅎ

[MidD]

미네르바 쿨하군요ㅎㅎ 시어머니가 걱정인데ㅜㅜ 미네르바 화이팅~~

[대원(大遠)]

저거 라데카 때문에 그런겁니다. ㅎ 그렇게 쿨하지만은 ㅋㅋ

[sheath]

달달하네요ㅎ 이소설을 오늘 봐서 정말 다행입니다.

[대원(大遠)]

저도 다행입니다~ ㅎㅎ

[오빠나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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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大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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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ythx]

길리안 이 자식 2명의 처가 생길 수 있겠군요 ㅎㅎ 엔젤은 길리안의 형이랑

[대원(大遠)]

그럴수가!! 어? ㅋ

[행복이좋아]

본처 확정이 여기서 확고해 지는구나!

[대원(大遠)]

음... 으흐흐흐흐;;;

[데이부우]

ㅅㅅ 안 하나요??

[대원(大遠)]

ㅅㅅ이라면... 음... 그건가요; 저, 저는 잘 몰라효... 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