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3장(5)
![DUMMY](http://cdn1.munpia.com/blank.png)
“경의 말대로 넘버즈는 그래야 하는 것이 맞다.”
넘버즈는 왕실을 대표하는 기사이고 왕국을 대표하는 기사이다.
에런 왕도 인정은 했지만 따져보면 그렇지만은 않다.
넘버즈의 자격조건은 첫째가 실력이다.
그만큼 개개인의 무력은 강하니 최고의 기사라 칭할 수는 있다. 하지만 강하기만 하다고 진정한 기사라고 할 수는 없다.
이번 일로 기사들의 기강을 바로 세우고 단합을 이끌어 내려면 넘버즈 중에서도 정리해야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고 보면.’
지금의 젊은 넘버즈들은 예전의 넘버즈들과는 많이 달랐다.
젊은 넘버즈들 끼리 허물없이 지내고 있다는 것은 들어 알고 있었다.
그건 그 나름대로 놀라운 일.
대귀족의 자제들이면서도 자유분방하고 타고난 신분보다 스스로의 힘으로 얻은 것에 더 가치를 두고 있다.
아무리 영지와 작위를 직접 물려받는 장남들이 아니라고는 하나 위에서 보면 쉽게 이해하긴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알려지진 않았지만 20여 년 전에도 검을 부러트리고 나간 이가 있었다.
바로 엘런.
지금의 길리안처럼 많은 이들의 앞에서 보란 듯이 검을 부러트린 것은 아니나, 자신과 당시 넘버즈의 기사들이 보는 앞에서 그랬었다.
하지만 당시의 넘버즈들은 지금의 넘버즈들처럼 그를 옹호하지 않았다. 드겔만이 사석에 있을 때 그가 검을 부러트린 의미를 생각해보라고 했었다.
아마 길리안처럼 크게 일을 벌였다면 엘런은 살아있기 힘들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면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과거 같으면 아무리 먹고살기 힘들어도 평민들이 모여 왕에게 야유를 보낼 수는 없었을 테니까.
예전 같으면 참다 참다 굶어 죽을 수는 없으니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것이 농기구를 들고 영주의 성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건 반란이나 폭동으로 밖에 볼 수 없으니 당연히 무력으로 진압했다.
농노나 평민이나 별 차이도 없었고 무지하고 힘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금의 평민들은 더 이상 무지하지 않다.
수가 늘어나고 그중에 배운 자들이 많아졌고 부를 가진 자들도 늘었다. 아카데미에서 배우는 평민의 수도 해마다 늘고 있다.
많은 이들이 모여드는 수도이니 다른 곳에 비할 바가 아니다.
영주들이나 귀족들이 내는 세금보다 직영지의 평민들이 내는 세금이 훨씬 많다.
그만큼 그들의 힘이 커졌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자신도 그들의 목소리를 무시 할 수 없어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니까.
그리고 예전 같으면 기사들 또한 그들의 편에 서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기사들은 평민 출신과 귀족 중에도 평 귀족 출신이 많다.
권력의 중심에서 멀리 있는 이들.
가진 것이 없는 평 귀족은 평민보다 못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하지만 기사는 어딜 가도 무시는 당하지 않는다.
그들에겐 기사의 작위가 그만큼 큰 가치가 있는 것.
평민들과 평 귀족들이 아카데미에서 같은 교육을 받는다.
한 공간에서 지내는 만큼 문제도 있지만 서로를 이해 할 수 있는 계기도 될 것이다.
왕자만 해도 기사와 평 귀족과 아직 기사도 되지 않은 평민을 친구라고 하였다.
신분의 경계가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심각하게 경계해야 할 일일수도 있지만, 탓을 하려면 개혁을 통해 교육을 장려한 타노스 3세를 원망해야 할 것이다.
그 후 100여년의 시간이 흘러 지금의 시대가 온 것이니까.
그리고 어차피 그 또한 선대의 왕.
자신도 그처럼 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왕위를 물려받은 집권 초기만 해도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한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에런 왕은 손에 느껴지는 따스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고개를 돌렸다.
왕비가 자신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서야 자신이 꽤 오래 말이 없었음을 깨닫고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보이고 앞을 봤다.
“크흠. 그래 경은 어떠한가. 로렌스 경의 말처럼 최고의 기사와 진정한 기사, 넘버즈는 같은 말인가?”
“예전엔 그랬습니다.”
“지금은 아니라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그럼 경이 생각하는 진정한 기사란 무엇인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기사도를 지키는 것은 너무 힘들고 그에 근거한 기사 서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또한 법위에 설 수는 없습니다. 법을 지키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그 법을 집행하는 것은 또 너무 어렵게 느껴졌습니다. 주어진 권한은 어디까지인지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사이에서 혼란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길리안의 말에 에런 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또한 기사의 서임을 받은 기사이고 고민해 본적이 있는 것이다.”
“차라리 이것이 진정한 기사라고 명문화 돼있거나, 누군가가 확실한 길을 제시해준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흐음.”
왕은 잠시 생각하다가 슬쩍 고개를 돌려 드겔을 보았다.
여전히 서류뭉치를 살피고 있는 드겔.
그를 보는 것은 왕만이 아니었다. 모여 있는 수백의 기사는 물론 일반인들까지,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해 있었다.
그걸 모를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경은 언제까지 모른 척 할 생각이오?”
왕의 말에 드겔이 고개를 들며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왕국 최고의 기사인 넘버즈 No.1인 경이 기사들에게 진정한 기사의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은 어떻소?”
빙글빙글 웃으며 말하는 왕을 보고 다시 한숨을 쉰 드겔이 옆에 있던 크락시스를 봤다.
하지만 그는 눈도 안 마주치겠다는 듯이 앞만 보고 있을 뿐.
“왕께서 이 늙은 기사를 너무 곤란하게 하십니다.”
“이 자리에서 경이 아니면 누가 진정한 기사의 자격을 논할 수 있겠소?”
“허허 이것 참.”
하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난 드겔이 앞으로 나섰다.
“경들은 내가 진정한 기사라 생각하는가?”
그 물음에 기사들이 일제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드겔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기사이기는 하나 진정한 기사는 아니네. 솔직히 진정한 기사란 말로만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지. 기사라는 제한적인 위치에서 그 모든 것을 지키며 살 수 없네. 하물며 한나라의 왕께서도 자유로이 마음대로 못하는 것이 있으니 말일세.”
잠시 왕을 본 드겔이 다시 말했다.
“어차피 그것은 개인의 생각보다는 다른 이들의 평가라 할 수 있네. 내가 아무리 진정한 기사라 우긴다 해도 남들이 보기에 아니라면 그건 아닌 것일 테니까. 저마다 생각하는 기사의 모습이 다르고 보는 눈이 다르니 평가가 다르네. 그러니 진정한 기사다 뭐다 하는 것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말게나.”
드겔이 말을 마칠 때는 길리안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같은 기사로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있네. 경은 기사가 무어라 생각하는가?”
드겔이 로렌스를 보며 묻자 잠시 생각하던 그가 답했다.
“결국에는 싸우는 사람이겠지요.”
“맞네. 무장을 하고 말을 타고 적진에 돌격하는 우리는 기사이며 군인이지. 우리는 전장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들이지. 경들이 어릴 때부터 훈련해 온 것들은 무엇인가?”
기사들을 둘러본 드겔이 다시 말했다.
“바로 살인의 기술이네. 갑옷을 입고 싸울 체력을 기르고 말을 타고 싸우는 기술, 무기를 다루는 기술. 그 모든 것이 다 살인의 기술이 아닌가?”
맞는 말이었다.
“그럼 경들이 어릴 때부터 손에 잡은 이것은 무엇인가?”
그러면서 검을 뽑아들었다.
햇살에 눈이 부시도록 빛나는 자신의 검을 바라보던 드겔이 말했다.
“이건 상대를 위협하고 나를 지키는 무기이지만 결국 살인을 위한 도구이네. 아무리 좋게 포장을 해도 태생이 그런 물건이니.”
그러면서 검을 내렸다.
“종합해보면 우리는 어릴 때부터 전장에서 적을 죽이기 위해 키워진 살인자들이란 말이네.”
원색적이지만 사실이었다.
“그런 살인자들이 살인을 위한 무기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지. 그리 인상들 쓰지 말게.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우리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는 정말 살인자는 아니지 않은가?”
기사들이 웃자 드겔도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과거에는 정말 그랬다고 하더군. 늘 전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니 그런 자들이 무엇을 했겠는가? 힘이 있으니 남의 것을 빼앗고 죽이고 마음에든 여자를 강제로 취하던 그들이 바로 예전의 기사라는 자들이었지.”
고개를 끄덕이는 기사들.
“그래서 기사도가 나온 것이네. 그러지 말라고 말일세. 지키는 자보다 지키지 않는 자가 더 많으니 지키면 존경을 받는 것이 기사도일세. 그럼 왜 기사도를 지키기 어려운가?”
잠시 둘러봐도 대답하는 이가 없자 다시 말했다.
“그것은 힘 있는 자가 그 힘을 휘두르는 것보다 그러지 않는 것이 어렵기 때문이네. 경들은 어떠한가? 다는 아니라고 해도 기사도의 몇 가지는 지키기 위해 노력하겠지.”
그러면서 다시 검을 들어보였다.
“이검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고 스스로를 갈고 닦으며 마음과 검을 바로 세우려 노력하면! 나는 그 정도면 진정한 기사라고 생각하네. 그 정도는 다들 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스스로 아닌 것 같다면 지금부터라도 하면 되는 것이네. 군인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적에게는 모두가 두려워할 살인자가 되고 보통 때는 스스로를 갈고 닦는 기사가 되면 되는 것이니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기사들이 웃자 드겔이 다시 말했다.
“지금까지 말한 것은 나의 생각일 뿐이네. 자 그럼 묻겠네. 여기 있는 길리안 경은 진정한 기사라 생각하는가? 그리 생각하는 이는 검을 들어보게.”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검을 뽑은 기사들이 높이 쳐들었다. 그 뒤에 있는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손을 흔들었다.
“보았는가? 경이 진정한 기사라는군.”
“저는···.”
“아아. 경의 생각을 묻는 것이 아니네. 저 많은 이들이 경을 진정한 기사라 말하고 있네. 그럼 그런 것이라네. 이런 것은 왕께서도 해줄 수가 없는 일이야. 그러니 경은 진정한 기사가 되는 길을 고민하지 말고 앞으로도 지금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마음을 다지게. 그게 경이 해야 할 일이네.”
“음.”
“자 그러니 경이 넘버즈가 되면 최고의 기사와 진정한 기사와 넘버즈는 같은 말이 되네. 아니 그런가?”
“전 아직···.”
“부족하다고 말하려는가? 허허. 경들은 내일 당장 출신아카데미로 가서 재입학을 하게.”
기사들이 웃자 드겔이 길리안을 보며 말했다.
“경이 겸손한 것은 알고 있네. 허나 뭐든 지나치면 그 또한 좋지 못한 것. 이곳에 70명의 기사와 싸운다 해도 물러서지 않을 기사는 많네. 허나 경과 같은 결과를 낼 수 있는 기사는 몇 없다네. 경은 아직 스스로가 얼마나 강한지 얼마나 대단하지 모르고 있는 것 같군.”
그리고 돌아서 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왕께 청합니다.”
“말해보시오.”
“왕께서도 그의 결투를 보지 못하셨습니다.”
“아쉽게도 말로만 들었소.”
“그러니 지금 눈앞에서 그의 실력을 한번 다시 보시지요.”
“그것도 좋겠지.”
“허나 보통 방법으로는 그의 진짜 실력을 보실 수 없을 겁니다.”
“그럼 경의 말대로 죽고 죽이는 싸움이어야 가능하단 것이오?”
“그렇습니다.”
“허허. 이것 참.”
전장도 아닌 곳에서 1대 72의 싸움은 지금까지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지 모를 일.
그리고 전장에서도 쉽게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수많은 이들이 지켜봤고 벌써 수도 전체에서 화자가 되고 있는 일.
앞으로 길리안에게 감히 결투를 신청할 기사는 없다고 봐도 좋았다.
존재만으로도 다른 귀족들에게 위협이 되는 기사.
드겔이 바로 그런 기사였다.
길리안이 아직은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해도 나이를 생각하면 정녕 놀라운 일이라 하겠다.
지금 당장은 물론 향후 수십 년간, 젊은 넘버즈들과 왕가를 수호 할 수 있는 이였으니까.
자신이 품지 않으면 다른 이들이 데려갈 테고 그건 절대 반갑지 않은 일이었다.
왕인 자신에게 그의 출신이 평민인 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다. 잃으면 득보가 실이 크다.
그를 품을 생각이고 그도 자신을 따를 생각이니 문제는 없었다.
드겔의 눈은 정확하다.
그의 말을 들어 실력은 알았으나 솔직히 직접 보고 싶기도 했다.
그렇다고 실력 좀 보겠다고 목숨 걸고 싸우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저번처럼 근위기사들을 제압하라고 해봐야 별 의미가 없어 보였다.
“왕께서 보고 싶으시다면 방법이 없지는 않습니다.”
“말해보시오.”
“제가 상대하면 됩니다.”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어떡하죠? 한번 붙일까요? ㅎㅎ
음 그보다 복귀해서 연재시작하고 하루 한편 정도는 쓴 것 같네요. 다행히...
재밌으시면 추천 꾹!
진행 느려!
원래 이런 거 아시면서~^^;
텨!!
Comment '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