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0 그래도 나는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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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륭은 눈을 떴다. 주변은 소름끼칠 정도로 고요해서 불쾌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옆에 있던 제갈의가 말을 걸었다.
“눈을 떴나??”
“또 제갈 대협이군요······.”
“나라서 불만인가?”
“그럴 리가 있나요. 아마도 저를 치료하다보니 제갈 대협이 계속 옆에 있는 거겠지요.”
“바로 그렇다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됐나요?”
“······.”
제갈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다들 무사하다네. 두 명만 제외하고는.”
“그 두 명이 누구죠??”
“한 명은 소림의 방장인 목령. 다른 한 명은······ 자네의 형일세.”
주르륵!!
잠시 아무 말도 못하고 있던 원륭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원륭은 미친 듯이 외쳤던 것이다.
“거짓말!! 거짓말이라고 해주시죠!! 형님이 죽었을 리가 없잖아요, 형님이!!!”
그러나 제갈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살아있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이 될 것이다.
원륭을 속여 넘길 수도 없을뿐더러 속여 넘긴다 해도 그것은 잠시겠지.
도리어 원륭의 가혹한 분노만을 맛보게 될 것이다.
비록 제갈의가 무공으로 원륭보다 앞선다 하더라도 그런 원륭을 상대하는 것은 곤욕인 것이다. 제갈의는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
결국 거짓말을 해봤자 의미가 없기에, 제갈의는 그저 잠자코 원륭의 분노를 받아들여 주었던 것이다.
“크흐흑!!!”
잠시 오열하던 원륭은 곧이어 새빨개진 눈으로 제갈의에게 물었다.
“파천황!!! 그 자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우리는 그 자의 절기, 대빙하시대로부터 가까스로 도망쳐 나왔네. 그 후로도 공안 요원들의 천라지망이 이어져 아슬아슬하게 거기서 도망쳐 나왔지.”
“대빙하시대라······.”
원륭의 눈이 번뜩였다. 이들 쪽방촌의 무림인들이 대빙하시대에 당해 도망친 것이 이번이 벌써 두 번째였다.
지난번 처음 파천황과 조우했을 때도 그의 대빙하시대에 말려 일행은 가까스로 도망친 것이다.
파천황의 음공에 대항할 수 있는 극양의 무공을 지닌 불사왕의 혈사마공 덕택에 가까스로 도망쳐 나왔지만, 그 정도가 고작이지 도리어 반격하기에는 너무나 강한 초식이었다.
그리고 그걸 뚫는다 해도 파천황은 순순히 당해주지 않는 것이다.
분명 대빙하시대가 일시적으로 막대한 공력을 소비한다고 해도 그렇다고 해서 파천황이 고작 그 초식 한번을 사용하고 무력화될 정도였으면 이 정도로 고생할 일은 없었던 것이다.
원륭은 이를 으득 갈았다.
“대빙하시대를 파훼할 방법을 찾아야겠군요. 그 초식을 파훼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파천황을 당해내지 못할 겁니다.”
“벌써 불사왕이 초식의 파훼법을 연구하고 있네.”
“불사왕이라······.”
원륭은 눈을 번뜩였다. 불사왕은 괴팍하긴 했지만 반대로 온갖 기이한 무공을 섭렵한 자라 그라면 천하제일의 절기인 대빙하시대의 파훼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당장 지난번에도 단독으로 대빙하시대의 음기에 맞서 일행을 지킨 자가 바로 불사왕이었던 것이다.
그가 중심이 되어 파훼법을 연구한다면, 불가능하진 않으리라. 그나 진룡이나 제갈의나 모두 무공에 있어서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인물인 것이다.
그 외에도 달마의 역근경을 계승한 소형승, 개방의 방주 상인관, 하오문의 문주 하홍휘, 사씨 세가 음양쌍검의 달인 사휘령 등 이들 쪽방촌의 무림인들은 한명 한명이 일당백의 정예들이었다. 혹은 그 이상?? 그때 진룡과 상인관 등 남은 쪽방촌의 무림인들이 모두 방으로 들어왔다.
불사왕만 제외하고. 진룡은 물었다.
“정신을 차렸군. 몸은 괜찮나??”
“덕분에 괜찮습니다······. 여러분들은 괜찮으십니까??”
“괜찮다고 하기에는······. 소모가 막심하군.”
진룡은 왠지 지친 표정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공안 요원들의 추격을 소림육승은 목령의 시체를 들고, 그리고 쪽방촌의 무림인들은 원륭과 그의 형의 얼어붙은 몸을 들고 피하느라 진이 빠질 대로 다 빠졌던 것이다.
게다가 그 추격진이 천라지망임에야······. 과거의 천라지망은 순수하게 무림인들이 발로 추격하며 전음과 불빛, 호각 등으로 신호를 보내 빈틈이 있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공안 내 무림인들의 수준은 떨어졌지만 그 수는 늘어났고 차량과 무전, 총기들을 장비하고 추격하니 그 위험도가 배로 늘어났던 것이다.
쫓는 쪽은 계속해서 인원을 교대하며 차량 등으로 추격하지만 쫓기는 쪽은 최첨단 과학 장비 등으로 관측당하며 총격이나 심지어 포격까지 당하니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도망친 쪽방촌의 무림인들과 소림육승이 대단할 뿐······.
원륭은 문득 물었다.
“소림칠승······. 아니, 이젠 방장이 죽었으니 소림육승이겠군요. 그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숭산 소림사로 돌아갔네.”
“아······. 사지로 들어갔군요······.”
“그렇네.”
“······.”
원륭은 말을 잇지 못했다. 파천황이 스스로 보복을 다짐한 이상, 이미 소림사는 끝장이 났을 터였다.
실제로 목령이 파천황의 명령을 거부하고 소림육승 및 쪽방촌의 무림인들이 도주한 직후 파천황은 명령을 내려 홍위병들을 투입시켰던 것이다.
홍위병들은 그저 무장한 일반인들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들의 광기는 어떤 의미에서는 악귀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목령 등 수뇌부가 자리를 비운 소림사는 중국 정부의 끄나풀인 홍위병들을 어떻게 상대해야할지 몰라 속수무책으로 당했던 것이다.
숭산 전역의 사찰이 불탔고 소림승들은 무릎 꿇은 채 끌려 다니며 조리돌림을 당했다.
그 앞을 파천황이 지키고 있었다.
“불 태워라, 불 태워!!! 모든 것을 불태워!! 소림사라고 해서 주저하지 마라!! 결국 일개 절따위에 불과하니까!!! 만약 부처가 존재한다면 이렇게 절들이 불탈 때 지켜줄 것이다!! 그러나 어떠냐!! 아무리 절을 불태우고 승려들을 살해해도 부처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이 부처가 존재한다는 증거냐!! 존재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퍼억!!!
외치며 파천황은 수도를 찔러 소림승 하나를 살해했다. 심장을 꿰뚫은 손끝이 번들거리며 피로 빛났다. 파천황은 극도로 분노해있었다.
천라지망을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소림육승과 쪽방촌의 무림인들을 모두 놓쳐 그 분노가 극에 달해있었던 것이다.
그로인해 파천황은 평소 하던 존댓말까지 관두고 닥치는 대로 소림승들을 살해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흉신악살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콰앙!!!
파천황의 삼매진화에 불탄 전각이 또 하나 부서졌다. 한편 저 멀리 숭산 봉우리 꼭대기 하나에서 그런 모습이 불타는 모습을 지켜보던 금령은 눈물을 흘렸다.
“소림이!! 우리의 소림이!!!”
그들의 감정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90년 가까이 생활하며 먹고 자란 그들의 터전, 그들의 고향이 불타고 수많은 동문들이 조리돌림 당해 죽고 있었던 것이다.
그제서야 소림육승은 목령의 유언을 떠올렸다.
‘복수할 생각을 버리라 한 것은 바로 이것이로구나!!!’
목령은 소림육승이 돌아가는 순간 스스로 무공을 폐하고 정부의 방침에 따르라고 했다.
실제로 막강한 무공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소림승들은 저항하지 못했다.
만약 그들이 저지하기로 했다면 홍위병들은 상대가 되지 않았겠지만, 그 뒤에는 파천황과 공안 무림맹의 요원들이 있었다.
개중에는 참사를 참지 못하고 저항하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런 파천황과 요원들에게 너무나 손쉽게 살해당했던 것이다.
소림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곳곳에 죽어나자빠진 승려들의 시체들, 그리고 아직 죽지 않은 승려들과 그를 고문하는 홍위병들. 그 사이로 파천황의 웃음소리만이 미친 듯이 울려 퍼졌다.
“다 죽이고 다 태워버려라!!! 하하하하하핫!!!”
지옥을 다스리는 악귀와 같이 파천황이 웃는 가운데, 소림육승은 눈물을 머금고 숭산을 떠났다.
“두고 보시오. 내 반드시 저 악귀에게 복수할 것이오. 비록 지옥에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이를 말이오.”
소림육승은 복수를 맹세했다. 비록 그것이 목령의 유언과 불가의 가르침에 위배된다고 하더라도······.
한편 원륭은 상태가 회복되자 집밖으로 나와 마당을 거닐었다.
이번 안전가옥 역시 예전 원륭 등이 생활하던 쪽방촌처럼 주변이 크고 높은 담벼락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중국식 주택이었다. 원륭은 마침 마당에 있던 진룡에게 물었다.
“이곳은 어딥니까?”
“역시 북경의 안전가옥 중 하나일세. 자네에게 알려준 곳들 중 하나지.”
잠시 안전가옥을 둘러보며 그 특징을 파악한 원륭은 확실히 그런 것임을 깨달았다.
진룡이 마련한 안전가옥들은 중국 주택들이 다 그렇듯이 비슷비슷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마다 특색은 있었다.
그리고 전에 들은 그런 미묘한 특징을 바탕으로 원륭은 이번 안전가옥의 위치를 파악한 것이다.
“대담하기 짝이 없군요. 저번 안전가옥도 들킨 마당인데.”
“삼세번이란 말이 있지. 적은 설마 두 번 들켰는데 세 번이나 자신들의 앞마당에 자리를 잡았겠느냐하고 생각했을 것이네. 그리고 지난번과는 달리 이번은 사정이 조금 달라 아마도 들키지 않았을 것으로 기대하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원륭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안전가옥이 들킨 이유는 부상을 당한 사휘령과 아직 미숙한 원륭이 미행을 떨쳐내지 못하고 추적당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불사왕과 진룡 등은 무려 수십 년 동안 중국 정부의 추적을 피해 은거한 인물들이라, 미행을 피하는 데는 도가 튼 것이다.
심지어 천라지망이라고 해도 사람이 펼치는 이상 다 틈이 있어서, 진룡 등은 일단 고비만 벗어나자 유유히 포위망을 뚫고 도망칠 수 있었다.
원륭과 그의 형의 얼어붙은 몸이라는 짐짝을 들고서도.
원륭은 물었다.
“제 형의 시신은 어떻게 됐습니까??”
“화장했네. 가능하면 고향에 매장하는 것이 낫겠지만 그 먼 거리를 어떻게 가겠는가?? 부패의 문제도 있고 아직 주변은 감시의 눈길이 가득할 테니 말일세. 자네에게는 미안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네.”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원륭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런 원륭을 바라보며 진룡은 물었다.
“형의 이름은 어떻게 되나??”
“휘륭이었습니다. 휘황찬란하고 훌륭하다의 줄임말이었지요. 실제로 형은 대단했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했지요. 중국 내 소수민족인 조선인이 아니라 한족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났다면 필시 공산당 수뇌부에까지 올랐을 겁니다.”
“후회하나? 조선인으로 태어난 걸.”
“후회하긴요. 후회는 옳지 못한 삶을 살 때 후회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옳지 못한 삶을 살 때라······. 그럴지도 모르지······.”
진룡은 입을 다물었다. 잠시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없었다. 원륭의 얼굴은 왠지 공허해보였다.
그는 형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뭔가 얼이 나간 것 같았다.
그리고 진룡 역시 왜인지 그런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기나긴 침묵을 뚫고 원륭이 말했다.
“지치신 것 같군요.”
“지쳤지. 90평생을 싸우며 지내왔지. 지치지 않는다면 거짓말일 것일세.”
“후회하십니까?”
“아니. 나 스스로 옳지 못한 삶을 살았다곤 생각하지 않네. 물론 실수를 할 때도 있었지. 하지만 나는 끝없이 살아나가 삶을 추구하고 있네. 그래도 나는 살아갈 것일세.”
“그래도 나는 살아간다라······.”
원륭은 입을 다물었다. 그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 작가의말
이번 화에서 언급한 것처럼 소림사는 실제로 홍위병들에 의해 유린을 당했습니다.
숭산 곳곳의 절들이 불타고 승려들은 조리돌림 당하거나 살해됐죠.
다만 그 이유는 모택동의 선동에 의해 광기에 불타는 홍위병들이 기존 관습이나 유물들을 파괴한답시고 아무 문화재나 종교물들을 박살냈기 때문입니다.
본작에서는 공안의 부부장인 파천황이 쪽방촌의 무림인들을 상대하기 위해 그들을 협박하여 숭산 소림사에서 끌고나온 것으로 되어있는데, 실제로는 상관이 없죠.
다만 1차 장풍전쟁 때 장개석의 진영에 합류하여 풍옥상과 같은 군벌을 공격하려다 오히려 그의 부하인 석우삼에게 소림사가 유린당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처럼 소림사는 석우삼에게도 수난을 당했고 그 외에도 언급한 바와 같이 홍위병들에게 당한다거나 홍건적 등 도적들에게 당했다거나 그 수난을 당한 역사가 많습니다.
실제 소림무공의 역사가 무협물들과는 달리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고, 그 수준 역시 낮았기 때문입니다. 소림무공의 강함은 말 그대로 무협물만의 환상이라고 봐야겠지요.
그러나 중국 정부는 우슈나 영춘권 등 중국 전통무술에 대한 환상을 강조하며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고, 반대로 그것을 깨부수려 하는 쉬쇼우둥과 같은 사람이 중국 정부에게 탄압당해 불이익을 받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본작은 실제 역사와 사실, 허구를 넘나듭니다. 본작을 읽으면서 실제 역사는 어떠한가, 과연 거기에 작가가 어떤 상상의 나래를 펼쳤는가를 파악하시는 것도 본작을 읽는 재미중 하나가 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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