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9장(3)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왕비의 옷차림은 의외로 수수해 보였다.
물론 고급 옷감으로 만든 드레스일 테지만 어두운 색과 장식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충분히 수수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왕비의 등장에 모여든 귀족들이 예를 표했다.
그런데 그 수가 상당했다. 언제 이렇게 귀족들이 많이 왔지? 하는 생각이 들만큼 말이다.
온화한 미소를 띠고 그들의 예에 답을 하며 걸음을 옮기는 왕비가 점점 가까워졌다.
“왕비님을 뵙습니다.”
이베트 자작부인이 치마를 잡고 무릎을 살짝 굽혀 예를 표했다. 그런 부인을 본 왕비가 지금까지와는 다른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이곳에 계셨군요. 항상 모범이 되는 모습은.....”
으로 시작된 말은 꽤 길게 이어졌고 왕실을 대표해서 감사한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칭찬을 받고자 함이 아닙니다. 부끄럽습니다.”
이베트 자작부인이 부끄럽다는 듯 말했고 그 뒤로도 몇 마디의 대화가 더 이어졌다.
긴 칭찬의 말도 그렇고 다른 귀족들을 대할 때와는 사뭇 달랐다.
“길리안 뭐하고 있니. 어서 왕비님께 인사드리렴.”
그녀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길리안이 주먹 쥔 오른손을 왼쪽 가슴에 대고 허리를 숙였다.
“길리안 후버입니다. 이렇게 왕비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원래는 어떻게 인사를 하고 어떤 말을 할까 짧은 시간동안 수많은 생각을 했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미사여구들을 조합해보다가 역시나 그런 말주변은 없는지라 포기하고 그냥 짧게 인사를 한 것이었다.
“이 청년은....”
왕비가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이베트를 쳐다보자 그녀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후견하고 있는 아이입니다. 이번에 슈발리에 입학시험에 수석으로 입학한, 장래가 촉망되는 기사 지망생입니다.”
길리안은 이베트의 말에 속으로 쓰게 웃었다.
정확히 말하면 아직은 이베트 자작부인이 후견인은 아니었다.
후견인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는 부모가 없거나 한 아이의 법적대리인의 성격을 띠거나, 부모가 있는 경우라도 혹시 부모가 잘못 됐을 때 대신 아이를 맡아줄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유능한 인재를 자신의 밑에 두기위한 후원자의 성격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었다.
대부분의 귀족 가의 자제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집안의 다른 어른이나, 친분이 두터운 귀족들이 후견인을 자처하는 경우가 많았다.
관청에 후견인으로 등록하면 부모의 이름말고도 후견인의 이름 또한 나온다. 귀족들 사이에선 가문도 중요하게 여기지만 누가 후견인인지 또한 중요하다고 할 수 있었다.
길리안의 경우 정식으로 등록돼 있는 후견인은 고향의 영주님이었다. 지방의 귀족이지만 영지를 가진 남작이라면 나쁘지 않은 후견인을 둔 셈이었다.
그런데도 이베트 자작부인은 후견인이 돼주겠다는 말을 꺼냈다. 길리안의 입장에서야 나쁠 것은 없었지만 그러고 싶다고 해도 그 결정을 혼자서 마음대로 내릴 수는 없는 것이었다.
후견인이 몇 명이건 제한은 없었지만 법적후견인으로 등록을 하려면 부모와 이미 등록이 돼있는 후견인의 동의가 필요했으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 얘기를 했었는데 부인은 그건 걱정하지 말라고 했었고, 그랬던 것이 바로며칠 전이다.
그런데 왕비의 앞에서 대놓고 후견인을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뭐 그 부분에 대해선 왈가왈부할 입장이 아니었기에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 일전에 부인이 말했던 그 청년이군요.”
왕비의 말에 길리안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저 말만 들어보면 이미 자신에 대해 왕비가 알고 있다는 것이었으니까.
거기에 아들자랑이라도 하듯 길리안이 이곳에 있는 이유를 열심히 설명하는 이베트의 모습에 솔직히 당황했다.
재밌는 건 왕비가 그 얘길 웃으면서 들어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듣던 대로 훌륭한 청년이었군요. 아카데미에서 많은 것을 배워 이 나라의 미래를 지탱할 훌륭한 기사가 돼주길 바랍니다.”
왕비의 말에 길리안이 고개를 숙였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왕비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앞날이 기대되는 훌륭한 인재가 좋은 일도 하고 있다니 상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상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닙니다.”
“그 겸손함 또한 부인을 꼭 빼닮았군요. 과한상이 아니니 그리 부담스러워 할 건 없을 겁니다. 미네르바 경.”
왕비의 부름에 뒤에 서있던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이 청년의 성장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 싶은데... 앞날이 밝은 인재에게 넘버즈인 그대라면 좋은 귀감이 될 거라 생각됩니다. 바쁘겠지만 가끔씩 조언을 해주는 정도는 가능하겠지요?”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시작하는 것도 괜찮겠군요.”
“하지만 호위는...”
“백성들을 만나러 온 길입니다. 과한 호위는 필요치 않아요.”
“알겠습니다.”
왕비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미네르바가 길리안을 보고 말했다.
“따라오도록.”
하지만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가 파악이 잘 안 되고 있던 길리안은 그저 멍하고 있을 뿐.
“길리안 어서 가보렴.”
옆에서 말하는 이베트의 말에 퍼뜩 정신 차리고 급하게 왕비에게 감사인사를 했다.
그리고 벌써 저만치 앞서간 미네르바의 뒤를 따랐다.
“언제고 다시 보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는걸.”
한적한 곳에서 멈춰서며 미네르바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전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투구를 벗고 돌아선 그녀가 은빛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 첫 만남은 서로에게 그리 좋은 인상은 아니었었지?”
그 말에 길리안은 쓰게 웃었다.
산행코스에서 처음 만났을 때는 수상한 놈으로 오해를 받았었으니까. 그날 벌어진 일 때문에 그녀의 행동을 이해 할 수도 있었고, 신분이 확인됐을 때 미안하다는 사과도 받았기에 그리 마음에 두지는 않았었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미네르바 폰 발렌슈타인이다.”
길리안이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보였다.
“길리안 후버입니다.”
“난 사람이름을 잘 기억 못하는 편이란다.”
“예? 아... 예.”
“하지만 네 이름은 잊어버리지 않을 것 같구나. 앞으로 네 이름을 자주 듣게 될 것 같기도 하고... 자주 듣는 이름은 기억하기 싫어도 기억이 되거든.”
길리안은 미네르바의 말이 이해가 안 갔다.
넘버즈인 그녀가 이제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자신의 이름을 자주 듣게 된다? 과연 그럴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내 말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이구나.”
“예.”
“흐음... 머리가 나쁜 건가? 아니면 순진한 걸까?”
빙글빙글 웃으며 말하는 그녀를 보며 길리안은 딱히 대답할 말도 없어 그저 가만히 있었다.
“훗 놀려먹는 재미는 별로 없는 녀석이었군. 방금 네가 겪은 일들을 떠올려봐라. 왕비님께서 네게 관심을 보였고 칭찬하셨지. 물론 이베트 자작부인이 후견인임을 자처해서 모른 척 할 수 없어서일 수도 있겠지만... 말 많은 귀부인들이 그런 좋은 이야깃거리를 그냥 둘 리가 없거든.”
“그렇군요.”
담담하게 대답하는 길리안을 보면서 미네르바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그렇군요? 너 무척 재미난 아이구나.”
“솔직히 왕비님을 뵙게 된 것도 또 칭찬을 듣게 된 것도 너무 놀라운 일이라서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긴 평민아이에게는 이례적인 일이긴 하지. 아무튼 넌 좋은 후견인을 뒀다 생각해라. 자작부인이 후견인임을 자처한 이상 어지간한 귀족들도 널 함부로 하지는 못 할 테니까.”
오늘 보니 왕비님과 가까이 지내시는 것 같아 보이긴 했지만 그렇게 대단한 분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왕을 제외하고 왕국의 대 귀족을 꼽으라면 첫째로 꼽히는 것이 크시펠 공작가다. 그리고 2개의 후작가문이 있고, 9개의 백작가문이 있었다.
이들이 바로 왕국의 대 귀족들이었다.
그 밑의 작위인 자작과 남작은 합치면 기백은 될 정도로 많았다.
물론 작위가 왕국의 관직을 말함은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작위는 명예직이라 할 수 있었다. 다만 작위를 가진 가문들은 거의 대부분 예로부터 영지를 가지고 있었고 그 힘 때문에 무시할 수 없는 존재들인 것이었다.
어쨌든 이베트 자작부인의 경우도 말 그대로 자작의 부인이었다. 자작의 사후 자작가의 실권을 쥐고는 있지만 그녀가 작위를 승계한 것은 아니었다. 차후 가문의 일원에게 그 작위를 넘겨줄 권리는 그녀에게 있었지만 말이다.
“이런 자신의 후견인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있나보군.”
미네르바의 말에 길리안은 쓰게 웃을 뿐.
솔직히 생각을 해보니 그랬다.
그녀가 남편과 자식을 잃은 불쌍한 여인이라는 것과, 자작부인이라는 것, 사교계의 여왕이라 불린다는 정도가 끝이었다. 그리고 사교계의 여왕이라고는 하지만 그건 작위도 아니고 그냥 그렇게 불리는 것뿐이니까.
어차피 그런 것들을 이용할 생각도 없거니와 그 덕을 보겠다는 마음자체가 없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귀족 가에 대한 것도 거의 아는 게 없나보구나?”
“예...”
집사가 틈날 때마다 많은 얘기를 해주고는 있지만 그거 일일이 기억하는 것도 정말 일이었다.
“남에 대해 얘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지만 네 후견인에 대해서는 조금 말해주지.”
이베트 자작부인은 결혼 전 백작가의 영애였다.
뭐 그건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는데 그게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했다.
그녀의 본가는 베이어드 백작가로 그 힘은 왕국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의 가문이었다.
그녀의 형제자매중 제일 큰오빠가 현 백작가의 가주이고, 그녀의 언니가 현 왕의 첫 번째 왕비였다. 쉽게 말하면 왕위계승 서열1순위인 1왕자의 이모라는 것이다.
어머니를 잃은 왕자들을 자주 보살폈던 것이 그녀이고, 현 왕비가 홀로 왕실에 남게 됐을 때 그녀의 유일한 말벗이 돼준 이이기도 했단다.
미네르바의 입을 통해 그 얘기를 듣는 길리안의 놀라움은 컸다.
“오늘 일로 네게 관심을 보이는 귀족들이 꽤 늘어 날거다.”
그녀의 말에 길리안은 그저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관심에 너무 신경 쓸 것은 없단다. 하지만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는 것이기도 하지. 아무래도 넌 그쪽에 대한 경험이 많이 부족해보이니 좋은 경험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하아...”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그쪽으론 내가 별로 조언해줄 것도 없고, 뭐 꼭 그런 일이 생기리란 보장도 없으니 너무 걱정하진 말도록.”
“예.”
“그럼 이제 우리 얘기를 해볼까?”
“어떤... 얘기를 말씀하시는지...”
“왕비님의 부탁을 받았으니 모른 척 할 수는 없고... 기사가 너무 말로만 하는 것도 그렇겠지?”
그러면서 옆구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고 말했다.
“기사는 검으로 말한다고들 하지. 그런 말 들어는 봤겠지?”
“예.”
“그럼 이제부터 우리 대화 좀 해볼까? 아주 진지하게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는 미네르바를 보며 길리안도 웃었다.
그리고 옆구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이렇게 미네르바와 길리안은 몸으로? 대화를 하는데...
본격 19금 판타지 넘버즈!
응?
설마~
Comment '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