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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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브러진 자효진을 한번 힐끗 바라보더니 파천황은 무언가 툭 던졌다.
침대에 쓰러져 있던 자효진은 그것이 무엇인가 싶어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이, 이게 무엇입니까······.”
“비급이요.”
“비급??”
그러나 파천황이 던진 건 흔한 종이책자로 된 비급이 아니었다. 그것은 얼음덩어리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음매를 보고 뚜껑을 연 순간, 놀랍게도 얼음으로 된 책자가 나왔다.
자효진은 충격을 받았다.
“이것이 뭡니까??”
“보는 대로, 얼음으로 만든 책자요.”
“얼음으로 만든 책자??”
책자의 구조는 매우 단순했다. 얇은 얼음판 몇 개가 겹쳐져 있고, 그 얼음판에 글자나 그림의 모양으로 구멍이 뚫려 책자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음판을 넘기면 다음 글이나 그림이 보이는 것이다. 자효진은 경악해서 물었다.
“대체 어떻게 이걸??”
“원본이 되는 비급은 다 보고 내가 태워 없앴소. 그래서 원본이 남아있지 않기에 기억을 더듬어 이렇게 재현한 것이지. 종이에 글로 쓰는 것보다 내가 이렇게 만드는 게 더 빠르거든.”
“······.”
자효진은 할 말을 잃었다. 말이 쉽지 얼음판 위에 이렇게 글과 그림을 새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실로 정교하고도 예리한 솜씨로 순식간에 얼음을 만들고 그 위에 글과 그림을 새긴 후 다시 녹지 않게 유지해야 했던 것이다.
이는 파천황의 경지가 단순히 내공이 높다 낮다의 문제가 아니라 그 무공의 운영이 신의 경지에 다다랐다는 것을 의미했다.
“······.”
자효진이 계속 침묵하고 있자 파천황은 무심히 한 마디 던진 후 돌아섰다.
“그렇게 한 얼음판만 계속 쳐다보고 있을 시간이 없을 거요. 그 얼음판들은 곧 녹을 거니깐.”
“녹는다고요??”
그제서야 자효진은 황급히 얼음판을 살폈다. 그러자 확실히 들고 있는 자효진의 손의 온기와 주변 온도에 반응해서 얼음이 천천히 녹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런!! 어째서 이런 일이!! 부부장님, 부부장님이 얼리신 얼음이 녹을 리가 있습니까?!”
다급히 묻는 자효진에게 파천황은 태연히 말했다.
“정말로 내공을 담아 녹지 않게 만든다면 한참을 녹지 않겠지. 당연히 내가 일부러 녹게 만든 거요.”
“어째서?!”
“원래 비급이란 다 그런 것 아니오??”
“······.”
그 말에 자효진은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랬던 것이다. 예로부터 신공비급이란 무림에 숱하게 피를 뿌리게 만드는 존재였으므로 입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입수 후가 더 문제였다.
귀중한 비급을 얻으면 빠르게 익히고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소각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무림인들은 비급을 얻으면 재빠르게 익힌 후 태워버리거나 그럴 시간도 없으면 묻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넓은 무림에 지난 수천 년 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무공 비급들과 그리고 새로이 만들어지는 비급들.
무림이 존재하는 한 비급들은 끊임없이 유지되고 새로이 생성되었으므로 무림사는 항상 그런 비급을 손에 넣기 위한 암투로 시끄러웠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젠 그런 무림도 사실상 사라졌으나······. 그렇다고 해서 비급이 전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소림사에, 무당에, 어딘가 알 수 없는 수많은 곳에.
그리고 이렇게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다시금 세상에 그 존재를 드러내는 비급도 있었던 것이다. 파천황은 뒤돈 채로 천천히 걸어가며 말했다.
“난 지금 이 시간부로 대만으로 출장을 나가오. 그러니 당신은 가능한 한 빨리 그 비급을 익히고 만약 내가 부재하는 동안 특수한 일이 생겨나면 대응하시오. 만약 지난번 그 의화단의 잔당들을 다시 만난다면 더욱 좋겠지.”
“······하지만 부부장님. 저희들은 한번 그들에게 패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제압당했다고 하는 것이 옳겠지요. 그런데 부부장님 없이 저희가 상대할 수 있겠습니까??”
“왕 대협에게도 말했지만 격발환을 쓰시오. 그것도 모자라면 진원진기도. 무장한 공안대원들의 사용도 허가하겠소.”
“무장한 대원들까지 말입니까!!”
쿵!!
자효진은 충격을 받았다. 본래 공안이란 다른 나라의 경찰이나 치안조직보다 그 권한과 종류의 폭이 상당히 넓어, 교통을 담당한다든지 외국인의 여권 등을 검사하는 공안도 있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는 무장을 하지 않지만 분명히 무장을 하는 특수부대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자효진은 무림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파천황에게 충격을 받고 있었다.
“부부장님, 정말로 그래도 됩니까??”
“?? 뭐가 문제요??”
“아니, 저흰 무림인이······.”
“아니라 이젠 그 이전에 공안이겠지. 그리고 그 이전엔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으로써 당의 충실한 일원이고. 당의 일원은 당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가장 큰 숙명이자 일생의 목표요. 그 점을 모르지는 않겠지??”
“하지만······.”
“무림인이라 무장한 대원들을 대동하고 현대 화기를 사용하는 것이 불편하단 말이오?? 이보시오, 자 대협. 무장한 대원들의 총기와 화기가 과거 우리 무림인들이 쓰던 무기와 뭐가 다르단 말이오?? 대원들의 소총에서 나가는 총알은 과거 무림인들의 호신강기를 뚫던 암기나 마찬가지고, 그들이 쓰는 수류탄은 폭약과 마찬가지요. 당신도 과거부터 폭약을 전문적으로 쓰는 문파가 있었다는 걸 모르지 않겠지??”
“······.”
그 말에 자효진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무공을 익히고 그 자신의 몸으로만 무림을 헤쳐 나가는 일반적인 무림인들과 달리 대포라든지, 폭약을 다루는 문파도 무림에는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특성상 그들은 마치 군대와 같이 조직을 짜고 화기로 적들을 제압했는데, 폭약을 다루는 그 성질이 성질이다보니 관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그러고보니 그런 폭약을 다루는 문파들 중 몇 개가 지금 인민해방군 포병 부대의 원형이 됐다든가······.’
확실히 자효진도 기억이 났다. 인민해방군은 본래 모택동이 국민혁명군에 저항하기 위해 만든 것이 그 시초인데, 그러다보니 그 초기에는 상당히 어수선하고 난잡하기 짝이 없었다.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어 초기에는 국민혁명군에 연전연패했는데 거기에 군인 출신이던 주덕(朱德)이 합류하고 비공식적으로는 온갖 무림 문파들이 합류하여 거기에 힘을 실어주었던 것이다.
그렇게 적은 머릿수에도 불구하고 체계가 잡히면서 국민당을 상대로 승리하고 그들의 무기를 노획하면서 물자를 보급했는데 그러다보니 결국 무림인이라고 해서 현대 무기를 거부할 명분이 생각나지 않았다.
파천황의 말대로 현대식 무기냐 재래식 무기냐의 차이만 있지 결국 치명적이고 사람을 살상하는 것은 별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자효진은 마음을 먹었다.
“알겠습니다. 분부대로 시행하도록 하죠.”
“허허, 그래야 자 대협이지. 내가 그래서 자 대협을 좋아하는 거요.”
그리고 파천황은 자효진의 머리를 마치 아이 다루듯 쓰다듬었는데 파천황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머리에서 꾸득꾸득, 하고 마치 얼음이 어는 듯한 소리가 들려 자효진은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파천황이 말없이 나가자 자효진은 황급히 파천황을 불렀다.
“부부장님, 이 얼음판은 대체 언제까지 유지되는 겁니까?!”
다급한 자효진의 목소리를 듣고 파천황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싱긋 웃으며 한 마디 남기고 떠났다.
“일다경이오.”
“!!”
그 말을 들은 자효진은 정신없이 얼음판에 새겨진 글과 그림을 외우기 시작했다.
일다경은 말 그대로 차를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에 불과한 것으로 고작 15분에서 20분 정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익힌 검법을 바탕으로 자효진은 지금 원륭을 상대로 매서운 검격을 날리고 있었다.
파천황이 떠나기 전 자효진은 당연히 이 점을 물었다.
“대체 이 비급은 무엇입니까?”
“아, 이거? 독수검법이라고 하오.”
“독수검법??”
“내가 예전에 우연히 얻은 거지. 단순하기는 하지만 그 묘리가 심오하고 기괴해 정상적인 무림인으로서는 쉽게 상대하기 힘든 면이 있소. 그 검법은 묘하게도 외팔이에 좌수검을 사용하는 자가 사용하도록 만들어진 것이오.”
“!!!”
자효진은 깜짝 놀랐다. 외팔이에 좌수검이라니, 정말로 지금 그의 상황과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어떻게 이런 비급이 존재할 수 있는 겁니까??”
“후후. 모르겠소. 무림이란 정말 온갖 종류의 무공이 다 있는 곳이니. 다른 사람의 내공을 훔치는 흡정공이나 색공, 섭혼술 같은 것도 있지 않소??”
“과연······.”
그 말에 자효진은 납득했다. 확실히 그런 무공들이 있는데 본디 내공이나 정신이란 깊게 박힌 나무뿌리와 같아서 어지간한 술수로는 그것을 빼앗거나 감히 흔들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내공을 뺏는다든지, 정상적인 사고 판단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색욕이 들게 만든다든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들어 최면에 빠트리고 세뇌한다든지 무림에는 온갖 상상을 초월하는 무공이 다 있었다.
그러니 자신처럼 오른팔이 잘리고 분노에 휩싸여 왼팔로 사용할 수 있는 검술을 만든 광인이 있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기나긴 무림 역사를 생각해보면 정말로 그런 자가 있을 법했다.
무림에서는 온갖 상황이 다 일어나니까. 아무튼 자효진은 파천황이 떠난 후 불과 15분 만에 녹기 시작하는 비급을 전부 다 외우는데 성공했다.
무림인이란 본디 머리가 좋아야하고 화산파 제일의 기재로 추앙받던 자효진 정도면 15분에 비급 하나 외우는 것은 일도 아닌 것이다. 그것을 실제로 쓰는 것은 문제라 하더라도.
자효진은 부상에서 일어난 지 얼마 안 된데다 조금 전 파천황에게 분근착골을 당해 온 몸이 엄청난 고통에 휩싸인 상태에서도 이를 악물고 일어났다.
‘파천황 이 개자식, 분근착골을 한 것도 모자라 이 따위 시한부 비급을 주다니.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내 기회만 생기면 반드시 네놈의 등 뒤에 칼을 꽂을 것이야!!’
그렇게 자효진은 분노에 휩싸여 채 낫지 않은 몸으로 미친 듯이 칼을 휘둘렀다.
그리고 불과 며칠 동안 수행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완성도로 그 독수검법을 완성시켰던 것이다. 지금 원륭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자효진은 한 사람의 광인이었다.
핏줄이 불거진 눈으로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그를 보고 누구든 광인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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