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8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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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 성 밖이구나. 의외네.”
길리안의 말에 그렉 대신 케빈이 대답했다.
“성안에 살면 좋기는 하지만 성문 출입하는 데 아무 문제도 없으니까. 그래도 성문에서 가까운 편이니 뭐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지. 그리고 얘네 집이 조금 시끄럽다.”
“응?”
“가보면 알아. 부모님이 둘 다 기사거든.”
“아, 그렇구나.”
그렇게 말하며 길리안이 그렉을 봤다.
인상을 찌푸린 채 마차 밖만 보고 있는 그렉.
“우리가 집에 가는 게 실례인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자 옆에 있던 케빈이 그렉을 툭 쳤다.
“응? 뭐? 왜? 나 불렀어?”
“우리가 집에 가는 게 실례냐고 물었어.”
“실례는 아닌데···. 우리 집에 가서 웃으면 안 된다.”
그 말에 왜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케빈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우 씨, 이게 웃지 말라니까.”
그때 마차가 멈추고 도착했다는 한스의 말에 다들 마차 문을 열고 내렸다.
그렉의 집은 크지 않은 벽돌집.
문 앞에서 잠시 망설이던 그렉이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 그렉을 따라 모두 집안으로 들어섰다.
“나 왔어요.”
그렉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런 대답도 없었고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이야~ 아무도 없네. 자 여기가 우리 집이야. 됐지? 가자.”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 나가려는 그렉의 어깨를 길리안이 잡았다.
“뒤에 누가 있는 거 같은데?”
“아무도 없을 거야.”
“확실히 있는데? 두 명.”
“하아~.”
한숨을 내쉰 그렉이 하는 수 없다는 듯 뒷문을 열었다.
문을 열고 나가자 넓은 뒤뜰이 나왔다.
거기엔 두 명이 흉갑을 입고 검을 겨루고 있었다.
2m에 가까운 키에 떡 벌어진 어깨와 힘을 줄 때마다 꿈틀거리는 팔 근육.
검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치열한 공방을 주고받는 둘.
그 둘을 보던 길리안이 고개를 한 번 갸웃하고는 집중해서 공방을 지켜봤다.
그중 덩치가 좀 더 큰 사람이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리며 일행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이 아들! 오랜만이네?”
그 모습에 그렉이 썩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뒤에 있던 친구들은 그에게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이라니. 매주 집에 가지 않나?”
프란트의 말에 케빈이 피식 웃었다.
“이 녀석은 매주 우리 집에서 뒹굴지.”
“그렇군. 그런데 너희 아버지는 목소리가 꽤 가느시구나.”
프란트의 말에 그렉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걸 본 프란트가 케빈에게 작게 말했다.
“내가 하면 안 되는 말은 했나?”
그 말에 케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거든.”
“뭐?”
그 말에 놀란 프란트가 다시 앞을 봤다.
키가 190Cm는 넘는 것 같고 키에 걸맞은 건장한 체구에 툭툭 붉어져 나온 팔 근육은 자신의 허벅지보다도 굵어 보였다.
얼굴의 선도 여자라고 하기엔 굵었다.
그래도 엄마라는 말을 듣고 아주 자세히 뜯어보니 여자 같기도 했다. 하지만 얼핏 봐선 수염만 없다뿐이지 남자였다.
“크흠. 어머니였구나. 미안.”
“야 그걸 사과하면 얘가 더 기분 나쁘지.”
케빈의 말에 프란트가 그렉의 눈치를 살폈다.
펴질 줄 모르는 인상.
“흠흠, 요즘 눈이 좀···. 하하하, 그런데 형이 있는 줄은 몰랐다.”
그 말에 케빈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고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진 그렉이 고개를 획 돌려 프란트를 노려봤다.
어색함을 풀려고 화제를 돌린 건데 반응이 영.
“음··· 내가 또 실수했나? 아~ 키가 커서 형인 줄 알았다. 남동생이구나?”
여전히 노려보는 그렉.
프란트가 그 시선을 피해 옆에서 깔깔거리는 케빈을 흔들며 작게 말했다.
“형이나 동생이 아니면 저쪽이 아버지냐? 아버지치곤 젊은데?”
“크크. 하아~ 아 죽겠다.”
“내가 또 실수한 거냐?”
“어. 여동생이다.”
“뭐?”
놀란 프란트가 다시 앞을 봤다.
그렉의 어머니라는 사람과 비슷한 체구에 비슷한 생김새, 우락부락한 근육까지. 남자 같은 여기사들도 봐왔고 아카데미 동기 중에도 있지만, 저 둘은 차원이 달랐다.
머리도 짧은 편이라 치마라도 입고 있으면 모를까 저 상태로는 여자로 봐줄 수가 없었다.
그때 안톤이 프란트의 어깨를 툭 쳤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가는 거다.”
“음···.”
그런 프란트를 보고 케빈이 웃으며 말했다.
“뭐 그럴 수 있다. 처음 보면 다들 그래. 그렉 이놈이 집에 우리를 데리고 오기 싫었던 이유가 그거거든.”
그러면서 그렉의 어깨에 양손을 올리며 말했다.
“얘는 아버지를 많이 닮았지. 사실 이 집에서 얘네 아버지가 제일 예쁘게 생겼다.”
“그렉의 아버지는?”
프란트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어보자 케빈이 말했다.
“여기 안 계신다. 아, 얘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그렉네 아버지는 기사단장이다. 국경에 계시는데 어디였지?”
“케른.”
“아, 케른 요새였지.”
“그럼···?”
말끝을 흐리며 그렉을 보는 프란트에게 케빈이 말했다.
“어, 왕실기사지. 그러니까 너 소개할 때 그냥 카미르라고 해라. 우리야 어떻게 하다 보니 이렇게 됐지만, 부모님들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 테니까.”
그때 다가온 그렉의 어머니가 그를 번쩍 들어 올리더니 품에 안았다.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아들.”
그러더니 볼에 연신 뽀뽀를 했다.
그렉이 몸부림쳤지만 빠져나올 수는 없었다.
“으악! 친구들도 있는데 이러지 말아요. 악, 아파. 살살 안아요.”
“오빠 말이 맞아요. 엄마, 그러다 오빠 죽겠어요. 나도 울 오빠 안아보고 싶으니까 얼른 줘요.”
옆에서 보채는 말에 그렉을 건넸다.
“악. 살려줘. 실비아 오빠한테 이러는 거 아니야. 으악.”
그러거나 말거나 으드득 소리가 날 정도도 그렉을 꽉 안은 실비아.
“컥!”
허우적거리는 그렉의 볼에 실비아가 볼에 뽀뽀하며 말했다.
“에이 좋으면서 친구들 앞이라고 부끄러워하긴. 어? 그러고 보니 여드름이 좀 없어진 거 같네? 우리 오빠 점점 예뻐지네.”
그걸 보며 다들 웃었다.
“이런, 내 소개가 늦었네. 난 그렉의 엄마인 미사예요.”
미사의 소개에 다들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제가 대신 소개해 드리죠. 이쪽은 안톤, 얘는 카미르. 다들 신분은 저랑 같은데 그냥 저처럼 대하시면 됩니다.”
“반가워요. 내 아들을 잘 부탁해요.”
“그리고 이쪽은 넘버즈 길리안입니다.”
“오오 길리안 경?”
미사가 길리안을 보다가 주먹 쥔 손을 가슴에 대고 고개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길리안 경. 멀리서 볼 때와는 달라서 못 알아봤습니다.”
“길리안 클라우드입니다. 이러시면 제가 불편합니다. 전 그냥 그렉의 친구일 뿐이니 편하게 대해 주십시오.”
“그래도 넘버즈의 기사에게 그럴 수는 없지요.”
그런 미사의 옆에 있던 실비아가 그렉을 휙 집어던지고 길리안의 손을 덥석 잡았다.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기사들과의 결투, 넘버즈 승급 대결도 봤습니다. 검을 부러트린 용기도···. 아,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정말, 정말 존경합니다.”
“하하하.”
어색하게 웃는 길리안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보던 실비아의 뺨이 붉어졌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번만, 딱~ 한 번만 안아 봐도 되겠습니까? 소원입니다.”
그녀의 말에 길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마자 실비아가 환하게 웃으며 길리안을 덥석 안았다.
“나중에 꼭 길리안 경과 같은 기사가 되고 싶습니다.”
그런 실비아를 보며 케빈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넌 가능할 거다. 그런데 보통은 여자가 안기지 않냐?”
“그런가? 아무렴 어때? 지금 엄청 행복하니까 방해하지 마. 평생 간직할 소중한 기억을 만드는 순간이니까.”
“아 그렇구나. 그런데 너무 오래 안고 있는 거 아니냐? 평생 악몽에 시달릴지 모를 존경하는 기사도 좀 생각해줘라. 힘 좀 빼라. 그러다 걔 뼈 부러지겠다.”
케빈의 말에 길리안이 말했다.
“난 괜찮아.”
“거봐. 길리안 경이 오빠 같은 약골인 줄 알아? 이 말라깽이야.”
“음, 말라서 미안하다. 그런데 너 내가 항상 말하지만, 예의상 머리라도 좀 길러라. 너 말고 남들을 위해서. 그게 배려라는 거다. 그리고 걔 원래 안 괜찮아도 괜찮다고 하는 애니까 좀 놔줘라. 땀이라도 좀 닦고 오던가.”
“아~ 이런 실례를.”
길리안을 놓은 실비아를 보고 케빈이 다시 말했다.
“그리고 너희 오빠한테 감사해라. 친구니까 여기까지 왔지. 아니면 넘버즈인 얘가 왜 왔겠냐.”
그 말에 실비아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그렉을 번쩍 안아 들었다.
“역시 우리 오빠 최고. 멋진 기사를 친구로 두다니. 아우 예뻐.”
체념한 표정으로 축 늘어져 있는 그렉을 보던 길리안이 미사를 보며 말했다.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세요.”
“미네르바 경과는 어떤 사이신지 궁금합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셨을까요?”
“공방을 주고받을 때 자세와 몇 번의 공격이 눈에 익어서 그렇습니다.”
“미네르바 경과 겨뤄본 적이 있나 보군요.”
“예. 한 번이지만.”
길리안의 말에 미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예리하시군요. 예전에 미네르바 경을 잠시 가르친 적이 있습니다.”
“그러셨군요.”
미네르바와는 조금 다르긴 하지만 비슷한 점은 많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어본 것.
스피드는 조금 처져도 검의 위력은 훨씬 강해 보였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 겨뤄보고 싶습니다.”
길리안의 말에 미사가 씨익 웃었다.
“길리안 경의 결투를 보고 꼭 한번 검을 나눠보고 싶었습니다. 미룰 것 없이 지금 간단하게라도 어떤가요?”
“그러고 싶지만, 지금은 좀 곤란합니다.”
아쉬운 듯 말하는 길리안의 어깨를 케빈이 토닥이며 말했다.
“얘가 지금 왕께 휴식을 명받은 상태라···. 이걸 보세요. 왕명으로 휴식을 명받은 최초의 기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케빈이 손에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펼쳐 보였다.
그걸 본 미사가 크게 웃었다.
“왕께서 강제로 휴식을 명할 정도라니. 경이 얼마나 쉬지 않고 노력하는 기사인지 알겠군요. 실비아. 길리안 경과 같은 기사가 되고 싶다면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알았지?”
“네! 어머니.”
“그리고 음식 대접할 거니 닭 좀 잡아 오겠니? 인원수대로. 아니 몇 마리 더.”
미사의 말에 안고 있던 그렉을 휙 집어던진 실비아가 검을 집어 들었다.
그런 딸을 본 미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자 그럼 우리는 식사 전에 차 한잔할까요?”
“꺼억~. 아 배불러. 점심때도 안됐는데 식사라니. 그래도 그렉네 어머니가 닭요리는 잘하시지.”
“어. 맛있게 잘 먹었어.”
다른 이들이 대화하며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그렉의 인상은 펴질 줄 몰랐다.
그런 그렉을 케빈이 툭 쳤다.
“인상 펴라 자식아. 이미 다 공개됐는데.”
아무 말도 없는 그렉을 보던 길리안이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그렇지. 이 자식이 행복에 겨워 그런다.”
케빈의 말에 길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빈 말이 맞아. 좋은 어머니와 예쁜 여동생이 왜 부끄러운 거야?”
예쁜 여동생이라는 말에 흠칫해서 뭔가 말하려던 케빈이 계속된 길리안의 말에 입을 다물었다.
“행복해 보여서 무척 부럽더라. 나나 안톤은 어머니를 다시 보고 싶어도 볼 수 없거든.”
“음···.”
반응이 없던 그렉이 안톤과 길리안을 힐끔힐끔 봤다.
창밖을 보던 안톤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은 말해줘도 못 느낄 거다. 단 나중에 후회하지는 마라.”
길리안이 안톤의 어깨를 툭툭 치고 그렉을 보면서 말했다.
“그런데 넌 왜 어머니가 쓰는 검을 안 쓰는 거야?”
“그야···.”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그렉이 작게 말했다.
“여자들이나 쓰는 검을···.”
그 말에 길리안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무시할 게 아니야. 그 검으로 미네르바 경은 넘버즈가 됐고 너희 어머니의 실력은 나도 감히 무시할 수 없어. 그렉.”
“어···.”
“기사가 되고 싶다고 했지?”
“응···.”
“그럼 너도 그 검을 익혀.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기사가 될 수 있을 거야.”
“그, 그럴까?”
“어. 분명 그렇게 될 거야. 내가 있는 힘껏 검을 휘둘러도 갑옷을 베는 건 불가능해. 하지만 미네르바 경이나 너희 어머니는 갑옷을 뚫을 수 있지. 그 차이는 무척 커. 나도 꼭 배워보고 싶으니까. 좋은 스승이 바로 곁에 있는데 왜 남들과 같은 길을 가려고 해?”
“음···. 알았어. 지금부터라도 해볼게. 그리고 미안. 괜히 투정 부려서.”
그렇게 말하는 그렉을 보며 길리안이 미소를 지었다.
“우리한테 미안할 건 없어. 우리한테는···.”
그렇게 말한 길리안이 창밖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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