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13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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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는 생포. 한 명도 죽여선 안 된다는 걸 모두 명심하도록.”
로렌스의 말에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쓱 둘러보고 시선을 돌렸다.
어지간하면 상대의 눈을 쳐다보지 않는 게 이젠 습관처럼 돼버렸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다는 것.
흔히들 사랑하는 사람의 생각이 알고 싶다고 말할 때가 있고, 적의 생각을 알고 싶다고 할 때도 있다.
그렇게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다는 건 당연히 모르기 때문.
그걸 알 수 있다는 건 무척이나 좋을 것 같지만, 전혀.
자신에겐 없앨 수만 있다면 없애고 싶은 능력이었다.
만약 너도나도 상대방의 생각을 알 수 있다면 어떨까?
아마 서로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남녀 간의 사랑이 가능하기나 할지 궁금했다.
때론 모르는 것이 약일 때가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이사회가 유지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릴 때는 자신의 능력이 뭔지도 몰랐었다.
상대방이 말도 하지 않는데 들리는 목소리. 귀를 통해 들리는 것이 아니라 머릿속에 울리는 그런 소리였다.
눈을 마주치면 그 말들이 들렸다.
입도 벌리지 않고 눈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무서웠다. 입으로 하는 말과 다른 말을 눈으로 하는 사람들.
처음엔 그게 너무 두려워서 사람을 피했다.
그러다 어머니에게 고백했다.
사람들이 말하지 않는데도 그들의 목소리가 들린다고.
아버지의 귀에 그 말이 들어갔고 여러 가지를 물어보셨다.
시험하는 거란 걸 알 수 있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말에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날 이후 아버지도 어머니도 자신과 눈을 마주치는 걸 꺼렸다.
괜히 말했다고 후회했다.
며칠 후 밖에서 놀다가 창을 통해 아버지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의자에 앉아 뭔가 고민하는 것 같은 모습.
거리가 있었지만, 아버지의 눈을 통해 생각을 읽을 수가 있었다.
고민하고 있었다.
아들인 자신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죽여야 하는지, 아니면 능력을 감추게 하고 그대로 키워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
그건 너무 큰 충격이었다.
무서웠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걸 알고 있다는 걸 아버지가 알면 정말 죽일 거란 생각이 들었으니까.
가끔은 아버지가 누군가를 만날 때 옆에 두곤 했었다.
그리고 나중에 그들의 생각이 어땠는지를 물었었다. 대답은 짧고 간단하게 아주 단편적인 것들만 말했다. 가끔은 모른다고도 했다.
그럴 때면 눈을 지그시 쳐다보며 생각으로 물어보셨지만 모른 척했다.
그리고 정말 모두에게 통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끔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사람들을 피하게 되고 그들의 생각을 읽더라도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자신의 능력을 감춰야만 했다.
그 능력을 키우기보단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
사람보단 동물들을 좋아하게 됐고,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이 오히려 반가웠다. 물론 읽으려 노력하고 힘을 키우면 그들의 생각도 읽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그러기 싫었으니까.
기사의 교육을 받고 나서부터는 혼자 수련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수련한다고 하면 찾지도 않고 찾아오지도 않아서 편하고 좋았다.
물론 처음부터 기사의 길을 걷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가르치던 이들이 재능이 있다고 칭찬했고 그게 진짜라는 것을 알았기에 더 신이 나서 노력했었다. 아버지도 인정하고 기대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더 노력했다.
타고난 능력보단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좋았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인정받는다는 게 좋았다.
위험한 힘이고 밝혀지면 가문에 화가 될 힘이기에 자식을 죽일까도 고민하던 분. 그런 아버지께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고, 가문의 화가 되는 존재가 아닌 명성을 높이고 빛나게 해줄 존재로 인식되고 싶었다.
그리고 그나마 이 저주받은 능력을 좋은 일에 쓴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왕실과 왕국을 지키는 데 쓰면 좋은 일이라 생각해서 선택한 길이기도 했다.
그렇게 넘버즈가 되었지만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어머니는 아직도 자신을 멀리하고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
오히려 넘버즈란 자리에 오른 자신의 힘과 그 저주받은 능력을 이용하고 싶어 하는 아버지에게 실망만 했을 뿐이다.
하지만 30년 가까이 살며 세상을 어느 정도 알고 나니 이제는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이 능력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 할 삶의 무게일 뿐.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아직도 없애고 싶은 능력이었다.
쓰고 싶지 않다고 안 쓸 수 있는 게 아니고 눈이 마주치면 그냥 생각이 읽힌다. 다만 자세히 그 사람의 기억까지 훑어보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
그냥 눈을 마주치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어차피 밝혀져도 믿는 사람보다 못 믿는 사람이 더 많을 능력. 그리고 스스로 내색하지 않고 눈에서 붉은빛이 쏟아져 나올 정도로 집중하지만 않으면 들킬 일은 거의 없었으니까.
물론 그렇게까지 해서 능력을 써야 할 때가 있기는 했다.
그 때문에 루퍼드에게 들키기도 했지만.
처음에는 그를 죽이려고도 했었지만, 모든 걸 털어놓은 후론 그리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냥 둘러댈 수도 있었지만, 그땐 왜 그랬는지 자신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상대는 어떻게 나올까 궁금해서 그런 것 같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입으로 털어놓은 것은 어릴 때를 빼곤 처음이었으니까.
루퍼드에 의해 밝혀진다면 조사를 받게 될 걸 알고 있었다. 그때 눈에서 붉은빛을 한번 내뿜어주면 신관들이 아주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들의 입에서 악마라는 말이 나올 테니까. 아마 그렇게 되면 곱게 죽지는 못할 것이다.
어쩌면 가둬두고 이런저런 실험을 할지도 몰랐다. 고서에도 자세히 나와 있지 않고, 자신도 왜 이런 저주받은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는지가 궁금한데 그것에 대해 자세히 알 기회가 될지도 몰랐다.
물론 결과적으론 죽을 테고 멋진 죽음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것도 그리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었다.
가문에도 당연히 피해가 갈 것이다.
그때는 아버지가 무슨 생각을 할지 무척 궁금했다.
뭐 그 답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마 어릴 때 죽이지 않은 것을 후회할 것이 분명했다.
어차피 그날 아버지의 생각을 읽지 못했다면, 그래서 스스로 조심하지 않았다면 이미 죽었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구역질이 나는 사람들의 생각을 읽으며 산다는 것이 지겹기도 했다.
겉과 속이 다르고 생각과 말이 다른 이들.
물론 그들을 욕할 수만은 없었다. 자신도 그러니까.
모두가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어도 자신의 세상은 시끄러웠다. 그렇다고 눈을 감고 살 수도 없고 파낼 수도 없는 일.
솔직히 지치기도 했다.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가 혼자 조용히 살아볼까도 고민하던 차였다. 그러지 않은 것은 홀로 평생 검이나 휘두르며 외롭게 살아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있어도 외로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하지만 녀석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고맙다고 말한 적은 없었다. 그걸 떠나서 꽤 괜찮은 놈이었다. 아니 이상한 놈이라고 해야 할까?
다른 이들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그렇다 쳐도, 보통은 멀리하는 것이 정상일 텐데 그러지 않았다.
그리고 녀석도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사람 중 하나.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사람 옆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자신도 좀 이상하긴 하지만, 그런 이를 멀리하지 않는 녀석도 보통사람과는 달랐다.
“놈들이 보입니다.”
부단장의 말에 로렌스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30명쯤 되는 적들을 상대로 자신과 100명의 기사단은 솔직히 과했다. 그냥 달려들어 잡아도 되겠지만 그래도 생포를 위해선 최대한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생각한 게 매복.
뭐 굳이 기습할 생각은 아니지만, 그래도 좁은 공간에 가둬 놓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산길을 택해 기다리고 있었다.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등에 메고 있던 검 하나를 뽑았다.
두 자루의 검 중 왼손에 드는 것은 보통 쓰는 한 손 검이었다. 오른손에 드는 검은 일반적인 한 손 검보다는 조금 긴 바스타드 소드로 손잡이가 길어 한 손뿐 아니라 양손으로 잡고 쓸 수도 있는 검이었다.
검을 양손으로 잡고 눈앞의 아름드리나무를 쳐다보며 심호흡을 하고 높이 쳐들었던 검을 사선으로 베었다.
검의 궤적에 나무가 있었는데도 아무런 소리도 또 방해도 받지 않은 것 같은 모습.
슬쩍 밀자 나무가 밑동과 분리돼 미끄러졌다.
다른 나무의 가지를 부러뜨리며 쓰러진 나무가 쿵 소리와 함께 길을 막았다.
길을 가던 이들이 놀라 멈추는 걸 보고 모습을 드러냈다.
로렌스의 모습을 보고 말에 타고 있던 이들이 무기를 뽑아들었다.
“산 도적이냐?”
누군가의 말에 로렌스가 피식 웃었다.
아닌 걸 알면서도 꼭 저렇게 물어보는 게 웃겼다.
어차피 투구에 가려져 상대에게는 보이지 않을 웃음.
“왕실 기사단 소속 로렌스 폰 지그먼트다. 조사할 것이 있으니 무기를 버리고 협조···”
말을 마치기도 전에 말을 몰아 공격해오는 이를 보며 차갑게 웃었다.
“할 생각은 없나 보군.”
말을 하며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을 상대에게 던졌다.
“커억.”
달려들던 이의 오른쪽 어깨에 검이 꽂히고 그가 말에서 떨어졌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그에게 다가가 검을 뽑아들었다.
“크윽!”
피가 흘러나오고 고통스러운지 다른 손으로 어깨를 감싸고 꿈틀거리는 이를 발로 찼다. 그의 몸이 붕 떠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러게 말로 할 때 들으면 서로에게 좋지 않나?”
그렇게 말하며 귀찮다는 듯이 검을 휘둘렀다. 화살과 볼트가 튕겨 나갔다.
그걸 보고 몇 명은 달려들고 몇몇은 말을 뒤로 돌렸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곧 멈췄다.
때마침 모습을 드러낸 기사들.
사방이 포위됐고 수는 몇 배나 많았다.
흔들리는 그들의 눈을 보며 로렌스가 손가락을 두 개 펴고 걸음을 옮겼다.
“두 가지 선택의 길이 있다. 하나는 무기를 버리고 순순히 항복하는 것. 다른 하나는 반항하는 것. 둘 중 아무거나 골라도 상관은 없다. 어차피 결과는 같으니까.”
그리고 걸음을 멈춰 말에 탄 이를 올려다봤다.
“좋은 생각은 아니군.”
말을 한 로렌스가 갑자기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크윽.”
날아온 화살에 맞은 그가 힘없이 말에서 떨어졌다.
로렌스가 활을 쏜 자를 향해 몸을 날리는 것을 시작으로 기사들도 움직였다.
적 하나에 한 명씩. 나머지는 그저 포위만 하고 지켜볼 뿐.
활을 쏜 자를 제압한 로렌스가 주변을 둘러보고 피식 웃으며 마차에 올랐다.
옆에 문이 달린 마차가 아닌 앞뒤가 뚫려있고 천으로 가려진 그런 마차였다. 마차 안에 사람이 있음을 느끼고 천을 걷어 젖혔을 때 안에서 쏘아진 뭔가를 검으로 막았다.
턱 하는 소리와 함께 튕겨 나가는 볼트.
상관하지 않고 천을 마저 걷었다.
“이런, 꽤 아름다운 아가씨가 숨어···”
말끝을 흐리는 로렌스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자신을 쳐다보는 여인의 눈을 통해 읽은 생각.
“아무래도 우린 할 얘기가 많을 것 같군.”
그렇게 말하며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가려진 천 사이로 붉은빛이 새어나왔다.
“야. 이러다 여기 성지 되는 거 아니냐?”
케빈이 무슨 말이냐는 듯 그렉을 쳐다봤다.
“생각해 봐라. 여기가 원래 이렇게 사람이 많은 데였냐?”
그 말에 케빈이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오~ 네놈 입에서 생각이라니. 그러고 보니 그렇긴 하네.”
본관 뒤편에는 기사 학부 입학시험을 위한 코스 대부분이 몰려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곳은 기사 생도들이나 남자들이 많이 오는 곳으로 주로 체력을 단련을 위해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지금 보니 사람이 무척 많이 지나다니고 있었다.
그 대부분은 여자들.
산책하기 그리 좋은 장소가 아님에도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건 다른 뭔가가 있다는 것.
그 다른 뭔가는 아직도 죽어라 검을 휘두르는 길리안이었다.
혼자만 수련할 수 있는 수련 실이 있기는 했다.
보통 기사들이나 생도들도 혼자서만 하는 수련이 있기 마련. 별것 아니면서도 남에게 보이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생도의 수에 맞게 갖출만한 시설은 아니었다. 온종일 혼자 수련만 하는 것도 아니고, 전날 미리 시간을 정해 신청하면 되는 것이고 매일 이용하는 이도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길리안은 그곳을 이용하지 않았다.
이유는 일단 수련시간이 길다는 것.
일과가 끝나면 거의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릴 때까지 한다. 거의 수련 실을 독차지해야 하기에 다른 이들에게 미안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굳이 숨길만 한 수련도 아닌 기본 수련이라는 것도 이유였다. 그렇게 본관 뒤편의 널찍한 곳은 길리안의 전용 수련장처럼 돼버렸다.
새벽에야 다들 잠을 자느라 길리안 혼자지만, 수업을 마친 후에는 자유시간.
외출하는 경우가 아니면 캠퍼스 내에서 놀 거리를 찾고 산책을 즐기는 이들도 많았다. 그들에게 물어보면 길리안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산책하다 잠시 지켜보는 거라고 하겠지만.
물론 길리안이 남들에게 보이려고 저러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를 보러 오는 이들이 많다 보니 일부러 저러는 거란 말도 나왔다.
길리안은 그런 말엔 티끌만큼도 신경을 안 썼지만.
아무튼, 성지까지는 아니어도 아카데미재학생들이 많이 찾는 장소로 변해가고 있기는 했다. 그게 언제까지일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뭐냐 저 안타까운 표정들은. 쟤들은 뭘 안다고 저러는 거냐? 잘하면 울겠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는 여자들을 보고 그렉이 한 말이었다.
지금의 길리안은 평소와 다른 상태.
딱 보기에도 지쳐 보이는데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자세한 건 몰라도 뭔가를 떨쳐버리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긴 했다.
그리고 수련이라기보다는 자기 학대에 가까워 보였다.
“글쎄. 모성애라고 해야 할까?”
“야 길리안이 어딜 봐서?”
“원래 관심이 생기면 그 사람에 대해 알아보기도 하고 자세히 관찰하고 지켜보기도 하지. 길리안이 지금 평소랑 다르다는 건, 알만 한 사람은 거의 다 아는 일이고··· 강한 줄만 알았던 남자의 약해 보이는 모습을 보면서 감싸주고 싶다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거고··· 뭐 확실하진 않다만.”
“오~ 그런 것이군.”
“따라 할 생각일랑 버려라. 같은 행동 다른 느낌이니까.”
“알아 안다 이놈아. 그나저나 저러다 정말 쓰러지지 싶은데?”
“그럴까 봐 여기 있는 거지.”
“오호 그런 것도 예상하셔?”
“당연하지. 그럼 내가 할 일이 없어서 여기서 책 읽고 있겠냐? 그런데 저 녀석이 쓰러지긴 할까?”
그게 의문이긴 했다.
케빈의 말에 그렉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수련할 때 쓰는 검 무게가 장난 아니던데. 어우 난 열 번도 못해 무거워서. 얼레? 저건 또 뭐냐? 갑옷까지 입고.”
그렉의 말에 책을 보며 대화하던 케빈이 고개를 들었다.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은 놈이 길리안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투구를 쓰지 않아 얼굴이 보여 누군지는 알 수 있었다.
“저놈은 무슨 라이스라고 했던 것 같은데. 그 입학 축하파티에서 악수하다가 망신당한 그놈.”
그 말에 케빈이 생각이 났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아아 맞다. 꼴에 상급생이라고 거들먹거리는데 귀족들한테는 학년에 상관없이 겁나게 살랑거리더라. 아우 재수 없어. 또 시비 걸려나?”
“글쎄. 오늘은 날이 안 좋은데.”
그렇게 말하곤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말리게?”
그렉의 말에 케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정하고 온 것 같은데 그래야지. 저 녀석 위해서가 아니라 길리안을 위해서.”
“어이 하급생.”
페릴은 불렀지만 돌아보지도 않는 길리안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어이 길리안.”
이름을 불러도 검을 휘두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인상을 팍 쓰고 다가가 어깨를 손을 짚었다.
“이 자식이···”
뭔가 말을 하려다 돌아본 길리안의 눈을 보고 멈칫했다.
“사람 말이 말같이 안 들리는 거냐? 부르면 대답을 해야 할 것 아냐?”
조금 전에 멈칫 한 게 부끄러워 일부러 언성을 높였다.
“못 들었습니다.”
짧게 대답하는 길리안을 보고 더욱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다 갑자기 웃음기 어린 얼굴을 하고 바짝 다가서 속삭이듯 말했다.
“왜 만날 사랑해주는 후견인한테 실연이라도 당했나? 아니면 다른 남자가 생겨서 질투라도 하는 건가? 원래 경험 많은 부인들은 그래. 이 남자 저 남자 자주 바꾸거든. 네가 이러는 것도 이해가 가. 나이는 좀 있어도 흔치 않은 미인이니까. 피부도 곱고 신음도 죽일 것 같고. 언제 어어···”
길리안은 그의 말을 더 듣지 않고 확 밀쳐버렸다.
뒤로 날아가다 바닥을 구른 페릴이 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하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가 조언을 해주면 감사하게 들을 줄 알아야지 밀쳐?”
그의 말에 대답 대신 검을 들고 다가갔다.
“오호 덤비겠다는 거냐? 그렇다면 상대해주마.”
그러면서 페릴도 검을 뽑아들었다.
다가온 길리안이 검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크윽.”
페릴은 손을 감싸 쥐고 날아가는 검을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양손으로 꼭 쥐고 있었고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는데, 길리안이 한 손으로 휘두른 검에 뭘 할 새도 없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부끄럽기도 하고 화도 나서 고개를 획 돌려 길리안을 쳐다보려다 수직으로 베어오는 커다란 검을 보고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안돼요!”
“안 돼!”
뾰족한 여자의 음성과 다급한 남자의 목소리에 길리안은 검을 멈췄다.
페릴의 머리에 닿을 듯 말 듯 멈춰진 검.
남자의 목소리는 케빈이라는 것을 알았고 고개를 돌려보니 소리를 지른 여자는 에리스였다.
달려온 그녀가 길리안의 손을 잡았다.
“죽이는 건 안돼요.”
“그래 죽이는 건 안 된다. 이자가 뭐라고 했는지는 몰라도 지금 상황은 네게 불리해.”
케빈의 말이었다.
길리안이 한숨을 내쉬고 바닥에 검을 꽂고 케빈을 보며 말했다.
“죽이지만 않으면 되지?”
“어? 어 뭐 그렇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페릴의 가슴을 발로 찼다.
“그런데 저자가 뭐라고 한 거냐?”
“자작부인을··· 나와 후견인을 모욕했다.”
고개를 저은 케빈이 페릴을 보고 차갑게 말했다.
“믿는 구석이 있나 봐? 건드릴 상대를 건드려야지. 길리안 죽이면 안 된다.”
그리고 놀라서 물러서 있는 에리스에게 케빈이 다가갔다.
“자 에리스 양 우리는 빠져줍시다.”
“하지만.”
“아아 원래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겁니다.”
그러다 길리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인상을 찌푸렸다.
“때리면서 크는 건가?”
“네?”
“아 아닙니다. 아우 아프겠다.”
그 말대로 페릴은 아프게 맞고 있었다.
반격은커녕 한 대 맞을 때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주먹이 아니라 해머로 맞는 느낌.
길리안의 입장에선 끌어 오르는 화를 참아가며 힘껏 때리지도 못해서 짜증이 났다.
갑옷을 입고 있어 주먹으로 때릴 곳이 얼굴밖에 없었고, 정말 힘껏 때리면 죽을 것 같아서 마음대로 때리지도 못하는 중.
몇 대 때리다 눈이 풀린 걸 보고 번쩍 들어서 집어던졌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그에게 다가갔다.
“길리안!”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크게 떴다.
진한 갈색 머리에 기사의 정복을 입고 있는 남자.
다만 흠이라면 한쪽 팔이 없는지 소매가 헐렁하다는 것.
“형?”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선작이 자꾸 줄어드네요. 가슴 아프게. ㅜ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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