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발언
그런데 발걸음을 옮기던 원륭의 발밑에 갑자기 짙은 그림자가 생겨났다.
원래도 발밑에 그림자가 생기는 건 흔히 있는 일이지만, 이 그림자는 다르다.
누가 봐도 뭔가 불길한, 검고 음침한 기운을 뿌리고 있었던 것이다.
원륭은 바닥을 밟으려다 문득 생겨난 불길한 기운에, 그대로 허리를 한 바퀴 회전시키며 공중에서 회전해 다른 바닥을 밟았다.
탁!!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착지하는 순간 마치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그 자리에 또 다른 그림자가 생겨난 것이다.
그 그림자는 바닥뿐만이 아니라 머리 등 온 전신을 다 노리고 있었는데, 원륭 역시 예상이라도 한 듯 지체 없이 연달아 회피에 들어가 버렸다.
그리고 다 피한 뒤에 그림자에 붕권을 날리자 어디선가 신음이 들려온 것이다.
쾅!!!
“으윽!!”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어둠 속에서 스멀스멀 그 그림자가 드러났다.
원륭은 예상대로의 인물을 봤다. 원혼. 아니, 살문의 원혼.
“역시 너였군. 하긴 너 아니고서는 이런 일을 할 자가 없지. 어쩐지 요즘 습격이 뜸하더라니.”
“웃기지마라. 습격을 피한 것은 네놈이 아닌가??”
“뭐??”
어처구니없는 말에 원륭은 어이가 없어했다. 습격을 피하다니 무슨 말인가 그게??
“무슨 말이야. 애초에 네놈에게 날 습격하라고 명령한 것은 나 자신이 아닌가?? 그런데 이제 와서 내가 왜 습격을 피하지??”
“그럼 네놈은 일부러 계속해서 최근 사람들과 같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뭐라고??”
원륭은 그제서야 살문의 원혼이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를 깨달았다.
거처로 삼고 있던 구룡성채가 통째로 철거되어서, 원륭은 지금 평소에 수련을 하는 지하 경기장에서 묵고 있었다.
그것은 경기장이자 지하에 감춰진 벙커인데, 핵공격도 막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런 특성상 개인의 사생활을 완벽히 보장해주는 개인의 방은 없고, 다닥다닥 붙은 공동숙박시설만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재벌 총수들은 오지 않는 일화의 VIP룸을 사용하라고 했지만 원륭은 사양했고, 매일 같이 태사향 등과 수련을 하며 수련이 끝나면 다 같이 대충 드러누워 자는 생활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다음 날 눈뜨면 씻고 또 수련하고, 밥 먹고 수련하고의 반복이었다.
그러다보니 정체를 숨기고 원륭을 노려야만 하는 살문의 원혼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습격할 틈새가 안 나긴 했다. 그제야 원륭은 원혼의 입장을 이해한 것이다.
“아, 그런가. 그런 거였군. 난 또 뭐라고. 이제야 네가 왜 착각했는지 알겠다.”
“뭐라고??”
“난 그저 네 존재를 잊고 있었거든. 수련에 열중하느라 신경 쓸 기미가 없었다.”
“그걸 말이라고······.”
살문의 원혼이 부들부들 떨었다.
눈도, 코도, 입도 보이지 않는 시꺼먼 영체 주제에 화내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을 만큼 엄청나게 부들거리고 있었는데, 그런 원혼에게서 원륭은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한 것이다.
“너, 뭔가 더 강해졌다??”
“이제야 눈치 챘나······. 좀처럼 너를 습격할 때가 나지 않아 난 다른 인간들을 암살하고 있었다.”
“혹시 무고한 일반인들을 건드린 건 아니겠지??”
원륭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도 가끔 사람을 죽이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범죄자나 남에게 민폐를 주는 인간뿐이다.
그런 인간들이 발견되지 않으면 피에 굶주려도 몇날며칠을 참는 것이다.
혈귀에게 있어서 피를 빨지 못하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는데, 어지간한 인간의 공복의 고통 그 이상이다. 비교하자면 한 한달 정도 아무 것도 먹지 못한 고통??
물만 마시고 아무것도 먹지 못한 인간의 고통과 비슷했는데 혈귀는 그저 며칠 정도 피를 빨지 못해도 그 정도 고통을 느끼는 것이다.
왜냐하면 혈귀는 스스로 음식을 먹고 그 영양분을 흡수할 수 없으므로 음식이란 것이 소용이 없다. 먹을 수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흉내일 뿐이다.
장내에서 소화가 되지 않으므로 분해는 되고 배설은 되어도 도로 영양분이 그대로 나오는 것이다.
게다가 무림인인 원륭은 그 특성상 에너지의 소비가 극심해 피를 빨지 않으면 더욱 고통스러웠다. 언뜻 강해보이기만 하는 혈귀지만 그런 약점이 있는 것이다.
게다가 태양빛에 소멸 당하지는 않지만 고통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마늘이나 십자가 등도 그런 타격을 주었는데, 존재 자체에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스트레스를 주는 것들이 많았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살아가다 보면 무심코 짜증을 주는 요소가 많았던 것이다.
아무튼 원륭의 물음에, 살문의 원혼은 답했다.
“난 죽어도 살문의 원혼. 무고한 일반인들은 건드리지 않는다. 살상의 대상으로 삼는 건 오직 범죄자들과 파천황, 그리고 그의 수족들 뿐!!! 파천황, 파천황!! 파천화아앙!!!”
살문의 원혼의 눈이 붉어졌다. 그냥 놔두면 폭주할 것 같아 원륭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인간을 습격한다고 해서 단순히 강해지나?? 뭔가 다른 요인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러자 살문의 원혼의 눈이 침착해졌다.
“예리하군. 실은 최근 홍콩의 암흑이 깊어지고 있다.”
“뭐라고??”
“정확히 말하면 인간 세상 전체의 암흑이 짙어지고 있는 거지. 너는 미륵이라는 존재를 아나?? 미륵(彌勒), 혹은 미륵불(彌勒佛)이라고도 하지.”
“알긴 안다만.”
원륭은 갑자기 왜 그 이야기가 나오는 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살문의 원혼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진행시킨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미륵불은 석가모니가 열반에 든 후 56억 7000만년이 지나고 강림하는 부처라고 한다. 미륵불은 총 3회에 거쳐 300억 명 정도의 인간들에게 깨달음을 얻게 하고, 6만 년 뒤에는 열반에 든다고 하지. 하지만 어떤 이는 이렇게 말하는 자도 있다. 미륵불은 그냥 강림하지 않는다고. 최고로 더러운 세계에 강림한다고 말이다.”
“······.”
“연꽃은 가장 더러운 연못에 피어, 가장 깨끗이 이를 정화한다고 하지. 미륵불도 이와 같다. 미륵불이 인간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결국 말세가 와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말세가 온다!! 미륵불이 이를 정화할 것이다 하하하!!!”
살문의 원혼이 다시 광기에 휩싸였다. 붉은 눈을 치켜뜨며 광기에 젖어드는 살문의 원혼에게, 원륭은 재빨리 물어본 것이다.
“그것이 확실한가??”
“그래. 죽고 나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드나들게 되며 알게 된 것이 있지. 멸망은 반드시 찾아온다. 그것도 너희가 예상하지 못한 죽음의 형태로.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원륭은 광기에 물든 살문의 원혼을 다독여 몇 가지 정보를 더 알아냈다.
그것이 사실인지는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이 살문의 원혼은 정말로 미륵불의 강림과 멸망의 예언을 믿고 있고, 그것이 현실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살문의 원혼에 따르면 최근 인간 세상의 어둠이 더욱 깊어져만 가는 건 계속 인간 세상이 타락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머물고 있던 구룡성채가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살문의 원혼은 계속해서 떠돌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원한을 먹고 영체를 유지하는 살문의 원혼은 그 누구보다 원한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조만간 자신이 실패하더라도 언젠가 인간 세상에 멸망이 내릴 것이라 저주하는 살문의 원혼을 보고, 원륭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저주를 내리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는 살문의 원혼을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라는 내용을 최근에 점쟁이한테 들었는데, 어떻게 생각해??”
“그런 건 다 미신 아니었나 원륭. 그런 걸 믿는 거였나, 하하.”
예상했던 대로 헐크G는 호탕하게 예언을 부정했다. 그러나 일지흔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던 것이다.
“아니오. 고대로부터 예언은 무시할 것이 못되었소. 예언을 무시하다 큰 코 다친 인간들이 많지. 특히 신화에서도 그런 예언은 상당히 많았소.”
“하지만 그런 신화의 특징은 예언을 거스르기 위해 발버둥 쳐봤자 결국 다른 의미로 예언의 결과에 적중된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예언을 신경써봤자 소용없어. 내가 소용없다는 건 그런 의미야.”
“그것도 그렇지만······.”
헐크G의 말에 일지흔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병법을 중시하는 일지흔은 예언이나 점이라 해서 무시하지 않았다. 그런 것들도 다 쌓여진 데이터의 일종이라고 보는 것이다.
손금이나 관상과 같은 것들도 미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어떤 이들은 다 그런 것도 과학의 일종이라고 보았다. 가령 특정 일을 자주하면 태어난 손금과 다르게 살아가면서 손금이 변화하는 일이 생긴다. 관상도 마찬가지다.
특정 성격을 가지고 있고 특정 표정을 자주 지으면 그만큼 표정에 따라 인상이 바뀌므로 그에 따라 길흉화복을 당하는 비율이 달라지는 것이다.
인상을 자주 찌푸리고 화를 자주 내는 사람이라면 그만큼 시비가 붙어 재난을 당할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그와 같은 것들을 단순히 느낌만이 아니라 쌓여진 데이터를 통해 분석하는 것인데, 뭐 아무튼 일지흔은 그러한 예감이 생각보다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좋지 않군요. 우리가 하려는 일에 앞으로 큰 화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그러면 뭔 축복이 있을 줄 알았나?? 우리가 가는 길은 지옥길이야, 지옥길!! 다 죽고 지옥가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인데 그럼 뭐 축복이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어?? 인민해방군이랑 공안 무림맹에 싸우는 일이 그렇게 쉬운가!!”
헐크G가 돌연 언성을 높였다. 그러다 자신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너털웃음을 지으며 분위기를 한결 부드럽게 만들려고 한 것이다. 헐크G는 원륭의 등을 세게 탁탁 두드리며 크게 웃었다.
“그러니 신경 쓰지 말라고, 원륭!! 그런 사이비 같은 예언은 어디에서 들었나??”
“길 가는데 지나가던 어떤 노인네가 그러더군······.”
전혀 틀린 말은 아니나 원륭은 그 내용을 대폭 비약해서 말했다.
살문의 원혼이라 하면 확실히 파천황에게 살해당한 살문의 일족의 원혼이라 노인네들도 섞여있고 지나가다가 대뜸 그렇게 예언이랍시고 저주를 퍼부은 것도 맞는데, 굳이 일일이 다 말하기에는 좀 그래서 그냥 간추려서 말한 것이다.
사실 살문의 원혼은 원륭의 비밀 병기 중 하나라, 크게 대놓고 말할 것이 못되었다.
이 중엔 배신자들도 섞여있을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제 공안 무림맹이나 인민해방군에 자신들의 동태나 계획을 밝힐 지도 몰랐는데 사실 상당히 불안정한 그룹인 것이다.
그런 이유를 알고 있는 이상, 원륭은 미주알고주알 다 말할 수는 없었다.
그것이 매일 거의 같이 먹고 자는 동지들이라 하더라도.
“그럼 난 간다. 아무튼 그런 개 같은 예언에는 신경 쓰지 마, 원륭.”
그렇게 헐크G는 욕지기를 몇 마디 내뱉으며 가버렸다. 그러자 뜻밖에도 궁요가 말한 것이다.
“저런 사람일수록 의외로 예언에 영향을 많이 받지. 아마 본인도 불안해서 저렇게 반응하는 것일 것이오. 그렇게 신경 쓰지 마시오.”
“아니, 나는 자네가 입을 연 것이 더 신경 쓰이는데 궁요.”
그러자 궁요는 한번 스윽 쳐다보더니 그대로 스르륵 사라져버렸다. 원륭으로선 헐크G의 그런 반응보다 궁요가 한번 입을 연 것이 더욱 신기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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