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4장(3)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어? 무슨 위험한 일이라도 있었나요?”
길리안은 아레샤 공주의 물음에 웃으며 그저 술 때문에 곤란했었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확실히 위험하기는 했었다.
왕에게 새로운 성을 받고 넘버즈로 임명된 오늘은 자신에겐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뜻 깊은 날이었다.
그 후에 왕은 궁으로 복귀하려고 했었다.
그러다 왕비와 대화를 좀 하더니 백성들에게 잔치를 베푼 아레샤 공주의 고운 마음을 크게 칭찬하고, 성 밖에서 하루 묵으며 기사들과 술잔을 나누겠다고 했다.
그렇게 시작된 왕과 기사들의 술자리는 평민들과 상당히 떨어진 곳에서 이루어졌다.
왕이 직접 따라주는 술도 받았을 때만 해도 무척이나 기뻤는데 문제는 그 다음.
왕이 기사들에게 새로운 넘버즈를 축하해 주라고 하니 너도나도 다가와 술을 권하는데, 거부할 수도 없어서 주는 대로 받아마셨다.
옆에서 로렌스와 루퍼드가 같이 앉아 나눠 마셔줬는데도 기사서임 식 날 마신 술의 양을 이미 훨씬 넘어선 상태.
취기가 올라도 흐트러질 수가 없는 자리.
그때 케빈과 프란트가 와서 공주가 찾는다는 말에 얼른 일어나 이곳으로 온 것.
“기사들은 술을 좋아하고 또 잘 마신다고 들었습니다. 넘버즈에 오른 경이 술을 무서워한다니 재미있군요.”
“때로는 술이 만 명의 적보다 무서운 법이지요.”
“그렇군요.”
“그런데 무슨 일로 절 찾으셨는지 궁금합니다.”
“아! 맞다. 한스라는 이에게 이야기는 들었을 걸로 압니다.”
“예.”
“그일 때문에 보자고 하였습니다. 아무래도 빨리 지불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좀처럼 기다릴 수가 없었습니다.”
아레샤는 솔직히 마음이 조급했다.
사람이 수천 명이지만 하루 저녁 배불리 먹이고 즐기게 해 주는 것 정도야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고 시작한 일.
공주에게도 품위유지비로 돈이 나오는데 딱히 쓸 일이 없어서 그냥 모아 두었다.
그렇게 모은 돈과 정 안되면 가지고 있는 장신구들을 팔면 그 정도야 못해주겠냐고 가볍게 생각했었다.
서민들의 파티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무척 기분이 좋았다.
왕다운 아버지의 모습에 가슴이 설레고 공주이고 왕가의 일원인 것이 자랑스럽게 느껴졌었다.
아버지에게 칭찬을 들어 기분이 좋았고 들어가는 비용을 지불해 준다고 했을 때도 자신이 끝까지 책임지겠다고 했다.
역시 공주답다며 또 칭찬을 들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시작된 파티 아닌 파티.
같이 어울리지는 못해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귀족들의 그것과는 많이 다른 모습.
모르는 이들끼리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격식 없이 먹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고.
음악은 빠르고 경쾌했고 그들이 추는 춤도 무척이나 신나보였다.
낮에 보았던 힘들고 지쳐보였던 그들이 맞나 싶을 정도.
그렇게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고 좋았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처음 수천 명을 생각했지만 왕인 아버지를 따라온 이들이 일만이 넘었다. 그들도 원래 이곳에 있던 이들과 같이 즐기고 있었다.
거기에 기사들이 수백.
보통사람들보다 많이 먹고 많이 마시는 엄청난 먹보들.
계속해서 추가로 술이 오고 음식재료들이 오고.
소, 돼지, 닭 같은 가축들도 계속 가져오는데 수도에 있는 가축은 다 잡아 먹을 기세였다.
듣기로 사람들은 밤새 먹고 마실 거라고 했다.
거의 2만은 되는 사람들이 밤새 먹고 마시는 양은 얼마나 될지 상상도 안됐다.
말을 꺼내고 책임을 진다고 했으니 다른 말을 할 수도 없는 상황.
지금 당장 지불하기 힘들다면 얼마나 들어갈지 알아야 준비를 할 테니까.
길리안은 약간 초조해 보이는 아레샤 공주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는 한번 본적이 있었다.
왕에게 처음으로 불려가 실력을 선보이던 날.
이베트에게 이끌려 왕비와 함께 차를 마시면서 그녀를 봤었다.
그 자리에서 대화는 왕비와 이베트가 거의 했고 공주와 자신은 그저 대답을 하는 정도.
그때는 왕비와 똑 닮아 차갑게 느껴졌었는데 오늘은 또 달랐다.
그녀의 오른쪽에 앉은 첫째공주 노엘리아는 오늘 처음 봤다.
시선을 왼쪽으로 돌리니 그곳에 서있던 프란트가 빨리 답을 주라는 듯 눈짓을 했다.
그에게 듣기론 두 공주들과는 꽤 친한 편이라고 했다.
일찍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얼굴도 기억을 못한다는 프란트.
그런 그를 왕비가 칼랜베르크로 가기 전까지 돌봐 줬다고 했다. 그래서 어릴 때 공주들과 곧잘 어울렸고, 돌아온 지금도 사이가 좋다고 했다.
아레샤와는 동갑인데 그녀는 프란트를 손위로 대했고 그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프란트에게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인 길리안이 아레샤에게 말했다.
“지금 지불하실 생각이십니까?”
“가능하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아직도 계속 추가되고 있는데 정확히 알 수 있는 건가요?”
“물론입니다.”
“그, 그렇군요. 그럼 어서 말해주세요.”
“우선 이친구도 같이 도움을 줬습니다.”
그러면서 케빈을 소개했다.
“다시 인사드립니다. 케빈 폰 에른스트입니다. 공주님.”
“기억하고 있습니다. 역시 같이 지불해야겠지요.”
공주의 말에 길리안이 말했다.
“처음에 5만 추가로 5만 아침까지 5만이 더 들 겁니다.”
“실버인가요?”
“골드입니다.”
길리안이 단호하게 말하자 공주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옆에 있던 케빈도 길리안을 쳐다보면 뭐하는 거냐는 듯 눈짓을 했다.
그런 케빈에게 눈을 찡긋 해보이고 말했다.
“너도 빨리 말씀드려라.”
케빈은 길리안이 왜 저러나 싶었다.
몇 천이라면 또 모르지만 솔직히 길리안이 말한 만큼 그렇게 많이 들지 않았고, 그렇게 들 리도 없었다.
술이 취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안 그럴 녀석이 뭔가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 응해주기로 마음먹고 입을 열었다.
“전 그만큼 많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얼마나···?”
“딱 10만입니다. 물론 골드입니다.”
그 말에 공주의 눈은 더 커졌다.
옆에 있던 노엘리아와 프란트도 놀란 듯 했다.
공주가 길리안을 불렀다기에 뭔 일인가 싶어 옆에 있다가 따라온 루퍼드도 놀라기는 마찬가지.
뭔가 말하려고 할 때 옆에 있던 로렌스가 어깨를 잡고 고개를 저어서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마, 많이 들었군요.”
합치면 25만 골드.
아레샤는 솔직히 겁이 덜컥 났다.
공주인 자신은 물론 왕에게도 큰돈이다.
많이 들 거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 많이 들어간 줄은 몰랐다.
앞에 놓여있는 작은 상자 두 개를 만지작거렸다.
하나에는 그동안 모은 골드가 들어있었고, 하나는 보석함이었다.
골드만으로는 한참 부족했다.
그래도 장신구들은 꽤 값진 것이라 들었기에 조금 기대를 해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망설이던 아레샤는 상자두개를 열어 보이며 길리안에게 이정도면 되겠냐고 물었다.
그가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 울상이 됐다.
“아레샤 걱정 마렴. 언니가 도와줄 테니까.”
“나도 돕겠다.”
옆에 있던 프란트까지 나서자 그녀의 표정이 좀 나아졌다.
그걸 본 길리안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자신도 처음 수도에 와서 세상물정 모른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공주들은 심각할 정도.
왕자들처럼 아카데미에 보내는 것도 아니고, 듣기로는 왕궁 외부의 파티나 무도회에는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어쩌다 나오는 것도 왕비나 왕이 함께할 때였다.
그러니 공주들은 그렇다고 치고, 이렇게 하면 프란트는 나서서 뭐라고 의문을 제기할 줄 알았다.
그런데 고작 한다는 말이 도와주겠단다.
결국 같이 돈을 내겠다는 소리.
이곳에서 한 아카데미 생활은 그렇다고 쳐도 칼랜베르크를 돌아봤다는데 도대체 뭘 본건지.
솔직히 자신도 수도에 올라와 큰돈이 생겨서 이런저런 일을 해보지 않았다면 돈에 대해 무감각 했을지도 몰랐다.
돈 욕심이 많았던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사업을 해보니 그건 또 그 나름대로 배울 것이 많았다.
프란트에게는 친구로서 좀 더 많은 것을 알려줘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직접 보고, 직접 경험하고, 직접 느끼는 것이 가장 좋은 공부가 되니까.
“미안합니다. 길리안 경.”
길리안은 공주의 말에 생각을 접었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은 힘들 것 같네요.”
“공주님께서는 정말 지불하실 생각이십니까?”
“물론입니다.”
“음. 공주님 외람되지만 제가 몇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러세요.”
“이번일은 공주님께서 제가 부리는 사람에게 부탁하신 일이지만, 결국은 저와의 거래입니다.”
“네, 그래요.”
“보통 물건을 직접 사는 것이 아닌 거래를 할 때는 계약서를 씁니다. 그리고 거래 금액이 클수록 계약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하지만 전 경을 믿고 맡긴 것입니다.”
“저를 믿으실 만큼 절 잘 알고 계시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경에 대한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의 기사이고 왕국의 넘버즈입니다. 믿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소문은 과장되기 쉽습니다. 저에 대한 이야기들도 그럴 겁니다. 그리고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모르는 것이 사람입니다.”
“음.”
“그리고 믿음과는 별도로 필요한 일입니다. 믿는다고 무조건 맡겨 놓으신다면 지금과 같은 일을 당하실수 있습니다.”
“당하다니요?”
그리고 잠시 생각하던 아레샤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그럼 내게 한 말이 거짓이란 말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음···. 왜 거짓을 말한 건가요?”
“언제든 이런 일을 당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음.”
“우선 돈의 가치를 잘 모르십니다. 이곳에 있는 사람의 수가 2만이라 쳐도 제 말대로라면 한 사람당 25골드를 소비한 겁니다. 보통 노역을 나가면 하루에 구리동전 10개를 받습니다. 왕국의 5급 행정관이 한 달에 50실버를 받고 2급 행정관은 12골드를 받습니다. 이제 막 기사가 된 제가 15골드를 받습니다.”
그렇게 따지니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그, 그렇군요.”
“소는 얼마인지, 돼지는 얼마인지, 들어오는 양은 얼마나 되는지, 다른 사람을 시켜 살피게 하셔도 어느 정도 금액이 들어가는지 대충 아실 수 있으셨을 겁니다. 그건 절 믿고 안 믿고를 떠나 확인 하셨어야 하는 일입니다. 계약서를 쓰지도 않으셨고 확인도 하지 않으셨으니 제가 요구하는 대로 주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신 겁니다.”
아레샤는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요. 확실히 경의 말이 맞습니다.”
“기분 나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니에요.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겁니다. 아버님께서 하신 실수를 반복하고 있었군요. 많이 배우게 되네요. 고마워요.”
“아닙니다.”
“그래도 이번 건은 경을 믿고 진행 할 수밖에 없겠네요. 확인하기엔 너무 늦어버렸으니까요.”
“절 믿으십니까?”
“날 속일 수 있었는데도 그리하지 않았으니까요. 믿겠어요.”
“그럼 제게 전적으로 맡기시는 걸로 알겠습니다.”
그 말에 아레샤가 노엘리아와 프란트를 번갈아 봤다.
둘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뭐 그러시다면.”
길리안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아레샤의 앞에 놓았다.
“이건 제가 담보로 맡아둔 겁니다.”
“네. 내 귀걸이네요.”
“그럼.”
그리고 열려있는 상자에서 금화 하나를 집어 케빈에게 던졌다.
“그거면 될까?”
그 말에 케빈이 웃으며 금화를 공중으로 던졌다가 다시 받으며 말했다.
“충분하다.”
“나도! 나··· 도··· 공주님 금화···.”
입구 쪽에 있던 그렉이 점점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는 걸 보고 길리안이 웃으며 금화 하나를 던졌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안톤에게도 하나를 던졌다.
“난 괜찮다만.”
“그래도 받아.”
그리고 길리안이 금화 하나를 집어 공주에게 보이며 말했다.
“이걸로 거래는 완료됐습니다.”
그 말에 아레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건 말이 안 되잖아요.”
“됩니다.”
“안돼요.”
“제게 모두 맡기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그건 이러라고 그런 게 아니에요.”
“전적으로 제게 맡기셨으니 얼마를 받을지는 제가 결정합니다.”
“으음.”
“공주님께서는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생각해주시는 고운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그들을 아껴주셨으면 합니다. 그럼 전 취기가 많이 올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길리안은 예를 표하고 막사 밖으로 나가자 케빈 등도 예를 표하고 뒤를 따랐다.
“음. 이건. 이건 좀. 아 답답해. 이럴 땐 뭐라고 해야 하죠?”
아레샤가 노엘리아를 봤지만 그저 미소를 지을 뿐.
“아! 정말!”
그러면서 프란트를 봤지만 그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프란트 왕자. 왕자는 좋은 친구를 두었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왕비님을 자주 찾아뵙도록 해요. 왕자가 칼랜베르크에서 지내며 있었던 일들을 들려드리면 좋아하실 겁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억울한 표정을 한 아레샤를 사이에 두고 노엘리아는 프란트와 대화를 했다.
그런 왕자와 공주들을 보던 루퍼드가 로렌스에게 나가자는 듯 손짓을 했다.
로렌스는 나가기 전에 노엘리아를 다시 한 번 보고 고개를 돌렸다.
밖으로 나와서 눈을 감고 움직이지 않자 루퍼드가 왜 그러냐고 물었다. 별거 아니라고 답한 로렌스는 어두워진 밤하늘에 떠있는 달을 쳐다봤다.
‘못 볼 걸 봐버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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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의말
로렌스는 뭘 본걸까요?
다음 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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