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9장(10)
와아아아~
모여든 사람들의 열렬한 환호에 마차에 타고 있던 일 왕자 윈스톤은 창을 열고 밖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좀 지나자 그의 인상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사람들의 환호가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환호는 넘버즈와 기사들을 향한 것이었고, 왕가의 깃발이 꽂혀 있는 마차에는 관심도 없었다.
인상을 쓰던 윈스톤은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쳐버렸다.
볼란트와 티란테는 서로를 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함께 있는 넘버즈 5명의 이름을 연호하는 사람들.
양옆에 길게 늘어서서 말을 타고 가는 기사들에게 꽃을 건네는 소녀들도 있었다.
수도를 떠날 때와는 분위기가 너무나 변해있었다.
기사들을 보고 이렇게 환호하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
분위기만 보면 마치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하는 행렬 같았다.
그때 앞에서 더 큰 환호성이 들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입을 모아 길리안이라는 이름을 연호했다.
그들도 수도로 복귀하며 그에 대한 소문은 들어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평민 출신의 기사가 18살에 예외 넘버 11을 부여받아 넘버즈 됐고, 며칠 만에 No.9 크리스와 대결을 벌여 그를 죽이고 그의 번호를 차지했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그 때문에 왕이 칼을 빼 들었다는 것이다.
둘 다 길리안에 대해 궁금하기는 했었다.
말을 달려온 길리안과 기사들이 행렬이 멈추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그와 인사를 나누는 넘버즈들의 표정은 밝았다.
어린 나이에 넘버즈가 된 길리안은 루퍼드와 비견되고 있었다.
신분으로 보나 현재의 위치로 보나 루퍼드가 그보다 위에 있기에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쁠 것 같은데, 루퍼드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길리안이 합류하자마자 사람들이 그의 이름만을 외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다른 넘버즈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모습.
둘의 눈에는 그런 넘버즈들이 너무 이상하게 보였다.
뒤를 돌아보는 길리안의 어깨를 루퍼드가 툭 쳤다.
“그들에게 관심 가질 것 없다.”
“그래도 인사 정도는···.”
“너의 예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곧 알게 될 거다. 그보다 지낼 곳은 마음에 드나?”
“예.”
“9기사단은 사기가 많이 떨어져 있으니까 신경 써주도록. 곧 인원 충원도 있을 테니 이제 지휘하는 법도 배워야 할 테고.”
“노력하겠습니다.”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왕성으로 향하는 길에 넘버즈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길가로 물러나 있는 한 명의 기사.
말 위에 있어 더 눈에 띄었다.
그가 살짝 고개를 숙이자 넘버즈들도 살짝 고개를 숙여 답했다.
그를 지나칠 때까지 눈을 떼지 못하던 길리안이 루퍼드에게 물었다.
“누굽니까?”
“아~ 처음 보나 보군. 칼렌베르크의 공주를 호위하는 에녹스 경이다. 음, 처음 본 건 아니겠군. 예전에 저쯤이었던가? 나에게 투기를 쏘아 보내던 곳이?”
그 말에 길리안이 피식 웃었다.
“그 일을 기억하시는군요.”
“당연하지. 아무나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수도 한복판에서 내게 그런 이는 처음이었으니까. 그런 이가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치르고 있었던 것도 의외였지. 어쨌든, 그때 에녹스 경을 못 봤나?”
“그날은 넘버즈들만 눈에 담는 거로도 설레서 다른 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습니다.”
그 말에 크게 웃은 루퍼드가 길리안을 보며 말했다.
“지금은 어떤가?”
“이렇게 함께 인 것에 가슴이 설렙니다.”
“나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사람들이 저렇게 환호하게 만든 건 바로 너니까. 아, 에녹스 경을 본 소감은?”
“그는 강해 보였습니다.”
“확실히 그렇지. 난 그에게서 드겔 경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약간 받았다. 물론 드겔 경이 그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하지. 솔직히 말하면 그에게 무척이나 부끄럽다. 왕국의 치부를 다른 왕국의 기사에게 보인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니까.”
길리안은 루퍼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거고 우리는 저쪽도 의심하고 있다. 아무리 동맹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타국이고 국가 간에 영원한 친구 같은 건 없으니까. 하지만 건드리기는 힘들어. 지금은 내부 정리를 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기도 하고. 아 미네르바. 칼랜베르크의 공주는 만나 봤나?”
그 말에 미네르바가 고개를 저었다.
“같은 여자라고 쉽게 만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야. 거기에 오자마자 병을 얻어서 왕비님도 얼굴 보기 힘든 상대를 내가 어떻게 만나. 이제 좀 나아졌다고는 하는데 딱히 친분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 기웃거리기가 좀 그러네.”
“하긴.”
그러면서 옆에서 말을 모는 로렌스를 쳐다봤다.
로렌스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까 에녹스를 뚫어지게 쳐다봤는데 고개를 젓는 걸 보니 아마도 그의 생각을 읽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의외군. 공주의 곁은 잘 떠나지 않는 그를 밖에서 보다니. 아이작 경. 혹시 그에 대해 좀 아십니까?”
루퍼드의 물음에 아이작이 고개를 저었다.
“칼랜베르크에서도 그를 마주친 것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네. 벨리타 공주와 마주칠 때마다 항상 그가 곁에 있었지. 그림자라고 봐도 좋을 정도네.”
“그렇군요.”
“그는 승부를 겨뤄보기 전에는 결과를 알 수 없는 강자네. 하지만 그 강함에 비해 칼랜베르크에서 그리 유명한 기사는 아니라는 것이 신기했지. 그가 이끄는 기사단도 내가 보기에는 왕의 기사가 아닌 그의 기사라고 봐도 좋을 정도였지. 그런 느낌은 호위를 하며 그대들도 느꼈을 테지만.”
“확실히 그렇기는 했지요. 음···. 칼랜베르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기안과 전쟁을 벌이면 큰 이득이 있을까요?”
“이득이라···.”
잠시 생각하던 아이작이 다시 말했다.
“이득을 보려고 하면 못 볼 것도 없지. 칼랜베르크는 사라센 제국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후에 베이가 왕국을 노렸네. 하지만 기안 때문에 옛 영토를 회복하는 것에 그쳤지. 아마 기회만 된다면 언제든 다시 베이가 왕국을 노릴 것이네. 그들에겐 그만한 힘이 있으니까.”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루퍼드가 말했다.
“우리가 기안을 상대해주면 그쪽에는 좋은 일이 되겠군요.”
“그렇게 볼 수 있지 않겠나?”
“동기는 있군요. 그쪽에서 일을 벌였다고 하기에는 여러 가지로 걸리는 것이 많지만 의심은 계속해야겠군요.”
“만약 그들이 배후라고 해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네.”
“그건···.”
아이작의 말에 뭔가 말하려던 루퍼드가 잠시 생각하더니 씁쓸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음, 확실히 그렇기는 하군요.”
칼랜베르크가 배후에 있다고 밝혀져도 왕국의 입장에서는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었다.
화가 난다고 쳐들어갈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페슈미안 공국이 배후로 밝혀진 것이 음모가 아니라고 해도 쉽게 전쟁을 벌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다.
기안과 칼랜베르크가 괜히 대륙의 4강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거기에 지금 왕국 내부의 사정을 보면 타국과의 전쟁은커녕 내부 단속에도 골머리가 썩을 정도.
“칼랜베르크가 배후라면 동맹 관계가 깨지고 적이 하나 더 늘어날 뿐이네. 대륙의 4강 중 2개 국가를 적으로 돌리고 주변국에 둘러싸여 있는 나라가 되는 것이지. 외교나 전쟁으로 어떻게 하기는 힘드네. 뭔가를 하고 싶다면 더 노력해야 할 것이네. 이대로는 두 나라 중 하나도 상대하기 버거우니까.”
아이작의 말에 넘버즈들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
“칼랜베르크에는 넘버즈급의 기사들이 상당히 많네. 그들은 전투 경험도 풍부하지. 문제는 우리는 각 영주 휘하로 분산돼 있지만 그들은 하나의 깃발 아래 모여 있다는 것이네. 그 차이가 얼마나 큰 건지는 직접 싸워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거로 생각하네.”
아이작의 말은 계속됐다.
칼랜베르크가 현시점에서 적은 아니지만, 만약 적이 되어 전쟁을 벌인다고 쳤을 때를 가정해서 하는 말이었다.
지금 왕실에서 바꾸려는 기사단의 체계나 상비군에 대한 것도 칼렌베르크의 것을 따라 하려는 것이 많다.
그건 그쪽의 것이 더 좋다고 생각돼서고 이미 그들은 결과를 보여주고 있었으니까.
칼랜베르크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했고 모든 군대가 왕의 휘하이다.
마음만 먹으면 넘버즈급 기사들로 기사단을 꾸릴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에스토의 상황은 다르다.
영주들을 소집해 전쟁에 나서도 왕이 직접 지휘하지 않는 한 작위가 높은 대귀족이 영주들의 군대를 지휘한다.
그건 작위가 높아서가 아니라 그가 가장 많은 군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
영지마다 다른 무장, 다른 훈련, 다른 명령체계를 가지고 있는데 그런 군대가 하나로 뭉쳐 제힘을 발휘하기는 힘들다.
그리고 에스토의 경우는 왕도 그렇지만 영주들도 상비군을 많이 보유하고 있지는 않다.
전쟁이 나서 징집된 징집병과 평소 훈련을 해온 상비군의 차이는 크다.
칼랜베르크와 비교하면 기사는 몰라도 병사들의 질 자체가 다르다는 것.
그 차이는 십여 년 전 벌어진 칼랜베르크와 베이가 왕국의 전쟁에서 그 차이는 확연하게 드러났다.
왕의 입장에서야 칼랜베르크처럼 하고 싶겠지만, 에스토나 베이가나 그럴 상황이 못 된다.
“칼랜베르크에서 그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감탄만 나오더군. 솔직히 징집된 병사들이 기사들의 돌격을 받아 낼 수 있을 거로 생각지 않네. 하지만 그들의 군대는 가능해 보이더군. 가급적이면 적으로 돌리고 싶지는 않은 나라네.”
“음···.”
“칼랜베르크에 비하면 기안이 낫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도 않네.”
이번엔 기안에 대한 얘기를 꺼내는 아이작의 말에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기안은 호전적인 국가지. 체제는 우리와 비슷하나 왕에 대한 충성은 비할 수 없을 걸세. 그쪽 영주들은 왕의 명에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가 거의 없네. 기사들의 충성도 마찬가지네.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변국과 크고 작은 전쟁을 끊임없이 벌여왔지. 각 영지마다 특색 있는 군대는 양성해왔고 그들은 여러 전쟁에서 명성을 떨쳤네. 기사들만이 아니라 그 병과들이 조합돼서 내는 힘은 상당하다네.”
“기안에 대해서도 잘 아시는 모양입니다.”
루퍼드의 말에 아이작이 들고 있는 방패를 툭툭 쳐보였다.
오각형의 방패.
“이건 기안의 기사들이 많이 쓰는 방패지. 방어도 방어지만 공격에도 유용하다네.”
“마탑주 사건 때 잠시 봤습니다.”
루퍼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아이작이 말했다.
“경들이 넘버즈가 되기 전에 이 자리에 올랐고 칼랜베르크에 오랜 시간 가 있어서 나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난 기안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네.”
“그러셨군요.”
“물론 오래전의 이야기이네. 지금의 기안은 어떨지 모르겠군. 하지만 그들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네. 우리의 힘이 약해졌다 생각되면 그들은 언제든 칼을 뽑아 들 수 있네. 솔직히 칼랜베르크보다는 기안과의 전쟁에 대비해야 하네.”
“확실히 그렇긴 하지요.”
“난 경들처럼 지금의 변화를 환영하네. 내부의 결속이 강화되면 어떤 위협도 두렵지 않은 법이지. 그나저나 새로 들어올 기사들이 기대되는군.”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다행히 12시 전이군요.
하루가 참 짧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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