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버즈. 22장(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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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리안은 해머를 놓고 쓰러져있는 거구의 기사에게 다가가 다리를 잡았다.
그리고 몇 바퀴 돌아 시체를 기사들에게 던졌다.
그러자마자 반응이 왔다.
기사가 어쩌고 뭐가 어쩌고 하면서 분노해서 자신에게 달려오는 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기사도에 첫째로 꼽는 것이 무용이다. 그리고 기사서약을 할 때도 나온다.
전투에선 물러나지 않고 용맹하게 싸우고, 전투가 끝난 후에는 관용을 베풀라했다.
어디에도 시체를 이용하지 말라는 말은 없었다. 있으면 저리 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시체는 그저 시체다.
그리고 적의 시체 따위 신경 쓸 것도 없다. 적어도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에는 말이다. 묻어주는 건 전투 끝나고 나서다.
반응은 있었지만 기사들 전부가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이십 여명의 기사들이 달려오자 길리안도 움직였다. 포위되기는 싫고 어차피 달려오는 속도는 다 다르다.
길리안은 제일 앞에 있는 기사에게 달려들었다.
오른 손에 든 해머를 휘두르자 기사가 달려오던 그대로 몸을 굴렸다. 앞선 이들이 당하는 것을 보고 막을 생각을 아예 하지 않은 것.
그를 무시하고 가까운 다른 기사에게 해머를 휘둘렀다.
위에서 아래로 크게 휘두른 길리안의 해머를 기사가 막을 생각을 버리고 뒤로 훌쩍 물러났다.
길리안은 휘두른 해머가 땅을 때리는 동시에 왼손의 해머를 상대에게 던졌다.
방패로 막는 것을 보고 남은 해머를 양손으로 쥐고 크게 휘둘렀다.
기사는 피하기엔 늦어 힘을 주고 막았지만 ‘퍽’ 소리와 함께 방패가 깨져나가고 몸이 붕 떠 날아갔다. 땅에 떨어져 팔을 움켜잡고 신음하는 그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이미 그가 날아갈 때 다른 기사를 덮치고 있었으니까.
그가 길리안의 공격을 몇 번 피하는 동안 세 명이 가세해 포위했다.
포위당한 길리안이 해머를 양손으로 잡고 횡으로 크게 휘두르자 기사들이 분분히 물러났다.
저걸 맞으면 어떻게 되는지 이미 똑똑히 봤기 때문.
길리안은 회전을 멈추지 않고 해머의 방향을 틀어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다.
그 틈을 노려 양 옆에서 공격이 들어왔다.
하지만 길리안은 땅을 친 해머의 손잡이를 지지대 삼아 그대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바로 앞에 있던 기사의 머리를 넘어 뒤에 착지해 그를 붙잡고 팔을 비틀었다.
갑옷을 입고 있지 않을 때처럼 너무도 쉽게 꺾이는 팔.
팔을 꺾인 기사는 비명을 지르고 다른 기사 하나가 길리안의 등을 노렸다.
길리안은 붙잡고 있던 기사로 그 공격을 막았다.
그리고 다른 쪽에서 달려드는 기사에게 잡고 있던 기사를 던지고 방금 동료를 공격하고 당황한 기사의 팔을 잡아 당겼다.
기사는 길리안이 잡아당기는 대로 훅 끌려가 다른 기사와 부딪혔다.
길리안은 땅에 떨어진 메이스를 들고 서로 부딪친 기사들을 공격했다.
타격부위는 당연히 머리.
그렇게 기사둘이 엉겨 쓰러지는 것을 두고 다른 이에게 향했다. 그때 등에 느껴지는 충격에 주춤 했지만 바로 돌아서 상대에게 달려들었다.
철퇴로 길리안을 타격했던 기사는 물러나며 다시 무기를 휘둘렀다.
그걸 슬쩍 피하며 메이스로 손잡이와 연결된 쇠사슬을 치자 철퇴가 감겼다. 길리안이 자신 쪽으로 훅 당기자 기사는 무기를 쥔 채로 끌려왔고, 다리를 걸자 그가 앞으로 넘어졌다.
철퇴를 풀어 오른손에 쥐고 메이스를 왼손에 쥐었다.
넘어졌던 이가 일어나려고하자 발로 걷어차고 옆에서 달려드는 이에게 철퇴를 휘둘렀다.
큰 해머를 휘두를 때보다 훨씬 빠른 공격.
무기를 고집할 생각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막고 때리고 가까운 거리에서 치고받기에는 한손무기가 더 편했다.
길리안의 전투방식은 기사들의 예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있었다.
잡고 있는 사람으로 공격을 막고, 땅에 떨어진 무기를 집어 공격을 하고, 들고 있던 무기를 던지는 건 예사요 필요하면 버리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길리안에게 잡히면 무기를 뺏기고 관절이 꺾이고, 의지와는 상관없이 하늘을 날아 처박혔다. 땅에 쓰러져 신음하는 자도 들어 집어던지거나 무기처럼 휘둘렀다.
방패를 들어 막으면 방패가 깨져나가거나 그대로 날아가기도 했다. 휘두르는 무기에 머리라도 맞으면 다시 일어나는 이가 없었다.
어지간한 공격은 갑옷의 방어력을 믿고 대충 몸으로 때워도 되는데, 길리안에게는 그런 상식이 통하질 않았다.
길리안은 자기들의 공격을 대충 몸으로 때우기도 하는데 이쪽은 그렇지가 못하니 쉽게 공격 할 수도 없었다.
다른 것도 차이가 많이 났지만 일단 힘의 차이가 너무도 컸다.
어느 샌가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이 기사들의 머릿속에 맴돌기 시작했다.
이제 관중들은 더 이상 환호나 야유를 하지 않았다.
그럴 타이밍도 없었고 기사들이 쓰러지는 속도도 엄청나게 빨랐다.
모두가 숨 가쁘게 진행되는 전투에 집중했다.
기사들의 고함 소리와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 그리고 비명소리만 투기장에 울려 퍼질 뿐.
“대단하군.”
길리안의 전투를 본 루퍼드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일전에 근위기사들과 겨룰 때 봤지만 지금은 그때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물론 죽이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랬겠지만, 그때도 지금 같은 상황을 주고 싸웠으면 몇 분 만에 근위기사들은 바닥에 널브러졌을 것이다.
엄청난 괴력과 유연성. 단순하지만 빠르고 효율적인 공격.
멋 같은 것은 일체 없었고, 잔인하기도 했다.
관중들 중 귀족 가 여식들 몇몇은 기절하기도 했으니까.
마치 전투는 이렇게 하는 거라고 보여주는 듯 했다.
솔직히 이정도로 일방적으로 전투가 흘러갈 걸 예상하진 못했었다.
볼 때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길리안에게 놀라움을 넘어 감탄하고 있었다.
루퍼드는 옆에 앉은 로렌스를 슬쩍 봤다.
별로 놀라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난 별로 놀라지 않았다.”
쳐다보지도 않고 말하는 로렌스를 보고 피식 웃었다.
“미네르바는 놀란 것 같지만.”
로렌스 옆에 앉은 미네르바를 보니 그의 말대로 꽤나 놀란 듯 했다.
미네르바는 솔직히 놀라고 있었다. 그게 얼굴에 나타나고 있다는 걸 의식하지 못할 만큼.
그가 그토록 담담했던 이유를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자기가 아는 그 길리안이 맞나 싶을 정도의 모습.
지금의 길리안은 한 마리 야수 같았다.
그와 붙으면 이길 자신은 있었다. 그처럼 많은 기사들과 싸워도 이길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길리안처럼 싸우지는 못할 것 같았다.
“마치 오우거가 오크들 사이에서 날뛰는 것 같구먼.”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미네르바 등은 뒤를 돌아봤다.
후드를 쓰고 앉아있는 드겔.
“앞을 보시게.”
그 말에 다시 길리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잘들 보고 배우게. 전투는 저렇게 하는 것이니.”
그건 셋 다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그와 검술을 겨루고 대련을 하면 그에게 이길 순 있겠지. 지금당장은 그보다 경들이 강한 것은 맞네. 허나 목숨을 걸고 싸우면 지금도 이길 거라 장담은 못할 거네. 저런 기사를 얕보고 상대하면 저들처럼 되거든.”
아마도 오늘 이후로 길리안을 얕보는 기사는 없을 것이다.
“전투를 벌일 때는 잔인해질 필요도 있네. 한 열 명쯤 쓰러졌을 때부터 결과는 이미 나왔으니. 사기는 그만큼 중요하니까.”
아직 반수이상의 기사들이 남았지만 드겔의 말처럼 결과는 정해진 것처럼 보였다.
기사들은 길리안에게 쉽게 공격을 못하고, 그가 공격을 하면 피하는데 급급하거나 협력을 해서 간신히 버티는 정도.
딱 봐도 겁을 먹고 있었다.
“저런 건 연습으로 되는 게 아니야. 그만큼 실전을 겪으며 몸으로 익혔다는 말이지. 간만에 눈이 호강하는군. 그나저나 그와 한번 싸워보고 싶군.”
그 말에 세 명이 동시에 뒤를 돌아봤다.
셋 다 그런 생각을 하긴 했지만 드겔까지 그런 생각을 할 줄은 몰랐으니까.
“날 보지 말고 앞을 보시게. 저 좋은 구경을 놓칠 생각인가?”
길리안은 숨을 고르며 주변을 둘러봤다.
정신없이 치고 박고 싸우다 이제 조금 여유가 생겼다.
몇 번 위험한 고비도 있었지만 아직 부상을 당하지도 지치지지도 않았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이들이 보였다.
죽은 이들도 있고 기절한 이도 있고 고통스러워 신음하는 이도 있었다.
대충 가늠해보니 반 정도 남은 것 같았다.
길리안이 보기에 이들은 약했다.
실력이 약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약하고 의지가 약했다.
죽인다는 건 상대방의 전부를 빼앗은 것이다. 그러니 누굴 죽이려면 이쪽도 죽을 각오는 해야 한다.
자신도 죽고 싶지 않으니 죽을힘을 다해 싸우는 거다.
라이라프 산맥어서 몬스터들과 싸울 때 늘 그랬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그게 없었다.
지휘하는 이가 있고 조직적으로 대항했으면 이렇게 하진 못했겠지만, 그랬다고 해도 자신은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한쪽이 죽거나, 전투불능이 되거나, 항복할 때까지 계속 되는 결투다.
길리안은 빙 둘러 포위한 기사들을 봤다.
마치 자신을 괴물 보듯 하고 있었다.
싸우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항복의사를 밝히지 않고 있는 게 이상했다.
뭐 상관없었다.
저들이 끝낼 생각이 없으면 이쪽에서 끝내면 되는 것이니까.
길리안은 눈에 보이는 기사에게 달려들었다.
길리안의 공격을 받은 기사는 죽을 맛이었다.
제일 가깝지도 않은데 눈이 딱 마주치더니 득달같이 달려와 무기를 휘둘렀다.
간신히 피하며 보니 두어 명의 기사가 뒤에서 길리안을 덮치는걸 보고 그나마 안심했다.
당연히 돌아서서 방어를 하거나 피할 줄 알았는데 웬걸.
자신에게 몸을 날려 허리를 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어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에 일어나려고 했지만 이미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무슨 힘이 그렇게도 센지.
어깨와 한쪽 팔이 잡힌 채로 일어났다. 아니 들렸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조금 있으면 다른 이들처럼 팔이 꺾이고 무기처럼 휘둘려질 거란 생각을 하니 소름이 돋았다.
달려온 기사들이 앞에서 공격도 못하고 망설이는 모습이 보였다.
어쩌면 방패로 쓰일 수도 있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동료들에게 구원의 눈빛을 보내는 게 전부였다.
“항복 하시겠습니까?”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였다.
“말로 하시죠.”
“하, 항복. 항복하겠소.”
그 말과 동시에 옆으로 밀쳐졌다.
자유를 얻자마자 그대로 땅에 주저앉았다.
나중 일은 어떻게 될지 지금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저 살았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한명의 항복을 받아낸 길리안은 앞에 선 기사들에게 다가갔다.
한 기사가 뒤로 몇 걸음 물러나더니 무기를 땅에 버렸다.
“졌소.”
그리고 두 손을 들고 뒤로 물러났다.
그걸 본 다른 기사도 패배를 시인하고 무기를 버렸다.
길리안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무기를 버리는 기사들이 늘어났다.
한두 명이 패배를 시인하자 너도나도 무기를 버리기 시작한 것.
이미 반수 이상이 바닥에 쓰러져있는 상황. 그중에는 꽤나 이름 있는 기사들도 있었다.
그런 이들도 죽거나 부상에 신음하고 있는데 싸울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그렇게 서있는 기사들이 모두 무기를 내려놓았다.
길리안은 그런 기사들을 씁쓸한 눈빛으로 보다 이베트가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무릎을 모아 웅크리고 앉아 얼굴을 묻고 있던 라데카의 귀에 사람들의 환성이 들렸다.
“말론 어떻게 됐어?”
그녀의 물음에 말론은 웃는 눈으로 라데카를 봤다.
결투가 시작되고 처음에는 지켜보려는 듯 자세를 바로하고 있던 아가씨는 첫 기사가 쓰러지자마자 몸을 웅크렸다.
원래 이런 것을 잘 보지 못했다.
그리고 안 봐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 무리해서 계속 지켜봤다면 지금쯤 기절했을 것이다.
문제는 자신의 이름을 백번도 넘게 불렀다는 것.
말론 어때? 말론 그는 괜찮아? 말론 이기고 있어? 말론 다치지는 않았어? 등등...
“말론 어떻게 됐냐고!”
“끝났습니다. 아가씨.”
“그는?”
“그가 이겼으니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이지요.”
그 말에 라데카가 고개를 들고 벌떡 일어났다.
의자위에 올라서니 길리안의 모습이 보였다.
“부상은 안 당한거지? 어디 다친 데는 없는 거지 말론?”
“예. 제가 보기엔 아무 이상 없습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흥! 이게 다 내덕이라고.”
“네. 그렇지요.”
“다행이다. 후우~.”
한숨을 내쉰 라데카의 몸이 무너지듯 쓰러졌다.
그걸 재빨리 받아든 말론이 혀를 찼다.
“쯧쯧 우리 아가씨 결국 기절하시는군.”
그리고 길리안을 한번 더 본 말론은 라데카를 안고 걸음을 옮겼다.
추천과 댓글은 글쟁이에게 큰 힘이 됩니다.^^
- 작가의말
이렇게 결투는 일단락.
이야기는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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