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6장(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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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현명하신 왕비님과 아름다우신 공주님들을 위해 승리하겠습니다.”
크리스가 한 말이었다.
왕비와 공주들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특히 왕비가 그를 쳐다보는 눈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왕비가 길리안을 보며 말했다.
“길리안 경은 할 말이 없습니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 말에 왕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경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왕비의 말에 크리스의 인상이 팍 구겨졌다.
왕비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쥔 홀을 들어 올리고 말했다.
“에스토의 국왕께 부여받은 권한으로 왕비인 내가 두 기사의 넘버를 건 결투를 승인합니다.”
왕비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와아아아아 하는 함성과 휘파람 소리가 경기장에 가득 찼다.
길리안은 크리스와 서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래봐야 서로 살짝 고개를 숙이는 정도였지만.
생각해보면 기사가 되고 몇 번 마주치며 인사를 건네 본 적은 있지만, 크리스는 항상 자신을 무시했었다.
귀족출신 기사 중엔 자신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 이들도 꽤 됐기에 그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솔직히 그런 건 하나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수도에 도착한 첫날 넘버즈들을 봤다.
루퍼드 경, 로렌스 경, 드레드 경, 그리고 눈앞에 있는 크리스 경.
그 네 명을 보면서 얼마나 가슴이 설레었는지 모른다.
어릴 때부터 넘버즈를 목표로 죽을 각오로 노력해왔던 자신에게 20대에 넘버즈에 오른 그들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들을 보며 절대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넘버즈는 동경의 대상이자 존경의 대상.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아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특히 기사가 되고 수도방화사건을 조사하면서부터 생각이 많이 변했다.
눈앞에 있는 크리스에게 느끼는 실망과 분노는 다른 기사들에게 느꼈던 것보다 훨씬 컸다.
그는 넘버즈는 물론 기사로서도 자격이 없다는 게 자신의 생각이었다.
아무런 잘못도 없고 보호해야 할 이들에게 무작정 검을 휘두르는 그런 이가 넘버즈에 있다는 것 자체가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잠시나마 넘버즈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존경했던 것이 후회됐다.
역시 소문만 듣고 사람을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지금은 다른 넘버즈에게 도전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복귀하면서 수도에서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얘기를 들었고, 적들의 근거지역시 그와 관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건 처리와 조사로 모두가 바쁜 상황.
결투나 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란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만은 그냥 둘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다른 기사들은 다 처벌을 받는데, 그는 그렇지가 않았으니까.
그래서 왕께 말을 꺼낸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거부당할 줄 알았다.
그런데 왕께서 그걸 허락했고, 언제가 좋으냐고 묻기에 당장 내일이라도 상관없다고 대답하니, 우선 하루정도는 쉬라고 해서 그러겠다고 했다.
다음날 아침 왕께서 크리스 경에게 도전하고 결투 날짜를 합의 하라고 해서 바로 달려가서 도전했고, 그래서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이다.
“힘만 좋은 애송이 녀석. 내게 도전한 것 울며 후회하게 해주겠다.”
크리스가 스쳐가며 말했지만 길리안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말을 몰아 자신의 자리로 갔다.
그런 길리안을 돌아본 크리스의 인상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감히 미천한 평민 따위가.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마.’
지금 이 상황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상황이 좋지 못하는 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루퍼드에게 당한 날, 왕이 미쳤는지 평민들의 편에 섰다.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모습.
기사들에게 내려진 벌은 가혹할 정도였다.
왕이 모르고 있었다고 생각지 않았다. 계속 묵인하고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그러니 오히려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다른 넘버즈들은 활약은 하는데 자신은 배제됐고, 불똥이 튈 것이라 예상했었다.
왕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봐서는 넘버즈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무 말도 없었다.
불안하고 초조했다.
그런데 어제 아침.
저 천한 기사 놈이 찾아와 대뜸 승급 결투를 신청했다.
왕도 허락했다는 말과 함께.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왕이 자신을 저 천한 놈의 명성을 높이는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왕이 허락한 상황이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리고 거부할 생각도 없었다.
감히 자신에게 도전한 놈에게, 그리고 자신을 무시한 왕에게 실력을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건 어쩌면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 자신을 바로 넘버즈에서 내린다면 가문에도 큰 모욕이다.
백작 가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서 왕이 이런 방법을 택했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기사는 강하면 그만.
놈을 꺾고 강함을 증명하면 왕도 다시 생각 할 테니까.
지면 모든 것을 잃겠지만, 절대 질 거라는 생각은 안했다.
그렇다고 놈과 진흙탕 싸움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자신과 마창시합을 벌일 용기가 있냐고 물었다.
수많은 대회에서 우승했고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검에서는 루퍼드에게 밀려도 마창시합에선 그를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만큼 가장 자신 있는 종목이란 말.
그런데 길리안이란 놈은 망설이지도 않고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오히려 자신 있어 보이는 모습에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놈이 가고 나서 화가 폭발했다.
이것저것 때려 부수는데 달려온 노예가 보여 손을 조금 댔다.
그때 부단장과 휘하 기사 하나가 들어와 자신을 말렸다.
고작 노예에게 손을 조금 댔다고 기사도를 운운하는 부단장.
어이가 없었다.
평소에도 사사건건 참견하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침 검을 휘두르고 싶었던 참이라 딱 죽지 않을 만큼 손봐줬다.
힘도 없으면서 기사도를 부르짖는 자들을 보면 그저 우스울 뿐.
며칠사이 기사들은 기사도를 부르짖고 있었다.
그걸 보면서 그들을 비웃었다.
어차피 힘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기사라는 자들도 결국 그 힘 있는 자들에게 붙어 기생하는 존재들이 아닌가?
자신이 보기에 그런 자들이 기사도를 운운하는 것은 가식 그 자체였다.
어차피 그렇게 살지도 못할 인간들이 솔직하지 못한 것이니까.
어쨌든.
모든 게 눈앞에 있는 저 천한 놈 때문이었다.
그리고 미네르바의 주변에서 얼쩡거리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천한 것.
‘말에서 떨어져 죽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크리스는 웃으며 안면가리개를 내렸다.
“길리안 꼭 이겨라.”
자신에게 랜스를 건네며 그렉이 한 말에 길리안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야, 그냥 저 자식 죽여 버려라.”
라는 케빈의 말.
“경기용 랜스로는 죽이기 힘들어.”
길리안은 손에든 랜스의 끝을 보며 그렇게 말하고, 안면 가리개를 내린 후에 틸드배리어 오른편에 섰다.
마창시합 경기장 중간에 있는 긴 나무 벽.솔직히 지금은 이 틸드배리어가 불필요하게 느껴졌다.
이것이 없을 때는 실전처럼 말을 달리며 유리한 위치를 잡으려했고 그러다 말끼리 부딪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때문에 큰 부상을 입거나 사망자가 많이 나왔고, 대회 중에 사망자가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이런 것이 설치된 것이다.
마창시합의 경기규칙은 대회마다 다르다.
그래도 대부분은 수도에서 열리는 가을 무투회의 룰을 따르는 편.
이런 틸드배리어가 생긴 지는 20년 정도 됐다고 한다.
자신은 어릴 때부터 봤던 것이다. 그때는 근처 영지에서 대회가 열리면 엘런 경과 함께 구경을 갔었다.
서로 랜스를 상대에게 꽂아 넣으면 랜스가 부서져나갔고 그 모습은 너무 인상적이고 또 멋있어서 가슴이 설레었었다.
커서 기사가 되면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엘런 경은 항상 대회와 실전은 다르다고 했었다.
그 당시에는 이해를 잘 못했는데 마상전투 기술을 배우면서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게 됐다.
일단은 서로 틸드배리어 오른쪽에 선다는 것 자체가 이상했다.
기사들이 보통 양손으로 무기를 다루는 연습을 하지만 오른 손 잡이가 대부분이고 그렇다보니 랜스는 오른손에 들게 된다.
마창시합에선 그걸 왼쪽에 있는 상대에게 찔러 넣는 것이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다르다.
아니 연습 때만 해도 다르다.
전속으로 달리는 말위에서 적에게 랜스를 꽂아 넣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래서 과녁을 만들어 놓고 말을 달리며 그걸 맞추는 연습을 하는데 그 과녁은 보통 오른쪽에 놓는다.
왼손에는 방패를 드니 굳이 상대의 방어가 용이한 쪽으로 랜스를 찔러 넣을 이유가 없다.
어차피 전장에선 널린 것이 적이고 많은 기사들이 서로 말을 달려 부딪치는 와중에 왼쪽의 적을 노린다?
그럴 정신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냥 편한 쪽으로 연습한 대로 타격이 용이한 쪽으로 찔러 넣기 마련.
오른손에 랜스를 들고 있으니 오른쪽에 있는 적을 타격하는 게 아무래도 편하다.
그래서 실전과 마창시합은 다르다는 것이다.
기사들의 용기와 실력을 선보이는 마창시합이 어느 샌가 그저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경기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기용 랜스도 실전에서 쓰는 것과는 재질부터가 달랐다.
깨지기 쉬운 목재로 만들어졌고 촉도 뭉툭해서 관통성도 없다.
찔러 넣는 각도가 비스듬하니 랜스가 부러지기 쉬운데 재질도 그렇다보니, 서로 랜스가 닿기만 하면 무조건 부서져 나간다고 보면 됐다.
처음에는 실전에서 사용하는 랜스를 그대로 썼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부상자와 사망자가 속출했고 대회 한번 치르면 멀쩡한 기사가 없을 정도. 예선전을 치르다 다음 경기를 치를 기사가 한명도 없었던 대회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랜스도 점점 바뀌고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냥 실력을 겨루는 대결이니 그런 것은 다 이해한다.
검을 들고 겨룰 때도 서로를 죽이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넘버즈의 승급을 위한 결투.
결투인데 마창시합의 룰을 전부 따르면 그냥 각지에서 열리는 보통대회랑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합에서 쓸데없이 기사들이 희생되는 것을 줄이기 위해 많이 변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역시 위험하기는 했다.
깨진 랜스의 파편이 투구의 구멍이나 갑옷 틈에 박혀 부상을 당하기도 하고 낙마해서 목이 부러져 죽는 경우도 많다.
확실히 그냥 대회에서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래도 정말 넘버즈들의 결투라면 실전과 같은 상황에서 치러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어쩔 수 없나?’
이 결투를 준비해준 것은 바로 왕이었으니까.
자신의 입장에서 크리스가 저지른 일은 분명히 죄다.
사형을 받아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그가 넘버즈여서 벌을 내리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왕실기사라도 다른 기사들이 죄를 짓고 벌을 받는 것과 넘버즈가 벌을 받는 것은 다르니까.
‘그럼 일단은···.’
넘버즈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물론 자신이 이겼을 때의 얘기다.
아까 왕비에게도 말했지만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와 형이 지켜보고 있다.
형이 고향에 내려가기 전에 결투가 잡혀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머니의 만류에도 고집스럽게 형의 갑옷을 입고 나온 이유는 형에게 꼭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넘버즈가 됐으니 새로운 갑옷도 나올 것이다.
그게 아니라도 몇 달 새 부쩍 커서 조금만 지나면 형의 갑옷도 못 입을 테니까.
형의 꿈도 넘버즈였다.
형은 몸이 저렇게 되지 않았어도 넘버즈가 되지 못했을 거라고 했지만,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일만 없었다면 시간이 조금 걸렸어도 분명 넘버즈가 됐을 것이다. 이 자리에 분명 자신보다 먼저 섰을 것이다.
길리안은 랜스를 들어 형을 가리켰다.
형이 씨익 웃는 것이 보여 자신도 웃었다.
자신이 웃는 얼굴이 보이지는 않겠지만 형은 알거라고 생각했다.
“형을 위해서 이길 거야. 반드시.”
그렇게 말하고 말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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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오탈자 수정은 내일 하겠습니다.
오늘 집에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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