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5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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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는 이상함을 느꼈다.
왕이 모든 기사를 소집한다고 해서 뭔가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분위기가 무척이나 무거웠다.
자신은 아무 말도 못 들었는데 다들 전투에 나가는지 다른 넘버즈들은 갑옷을 입고 있었다.
가장 의외인 것은 드겔.
그가 갑옷을 입은 모습은 거의 보질 못했으니까.
그들만이 아니라 300정도 되는 기사가 갑옷을 입고 늘어서 있었다.
그런데 넘버즈들이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멀리서는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껍데기는 몰라도 알맹이는 다른 사람 같은 느낌.
궁금했지만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는 상황.
그만큼 왕은 날이 잔뜩 서있었다.
크락시스가 호명한 기사들은 왕의 앞으로 나가 한쪽 무릎을 꿇었고 그 수가 200은 돼보였다.
왕은 그들이 저지른 죄를 일일이 짚으며 기사들을 훈계하는 중.
훈계가 아니라 처결을 하는 중이라고 봐야했다.
기사 작위를 몰수하는 것으로 끝나면 운이 좋은 거였다. 왕의 입에서 사형이라는 말이 몇 번이나 나왔는지 세기도 힘들 정도.
근 천명은 되는 기사들이 한자리에 있는데 숨소리도 잘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때 시종장이 다가와 왕에게 뭔가를 속삭이니 왕이 넘버즈들과 갑옷을 입은 기사들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
새로 넘버즈가 된 길리안이라는 자도 그 안에 속해 있었다.
조심스럽게 왕에게 자신도 출동하겠다고 했으나 옆에 있으라는 말에 입을 다물고 물러섰다.
크리스는 장내를 벗어나는 넘버즈들을 봤다.
특히 길리안을 보는 그의 눈에는 살기가 감돌았다.
넘버즈들을 비롯한 기사들이 나가자 에런 왕은 갑옷을 입지 않고 서있는 기사들에게 말했다.
“내 작은 것까지 하나하나 따져 벌을 내리면 휘하에 기사가 남아나질 않을 것 같아 이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손에 든 두꺼운 종이뭉치를 흔들어 보였다.
“내 경들에게는 기회를 한번 줄 생각이다. 그러면 경들은 내게 충성하며 앞으로 기사다운 모습을 보일 수 있겠는가?”
그 말에 수백의 기사들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 왕이 손짓을 하자 기사 둘이 화로를 들고 왔다.
“그럼 내 이것은 못 본 것으로 하겠다.”
그리고 두꺼운 종이뭉치를 화로에 던졌다.
“경들은 무장을 갖추고 나의 명을 기다리라.”
그 말에 기회를 얻은 기사들이 대답을 하고 장내를 벗어났다.
에런 왕은 앞에 있는 기사들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추리고 추렸는데도 수가 많았다.
직영지에 나가있는 기사들에 국경에 있는 이들까지 하면 앞으로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신료나 행정관들은 그 수가 더 많았다.
그래도 해야만 했다.
방금 시종장에게서 드겔이 있던 곳에 습격이 있었고 그걸 물리쳤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하나도 기쁘지가 않았다.
작전을 허락하면서도 설마, 설마 했었다.
실제로 일이 벌어지니 이제는 화도 안 날만큼 어이가 없었다.
시종장은 드겔이 마탑주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그 말은 마탑도 대대적으로 손을 봐야 한다는 말.
“하아~”
한숨을 내쉰 에런 왕이 눈을 뜨고 힘없는 목소리로 크락시스에게 말했다.
“저들을 치우게. 형은 내일 집행하고.”
“예.”
그리고 다시 눈을 감고 왕좌에 몸을 기댔다.
이 자리에서 도대체 무엇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에런 왕이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책하고 주저앉아 있을 시간이 없었다.
밖에 나가있는 넘버즈들도 할 일이 많지만 자신도 할 일이 무척이나 많았다.
왕으로서 왕국을 바로 세워야 했으니까.
“하아~ 하아~. 말도 안 돼.”
미네르바는 나무에 기대 숨을 골랐다.
추격을 시작하고 한 시간이 넘었다.
말을 타고 쫓을 때는 좋았다.
그러다 적들이 나눠졌다.
자신은 다른 쪽으로 간이들을 처리하고 따라가겠다고 했고, 길리안은 숲으로 들어간 자들을 쫓았다.
흔적을 남길 테니 쫓아오라는 길리안의 말에 그러겠다고 했다.
따로 떨어진 적을 처리하는데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10분의 차이가 이렇게 클 줄은 생각도 못했다.
뒤따르던 기사들을 신경 쓰지 않고 달려 그들과도 거리가 상당히 벌어진 상태.
그런데도 길리안을 도무지 따자 잡을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더 웃긴 건 공격받은 흔적도 있다는 것.
그럼 조금씩 멈추고 속력도 줄었을 텐데 이게 말이 되나 싶었다.
로렌스가 다른 이들이라면 19호를 못 잡았을 거라고 말했을 때, 그냥 웃어넘겼는데 지금 보니 정말 그랬을 것 같았다.
숲은 산으로 이어졌고 길은 더 험해졌다.
순간적인 스피드 싸움도 아니고 이런 것은 딱 질색이었다.
“으아!!”
미네르바는 크게 고함을 지르고 이를 악물었다.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고, 지고 싶지 않은 건 또 다른 거다.
그러다 피식 웃었다.
추격은 뒷전이고 지금 머릿속에는 길리안을 따라잡을 생각밖에는 없었으니까.
“목적이 바뀌면 안 되지. 이 자식들 잡히면 온몸에 구멍을 내주겠어!”
그렇게 말한 미네르바가 다시 뛰기 시작했다.
로렌스가 말을 멈추고 멀리 보이는 마을을 가리켰다.
“저기다.”
그 말에 마을을 살펴보던 드레드가 손을 내밀었다.
로렌스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건네자, 그걸 보고 다시 마을을 보고를 반복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어떤 시각으로 봐야 이 그림이 저기라고 생각하게 되는 건가?”
“그자의 그림실력이 별로이긴 하지.”
19호를 말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고, 이 그림을 그린 것이 그란 것도 알고 보기도 했었다.
그가 임무를 끝내고 복귀할 장소라고 했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림과 절대 일치하지 않는 풍경.
뭐 일단 그림실력이 별로이기도 했지만.
“난 아무리 봐도 모르겠군.”
그런 드레드를 보며 로렌스가 웃으며 말했다.
“큰집과 작은 집들, 빈 마을. 그리고 방향. 수도와 멀지 않은 거리에서 부합하는 것은 이곳밖에 없었다.”
“음, 와봤었다는 말이군.”
“너와 미네르바에게만 일을 시키고 놀고 있지는 않았으니까. 너도 예전에 와 본적이 있지 않나?”
그 말에 드레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마을에서 가장 큰 저택에 살던 상인과 그 가족이 몰살당했었다.
범인은 잡지 못했고 원한에 의한 것으로 추측했지만, 귀족기사단의 소행이라는 의견도 나왔었다.
일을 벌이면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버젓이 증거를 남기던 자들. 하지만 그들과 관련된 아무런 증거가 없어서 그 의견은 무시됐었다.
어쨌든 저택에 살던 상인이 밑에서 일하던 이들과 함께 만들었던 마을이라 그가 죽고 나서 사람들이 하나둘 떠났다.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고 유령이 나오는 마을로 소문이 나서 가까이 가지 않는 곳이 됐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지는 않았나?”
“뭔가 있다면 괜히 자극할 필요는 없으니까.”
“뭔가 있다고 생각하나보군.”
로렌스가 드레드의 등을 탁 치며 말했다.
“있을 거다. 의외로 내 감은 무척 좋으니 믿어도 좋다.”
그 말에 드레드의 표정이 오랜만에 변했다.
“뭔가 있다면 많았으면 좋겠군.”
“설마 웃는 거냐?”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로렌스가 피식 웃었다.
항상 투구를 쓰고 있어 얼굴도 잘 못 보는 그다.
웃는 건 정말 보기 힘든 모습.
“너도 웃는 연습은 좀 해야겠다.”
“내가 웃으면 내 딸은 무척 좋아한다.”
“다행이군. 무서워하지 않는다니.”
“응?”
“아니다. 어떻게 하겠나? 난 좀 돌아가서 살짝 접근해보려고 한다만···.”
“그럼 내가 미끼가 되어주지. 뭔가가 있다면 말이다.”
슬쩍 고개를 내밀자 여지없이 날아오는 화살.
‘역시.’
상대하기 까다로운 자들.
19호를 추적할 때와는 달랐다.
이번엔 자신도 활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저쪽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
숲으로 숨어든 자들은 3명.
교대로 견제를 해왔지만 쫓는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시간을 많이 지체하고 있었다.
그냥 견제가 아니라 혼자 남아 시간을 벌겠다는 것.
다른 자들은 도망치며 흔적을 지울 테고 그러면 추적이 힘들다.
길리안은 활시위를 힘껏 당겼다가 활만 내밀고 재빨리 시위를 놓았다.
그리고 숨어있던 나무에서 뛰쳐나오며 다시 활을 쏘고 비탈을 달렸다. 언제든 다시 활을 날릴 수 있게 준비하고 시선도 적이 있는 곳에서 떼지 않았다.
목표로 했던 큰 나무가 몇 발짝 남지 않았을 때 길리안이 푹 꺼지듯 바닥에 엎드렸다.
뭔가 날아오는 것을 느꼈기 때문.
엎드린 상태에서 옆으로 몸을 굴렸다.
뭔가가 퍽퍽 소리를 내며 땅에 박히거나 튕겨나갔다.
보지 않아도 화살임을 알았다.
길리안은 계속 몸을 굴려 적당한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둘이었군.’
화살이 날아온 방향도 각도도 계속 자신을 견제하던 자의 위치가 아니었다.
‘이러면 곤란한데.’
하나가 더 남았을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나무에 화살이 퍽퍽 소리를 내며 박혔다.
자신의 약간 우측에 치우쳐있는 공격.
움직이는 동안 공격했던 자였다.
원래 공격을 주고받던 자의 공격은 없었다.
하나가 견제하고 하나가 이동해서 자신을 공격할 위치를 잡을 수 있는 상황.
길리안은 좌측을 살피며 수풀이 움직일 때마다 활을 쐈다.
그리고 틈틈이 우측으로도 활을 쐈다.
양쪽 다 신경을 쓰려니 곤란한 상황.
‘어쩌면.’
셋 다 남아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움직여야 했다.
그때 멀리서 새들이 날아오르는 게 보였다.
자신이 왔던 방향.
‘적은 아닐 거 같고 그렇다면···.’
길리안은 씨익 웃으며 그쪽으로 화살을 몇 발 날렸다.
미네르바는 위에서 떨어진 것을 보고 멈춰 섰다.
위협적이지 않아서 그냥 열매나 나뭇가지 인줄 알았는데 화살이었다.
숨을 고르며 집어서 살펴보니 적들이 쓰던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길리안이다.
미네르바는 숨을 고르는데 집중했다.
나무에 박혔던 것이 떨어졌을 리는 없고, 이쪽의 움직임을 보고 쏜 것이라 생각했다.
몇 백 미터 앞에 길리안이 있고 이러는걸 보면 적도 있을 것이다.
안정을 찾고 나서 기척을 죽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동하는 동안 땅이나 나무에 박힌 화살을 몇 개 더 발견했다.
미네르바는 조심스럽게 산비탈을 오르며 주변을 살폈다.
이제는 나무에 뭔가가 퍽퍽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이동하다보니 큰 나무에 등을 대고 있는 길리안이 보였다.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자 길리안이 자신이 있는 쪽을 쳐다봤다.
거리도 있었고 장해물도 있었지만 눈을 마주치기엔 충분했다.
자신에게 미소를 지어보인 길리안이 양쪽을 가리키고 손가락을 두 개 펴보였다.
적이 둘이라는 말.
그러더니 보고 있는 방향 왼쪽으로 활을 쏘고 원위치를 한 후에 자신을 가리켰다.
적을 처리해달라는 것이라 생각했다.
화살이 박힌 위치는 봐서 알고 있었다.
대답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지금은 움직일 때.
길리안은 미네르바가 온 것을 보고 무척이나 반가웠다.
솔직히 미네르바라고 확신은 하지 못했다. 산짐승일 수도 있고 그냥 새들이 날아오른 것일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왔고 자신의 의도도 전해진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누군가를 암습하는 것에 익숙하지가 않고 그건 넘버즈들도 다르지 않았다.
능력이 뛰어나 기척을 죽이고 움직일 수는 있지만, 확실히 이런 식의 싸움은 익숙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움직임을 방해하는 것들도 너무 많다.
이곳에서 견제해주는 정도로는 저런 자들의 눈을 피해 접근하기 힘들 것 같았다.
그렇다면.
길리안은 활을 메고 두 자루의 검을 뽑아 양손에 들었다.
저들의 쏘는 화살의 위력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못 피하고 못 쳐낼 정도는 아니다.
무한정 그럴 수는 없지만 가능은 하다.
다만 그런 식으로 저들에게 접근하는 게 용이하지 않아 안했을 뿐.
기회를 잡으면 그때는 하려고 했다.
그리고 지금이 그때라고 생각했다.
길리안은 오른쪽으로 튀어나갔다.
나가자마자 날아오는 화살을 튕겨내고 몸을 비틀었다.
팔을 스쳐지나가는 화살.
중심을 잡고 비탈을 달려 올라갔다.
하지만 역시나 만만치 않았다.
쉬지 않고 양쪽에서 날아오는 화살.
그걸 피하고 막고 숨으며 계속해서 움직였다.
‘저 바보가!’
미네르바는 깜짝 놀랐다.
처리하라고 했으면 신경을 못 쓰게 견제나 좀 해주던가.
저건 완전히 미끼가 되겠다는 행동.
미네르바는 자세를 낮추고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검을 뽑아들었다.
저렇게 까지 해주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자신도 길리안의 실력을 제대로 몰랐지만, 그건 길리안도 마찬가지.
얕보는 건 아닐 테고 걱정이 돼서 저러는 거겠지만 그것도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걱정할 사람을 걱정하라고.’
길리안의 행동 때문에 적이 이동했지만 그 정도를 놓칠 정도는 아니다.
미네르바는 거치적거리는 나뭇가지를 베며 달렸다.
앞을 가로막는 것은 모두 베며 화살처럼 쏘아져 나갔다.
시야를 가리던 작은 나무를 베자마자 몸을 틀었다.
화살이 스쳐지나가자 다시 땅을 박찼다.
적의 공격은 예상했었다.
이정도 움직임을 눈치 못 챌 리가 없으니까.
두 번째 화살을 쳐낸 미네르바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화살을 시위에 거는 적의 모습.
‘이정도면!’
그녀의 신형이 쭉 뻗어나갔다.
그리고 활시위를 당기던 적을 스쳐지나간 미네르바가 검을 털었다.
길리안은 들려오는 휘파람 소리에 씨익 웃었다.
미네르바가 적을 처리한 모양.
그때 뭔가가 뒤쪽에서 빠르게 접근하는 걸 느끼고 돌아섰다.
“이따 혼날 줄 알아.”
대답도 하기 전에 자신을 스쳐지나가는 미네르바.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 잘려나간 나뭇가지와 수풀이 떨어져 내렸다.
“허.”
엄청난 스피드였다.
하지만 당황한 것도 잠시.
아직 적이 하나 남았다.
혼날 때 혼나더라도 빨리 적을 처리하고 추적을 해야 했다.
길리안은 웃으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음, 열심히 썼는데 12시가 넘었네요.
좀 더 박진감 넘치게 쓰고 싶었는데...
뭐 앞으로도 이야기는 계속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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