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4 정중한 대응
‘그렇게 나오겠다는 거지??’
‘내가 뭘??’
싱긋 웃는 진흑창의 표정과 전음에서, 일화는 완전히 그들의 길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는 도저히 같은 길을 갈 수가 없는 것이다. 예전에야 서로 티격태격하기도 하고 경쟁도 하고 때론 도가 지나쳐 분쟁에까지 들어가기도 했지만, 이 정도로 그들이 명확하게 적대한 적은 없었다. 일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겠다.’
일화는 결심을 굳혔다. 다른 총수들을 보니 천만홍과 당화는 그저 아무 표정 없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아까 원륭을 바라볼 때와 같은 감정 없는 눈.
그러자 일화는 돌연 웃음을 터트렸던 것이다.
“호호! 호호호호호호!!!”
드넓은 회의실에 그녀의 웃음소리만이 커져나가고 있었다. 왜 웃는지 영문을 모르는 악무양을 제외하곤, 모두 그녀의 웃음소리에 이들 모임의 단합이 어찌될 것인지는 알 수 있었다.
완벽하게 깨어졌던 것이다. 일화는 원륭에게 숙이고 들어갈 생각이 없고 원륭은 그녀에게 져줄 생각이 없다.
애초부터 이 둘의 성격은 둘이 있으면 반드시 치고 박아야 하는 성격의 서로 상극이라, 절대 공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일화의 오만방자한 성격을 원륭이 받아줄 수 있었다면 모르겠지만 그것도 아니고, 원륭에게 지고 들어가기에는 일화가 너무 거만했다. 심지어 이미 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일화는 통보를 내렸다.
“내가 지금까지처럼 너희들의 일에 방해를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상의 협조도 요청하지 마라. 나는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충분한 자금을 제공하고 너희들의 방침에 동의하겠다. 하지만 내가 전면에서 무언갈 하는 일은 없을 것이야. 알아듣겠나?? 설마 이런 나에게 억지로 뭔가 시키진 않겠지.”
“시키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뚜둑. 원륭이 손가락 마디를 꺾자 일화보다 그녀의 뒤에 있던 비서의 표정이 굳어졌다.
비서 역시 여자였는데 미묘한 보법만 보아도 그녀가 상당한 고수이자 타고난 암살자임은 누가 봐도 뻔한 일이었다. 거기다가 암살자들은 보통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깊다.
주인의 명령에 따라서 맹목적인 살육을 반복하는 자들도 많았는데, 살인의 망설임을 지우고 주인의 명령을 완벽하게 따르게 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세뇌를 하여 살육머신으로 키워지는 자들이 많았던 것이다. 아무튼 비서가 험상궂은 얼굴을 하자, 원륭은 일부러 일어났다.
“좋아. 소를 물가까지 데려갈 수는 있어도 억지로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는 법이지.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제 싫으면 그만. 바래다주겠네.”
“관두지. 나에겐 비서가 있으니까.”
“그런 말 하지 말고. 사양할 것 없어.”
원륭은 싱글싱글 웃으며 다가갔다. 그러자 일화의 표정이 굳어지고 비서가 한 발짝 나와 그와 일화의 사이를 차단했던 것이다.
“그만두시죠. 주인님이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인님이라니, 이건 무슨 봉건주의 사회야??”
원륭은 때 아닌 봉건제도 사고방식을 지닌 그들의 관계를 비웃으며, 태연하게 다가갔다. 그러자 비서는 명확하게 경계를 하고 자세를 잡았던 것이다.
“그만하시죠. 더 이상 다가오면 살수를 쓰겠습니다.”
“바래다주겠다는데 살수를 쓴다고?? 아이고, 무서워라. 아니면 너희들은 내게 뭔가 크나큰 죄라도 지었나?? 지레 제발이 저리게.”
“!!”
순간 비서의 눈길이 커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원륭은 다가갔다.
‘이형환위!!’
무공이 낮은 악무양조차도 원륭이 사용한 수법이 이형환위임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원륭의 움직임을 완벽히 포착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순간 시야에서 놓쳐버렸기에 이형환위임을 짐작한 것이다.
‘무림에는 다양한 신법이 있지. 그 중에서도 이형환위는 최고급의 신법 중 하나인데, 순간 상대의 실체를 놓치거나 상대의 잔상이 가만히 남아 그 자리에 있으면 무조건 이형환위를 의심해라. 그리고 그 순간 배후를 조심하는 게 좋겠지.’
원륭을 비롯한 이들 무림인들은 악무양을 가르치며 무공에 대한 상식이 부족한 악무양에게 그런 상식들을 가르쳤다.
숙련된 무림인이라면 상대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순간 ‘이형환위!!’라고 속으로 외치며 뒤를 조심하는 것이 보통이다.
상대의 시야를 속였다면 그 순간 가장 효과적인 것은 완벽한 사각인 배후에서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악무양은 물론 이 비서도 원륭의 모습을 놓친 순간, 뒤에서의 움직임을 경계했다.
그런데 원륭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디냐? 어디서 오는 거냐!!!’
그런데 고개를 돌려보니 원륭은 태연하게 앞에서 계속 걸어오고 있었다. 그러자 비서를 비롯해 악무양같이 무공이 낮은 자들은 혼란에 빠진 것이다.
‘뭐지?? 대체 무슨 수법을 쓴 거야??’
그들은 일순간 분명히 원륭의 실체를 놓쳐버렸다. 그리고 비서의 뒤편을 경계했는데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악무양이면 몰라도 이 비서도 상당한 실력이라 순간 원륭의 모습을 놓쳤다 하더라도 어지간하면 곧바로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본래는 그랬었을 것이다.
그런데 비서는 원륭이 정말 자신의 뒤로 돌아들어갔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 반대편으로 돌아서 다시 돌아온 건지, 아니면 잔상을 통해 실체를 숨겼지만 본래부터 계속 그 자리에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원륭은 기묘한 보법으로 비서의 눈길을 현혹시켰는데, 혼란스러운 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저거 뭐지?? 굉장히 기묘한 보법인데.’
‘자네도 그렇게 느꼈나, 천만홍. 그래. 정말로 기묘한 보법이야.’
살아생전 온갖 보법을 다 본 천만홍과 진흑창, 그 외 고수들도 이 같은 보법은 처음 보았다.
대체 무슨 보법이란 말인가. 사라질 듯 사라질 듯 사라지지 않으며 그 실체를 잡으려 하면 사라진다.
그런 기묘한 보법에 모든 이가 현혹돼있는 순간, 원륭은 어느새 비서와 일화의 앞에 도달했다.
“나를 막으려던 것 아니었나?? 이미 도달했는데.”
척. 원륭의 발소리가 들리자 비서는 당황했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살수(殺手)를 사용한 것이다. 원륭의 기묘한 보법은 파악하지 못했지만 이 비서 역시 보법이나 기타 무공에서는 상당한 솜씨.
어지간한 일류 무인에게는 지지 않는다. 이류무인인 악무양 정도는 순식간에 처리해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가 지금 상대하고 있는 건 악무양이 아니었다.
원륭은 내지른 비서의 주먹을 보고 그녀의 손목에 V자 모양으로 만든 자신의 중지와 검지의 사이를 걸더니, 그대로 그녀를 넘겨버렸다.
그 기세가 너무나도 강해 보던 이들은 모두 비서가 땅바닥에 처박힐 것을 예상했다.
그러나 원륭은 그럴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비서가 공중으로 날아가는 동안 그는 일화의 등 뒤로 돌아가 그녀의 목에 손가락을 대고 힘을 주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녀는 반사적으로 일어났다.
벌떡!!
“!!”
“!!!”
일화 본인은 물론이고 모든 이들이 놀랐다. 경추와 요추는 인체의 온갖 신경이 지나가는 곳으로서, 급소중의 급소였다.
이 같은 부위를 절묘한 방식으로 자극하면 멀쩡한 사람도 앉은뱅이로 만들 수 있고 앉은뱅이도 치료할 수 있다.
심지어 원륭은 제갈세가의 마지막 생존자 제갈의로부터 해부학은 물론 서양의학, 기존 무림의 의술에 대해서도 모두 배운 의외로 의학에 통달한 자였다.
자신의 몸은 너무 망가져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지만, 남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탁월하다.
그러한 수법을 통해 원륭은 휠체어에 앉아있던 일화의 신경을 자극해 그녀를 일어서게 만들었던 것이다.
무림의 점혈법과는 완전히 다른, 서양의학의 신경계통의 지식을 이용한 기술이었는데 그런 지식에 기반한 기술이었으니 일화가 만약 대비하려고 했어도 그리 대항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이 기술을 통해 드러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뭐야, 잘 서잖아, 일화. 생각보다 몸이 멀쩡하군.”
으득!! 일화는 이를 갈았다. 원륭의 이 수법은 사람의 신경을 이용한 반사를 통해 강제로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에, 정말로 몸이 불편하다면 방금 일화는 일어설 수 없었다.
치료를 위한 자극이 아닌, 강제로 일으키기 위한 자극인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일화는 외쳤다.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조금만 더 내 몸이 좋지 않았다면 나는 신경에 부하가 걸려 크나큰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느냐!!!”
“하지만 멀쩡하지 않은가. 내가 사용한 수법이 몸이 좋지 않은 사람에게 사용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나도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고??”
어처구니없는 말에 일화는 경악했다. 방금 그녀가 말한 대로 원륭의 수법은 정말로 경추신경이 좋지 않은 사람에게 사용하면 즉사할 수도 있는 수법이었다.
잘해도 전신마비가 올 수 있는 것이다. 온 몸의 신경이 뇌에서 시작돼 전신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바로 목이었는데, 그런 목을 함부로 건드렸으니 무사할 리가 없었다.
다만 이 기술은 경추신경에 문제가 없다면 원륭의 말대로 그저 사람을 일으키는 정도에 끝나는데,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 생각하니 일화의 분노는 가시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원륭은 태연하게 말했다.
“이야~~ 내가 너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해서 다행이지 않은가. 아무래도 너는 너의 몸 상태를 제대로 모르는가보군. 내가 보증하니 걱정하지 말게. 사고만 없다면 천수를 누릴 몸이야! 하하하하하하!!”
일화는 숫제 말도 하지 못하고 몸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원륭은 방금 그녀의 꾀병을 지적한 것이었다. 원륭의 말대로 일화의 몸 상처는 이미 다 나았다.
그러나 원륭에 대한 증오, 미움, 그리고 그를 보기 싫은 마음에 일화는 나타나지 않았는데, 원륭은 그녀를 병문안을 간다고 핑계를 대어 스스로 나타나게 한 후 그녀의 거짓말에 종지부를 찍었던 것이다.
일화 스스로도 알듯이 정말로 그녀 자신의 몸에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면 원륭의 방금 그 한 수법에 그녀는 죽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죽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거짓말과 원륭의 추측을 사실대로 증명해버렸다.
그러자 그녀는 분노로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원륭에 의해 던져진 비서는 순간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뭐지, 이거?? 낙법을 취할 수도 없을 정도로 거센 기세로 던져졌다고 생각했는데 착지하기 전 알아서 몸이 돌아졌다??’
그녀의 생각대로 그녀는 순간 원륭에게 거센 기세로 던져졌다.
그녀 자신이 내뿜은 힘, 그리고 원륭이 더한 힘에 의해 낙법도 제대로 취할 수 없을 정도로 맹렬한 기세였는데 착지의 순간 몸이 저절로 돌아간 것이다.
낙법을 취할 것도 없이 제대로 발부터 착지하게 되었는데, 그녀 자신도 모르는 영문을 당화는 알아챘다.
‘쯧쯧······. 완전히 원륭의 손길 안에서 놀고 있구만······.’
만천화우라는 희대의 초고난이도 무공을 익힌 그녀라면 그 순간의 움직임을 모두 파악할 수 있다. 원륭은 처음부터 비서를 던지면서 그녀의 몸이 일정한 궤도를 그리며 날아가도록 취한 것이었다.
가령 야구의 투수들은 상당한 실력일 경우 본인이 원하는 궤도로 공을 던질 수 있다.
이른바 변화구. 패스트볼이라든지 커브 같은 것이 그것들이었는데, 테니스도 그렇고 아무튼 어지간한 구기 종목에는 그런 게 다 있었다. 축구의 바나나킥 같은 것들 말이다.
마치 그런 구기 종목을 하듯이 비서를 일종의 공으로 취급하고 그런 개념으로 그녀를 던져버린 것인데, 사실 무림인으로서는 굉장히 굴욕적인 일이었다.
자신의 몸을 완전히 제어하지 못하고 착지마저 그 흐름에 몸을 맡겨 던진 사람이 안배한 대로 무사히 하게 되었는데, 굴욕도 그런 굴욕이 없는 것이다.
이 비서도 멍청한 자가 아니라 잠시 생각하다가 순간 그러한 사실을 눈치 챘다.
‘이, 이!!!’
화륵!!! 비서의 얼굴에서도 노기가 드러났는데, 당화는 그런 그녀들을 보고 속으로 혀를 찼다.
‘이제야 알았군. 자신이 공 정도의 취급을 당해 마치 어린아이 다루듯 안전하게 착지한 것을 알았으니 어찌할꼬.’
그런 취급을 받을 바에는 그냥 차라리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는 게 나았다.
그러나 원륭은 실로 정중하고도 고난이도인 수법들로 두 여자를 농락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달은 두 여자의 얼굴에 분노가 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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