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12장(1)
“다행히 큰 부상은 면했습니다. 며칠 동안 휴식을 취하게 하고 이상이 없는지 지속적으로 살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엔젤은 말을 마치고 앞에 놓여있는 찻잔을 들며 이베트 자작부인의 눈치를 살폈다.
딱딱하게 굳어있는 그녀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고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길리안이 마상전투 수업 중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전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온 그녀.
마중을 나갔다가 마차 문을 벌컥 열고 나와 자신을 지나쳐 뛰는 모습에 솔직히 당황했었다.
지금까지 그녀를 많이 봐왔지만 한 번도 본적이 없는 모습. 지금처럼 굳어있는 표정도 평소엔 볼 수 없는 것이기에 어색했다. 거기에 마주앉은 지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어 혼자만 떠들고 있는 중이었다.
막 대할 수 있는 이도 아닌데 화까지 단단히 나있는 것 같아, 친분을 떠나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는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더 신경 쓰겠습니다. 그러니...”
“내가.”
엔젤의 말을 끊은 이베트가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당연한 말이나 듣자고 총장대리와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음... 그럼 어떤...”
“누군지 밝혀내야 할 겁니다.”
단호한 이베트의 말에 엔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건... 지금 당장은 누군가 일부러 그랬다고 단정을 지을 수 없습니다. 교육과정 중엔 예기치 못한 사고가 벌어질 수도 있고, 그에 대한 대비는 항상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단순한 사고였다고 말하는 건가요?”
“자체적으로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원인을 밝히고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그냥 넘어가 달라는 말로 들리는군요.”
이베트의 말에 엔젤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저희 쪽의 입장이라는 것도 있기에...”
“그럼 내 입장에서 얘기할게요. 곧 정식 후견인으로 등록을 마칠 거고 다른 후견인과 길리안 아버지의 위임장도 받아놓을 거예요. 후견인으로서 적어도 아카데미를 졸업하기 전까진 길리안이 갈 길을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이죠.”
“음...”
“물론 그 아이의 뜻을 존중할거에요. 하지만 이번일이 제대로 해결되지 않으면 드니로프나 골든로드에 다니는 길리안의 모습을 보게 될 거에요.”
“그건... 하아...”
엔젤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베트 자작부인과는 잘 알고지내는 사이였다. 늘 한결같은 모습과 어려운 이들을 돕는 일에 앞장서는 그녀를 존경했다. 어릴 때부터 봐왔고 그녀에게 많은 조언을 듣기도 했었다.
하지만 사적인 친분을 떠나 총장대리와 후견인으로 마주한 그녀는 너무 달랐다.
이렇게 강경하고 단호한 모습은 한 번도 본적이 없었다.
그보다 그녀가 저렇게 마음을 먹었다면 그렇게 일을 진행 할 것이 분명했다.
잠시 이베트를 보며 망설이던 엔젤이 일어나 업무를 보던 탁자에 있던 서류를 들고 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길리안 생도가 갑자기 관심과 주목을 받게 됐고, 그 실력과 재능 때문에 많은 이들의 시기와 질투를 사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번일은 길리안 생도를 노리고 했다고 단정 지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들고 있던 서류를 이베트에게 내밀었다.
“우선 그걸 보시고 난 후에 말씀해드리겠습니다. 단 지금부터 말씀드리는 것에 대한 비밀은 지켜주셔야 합니다.”
서류를 집어 들고 훑어본 이베트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걸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카미르 폰 그라프라는 생도가 프란트 왕자인가 보군요. 그게 이일과 무슨 상관인가요?”
이베트의 말에 엔젤이 놀란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건넨 서류 어디에도 그가 왕국의 넷째 왕자인 프란트라는 말은 없었을 텐데, 그녀가 단번에 안다는 듯이 말을 꺼낸 것이었으니까.
“음...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나요? 아카데미입학을 위해 바꾼 이름과 성은 몰랐지만, 프란트 왕자가 슈발리에에 입학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어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 아닌가요?”
그게 무슨 대단한 비밀이냐는 식으로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그녀를 보며 엔젤이 쓰게 웃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왕실의 인물과 극소수만 아는 일.
하긴 이베트 자작부인과 왕실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알고 있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지금 에스토 왕국에는 5명의 왕자와 2명의 공주가 있었다.
현 왕비는 아들을 낳지 못했고 2명의 공주만이 그녀의 친자식이었다. 그 이전에 죽은 첫 번째 왕비의 자식인 1,2왕자. 그리고 그 밑의 다른 왕자들도 각각 그 어머니가 달랐다.
에스토 왕국은 법으로 일부일처를 정해놓고 있었다.
사별하거나 이혼하는 경우가 아니고선 법적으로 등록할 수 있는 아내는 한명.
이는 왕실을 비롯한 유명 귀족 가에 너도나도 혼인으로 줄을 대는 것과, 혼인으로 세력을 불리려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로 제정된 법이지만 사실상 유명무실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법적으로 등록된 아내는 한명이지만 등록만 돼있지 않을 뿐 실제론 다처인 경우도 많았다.
그건 왕가 또한 마찬가지.
왕의 아이를 낳은 여자들은 단승 남작이나 자작의 작위를 주고 남작부인 또는 자작부인으로 불렸다. 물론 이베트 자작부인과는 다른 개념이지만 호칭은 그랬다.
아무튼 현 왕도 왕비 말고 부인이 3명이 더 있다는 말.
그 외에도 알게 모르게 건드린 여자들은 많겠지만 아이를 낳은 이들이 3명이라는 말과 같았다.
많은 이들이 영원한 사랑을 입에 담지만 솔직히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고 봐야 했다. 특히 사랑이라는 것의 유효기간은 너무나도 짧은 것.
돈과 권력을 손에 쥔 능력 있는 남자들이 한 여자에게만 만족한다는 건 어쩌면 밤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려운 일일지도 몰랐다.
물론 개인의 차이가 있겠지만, 세상에서 제일가는 미인을 아내로 맞이해도 시간이 지나면 다른 곳에 눈을 돌리는 것이 남자들의 특성. 이미 손에 넣은 아름다운 꽃은 언제든 취할 수 있는 것이니까.
그리고 정식 혼인이 아니더라도 아이가 생기게 되면 그 아이는 그 가문의 자손으로 등록할 수 있었다.
그 예로 지금 왕자들은 어머니가 다르지만 왕과 왕비의 자식으로 돼있었다.
왕자를 낳고도 왕실기록에 이름한줄 나오지 않고, 내가 낳은 아이를 다른 여자의 아이로 등록시켜야 하는 어머니의 슬픔 같은 것은 전혀 배려하지 않은 처사였지만 세상이 그랬다.
물론 그걸 받아들여야 하는 본부인의 입장에서도 내키지 않는 일임은 분명하지만, 남자들보단 여자들이 감내해야 할 것이 많은 세상.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이혼이라는 것을 택하지 않는 이유는 그것을 가문과 가문의 단절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혼 후 이혼했다가 서로 원수가 된 가문들도 있었다.
여자 쪽에서 이혼을 요구하지 않아도 남자가 요구할 수도 있지만, 아내가 참고 넘겨준다면 본부인을 바꾸면서까지 새로운 부인을 맞는 경우는 많지 않았다.
본부인을 내치면 세간의 좋은 평을 듣긴 힘들었고 명성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의 부인과 갈라서고 새로운 부인을 맞았을 때 얻는 것이 더 많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다른 이에게 눈을 돌리는 것이 남자들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남편의 관심에서 멀어진 부인들이 그러려니 하고 조용히 살아갈 수만은 없는 일. 그녀들도 사람이고 감정이 있고 사랑을 느끼고 욕망이라는 것이 있기에 다른 남자를 침실로 끌어들이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세상이 참 재미있는 게 남자가 그러면 그럴 수도 있는 일로 여기는 경우가 많았지만, 여자는 절대 그러면 안 된다는 인식도 있었다.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다 걸리면 그걸 핑계로 이혼을 요구했을 때 여자입장에선 할 말이 없기에 들키지 않게 은밀하게 그랬다.
그리고 남편들도 가문과 개인의 명예에 악영향을 줄만큼 소문이 나거나, 큰 스캔들이 아니라면 알아도 모른척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대부분 아내의 배경이 무시할 수 없을 경우다.
어쩌면 처음부터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라 그럴 수도 있었다. 귀족들 중에는 무늬만 부부이지 처음부터 서로의 사생활에 간섭을 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으니까.
“왕자와 이번일이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가요?”
이베트의 물음에 엔젤은 생각을 접고 쓰게 웃으며 말했다.
“길리안 생도가 탄 말은 원래 그에게 배정됐던 말이 아닙니다.”
“왕자가 탈 말이었다는 거군요?”
“네. 당일 왕자께서 탈 말이 도착해 그에게 배정됐던 좋은 말들을 모두 길리안 생도에게 돌렸습니다. 나름의 배려였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원래 노린 것은 프란트 왕자고, 길리안은 운이 나빠 사고를 당했다는 거군요.”
이베트의 말에 엔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은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물론 고의성이 있었을 때의 얘기입니다. 민감한 사안이라 드러내놓고 일을 진행하기는 힘들지만, 누군가 일부러 그런 것이라면 반드시 밝혀낼 생각입니다. 이미 국왕께서도 보고를 받으셨을 겁니다.”
“그래서요?”
이베트의 물음에 엔젤이 당황한 듯 되물었다.
“그래서라니... 요?”
이정도 말했으면 못 알아들을 인물이 아니다.
불행한 사고였고, 고의성이 있다고 해도 누군가 길리안을 노린 것이 아니라는 걸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말해놓고 저렇게 물으니 할 말이 없었다.
“내 입장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군요. 슈발리에에 누가 다니고 누가 어떤 사고를 당하고 또 무슨 일이 벌어지든 난 관심이 없어요. 불행한 일이 생겼단 소식을 들으면 안타까움에 도움은 줄 수는 있지만 그 외엔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잠시 말을 멈춘 이베트가 엔젤을 똑바로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길리안에 관해서는 달라요. 누군가로 인해 피해를 입거나 혹은 누군가 그 아이를 노린다면 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어떤 식으로든 내 아이가.”
갑자기 이베트의 말이 끊겼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돌고 이베트 스스로도 말이 잘못 나온 것을 느꼈는지 피식 웃었다.
오늘은 평상시에 볼 수 없었던 모습을 많이 보이는 그녀였다. 약간 격앙된 목소리와 말투.
그보다 엔젤의 눈에는 그녀의 웃음이 왠지 처연해보였다.
흥분을 가라앉히려는 듯 이베트가 앞에 놓여있던 찻잔을 들었다. 미미하게 떨리는 손.
차를 몇 모금 마시고 다시 내려놓을 때는 손이 눈에 보일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잔을 내려놓고 두 손을 꽉 잡은 이베트가 눈을 감았다.
엔젤은 말없이 그런 그녀를 쳐다볼 뿐.
한동안 그러고 있던 이베트가 낮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떴다.
“조금 흥분했군요. 다시 말하지만 길리안에게 어떤 식으로든 피해가 갈 거라 판단되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란 걸 분명히 말해두겠어요.”
차분하고 단호한 그녀의 말에 엔젤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슈발리에 아카데미의 총장대리로서 자작부인의 입장과 뜻은 분명히 알았습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더 철저히 관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일에 고의성이 없길 바라지만, 만약 길리안 생도를 노린 것으로 밝혀지면 부인께 제일 먼저 알려드리겠습니다.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신상에 문제가 없게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그러니 그만 노여움을 푸시지요.”
그 말에 잠시 그녀를 쳐다보던 이베트가 말했다.
“그 약속을 믿어보겠어요.”
그녀의 말에 엔젤이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엔젤.
“총장대리가 아닌 엔젤리나로 부인께 한 가지만 여쭤보겠어요.”
엔젤의 말투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부드러워졌다.
그 말에 이베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질문이 실례가 되는 줄은 알지만... 혹시 길리안에게서 라미레스를 보고 계신건가요?”
그 물음에 이베트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천천히 찻잔을 들고 차를 몇 모금 마신 후에야 입을 열었다.
“아직 라미레스를 기억하는군요.”
“네. 부인을 닮아 아주 예쁜 아이였으니까요. 물론 남자아이에게 그런 말은 어울리지 않겠지만 솔직히 그렇게 느꼈었답니다.”
“다들 그렇게 말했었죠. 내가 봐도 여자 옷이 더 어울릴 정도로 예쁜 아이였고...”
그 모습을 떠올렸는지 이베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제가 보기엔 전혀 닮은 면이...”
엔젤이 말끝을 흐리며 이베트의 눈치를 봤다.
“맞아요. 전혀 닮지 않았어요. 나도 처음에는 그 아이에게서 라미레스의 모습을 봤었다고 생각했었지만... 그게 아니더군요. 분명한건 길리안을 라미레스라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다는 거예요.”
“그럼...”
“별로 하고 싶은 얘기는 아니군요. 하지만 더 이야기 해줘도 날 이해하기는 힘들 거예요. 나와 같은 일을 당하면....”
말끝을 흐리던 이베트가 씁쓸한 표정을 짓다 말을 이었다.
“이런. 내가 저주를 입에 담을 뻔 했군요. 아무튼 난 이해를 바라지도 않아요. 그러니 그냥 그 아이를 각별하게 생각하는 후견인이라 생각해줘요.”
“네...”
그녀의 말대로 어떻게 설명을 해도 이해하기 힘들지 몰랐다.
그녀가 못 다한 말이 뭔지는 짐작이 갔다.
그녀와 같은 일을 당했다면 이해가 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절대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 그녀의 말대로 그건 저주일 테니까.
“그만 길리안에게 가봐야겠어요. 아 바쁠 텐데 나올 필요는 없어요.”
그렇게 말한 이베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엔젤의 눈에 비치는 그녀의 뒷모습은 너무 쓸쓸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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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독자님 : 이게 뭐야?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는데! 말 다리 안 잡아?
-글쟁이 : 크흠. 굳이 변명을 하자면 이게... 사고가 막 나려는 순간 드라마 끝내놓고 다음화보면 병원이 똭! 뭐 그런 것입죠.
-독자님 : 카미르 머시기는 머야? 갑자기 왕자는 뭐고!
-글쟁이 : 카미르라는 애는 전에 입학시험 첫날에 언급한 아이입죠. 아무튼 길리안이 의도하진 않았지만 주변에서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고 뭐 그렇다는... 자세한건 뒤로 갈수록 나온다는... 그보다 오늘의 뽀인트는 일부일처!
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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