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16장(6)
“저는 이미 분에 넘치는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음, 네게 준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이미 보상을 받았다? 정녕 원하는 것이 없다는 말이더냐?”
“무엇을 바라고 한 일도 아니고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입니다. 보통사람은 가까이서 뵐 수 없는 폐하의 앞에서 보잘것없는 실력도 뽐낼 수 있었고, 왕궁에서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폐하의 앞에 이렇게 앉아있습니다. 분에 넘치는 영광이고 이 정도면 제겐 충분합니다.”
한동안 길리안의 눈을 쳐다보기만 하던 국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눈빛이구나. 정말 바라는 것이 없느냐?”
“예.”
“조금 전에 넌 날 폐하라고 칭했다.”
“예. 그리하였습니다.”
길리안은 대답하며 뭐가 잘못됐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베트와 엔젤리나에게 많은 주의 사항을 들었고 그중엔 국왕과 대화할 땐 폐하란 칭호를 쓰라고 들었다.
단어의 선택이나 말투에 대해서도 짧지만, 교육을 받았는데 혹시 실수한 건가 하는 생각에 몇 마디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려봤다.
“트집을 잡고자 함이 아니다. 네게 묻고 싶어 꺼낸 말이니 부담 갖지 말거라. 내가 제국의 황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고 보느냐?”
길리안은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제국의 황제나 다른 나라의 왕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하지만 폐하께선 왕국의 제일 높은 곳에 있으신 분이고 또 가장 존귀한 분이란 것은 알고 있습니다. 왕국이 다른 나라를 섬기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한자리에 모두가 모인다면 폐하께선 당연히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셔야 할 분이십니다.”
“제법 듣기 좋은 말도 할 줄 아는구나.”
“자국의 왕을 가장 높은 곳에 놓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존경의 마음을 담아 존칭을 사용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배웠습니다.”
길리안의 말에 국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모두가 날 폐하라 칭하며 높이지만 그 말이 항상 듣기 좋은 것은 아니다. 이유는 말과 행동이 다르기 때문이지. 또 말에 진심을 담는 것 또한 힘든 법이다. 무슨 말을 해도 거짓처럼 느껴지는 이가 있고 무슨 말을 해도 진실로 들리는 이가 있다. 그중에서 너는 후자에 가깝다.”
“감사합니다.”
“너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었고 네 신분을 생각하면 절대 흔한 일이 아닌데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제는 알겠구나.”
길리안은 대답할 말이 없이 그저 가만히 있었고 왕은 계속 말을 이었다.
“기사들과 겨룰 때는 사나운 맹수를 보는 것 같았다. 네가 뿜어내는 투지가 느껴질 만큼 대단했지. 그런데 지금은 다른 사람을 보는 느낌이다. 너 자신을 얼마나 잘 다스리고 있는지 알겠구나.”
거기에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분위기가 있었다.
참 재미있는 녀석이었다.
평민이 아니라 귀족이라 해도 상을 준다면 거절하는 경우가 없고 뭘 줄지 기대하는 것이 표정과 눈에 드러난다. 내색하지 않고 한두 번 거절하는 경우가 있지만, 말뿐인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 평민 아이가 주는 느낌은 달랐다.
긴장하고 있음은 느껴지지만, 경계하고 있지는 않고 말에 진심과 존경을 담으려 노력하면서도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았다.
“넌 충분히 기사가 될 자격을 갖췄다. 그런데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이미 한번 거절하였다. 무슨 준비가 더 필요한 것이더냐?”
“폐하께서 내려주시는 임무를 완벽히 해낼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면이 많아 배워야 할 것도 많고 아직은 기사의 서약을 지키고 행할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습니다.”
“준비되지 않았다? 하하하하. 계속 아카데미에 남겠다는 말로 들리는구나.”
“아직은 그러고 싶습니다.”
“허허 나의 기사들을 전부 아카데미로 돌려보내야겠구나. 왕실의 기사가 되겠다는 것은 날 섬기는 기사가 되겠다는 말이겠지.”
“그렇습니다.”
“하지만 아직 준비가 안 됐고, 준비된 후에 오겠다는 것은 언제든 나의 기사가 될 자신이 있다는 말이로구나.”
“그건···.”
맞는 말이긴 한데 저렇게 말하니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뭐했다.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는 길리안을 보고 국왕이 호탕하게 웃은 후에 말했다.
“충분히 그런 자신감을 가질 만하다. 주군을 선택하는 것도 그 시기도 기사가 될 자가 선택하는 것이 맞다. 허나 나는 그 시기를 좀 더 앞당기고 싶구나. 시종장이 보기엔 어떻소. 슈발리에에서 저 아이에게 더 가르칠 것이 있겠소?”
국왕의 우측에 앉아있던 시종장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배움에 끝이 어디 있겠습니까. 스스로 배우려 한다면 그만큼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출중한 실력을 다듬고 다른 부족한 부분을 채운다면 앞으로 더 훌륭한 기사가 될 것입니다.”
그의 대답을 들은 국왕이 좌측으로 고개를 돌렸다.
“드겔 경이 보기엔 어떠시오?”
“기사가 될 충분한 자격과 더 발전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습니다. 마음가짐 또한 충분하다 여겨지지만, 아직 어린 나이임을 고려해 좀 더 배울 수 있는 시간을 주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됩니다.”
한동안 셋은 계속해서 말을 주고받았다.
길리안은 그때야 국왕의 양옆에 앉은 이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일전에 총장실에서 만났던 왕실의 인물들.
왕국의 시종장이자 백작이고 슈발리에의 총장이기도 한 이와 체스를 두었고, 왕실 최고의 기사이자 넘버즈의 No.1과 악수를 했던 것이다.
대단한 위치에 있는 이들을 만났던 것인데 모르고 있었다. 하긴 지금은 국왕의 앞에 앉아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지 않은가?
대화를 나누고 난 후 국왕이 길리안을 보고 말했다.
“말했듯이 내 너를 기사로 삼고 싶다. 물론 아직 준비 되지 않았다고는 하나 그 시기도 앞당기고 싶다. 해서 기사의 작위를 내릴 것이다.”
“그건···.”
“아직 나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
그 말에 입을 닫고 고개를 숙였다.
“왕자로 태어났다 해서 그냥 왕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에 맞는 교육을 받고 경험을 쌓다가 때가 되면 물려받는 것이지. 하지만 아무리 배워도 왕이 돼보기 전엔 그 고충을 알 수 없고 왕관의 무게 또한 알 수 없다.”
국왕이 앞에 놓여있는 찻잔을 들었다.
“기사들 또한 마찬가지다.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 기사가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기사가 된 후에도 그전처럼 노력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기사 작위에 대한 긍지를 가지고 그 자리에 대한 무게를 알고 더 노력하는 자는 훌륭한 기사가 되지. 앞으로 더 나아갈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지는 자신의 노력에 달렸다.”
차를 한 모금 하고 난 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기사 작위를 받는 것에 그리 신중하다면 마음가짐과 목표가 다를 터. 허나 그 자리에 오르고 난 후에도 그럴지는 돼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 어떠냐. 자신할 수 있겠느냐?”
“노력은 계속 할 것입니다.”
“그 노력을 보고 싶구나. 기사 작위를 내려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네가 그것에 만족하고 멈춘다면 내 기억 속에서 금방 잊힐 것이다. 하지만 네가 말한 대로 계속 노력해 더 나은 모습을 보여준다면 지금 네게 받은 깊은 인상을 계속 이어갈 수 있겠지. 젊은 생도들과 기사들에게도 자극과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기사가 되어 나를 섬기고 너의 노력을 보이 거라.”
즉시 대답하지 못하는 길리안을 보고 국왕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른 기사들처럼 일선에 서서 나를 섬기라는 말은 아니다. 네가 원하는 대로 시간을 줄 것이니 아카데미에 다니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는 말이다.”
“감사합니다. 폐하.”
“허나 형식적으로라도 기사단에 이름은 올려놓을 것이다. 드겔 경이 보기엔 어디가 좋겠소?”
“동부의 현상범들을 잡아들여 은빛 가면의 악마라는 별명까지 얻은 것과 이번에 암살자를 추격하며 보인 능력으로 봐선 치안기사단이 좋지 않겠습니까? 일선에 나서지 않아도 그 명성만으로 제 몫은 다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왕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치안기사단이라···. 일리가 있는 말이오.”
그리고 길리안에게 말했다.
“기사 작위를 내리고 치안기사로 임명할 것이다. 그렇다고 일선에 나설 필요는 없다. 치안의 임무보단 다른 임무를 내릴 것이다. 평민의 신분이니 보통사람들의 삶을 잘 알 것이고, 수도에서 소작도 주고 있다니 그들의 생활과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겠지. 그걸 사실대로 말해주면 되는 것이다.”
“폐하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길리안의 대답에 국왕이 흡족하다는 듯 웃었다.
지금까지 대화를 듣고만 있던 이베트가 미소를 띠고 말했다.
“폐하께서 허락하신다면 서임 식은 정식으로 했으면 합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국왕이 시종장을 보고 말했다.
“언제가 좋겠소?”
“돌아오는 주일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날 왕궁에서 정식으로 서임 식을 열겠소.”
국왕의 말에 이베트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폐하.”
길리안은 감사하단 말도 못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왕궁에서 열리는 정식 서임 식.
가을에 왕실 기사시험을 치러 합격한 이들도 한 데 모아 기사서임 식을 치르는데, 대표 한 명만이 왕에게 직접 서임을 받는다. 그게 왕궁에서 열리는 가장 큰 서임식이다.
일반적으로 작위가 있는 귀족 가에서 기사를 임명하거나 왕이 따로 기사 작위를 내려줄 때도 서임 식은 약식으로 진행된다.
성대한 서임 식을 여는 경우는 대부분 힘 있고 돈 많은 귀족 가의 장남들. 중요한 의식을 포함한 큰 행사라 비용이 무척 많이 들기에 아무에게나 열어주는 것이 아니고 비용의 부담은 귀족 가에서 한다.
그런데 왕이 왕궁에서 서임 식을 해주겠다니 놀랄 수밖에.
옆에 있던 이베트가 감사를 표하라는 말에 길리안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폐하.”
길리안이 뭐라 더 말하려 했지만 그 전에 이베트가 국왕에게 말했다.
“폐하. 이틀 후면 길리안은 열여덟 살이 됩니다. 서임 식에 성인식을 겸하고 싶습니다. 그에 대한 비용은 모두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시종장과 상의하여 그리하시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폐하.”
이베트의 감사에 고개를 끄덕인 국왕이 길리안에게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그만 가 보거라.”
국왕의 말에 예를 표한 길리안이 엔젤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 후에 다른 방과 이어져 있던 작은 문이 열리며 카미르, 아니 프란트 왕자가 방으로 들어서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무엇에 대한 감사이더냐? 길리안에 대한 것이라면 그럴 것 없다. 기사의 작위를 내리는 것은 충분한 실력을 갖췄기에 당연하다. 그리고 기사 서임 식을 여는 것이 공에 대한 상이다. 그보다 굳이 아카데미에 계속 다녀야겠느냐?”
“저 또한 그곳에서 배울 것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길리안과 함께 수련하며 얻는 것이 많습니다.”
“흐음···. 널 노린 것으로 의심되는 암살시도가 두 번째다.”
“절 노린 것으로 생각지는 않습니다. 만약 그런 것이라 해도 충분히 보호를 받고 있고, 저 스스로 지키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꼬리가 길면 잡힌다 했습니다. 시도가 계속되면 그것이 누구든 밝혀질 날이 올 것입니다. 왕국을 뒤흔든 사건과 관계가 있다면 해결에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네가 나서지 않아도 해결될 일이고 아들을 미끼로 쓸 생각도 없다. 그러니 고집은 그만 부리 거라.”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걱정하시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 또 조심하겠습니다.”
프란트의 말에 국왕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제대로 된 갑옷이라도 입거라.”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환하게 웃으며 대답하는 프란트를 보고 국왕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며 시종장을 쳐다봤다.
“슈발리에에 내가 모르는 교육과정이라도 있는 것이오? 기사 작위를 받고도 다니겠다고 하고 왕자도 다니겠다고 하니. 허허. 이것 참.”
길리안은 방을 나와 걸으며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일들을 되새겨봤다. 기사 작위에 대한 것은 그래도 생각하고 있었지만, 서임 식은 의외였다.
뭔가 너무 분에 넘치는 보상을 받은 기분.
“무척 마음에 드셨나 봐요.”
“예?”
멍한 눈을 하고 있다 되묻는 길리안을 보고 엔젤이 미소를 지었다.
“준비가 안 됐다는 데도 굳이 왕실기사로 만드시려 하시는 걸 보면 다른 귀족 가에 뺏기기 싫을 만큼 탐이 나셨나 봐요. 물론 원하던 길이니 잘된 일이지요.”
“아직도 좀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과분한 관심과 보상입니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평민이었다면 그렇겠죠.”
하지만 길리안은 그저 그런 평민 꼬마가 절대 아니었다.
이미 많은 이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미네르바 언니와 그날 추격에 합류했던 기사들이 제대로 보고를 해줬고, 시종장인 아버지께 말씀드렸는데 조금 도움이 된 것 같았다.
물론 후견인인 부인의 힘도 컸을 것이다.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남자지만 그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여자라는 말처럼 사교계를 주름잡는 그녀의 영향력은 그만큼 컸다. 거기에 굳이 왕비를 통하지 않아도 원할 때 국왕과 대면할 수 있을 만큼 친분도 있었으니까.
“며칠 후면 길리안 경이라고 불러야 되겠군요.”
그녀의 말에 길리안은 그저 어색하게 웃을 뿐.
“아카데미에 남겠다고 해줘서 고마워요.”
아니라고 말하는 길리안을 보며 엔젤은 미소를 지었다.
언제 졸업하든 그의 출신아카데미는 슈발리에다.
왕의 허락을 얻어 자작부인이 성대한 성인식 겸 기사 서임 식을 준비할 테니 주일이 지나고 나면 그의 일은 크게 알려질 것이다.
왕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기사가 아카데미에서 계속 배우고 싶어 한다는 건 정말 의외의 일이고 그만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다.
자신은 정말 두 팔 벌려 환영할 일이었다.
‘그나저나 앞으로 더 신경 써야겠는걸?’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왕과 직접 대화할 땐 폐하로 하고 그냥 서술할 땐 왕이나 국왕으로 하려합니다. 물론 없는 자리에서 서로 대화할 때도 국왕이나 왕으로 쓸 때도 있을 겁니다.
왕도 자신을 과인이나 짐으로 하진 않고 그냥 나, 내가 이런 식으로 하려 합니다. 전하나 과인이 이러면 너무 조선시대 사극 느낌이 날 것 같아서;;; 뭐 한자어를 많이 쓰긴 하지만요^^;
Comment ' 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