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4장(7)
“하아...”
길리안은 창밖에 환히 빛나는 달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오늘하루가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다는 아니지만 수도에 있는 귀족의 삶을 조금은 엿본 것 같았다. 그중 압권은 원치 않던 목욕시중이었지만.
아무튼 그 후에 끌려가서 머리도 손질당하고 귀족들이나 입을법한 고급스러운 옷까지 입고, 자작부인과 식사까지 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붙잡혀 많은 얘기를 나누다 온 것이었다.
부인에 대해서 꽤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베트 자작부인은 혼자였다.
그녀의 나이는 38살.
사교계에 입문했던 소녀시절부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큼 미모를 뽐내던 그녀였고, 나이가 더해져 농익은 미모만큼이나 아직 뭇 남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미모뿐 아니라 그녀를 얻으면 자작 가를 얻는 것이기에 노리는 귀족들이 많았다.
결혼 전 그녀는 아름다운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백작가의 영애로 많은 남성들의 선망이 대상이었다. 그녀에게 반해 쫓아다니던 귀족가의 자제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자작도 그들 중 하나였다.
자작의 끈질긴 구애에 결국 마음을 열었고 결혼을 했다.
아이도 낳고 여느 귀족들과 별 차이가 없는 삶이었고, 그녀의 결혼생활은 행복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의 불행은 남편의 죽음과 함께 시작됐다.
아들이 3살이 되었을 때 남편인 자작이 국외무역에 직접 나섰다가 얻어온 병이 화근이 됐다.
신관에 의사에 좋다는 약제에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지만 그는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남편의 죽음은 그녀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다. 슬픔에 빠져 지내던 그녀는 아들 때문에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일어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들이 6살이 됐을 때 납치를 당했고 범인들은 몸값을 요구했다.
귀족을 납치하는 것은 흔하지는 않지만 종종 있는 일이었다. 기사가 붙어 다니는 귀족가의 자식들은 납치가 힘들지만 성공하면 큰돈을 만질 수 있기에 목숨을 거는 이들이 있었다.
범인들이 엄청난 액수를 요구했지만 순순히 들어줬다. 그녀에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목숨에 비할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원하는 몸값을 지불했음에도 아들은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왔다.
그것이 그녀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식음을 전폐하고 죽음까지 결심했던 그녀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복수였다.
아들은 살해한 범인들을 잡겠다는 일념.
그녀는 모든 것을 동원해 그들을 찾아 나섰다. 그것이 지금의 그녀를 사교계의 여왕으로 만든 계기라고도 할 수 있었다.
아무튼 왕국을 이 잡듯이 뒤져 범인들을 잡아들였지만, 마지막 한 놈과 아들이 하고 있었던 목걸이를 찾을 수가 없었단다.
그 일당 중 마지막 녀석이 길리안이 잡아온 자였다고 한다.
이 모든 얘기를 해준 것이 이베트 자작부인이었다.
왜 아무관계도 없는 자신에게 그런 얘기를 들려줬는지 몰랐지만 슬픈 그녀의 삶에 관한 얘기여서 그냥 조용히 듣기만 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방까지 데려다준 카스트로에게 간략하게 들을 수 있었다.
“부인께서는 네게서 돌아가신 도련님의 그림자를 본 것 같다.”
짧은 말이었지만 그렇다면 조금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자신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으니까.
어릴 때 어떤 부인에게서 어머니와 비슷한 면을 느끼면 무척 설렜었고, 무슨 말이던 잘 따랐었다. 어머니의 그림자를 보고 진짜 어머니가 아님을 알면서도 그랬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 것에서 많이 벗어났지만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자작부인에게서 어머니의 향수를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은 그녀의 아들이 아니고, 그녀 또한 자신의 어머니가 아니다.
어떻게 보면 무척이나 좋은 기회이기도 했지만 그런 것을 이용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자식을 잃은 것과 어머니를 잃은 것 어느 것이 더 슬플까?
바보 같은 질문이다.
둘 다 소중한 사람을 원치 않는 상황에서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그 슬픔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
말로표현 못 할 슬픔이고 상처인 것이다.
그걸 알기에 더더욱 이용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많은 재산도 지위도 사랑하는 이들이 떠난 빈자리를 채워주지 못할 것이다. 화려함과 미소로 아픔을 감추고 있지만 길리안의 눈에는 그게 더 슬퍼보였다.
창밖을 내다보던 길리안이 돌아섰다.
그의 시선이 벽에 걸려있는 초상화로 향했다. 초상화의 주인공은 부인의 아들이라고 들었다.
초상화는 하나가 아니었다. 신기한건 어릴 때의 모습만 있는 것이 아니란 거다. 이미 죽은 사람인데도 소년시절을 지나 청년이 됐을 때의 모습까지 그려져 있었으니까.
나이가 들었을 때의 모습은 실제라기 보단 어린 시절 모습과, 자작과 자작부인의 모습을 토대로 그려진 것일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아들을 보고 싶었나보다. 그리고 그만큼 부인이 아들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웃긴 건 아무리 봐도 자신과 닮은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머리색은 물론 눈동자나 생김새까지, 모든 것이 다르다. 도대체 어디서 아들의 그림자를 봤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길리안은 초상화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닮았건 닮지 않았건 간에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 아픔은 알지만 해줄 수 있는 것도 없고, 다만 그녀가 빨리 그 슬픔과 과거에서 벗어나길 바랄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쓰게 웃었다.
잊고 싶다고 잊히는 것도 아니고, 지우고 싶다고 지워지는 것이 아니란 걸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오늘은 쉽게 잠들기 힘들겠구나.”
그녀 때문에 자신도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그리고 떠올리기 싫은 어릴 때의 기억도 자꾸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이런 날은 몸에 힘이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검을 휘둘러야 하는데 그럴 상황이 못 됐다.
길리안은 하는 수없이 침대에 누웠다.
빨리 잠들기를 바라면서.
“말도 없이 가는 건 부인에 대한 모욕이고 무례다.”
“윽.”
새벽같이 일어나 저택을 벗어나려던 길리안은 뒤에서 들리는 카스트로의 목소리에 멋쩍게 웃으며 돌아섰다.
“하하하하... 저는 단지.”
“단지?”
“조금 일찍 일어나는 편입니다. 일어나면 항상 수련을 하는 것이 습관인지라...”
“그런 건 미리 말하지 그랬나. 어제 갔던 연무장을 쓰게 해주마. 따라오도록.”
“아 예...”
길리안은 하는 수 없이 카스트로의 뒤를 따랐다.
올 때는 어머니의 유품인 손수건만 받으려고 왔는데 벗어나는 건 참 힘들었다.
“어제 내색하지 않은 것은 고맙게 생각한다.”
“네? 아 네...”
‘덕분에 저도 잘 잤습니다.’
라는 말은 생각으로만 했다.
어젯밤에 잠자리도 바뀌고 생각도 많아 잠이 통 오질 않았는데 누군가 들어서는 기척에 눈을 떴었다.
하지만 들어온 사람을 보고 다시 눈을 감았다.
이베트 자작부인이 머리맡에 앉아 한참동안 자신을 바라보았던 것을 알고 있다.
나중에는 머리를 쓰다듬은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 나갔는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그녀가 머리를 쓰다듬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어버렸으니까.
나가기 전에 그녀가 이마에 입을 맞추고 간 것도 길리안은 몰랐다.
“괜찮다면 부인의 관심이 식을 때까지 종종 초대에 응해주겠느냐?”
카스트로의 말은 의외였다.
“제가 그걸 이용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이용할 생각이 있는 녀석이라면 그런 말도 꺼내지 않겠지.”
“하하 좋게 봐주시는 것은 감사하지만, 전 그렇게 좋은 놈이 못됩니다.”
“적당히 라면 모른 척 해주마.”
“음...”
이유를 모를 때는 나한테 왜 이리 잘해주나 궁금했었고, 이유를 알고 나서는 그 관심과 친절이 부담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녀의 아픔에 공감은 할 수 있고, 자신에게 이러는 것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마주치는 것은 서로에게 좋을 게 없다는 생각이었다.
예의가 아닌걸 알면서도 새벽같이 몰래 빠져나가려했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카스트로가 의외의 부탁을 해오는 것이다.
“상처가 많고 외로운 분이다. 아직도 슬픔에 빠져계시지. 단지 친절함과 미소 그리고 화려함으로 그걸 감추고 계실뿐.”
“제게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길리안의 물음에 카스트로가 걸음을 멈췄다.
“네가 부인의 아픔과 상처를 이해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다른 뜻은 없다.”
“이해는 하고 공감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전 부인의 아들이 아니고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절 보면 계속 돌아가신 아드님을 떠올리시겠지요. 그건 부인께 좋지 못한 일이 될 겁니다.”
길리안의 말에 카스트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지.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싫다면 네가 거절하면 그뿐.”
길리안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후우....”
그렇게 매정하게 대할 수 있을 정도면 이렇게 도망치듯 빠져나가려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예전에도 종종 있었던 일이고,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거다. 어제처럼 가끔 식사나 차를 하며 얘기를 들어주는 정도면 된다. 그에 대한 사례는 충분히 하마.”
“그때마다 이렇게 하셨습니까?”
“어땠을 거 같나?”
그 물음에 길리안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는 표현이었지만 짐작은 갔다.
아마 지금과 다르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카스트로 같은 기사는 자신이 어려움에 처했다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만한 부류가 못된다.
그런 그가 애송이 기사 지망생인 자신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건 그만큼 자작부인을 위한다는 뜻일 테니까.
그리고 생각해보면 그리 어려운 부탁도 아니다.
“하아... 뭐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입학 전까지는 아직 여유도 있고... 사례를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수련장까지 가는 길은 알고 있으니 전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길리안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 달려갔다.
길리안의 모습이 사라지자 카스트로가 희미하게 웃었다.
지금처럼 부인이 관심을 가지는 아이들을 조용히 만난 적은 많았다. 하지만 대화의 내용은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죽은 아들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이베트 자작부인의 유일한 단점이자 약점이었다.
그녀의 눈에 든 이들은 행운을 잡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대부분은 그걸 이용해 많은 것을 얻어내려 했다. 운 좋게 부인의 양자로라도 들어간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없을 테니까. 일부러 그걸 노리고 접근하는 녀석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카스트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부인에게 녀석들의 실체를 알려주고, 그런 놈들에게 경고를 하는 것이 전부였다.
옆에서 아무리 조언을 해도 부인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니까.
그런데 저 녀석은 정말 의외였다.
그 관심이 부담스러워 피하고 도망치려하는 것은 길리안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다.
자작 가는 그저 그런 귀족가가 아니다.
아무리 수도에 온지 얼마 안 되고 잘 모른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느끼는 것이 있을 것이다. 평민의 기사 지망생이면 이보다 좋은 기회도 없을 텐데, 녀석은 그걸 이용하고 뭔가 얻으려는 모습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물론 아직은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말이다.
욕심도 없어 보이고 순진해 보이는 모습이 녀석의 계산된 행동이라면 정말 무서운 놈이겠지만, 적어도 그렇게 보이지는 않았다.
길리안이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던 카스트로가 낮게 중얼거렸다.
“고맙군.”
그리고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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