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7장(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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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여기 모여 있었구나. 그런데 뭐 하는 거야?”
미네르바의 물음에 루퍼드가 서류를 살피며 말했다.
“보다시피 일하는 중이지.”
“밖에 있는 막사들은?”
루퍼드가 미네르바를 보며 들고 있던 서류를 흔들었다.
“마찬가지다. 기사들이 일하고 있지.”
“난 또 전쟁이라도 난 줄 알았네.”
루퍼드의 제2 중앙기사단이 머무는 곳에는 와서 본 것은 수많은 막사와 분주하게 움직이는 기사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궁금했지만 다들 바빠 보여 인사만 받으며 루퍼드의 집무실로 들어왔다.
그런데 로렌스와 드레드까지 모여서 하는 일은 서류 작업.
“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그렇게 말한 루퍼드가 손가락으로 밑을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그리고 여긴 전장이지.”
그 말에 미네르바가 피식 웃었다.
“맞는 말이기는 하네. 기사들이 종이와 펜을 들고 싸우게 될 줄은 몰랐지만.”
“꼭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만이 전쟁은 아니지. 알다시피 관료들 쪽은 정리대상이 기사들보다 훨씬 많아. 다 잡아들여 놓고 보니 일할 사람이 너무 없더군. 그러니 우리라도 나설 수밖에.”
“하긴. 그런데 현장 조사는?”
“지금 당장은 더 나올 게 없다. 급한 불은 껐고 어차피 잔해를 뒤지는 건 감독할 기사 몇 명만 있으면 충분하다. 뭘 하려고 해도 내부정리가 먼저고, 혼란을 바로 잡는 게 먼저니까. 너도 몸 상태가 괜찮으면.”
그러면서 빈자리를 가리켰다.
“앉아서 일하란 말이네?”
고개를 끄덕이는 루퍼드.
“아, 그런데 길리안은 괜찮나?”
“어. 난 독에 당하고 며칠 고생했는데 길리안은 신기할 정도로 멀쩡해. 아마 지금도 나오라고 하면 당장 달려올걸?”
그녀의 말에 넘버즈들이 웃었다.
“그런데 길리안을 편하게 부르네?”
“아, 몰랐나? 그가 넘버즈가 되던 날 술 한잔하면서 조금 친해졌지.”
“그렇구나.”
“그날 너희와 행동하지 못한 게 좀 아쉽다. 아, 이건 아직 못 봤겠군.”
루퍼드가 미네르바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지금까지 나온 걸 대략 요약한 거다.”
그걸 받아든 미네르바가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잡아 온 마법사를 심문한 결과였다.
성 밖에 있던 던전은 몬스터를 배양하는 시설이 있었다고 돼 있었다. 마도 시대의 것은 아니고 제국이 점령했을 당시 실험과 연구가 진행됐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몬스터를 무한으로 찍어낼 수 있다는 말이야? 끔찍하네.”
“완성된 시설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실제로 우리가 상대했던 것들도 모두 만들어 낸 것들은 아니라더군. 대부분 사육해서 수를 늘리고 그러면서 마법과 약물로 강화한 거라는데, 자세한 건 발굴 후에나 확인이 가능할 것 같다.”
“그렇구나. 응? 우리가 상대한 것들은 약한 놈들이었네? 성안에 들였던 놈들은 완성품이고.”
몬스터를 그렇게 많이 수도 안으로 들일 수 있었던 것은 마탑에서 실험용으로 몬스터 시체를 반입한 것으로 돼 있었기 때문.
그것도 기록이 누락된 것이 많아 실제로 보고된 것은 사실과 전혀 달랐다.
“일단은 그렇다더군. 그래도 네 명이 별다른 무장도 없이 그 많은 몬스터를 처리했다는 건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루퍼드 경께서 자존심을 조금 회복한 모양이네?”
루퍼드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누가 어떤 몬스터를 얼마나 처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너희와 함께 좋은 경험을 못 한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리 좋은 경험은 아니었다. 특히 마지막엔.”
잠자코 있던 로렌스의 말에 모두가 그를 봤다.
서류를 보고 있던 로렌스가 시선을 고정한 채 다시 말했다.
“드레드의 품은 정말 아늑하고 편안하더라. 이상하게 기분은 별로였지만.”
그 말에 루퍼드가 큭큭 거리다 크게 웃었다.
“하하, 하아~ 나도 처음엔 드레드가 미네르바를 안고 나온 줄 알았지. 큭.”
“빨리 말하지 그랬나? 집어 던지고 싶은 걸 억지로 안고 나왔는데.”
역시 시선을 서류에 고정한 채 말하는 드레드.
“그럴까 봐 말하지 못했다.”
로렌스의 말에 드레드가 피식 웃었다.
미네르바도 그런 로렌스와 드레드를 번갈아 보다가 웃었다.
“그런데 루퍼드 너도 그 자리에 있었어?”
“대충 치료를 받고 너희를 지원하러 갔는데, 내가 도착하니 너희가 막 밖으로 빠져나오고 있었다. 넌 기절해 있어서 몰랐겠지만.”
“나도 기절하고 싶어서 한 건 아니라고.”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들어서 알고 있어. 물론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할 정도다.”
“뭐가?”
“그때 가장 멀쩡해 보였던 게 길리안이었거든. 널 어깨에 들쳐 메고 마법사 하나도 옆구리에 끼고 나왔지. 덕분에 얻은 게 많다.”
루퍼드의 말에 미네르바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를 메고 나왔다고?”
“두 명을 안고 달리는 건 아무래도 힘들 테니까.”
“쳇.”
길리안의 품에 안기자마자 기절했다.
그래서 그 상태로 나온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말.
인상을 쓰는 미네르바를 보며 로렌스가 웃으며 말했다.
“미안하다. 내가 다리가 부러져서 드레드의 품을 차지하는 바람에 네가 짐짝처럼 들려 나왔다만, 그래도 그게 어디냐? 목숨을 구해준 건 구해 준거니 답례로 키스라도 해줘야···.”
“그런 답례는 너나 하라고. 목숨을 구해준 드레드에게 키스 한 번 해주지그래?”
미네르바의 말에 로렌스가 드레드를 물끄러미 보다가 그를 불렀다.
“드레드.”
“키스는 사양한다. 입술 들이밀면 죽일지도 모른다.”
“나도 그럴 생각은 없다만.”
“다행이군.”
“다음에는 그냥 버려라.”
“그럴 생각이다.”
그런 그들을 보며 루퍼드가 미소를 지었다.
넘버즈들은 예전보다 많이 친해졌다.
특히 던전에 함께 들어갔다 온 그들은 서로 더 친해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하지 못한 것이 조금 아쉽게 느껴지는 거였다.
“그런데 루퍼드.”
“말해라.”
“난 지금 상황이 너무 마음에 안 들거든.”
“지금 마음에 안 드는 게 어디 한두 가지인가? 뭘 말하는 거지?”
“모든 원망의 화살과 질시의 시선이 길리안에게 쏠려 있는 거.”
미네르바의 말에 루퍼드가 깍지를 끼고 의자에 기대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음, 확실히 그건 마음에 안 든다만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말을 멈춘 루퍼드가 다른 넘버즈들을 둘러보고 다시 말했다.
“우린 같은 군주를 섬기는 기사고 그런 생각을 하는 자들은 우리에게도 잠재적인 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긴다면 절대 그냥 두지 않을 거다.”
“꽤 마음에 드는 말이네. 하지만 우린 기사야. 넘버즈라고 해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지.”
미네르바의 말에 루퍼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기사란 신분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상당히 제한적이지. 왕께서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한계가 있다. 단, 기사는 절대적 충성을 바치는 존재는 아니다. 혹시 이 자리에 왕께 무조건 적인 충성을 바치는 사람이 있나?”
루퍼드의 물음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어차피 기사와 군주는 서로를 보호하는 관계다. 한쪽이 다른 마음을 먹으면 그 계약은 성립하지도 않고, 유지되지도 않아. 기사를 이용할 수는 있지만 대놓고 버리지는 못해. 특히 넘버즈의 기사를 지키지 못하면 어떤 기사도 충성을 바치지 않을 테니까.”
“그렇지.”
“난 우리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고, 나의 군주가 옳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왕께서 날 저버리지 않는 한 내 충성의 서약은 유효하다. 그리고 기사로서 그 적을 베는 걸 주저 하지 않을 거다.”
그 말에 미네르바가 웃으며 손뼉을 쳤고 루퍼드가 피식 웃고는 계속 말했다.
“넘버즈가 그저 실력을 뽐내는 자리가 아니란 걸 다시 느꼈다. 모든 상황을 군주 혼자 인지하고 대처할 수는 없어. 기사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왕께서 그 많은 기사를 하나하나 신경 써줄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 우리가 그 짐을 나눠서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이런 마음가짐이었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고 후회하지만, 지난 것은 어쩔 수 없다. 지금이라도 느꼈으니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 되는 거다.”
“와~ 오늘 처음으로 네가 No.2에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어.”
미네르바의 말에 루퍼드가 씁쓸하게 웃곤 입을 열었다.
“미네르바 영주회의가 열리는 건 알고 있나?”
“응. 들었어.”
“내부 정리의 명분은 충분하지만 정리된 기사들과 관료 중에 귀족이 너무 많다는 게 문제다. 그들 중 내 가문의 사람도 있고 연관된 이들도 있었다. 그건 다른 영주들도 다르지 않아. 충분히 위협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지. 많은 영주가 이번 일에 반발하면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어쩔 수가 없다. 역시 최악의 경우는 무력 충돌이다.”
루퍼드가 한 명 한 명 눈을 맞춘 후 다시 말했다.
“그래서 너희에게 하는 말이지만 계속 이 길을 가려면 가문과 등질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해둬라. 최악의 경우 가문을 향해 검을 겨눠야 할지도 모른다.”
“루퍼드 경은 각오가 되셨나 보네?”
“그런 각오 없이 말을 꺼냈을까? 그래도 되도록 그런 일은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도 별로 사이는 안 좋지만 검까지, 겨누고 싶지는 않네.”
미네르바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난 영주회의 전에 아버지와 진지한 대화를 나눠 볼 생각이다. 너희도 가능하다면 그렇게 해보길 바란다. 로렌스?”
“내 쪽은 신경 쓰지 마라. 알아서 할 테니.”
로렌스의 대답에 루퍼드가 미네르바를 봤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내 상황은 대충 알잖아?”
“그래도 한번 시도는 해봐라.”
“알았어. 노력은 해볼게.”
루퍼드의 시선이 드레드에게 향했다.
“난 집안과 왕래하지 않은 지 오래다.”
“음,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루퍼드의 물음에 드레드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반대하는 결혼을 강행했다.”
“그랬던가? 몰랐군.”
“나에겐 별로 기대하지 마라.”
“알았다.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
그렇게 말한 루퍼드가 다시 서류를 집어 들었다.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영주 회의 전까지 지금의 혼란을 수습하는 거다. 아이작 경이 큰 도시가 많은 남부를 맡았고, 부단장들이 인근 직영지로 출발했다. 며칠 안에 거의 모든 왕실 직영지의 청소가 끝날 거다.”
“그런데 우리는 서류작업이야?”
미네르바의 말에 루퍼드가 웃는 얼굴로 손에든 서류를 흔들며 말했다.
“가장 중요한 일이지. 이미 말했지만 정리된 관료들 중 영주들과 관련된 자들도 많았다. 그런 자들이 영주들에게 내어주고 받아먹은 게 없을까? 없다면 말이 되지 않지. 이 안에 그런 증거가 가득 할 테니, 우린 정리하면서 그걸 찾으면 된다. 영주들의 입을 다물게 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
말을 마친 루퍼드가 씨익 웃자 모두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동안은 검 대신 펜을 들어야 할 거다. 자~ 그럼 일을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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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추석 당일은 역시 연재가 힘드네요.
그래서 새벽에 썼습니다. 연휴라서 좋네요.
자고 일어나서 또 써야지~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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