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세 사나이
“흐음······.”
원륭은 술 한 잔을 따라 마시고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헐크G와 태사향이 예의 그 노촌장을 한 잔씩 따라 마신 뒤 한마디씩 했다.
“정말 소박한 술이군.”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가볍지만은 않아. 그 안에 깊이가 있어.”
그들은 말없이 한참동안 노촌장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원륭이 입을 연 것이다.
“이 술은 정말로 내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군. 정말 잘 만들어졌어. 소박한 향기, 마치 저녁 무렵 해가 저물며 밥 짓는 연기가 올라오는 우리 마을 초가(草家) 같다.”
헐크G와 태사향도 동의했다. 확실히 이 은은히 올라오는 단 맛과 향에는 마치 소박한 시골마을 풍경 같은 그림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모대주보다 이 술이 더 마음에 드는군. 그리고 검남춘 같은 것도 맛있었지만 확실히 이 깊은 노촌장의 여운에는 못 버틸 것 같다.”
“나도 동감이다.”
그렇게 헐크G도 동의하는 가운데, 태사향이 입을 열었다.
“듣자하니 동북3성은 조선인들이 많이 개척했다고 하던데.”
“그래. 본래는 벼농사를 지을 수 없을 정도로 추운 그곳을 조선인들은 끊임없이 포기하지 않고 농사를 지어 이제는 쌀이 그쪽 특산물이 되어버렸지. 아예 북방한계선 자체가 올라가버렸어. 농사란 보통 천지인(天地人)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지. 하늘이 날씨를 내리고, 땅이 기르며 사람이 보살핀다. 그런 의미에서 동북3성의 쌀은 엄밀히 말하면 자연의 선물만은 아냐. 본래는 자연히 허용하지 않은 권리를 사람이 끊임없이 투쟁한 끝에 선물을 받은 거지. 하지만 그렇게 북방한계선을 올릴 정도라면 누가 그것을 자연을 훼손한다고 하겠는가? 하늘도 이해하겠지.”
“······.”
태사향은 잠시 가만히 있다 말했다.
“중국에는 술은 하늘이 내려준 아름다운 상(酒天之美祿)이라는 말이 있네. 그 외에도 한(漢)의 왕망(王莽)은 소금이 먹을 것의 으뜸이요, 술은 백 가지 약의 으뜸이라고 하였지.”
“그리고 맹물 같은 술도 차보다는 낫다는 말도 있고.(薄薄酒勝茶湯)”
“호오, 헐크G, 그런 말도 잘 아나? 자넨 분명히 어린 시절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들었는데.”
“후후, 바다 건너 먼 타지에 있어도 알려고 하면 알 수 있는 법이지. 우리 부모님도 자주하신 말씀이니까 말이야.”
“그렇군. 그 외에도 이태백은 자신의 시 월하독작(月下獨酌)에서 하늘이 술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주성은 하늘에 없으리(天若不愛酒 酒星不在天)라는 말을 남겼네.”
“그게 무슨 말이지??”
“주성이란 처음 술을 만들었다고 알려진 신일세. 하늘에 우주를 관장하는 여러 신들이 있는데 그 중에 술을 관장하는 신이지. 그래서 옛 사람들의 글에는 주성이란 말이 자주 나오네.”
“그렇군······.”
고개를 끄덕이는 원륭에게 태사향은 계속해서 말했다.
“사실 중국 역사에서는 결정적인 순간 항상 술이 등장했네. 앞서 말한 것처럼 중국과 미국이 국교를 수립할 때도, 닉슨이나 키신저가 방중 했을 때도, 그리고 먼 옛날 은나라에는 주왕이 달기와 함께 벌인 연회를 주지육림이라 했으며 초한지에서는 홍문에서 있었던 연회에서 술자리를 두고 유방을 죽이기 위해 칼부림이 일어났지. 월나라 왕 구천은 오나라를 치러 가기 전에 군사들과 함께 술을 마셨고 진시황을 암살하려 한 형가도 술을 즐겼다고 하지. 그리고 그 유명한 도원결의. 유비 관우 장비 뿐만 아니라 유비의 고향인 탁군의 청년 수백 명도 그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의병이 되었다고 하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태사향은 원륭의 눈을 빤-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역시나 우리의 이 만남이 운명적인 자리가 될 거라는 거지. 우리가 비록 유비 관우 장비는 아니지만 그 뜻만은 같지 않겠나? 한 황실이 무너지고 군벌이 난립하며 황건적이 들끓던 가운데 백성들을 위해 일어선 유비나, 중국 정부의 폭거를 막기 위해 일어서는 우리나 다를 바가 없다는 거지.”
“그렇군······. 하지만 도원(桃園)이 아니라 한낱 술집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건 좀 그렇지만 말이야.”
“후후, 요즘 세상에 그런 도원이 어딨겠나. 복숭아밭을 찾을려면 시골로나 가야겠지.”
“그건 그런가. 하하하하!!”
태사향과 원륭이 한바탕 웃고 있는데, 헐크G가 말했다.
“중요한 건 도원이 아니라 무슨 말을 하느냐 아니겠나. 중국에는 주휴견진정(酒後見真情)이란 말도 있네. 같이 술을 마셔봐야만 진심을 알 수 있다는 거지. 물론 술을 마신다고 해서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는 건 아냐. 하지만 우리는 서로 싸워봤다. 술로도 알지 못할 진심이라도 싸워본 자들이라면 서로 아는 게 있지. 나는 서로를 믿고 싶다. 아니, 믿어야 한다.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지?”
“물론.”
“말할 것도 없지.”
세 사람은 손을 뭉쳤다. 무림이란 것도 결국 인간 세상과 똑같아서, 언제 배신이 일어날지 모른다. 서로 속고 속이는 일이 빈번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믿고 싶었다.
그러지 않으면 안 되니까.
·········.
정말 코가 비뚤어질 정도로 술을 마시고, 원륭은 다음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 아무리 무림인인 그라도 내공을 운기해 술기운을 몰아내지 않으면 숙취에 시달리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는 대충 씻고 경기장 VIP실로 향했다. 그가 들어가자마자 네 사람이 진저리를 쳤다.
“대체 술을 얼마나 마시고 온 거냐!! 코가 비뚤어질 것 같군!!”
“그런가? 나도 지금 코가 비뚤어지는 것 같은데.”
“말장난 하지 말고!! 너는 마셔서 코가 비뚤어진 거잖아!! 나는 네 술 냄새 때문에 죽을 것 같다고!!”
어김없이 일화가 짜증을 내왔다. 원륭이 못들은 척 하자 일화는 화가 나서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쾅!!
“하하, 저 성질머리하고는. 그런데 그렇게 술 냄새가 많이 나나?”
“아아, 솔직히 말해서 술을 좋아하는 나도 꺼려질 정도로 찌들은 냄새가 나는군. 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건가??”
흑사 진흑창의 말에 원륭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뭐 그리 많지는 않아. 수정방에 공부가주, 연태고량주, 검남춘, 모대주 정도만 마셨을 뿐이지.”
“중국의 내노라 하는 명주는 다 마셨군, 쯧쯧······. 그 정도 술을 마시고 운기도 하지 않은 채 멀쩡한 게 과연 무림인답다만······. 좀 있다가 대진표 공개와 시합이 바로 시작된다. 그 전에 해독을 해둬라.”
“대진표 공개를 한다고??”
“8강이 결정되었지 않나. 이제부턴 시드 선수들도 나서니 대진표를 한번 공개해야겠지.”
“그렇군······.”
원륭은 소파에 앉은 채 턱을 괴고 지켜봤다. 곧 유리창 너머로 화구가 대진표를 짜는 모습이 보였다.
“자! 이제부터 8강이 시작됩니다!! 8강부턴 그동안 시드선수였던 자들이 본격적으로 참가하게 되는데요, 다만 여기서 페널티가 있습니다!!”
“응?!?”
원륭은 고개를 갸웃했다.
“128강부터 싸워온 자들과 다르게, 시드 선수들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내공은 물론 신체의 상처도 없죠. 반대로 처음부터 그 격전을 뚫고 온 자들은 아무리 몸을 잘 관리했다 하더라도 분명히 내공의 소모나 사소한 신체의 피해라도 있었을 겁니다.”
‘그건 그렇겠지.’
원륭은 납득했다. 128명의 선수 중에는 그야말로 자리만 차지하는 삼류무림인들도 있었지만 시드 선수가 아님에도 상당한 실력을 자랑하는 헐크G나 태사향 같은 자들도 있었다.
시드 선수들도 그들을 만나면 위험한데 그런 자들을 만나지 않고 8강에 안착했으니 아무리 이 대회의 주최자라도 이득이 있는 건 당연한 것이다.
“시드 선수는 총 세 명이 있는데요, 각각 순홍 그룹의 일화 선수, 지평선 그룹의 당화 선수, 그리고 천지 그룹의 천만홍 선수입니다. 본래 흑룡 그룹의 진흑창 선수도 시드 선수이나, 그는 스스로 시드권을 포기하고 128강부터 참전했습니다. 어쨌든 이 세 시드 선수에 대한 페널티는, ‘상대 선수를 미리 가르쳐주지 않는다.’입니다.”
‘흐음······. 그 정도면 적당한 페널티인가.’
원륭은 납득이 갈듯, 말듯해서 고개를 살짝 갸우뚱했다.
“페널티라고 해도, 경기에 지장이 갈 정도의 페널티를 줘서는 시드권을 받은 의미가 없겠죠. 그래서 상대선수를 미리 가르쳐주지 않는다 인데, 사실 알다시피 16강전까지의 대결에서는 상대를 미리 알 수 있었습니다. 대진표가 공개돼있기 때문에 말하지 않아도 분명 알 수 있었죠.”
“에엑, 그랬나.”
“설마 대진표도 모르고 경기를 한 건가, 너는??”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진흑창이 자신을 바라보자, 원륭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게 뭐 어때서?”
“하지만······. 분명히 상대를 알면 미리 대비도 할 수 있고 훨씬 더 유리하지 않은가? 쓰는 무공이라든가, 유파, 약점 같은 것도 알 수 있고 말이야.”
“그러면 재미없잖아.”
“!!!”
“결국 이러쿵저러쿵 해봤자 경기장에 올라가보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오히려 어설픈 정보를 미리 알고 가느니 현장에서 파악하는 게 더 빨라.”
‘그건 그럴지도······.’
진흑창은 납득했다. 확실히 그 말 대로였다. 이 대회는 128강전부터 진행되기 때문에 결승전까지 치면 무려 일곱 번의 경기나 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이 싸우는 모습은 고수들의 눈에 의해 샅샅이 해부되는 것이다.
아무리 강한 무공이라도 약점이라거나 상성은 반드시 있다.
쾌검만을 사용한다면 반대로 힘이 모자라는 경우가 많고, 중검만을 사용한다면 당연히 속도가 모자랐다. 그럼 상대는 그 약점을 공략해 승리를 챙기는 것이다.
그래서 이 대회의 선수들은 일부러 128강전이나 64강전 등 낮은 단계의 경기에서는 자신의 실력을 숨기고 공력을 반 이하로만 운용하거나, 주로 사용하는 무기가 아닌 다른 무기나 무공을 사용하는 등 철저하게 자신을 숨겼다.
처음부터 자신의 주 무기를 보여준 건 원륭이나 진흑창, 그리고 헐크G나 태사향 같은 강자들 정도??
그들은 남의 눈 따위는 신경 쓰지 않으므로 처음부터 자신의 본신의 무공을 선보인 것이다.
아무튼 화구가 진행방식의 소개를 계속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와는 달리 대진표는 시드선수가 아닌, 다른 선수들에게만 개인적으로 통지됩니다.”
“잠깐, 시드선수들은 동의한 거야?!”
“아무리 그래도 8강이라는 본격적인 시기에 그런 페널티를 주는 건 뭔가 불합리한 것 같은데 말이야!!!”
관중석에서 각 그룹의 소속원들이 일어났다. 이들은 결국 4대 그룹 중 하나에 소속되어 있으므로 그 소속감이 엄청난 수준이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수장이 불리해지는 것 같자 항의를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화구는 말했다.
“그럴 줄 알고 시드를 받은 세 선수들에게는 미리 동의를 구해놨습니다. 그들도 그 정도의 페널티는 감수하겠다며 흔쾌히 납득하더군요.”
“끄응, 총수님이 그렇다면야······.”
“딱히 할 말은 없지······.”
바로 불만은 수그러들었다.
“그런 의미에서 조 추첨 역시 그들 세 명을 빼고 진행됩니다. 조 추첨 자리에 그들이 있어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겠죠? 세분 선수를 제외한 나머지 다섯 명은 추첨하는 방으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
원륭과 진흑창은 VIP실에 당화와 천만홍을 남겨두고 일어섰는데, 이동하는 중에 진흑창이 문득 입을 열었다.
“후후, 첫 대결부터 우리가 붙으면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
“그럴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맛있는 음식은 나중에 먹는 게 낫지 않나? 난 그러는 편인데.”
“나도 동감이다.”
그들은 씨익 웃으며 추첨실로 향했다. 거기엔 그들을 제외한 세 명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흐음······.”
원륭은 찬찬히 그들의 인상을 살폈다. 한명은 날카로운 눈의 험상궂은 인상을 가진 사나이. 다른 한명은 다부진 몸의 유연해 보이는 사나이였다. 그리고 마지막 한 명은 무려 활을 들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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