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8장(2)
“어서 오시게. 카스트로 경. 요청에 응해줘서 고맙네.”
총 교관 마르스의 환대에 카스트로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별말씀을. 기사로서 당연히 나서야 하는 일입니다. 이 또한 부인께서 허락하시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 제가한 것은 없습니다.”
“내 부인께는 따로 감사를 전하겠네. 그보다 이자들의 협박이 그저 말로 끝났으면 좋으련만...”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시험을 중단하시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카스트로의 말에 마르스가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100년을 넘게 이어온 전통일세. 그깟 협박에 굴해 전통을 포기할 수는 없지.”
“사람목숨보다 중요한 전통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채 꽃도 피워보지 못한 젊은이들이라면,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귀족기사단이라 칭하던 자들이 활동을 시작한 것이 언제쯤인지 기억하시는가?”
“한 15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그렇지 그쯤 되었지. 그들이 처음 나타났을 때부터 지속적으로 아카데미에 협박을 가해왔다네. 우리가 귀족들의 명예를 실추시킨다나?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내세우면서 말일세.”
“그랬습니까?”
“뭐 굳이 밖에 알릴 일은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협박은 해왔지만 우리에게 피해를 입힌 적은 없었다네. 그렇게 무시하고 넘어갔지만 이번에는 좀 확실한 정보를 얻었지. 그래서 이렇게 도움을 청하고 준비를 하는 것이고.”
“설마...”
말끝을 흐리는 카스트로를 보며 마르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네. 정말 그들이 모습을 보인다면, 이번기회에 그 실체 없는 귀족기사단이라는 것들의 숨통을 끊어놓을 생각이라네.”
“음...”
귀족 기사단.
정확히 15년 전부터 활동을 시작한 그들은, 귀족들의 권리를 보호하고 땅에 떨어진 명예를 회복한다는 취지를 내세웠다.
하지만 국가에 인정받은 단체도 아니었고, 어딘가에 본거지를 두고 활동하는 단체도 아니었다.
그들의 첫 등장은 어느 평민 상인가문의 몰살에서 시작됐다. 수도인근에서는 꽤 유명하고 명망도 있는 이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가족들과 하인들까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사건현장에 붙어있던 공고문 같은 것에는 이 일을 벌인 것이 귀족기사단이고, 귀족의 명예와 권위에 도전한 이에게 피의 심판을 내렸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하지만 남들이 보기에 그것은 그저 강도 집단이 벌인 학살에 불과했다.
그 후로도 여러 가지 사건을 많이 일으켰는데 보통 부유한 평민이 그 대상이었고, 사건현장에는 어김없이 귀족기사단의 짓임을 밝히는 공고문이 붙어있었다.
모습은 드러내지 않고 범죄만 일삼는 집단.
그것이 귀족기사단이었다.
구성원이 정말 귀족인지, 그들이 정말 기사인지도 밝혀진 것이 없었다.
귀족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가하진 않았지만, 귀족들과 왕실의 입장에서도 그들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들의 행동은 결론적으로 귀족들의 명예를 땅에 떨어뜨리는 것이었고, 지배계층에 대한 백성들의 적개심만 높여 놓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왕실에서는 물론 귀족의회에서도 그들을 극히 위험한 범법집단으로 규정했지만, 세상에는 그리 널리 알려지진 않았다.
왕국전체로 보면 아는 이들보다 모르는 이들이 훨씬 많을 것이었다.
이유는 그들이 스스로 내세운 귀족기사단이라는 명칭 때문이었다. 세상에 널리 알릴 수 없는 명칭이었고, 그 명칭을 그대로 사용해 범법집단으로 규정하고 발표하는 것은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회에서 결정한 그들의 새로운 명칭은 레드블러드였다.
어쨌든 그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추적에 나섰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목격자는 없었고, 증거라고 해봐야 시체와 그들이 남겨놓은 공고문이 전부였으니까.
세상에 드러내놓고 찾을 수 없다는 것도 큰 문제였다.
때문에 귀족기사단이 일을 벌이면, 모르는 사람들은 그저 어느 도적단이 벌인 흉악한 범죄라고만 생각했다.
또 사건을 벌이고 나면 흔적을 지우고 한동안 모습을 감추었기에 꼬리를 잡는 것도 쉽지가 않았다.
결국 추적은 흐지부지해졌고, 그러다보니 정말 다수의 귀족들이 포함돼있는 게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그리고 단순한 도적집단으로 규정하고 넘어가기에는 행동이 너무 비밀스러운 면도 있었다.
어쨌든 그렇게 큰 사건 몇 번 벌이고 나면 한 2~3년 잠적했다가, 또 나타나길 반복하는 중이었다.
그들을 싫어하는 것은 비단 귀족뿐만이 아니었다. 기사들에게도 그들은 증오의 대상이었다.
귀족기사단이라는 이름으로 저지른 범죄들 때문에, 귀족은 물론 기사들이 명예까지 바닥에 떨어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이 알려지진 않았다고는 하나 알만한 이들은 다 아는 놈들이다. 그 이름만으로도 사회지배계층에 속하는 존재들을 우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이번에 모습을 드러내면 또 몇 년 만에 다시 나타나는 것이었다. 녀석들이 나타나면 한동안 시끄러울 것이 분명했다.
문제는 녀석들의 행동이 은밀하면서도 일을 벌일 때는 대범하다는 것이다. 수도인근은 물론 대귀족의 영지에서도 서슴없이 잔혹한 범죄를 저지르고, 또 감쪽같이 흔적을 지우고 사라진다.
그 때문에 그들에게 이를 가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카스트로 역시 그자들을 싫어하고, 눈앞에 있다면 가차 없이 베어버릴 생각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그자들을 잡는 것도 좋지만, 지원 생들을 미끼로 쓰실 생각이신 겁니까?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카스트로의 말에 마르스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말을 삼가시게. 미끼라니. 우리는 저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러는 것일세. 아카데미의 전통은 어떠한 경우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고, 올해의 시험도 예정처럼 아무 탈 없이 진행될 걸세.”
“어찌 그리 자신하십니까?”
“이번 일에 왕실이 나섰네. 유명귀족 가에서도 적극적으로 나섰지. 며칠 전부터 준비한 일이니 그리 걱정할 것 없다네.”
“음...”
“지금까지 그자들이 벌여온 일을 보면 아마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네. 잡힐 것이 빤한데 나타날 리가 없지 않나?”
“하지만...”
“걱정 말게나. 이번 일에 넘버즈들도 대거 나섰으니까.”
마르스의 말에 카스트로의 표정에 처음으로 변화가 일었다.
“넘버즈가 나섰단 말입니까?”
“그렇다네. 거기에 왕실 기사단과 병사들도 동원됐으니 너무 걱정 마시게.”
“음...”
슈발리에 아카데미는 미슬라로프 백작가의 소유였다.
그리고 미슬라로프 백작가는 대대로 왕실의 시종장을 역임해온 집안.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9개 백작가문 중에 유일하게 영지가 없는 가문이기도 했다.
아카데미를 백작가의 넘길 때만해도 왕실재정 악화를 이유로 들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오랫동안 왕실에 헌신한 백작가문에 영지대신 하사한 것이 아니냐는 말도 있었다.
아무튼 왕실과의 관계는 그 어느 가문보다 돈독하다고 할 수 있었다. 이정도면 백작 가에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한 샘이고, 마르스가 자신할 만도 했다.
하지만 수십 명이 지켜도 도둑하나를 막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그들이 지켜야 하는 곳은 타그로스 산맥.
범위가 너무 넓기 때문에 동원된 이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반드시 허점이 있을 수밖에는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일을 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기사들도 많고 넘버즈도 나왔다고 한다.
넘버즈가 남들보다 특별한 능력을 갖추고 강한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엔 그들도 기사이고 또 사람이다. 그들이 나서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 믿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넘버즈를 맹신할 때가 있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카스트로는 마르스를 쳐다보다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가 총 교관으로 이 자리를 책임지고 있고, 귀족의 신분이며 기사이지만 결국 백작가의 가신일 뿐이다.
명령을 받는 존재란 것.
그건 그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것이 기사의 한계인 것인지도 몰랐다.
그에게 더 이상의 말을 해도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었다.
“아이들에게는 알리셨습니까?”
카스트로의 물음에 마르스가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불안감만 가중시킬 걸세. 아이들에겐 중요한 시기고 중요한 시험이지. 그렇지 않아도 많은 부담감에 시달릴 텐데 거기에 더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음...”
카스트로는 모여 있는 지원 생들을 훑어봤다.
수가 천명은 돼보였다.
이들에게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있다면 끔찍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그것을 막는 것뿐이었다.
그런 카스트로의 눈에 한쪽에서 아이들과 얘기를 주고받고 있는 길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저 아이와 잠시 얘기를 나눠도 되겠습니까?”
“누구 말인가?”
“길리안이라는 아이입니다.”
“음... 경이 그 아이를 알고 있었는가? 알겠네, 불러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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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이게 입학시험을 포기하지 못한 이유랄까요.
연참은... 집에 가서 열심히 쓰면... 어쩌면 12시 전에 올릴 수 있을지도... 너무 기대는 말아주세요.
P.S 오늘 용아(龍兒)님께서 표지를 똭!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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