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넘버즈. 19장(4)

“명분은 충분하지 않소? 지금까지 속을 썩이던 도적무리의 배후가 공국으로 밝혀진 지금 무엇을 더 생각해야 한단 말이오?”

“우리가 지금까지 명분이 없어 공국을 그냥 둔 것이 아니지 않소? 아무리 확실한 명분이 있다고 한들 기안이 가만히 두고 보기만 할 것 같소?”

“결국엔 기안이 두렵다는 말이 아니오? 이러니 공국 따위가 기안을 믿고 왕국을 우롱하는 것 아니겠소?”

“이 일이 꼭 공국의 소행이라 볼 수는 없는 것이 아니요? 좀 더 확실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오.”

“이렇게 확실한 증거가 있는데 또 뭘 조사한다는 말이오?”

“혐의를 받고 잡혀있는 자들의 신분이 너무 확실하니 의심스럽다는 것이 아니요. 바보도 아니고 잡히면 빤히 어떻게 될지 알면서 그런다는 것이 이해가 가는 일이오?”

“지금 같은 상황을 노렸을 수도 있지 않소? 너무 확실해서 의심스럽다고 말하는 지금 같은 상황 말이오.”

“지금 밝혀진 것만으로 공국을 배후로 지목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오. 이건 누가 봐도 진정한 배후를 감추기 위해 조작한 티가 나질 않소?”

“그러니 조작이라면 증거를 내놓으란 말이오. 그런 것도 없이 공국을 두둔하는 것이 의심스럽구려.”

“공국을 두둔하는 것이 아니라 배후를 제대로 밝히자는 것이 아니요. 혹시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는 것이오?”

“허허 이런 언쟁이나 하자고 모인 자리가 아니지 않소. 진정들 하고···.”

“확실한 배후가 밝혀졌는데도 무마하려고 하니 이러는 것이 아니요. 이는 누가 봐도 공국의 뒤에 있는 기안이 두려워서 피하는 모습이지 않소?”

“맞소. 언제부터 대 에스토 왕국의 귀족들이 기안이 두려워 싸우는 것을 망설이게 되었소?”

“누가 기안이 두렵다고 그랬소? 논제를 흐리지 마시오.”

대립각을 세우며 주장을 펼치는 귀족들을 보며 국왕인 타노스 6세는 고개를 저었다.

서로 자신들의 주장만 펴고 전혀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모습. 여기서 좀 더 진행된다면 논의해야 할 것은 잊어버린 채 과거의 일까지 들먹여 가며 논쟁을 해댈 것이었다.

귀족의회는 선대인 타노스 3세가 추진했던 개혁의 산물이었다. 아니 개혁을 추진하며 귀족들의 반발을 누르고 왕권이 강해지는 것을 걱정하는 그들을 달래기 위해 권력의 일부를 내어준 것과 같았다.

타노스 3세 이전 시대에는 영주가 왕의 간섭을 받지 않던 불입권이 상당히 강했고, 에스토 왕국이라는 하나의 울타리 안에 속해 있지만 각 영지는 거의 독립된 형태라고 봐도 좋았다.

직영지에서 멀리 떨어진 영지들은 왕의 입김보다 인접한 대 귀족의 영향력이 더 크게 작용했던 시대였다. 물론 지금도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과거보단 많이 나아진 상태.

그건 귀족의회의 영향이 크긴 했다.

과거에는 타국의 침략이 있지 않은 한 자신들의 영지에 틀어박혀 별 신경을 쓰지 않던 영주들이 왕국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직접 수도에 머물거나 대리인을 내세웠다.

처음에는 영주들과 그 대리인들이 의회의 자리를 채웠지만, 시간이 지나며 자신들의 힘을 더 강화하기 위해 의회의 자리를 늘렸고 영지가 없는 귀족들의 참여도 늘어갔다.

결국에 모든 결정권은 왕에게 있지만, 왕인 자신이 하고 싶다고 해도 의회가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서면 그럴 수도 없는 일.

마음 같아서는 말 많은 귀족들을 싹 밀어버리고 강력한 왕권을 거머쥐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그건 불가능했다.

의회에 왕인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은 당연히 만들어 놓았지만, 그 또한 자신들의 영지와 세속적인 귀족의 권리가 보장되기에 자신을 따르는 것.

칼랜베르크처럼 영주들의 영지를 몰수하고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갖춘다면 좋겠지만 그걸 실행하려고 하면 자신의 편에 서 있던 영주들도 등을 돌릴 테고 내전이 벌어질 것이다.

그걸 시행하려 했다면 제일 좋았던 시기는 역시나 타노스 3세의 시대. 그때 해놓은 개혁의 덕을 몇 대가 지난 자신도 톡톡히 보고 있지만, 지금처럼 다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처음 의회를 만들었던 목적과는 달리 지금은 각 세력의 이권을 놓고 다투는 곳이 돼버린 지 오래. 옳고 그름을 떠나 자신들에게 손해가 날 것 같다면 입에 거품을 물고 반대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이 가져다줄 눈앞의 이익에 눈이 먼 자들과 그나마 생각이 있는 자들의 언쟁은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됐다. 그중엔 자기 생각과는 달리 지지하는 세력의 뜻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나서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한참 동안 귀족들의 언쟁을 듣고만 있던 타노스 6세가 입을 열었다.

“그만들 하시오.”

그의 낮지만, 위엄 있는 음성에 목소리를 높이던 귀족들이 말을 멈추고 헛기침을 했다.

장내가 조용해지자 타노스 6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설마 지금처럼 언쟁하는 모습을 보여주고자 날 이 자리로 불러낸 것이오? 이 일 말고도 처리해야 할 안건이 많은 것으로 아는데 다른 것부터 진행합시다.”

“하지만···.”

“그럼 나까지 그 논쟁에 끼어들라는 것이오?”

“그건 아닙니다.”

“이미 벌어진 일이고 사전에 이를 막지 못한 것은 나의 무능함이라고도 할 수 있소.”

“그게 어찌 폐하 혼자만의 책임이라 하겠습니까?”

“내가 책임져야 할 일은 내가 질 것이오. 하지만 그대들이 져야 할 책임도 있을 것이고 또 해야 할 일도 있을 것이오. 이 한 가지 일에 매달려 다른 일을 등한시하지 말라는 것이오. 내 이번 일에 대해 분명히 말해두겠소. 이번 사건의 배후가 페슈미안 공국이 아니라 그 어디라 해도 상관없소. 상대가 기안이 아닌 제국이라고 해도 전쟁을 해야 한다면 할 것이오. 하지만.”

잠시 말을 멈춘 타노스 6세가 의원들을 둘러봤다.

“전쟁은 최선책이 아닌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하고 있소. 그리고 난 이 일의 배후보다 내부의 조력자가 더 궁금하오. 외성 밖도 아니고 수도 한복판에서 일이 벌어졌소. 고작 몇몇 하급귀족의 도움으로 그런 일이 가능하리라 생각하시오?”

“그건 결국 우리를 의심하신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그리고 확실한 증거를 제시한 것은 폐하의 기사인 넘버즈들입니다. 그걸 부정하신다는 것은 결국 그들을 못 믿는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확대해석하지 마시오. 난 그대들도 믿고 나의 기사들도 믿고 있소. 이건 내 믿음의 문제가 아니란 말이오. 그리고 결과가 나온 후에 재조사를 하겠다고 한 것 역시 넘버즈들이오.”

“그럼 재조사가 끝날 때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대들이 이미 다 말하지 않았소? 페슈미안 공국과의 전쟁은 언제든 가능하오. 그 뒤에 기안이 있건 없건 그런 건 두렵지 않소. 언제든 가능한 일을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지 않소? 그리고 전쟁은 왕국의 힘을 한데 모아야 하는 일. 그런데 지금 상태에서 전쟁을 벌이기엔 뒤가 너무 가렵지 않소?”

“결국엔 내부 조력자가 있다고 보고 우리를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서 우리를 믿는다고 하시니···. 허허. 이것 참.”

말을 꺼낸 의원을 보고 타노스 6세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기안의 수도는 우리와 비슷하다 들었다. 큰 강도 있고 산맥도 있다더군. 내 그대에게 오우거 한 마리를 산 채로 잡아다 주겠소. 그걸 가지고 가 기안의 수도 근처에 있는 산맥에 풀어놓고 성에 큰불을 질러보시오. 내 돈과 인력은 원하는 대로 대줄 터이니 그들 내부의 조력을 받지 않고 한번 성사시켜 보시오. 그렇다면 나도 더는 조사 따윈 하지 않을 테니 말이오.”

“그건···.”

“왜 힘드시겠소?”

“음···.”

“전쟁보다는 우선 똑같이 갚아주는 것이 먼저가 아니겠소. 혹시 이 중에 가능한 이가 있소? 단 왕국이 했다는 증거는 없어야 하오. 되도록 기안과 인접한 다른 왕국이 했다는 증거를 남겨주면 좋겠지. 어떻소? 그러면 전쟁을 벌이기에도 상당히 편할 것 같은데···.”

말끝을 흐리던 타노스 6세가 인상을 찌푸리는 의원들을 보고 다시 말했다.

“기안이 아닌 그대들이 가볍게 보는 공국의 수도에 이와 같은 일을 벌이려 해도 내부의 도움 없이는 힘들지 않겠소? 난 왕국의 모두를 믿고 있소. 아니 믿고 싶소. 지금의 상황은 나의 믿음을 져버린 것이 아니고 무엇이오? 그건 곧 충성의 서약을 져버렸다는 말. 그걸 찾아내겠다는 것이 잘못된 것이오?”

아무 말도 없는 의원들을 보고 타노스 6세가 표정을 굳히고 말했다.

“분명히 말하지만, 전쟁은 차후의 문제요. 혹시라도 공국이나 기안과 국경을 접한 영지에서 먼저 군사적인 행동을 벌인다면 왕국과 나를 무시한 것으로 알고 가만두지 않을 것이오. 아니 어쩌면 그런 행동을 하는 이가 내부의 배신자일 수도 있겠지. 그러니 그런 의심을 받고 싶지 않다면 이점 명심하길 바라오.”

의회의 귀족들을 살펴보던 로렌스는 눈을 감았다.

국왕의 오른쪽엔 드겔이 왼쪽엔 자신이 있었다. 원래 자신이 서 있는 자리는 근위대장인 크락시스의 자리.

크락시스는 루퍼드와 함께 왕궁 내부의 밀정을 찾아낼 방법을 모색하고 있을 것이다. 그중엔 국왕의 곁을 지키는 근위기사들도 포함돼 있을 가능성이 컸으니까.

물론 그런 일에는 자신이 나서는 것이 더 나았지만, 생각을 읽는 능력을 써서 알아낸다고 해도 무작정 끌어내릴 수는 없는 노릇.

루퍼드가 자신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일부러 그런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특별한 능력이지만 상대가 자신의 존재를 알고 그마저 계산에 넣고 일을 진행한 것이라면 역이용당할 수도 있는 것.

아니 적은 이미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일전에 페슈미안 공국 소속의 용병들을 잡아들이면서 그런 느낌을 계속해서 지울 수가 없었으니까. 자신이 아니었다면 그들이 일을 벌이고 난 후에 뒤를 쫓게 됐을 것이다.

시작부터 너무 불리한 싸움이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고, 자신들은 노출돼 있는데 상대는 어둠 속에 꼭꼭 숨어 그림자 조차 밟히지 않고 있었으니까.

배울 만큼 배웠다는 귀족들도 똑똑하다는 마법사들도 용맹하고 지략이 뛰어나다고 자부하던 기사들도 적의 손바닥에서 놀아나고 있는 상황.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체제가 이런 일에 얼마나 비효율적이고 무능한지 깨닫게 해주었으니까. 루퍼드가 나서서 체계를 잡으면서 많은 것들이 변하게 될 것 같았다.

그보다 적에게 이용당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지금 같은 상황에 안 쓸 수도 없는 노릇.

하지만 그걸 알아내는 것 또한 쉽지만은 않았다.

사람의 생각은 시시각각 변하고 그 짧은 순간에 사건에 관련된 것을 잡아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 거기에 상대의 생각에 상상이란 것이 포함되어 있으면 더욱 머리 아픈 일.

그리고 지금은 대상이 너무 많았다.

다수의 생각을 순식간에 읽어내고 그 내용을 모두 따로 기억하고 분류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 정도 능력은 없었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다고 해서 머리까지 좋아지는 것은 아니고, 지금까지 그런 훈련을 해왔다면 모르지만 그러지 않았으니까.

이 많은 사람의 생각을 한꺼번에 읽어내다간 머리가 터져버릴지도 몰랐다. 그래서 중간에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자신의 능력이지만 스스로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그래서 조금 걱정스럽기도 했다.

항상 눈은 충혈 돼 있었고 눈동자가 붉어진 것 같다는 소릴 많이 들었다. 아직까진 괜찮았지만 이렇게 계속해서 사람들의 눈을 보고 생각을 읽어내고 무리해서 힘을 사용하다 보면 폭주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평상시에도 눈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오는 악몽은 어릴 때부터 꾸던 것이지만, 계속 이러다간 그 악몽이 현실이 될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멈출 수는 없지.’

로렌스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지금 당장 많은 것을 알아내려고 하는 것은 무리였다. 의심이 가는 자는 나중에 따로 만나 봐도 되는 일.

그렇게 의원들을 살피던 로렌스는 국왕이 그들에게 하는 얘기를 듣고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의원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배후에 숨어 있는 적에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원하는 것이 전쟁이라면 국왕인 자신이 이해할 수 있을 만한 관련자를 내놓으라는 말로 들렸으니까. 더욱 확실한 증거를 내놓으라고 도발하는 것 같았다.

이 자리에 배후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관련된 자는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그렇게 생각하는 건 국왕 또한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로렌스는 찬찬히 의원들을 살폈다.

‘많이 바라지 않는다. 작은 실마리만, 꼬리만 잡을 수 있으면 된다. 꼬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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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말

추석 연휴는 잘 보내셨는지요.

원래는 비축 분을 좀 만들 생각이었습니다만, 휴식을 좀 취하고 지금까지 쓴 것을 다시 읽어보고 플롯을 다시 짜고 그랬습니다. 생활에 치이고 연재까지 하려다 보니 좀 지쳐있었나 봅니다.

연재를 멈추면서까지 좀 쉬고 나니 머리가 맑아진 기분이랄까요.

미리보기 편수가 10편정도가 될 때까진 무료분이 풀리는 주기를 월, 수, 금 3일로 줄일 생각입니다.

미리보기가 10편이 되면 다시 주5일로 늘리겠습니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대원(大遠)]

죄송합니다. 일이 좀 있어서 ㅠㅜ

[정체무실]

잘보고가요 ㅎㅎ 리플 안다셔도 괜찮아요 ㅋ 귀찮게 시리.
역시 이 소설은 국왕도 뭔가 좀 틀리네요 ㅎ

[대원(大遠)]

안 귀찮아요. 최근화만 인데요 뭘 ㅎ 바보 국왕은 아닙니다 ㅎ

[천지]

즐감!

[대원(大遠)]

감사합니다.^^

[나우(羅雨)]

재미나게 잘 보고 갑니다!

[대원(大遠)]

감사합니다.^^

[finish]

잘보고 갑니다~
앞으로 어떻게 풀어나가실지 기대되네요.

[대원(大遠)]

으흐흐;; 감사합니다.^^

[sfartar]

건필하세요

[대원(大遠)]

옙! 감사합니다.^^

[현모기]

잘봤습니다!

[대원(大遠)]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