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9 고향의 향기
“대만여행??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지??”
뚱한 표정의 원륭을 보고, 홍청서는 말했다.
“지금 대만은 아시아에서 가장 발전하고 있는 나라에요. 아마 직접 보지 않으면 못 믿으시겠죠.”
“대만이 발전하고 있는 건 우리도 알고 있어. 우리를 일반인들과 똑같이 생각하지 마. 일반인들이야 정보가 통제돼있고 적국인 대만에 대해서 부정적인 공산당의 선동만을 접할 수 있지만, 우리는 다르지. 우릴 너무 우습게 보는군.”
“아,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직접 와서 보면 뭔가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한거에요.”
“그렇게 하면 우리들이 대만 음양당과 협력할 것 같나? 꿈 깨시지. 우리가 대만의 발전사항에 대해 알고 있는 것처럼, 장개석과 국민당이 대만에서 뭘 하고 있는 건지도 손에 쥐듯 다 알고 있어. 너희는 정적들을 숙청하고 범죄조직인 청방을 정치깡패로 동원해서 대중들을 억압하고 선동하는데 그게 홍위병들을 이용해 정적들을 탄압한 모택동과 4인방, 공산당과 뭐가 다르지?? 그럼에도 너희들이 중국에 대해 우위를 주장할 수 있나!!”
“!!”
급작스레 내지른 원륭의 사자후에 홍청서는 잠시 아무 말도 못했다.
그러다 잠시 후 그녀는 가까스로 떨리는 입을 열며 말했다.
“공산당은 당신과 우리의 공통의 적이에요. 그러니 당신들과 힘을 합쳐 그들을 타도할 생각을 했을 뿐이에요. 거기엔 어떤 다른 뜻도 없어요.”
“울먹거리지 마. 나한테 연기는 안 통해!!”
“!!”
쐑!! 홍청서가 세차게 싸대기를 내질렀다. 그러나 원륭은 가볍게 홍청서의 손목을 두 손가락으로 잡아버린 것이다.
“너의 무공도 통하지 않아.”
“······!!”
이에 홍청서는 자신도 모르게 완전히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펑펑 울며 서럽게 얘기했던 것이다.
“어째서 나의 진심을 무시하시나요? 그때 나를 도와준 것 때문에 신분과 입장을 떠나서 나는 줄곧 당신에게 고마워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런 호의를 그런 식으로 무시하시나요?!”
“호의를 베푸는 걸 은혜로 생각하지 마. 베풀어달라고 한 적 없어. 그리고 그것이 완전한 호의라고 장담할 수 있나? 내 입장에서 그건 사지로 들어가는 것 뿐이야.”
“!!”
다시 한 번 분노에 차 홍청서는 원륭의 뺨을 치려했으나, 이내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그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타지로 걸어들어가는 것은 사지로 가는 것과 마찬가지겠죠. 제가 너무 제 생각만 했네요. 저는 이만 돌아가겠어요.”
“잠깐, 거절한다고는 하지 않았어.”
“예??”
“거절한다고는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방금 전 사지로 걸어가는 것과 같다느니, 믿을 수 없다느니······.”
“못 믿는 것과 가는 것은 다르지. 살다보면 반신반의하면서도 결국 하는 일이 많지 않나? 그것과 마찬가지야. 난 속아주기로 하겠다고. 자, 얼른 나를 속여 봐. 오히려 속으면 기대를 벗어나지 않아 덜 당황스러울 것 같군.”
그리고 하하하, 하며 웃는 원륭을 보고 홍청서는 눈물이 쏙 들어갔다.
더불어 다시 한 번 분노가 차오른 것이다.
‘이 자식, 미친 자식인가???’
17년 전 처음 봤을 때도 사실 원륭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풋내기인 무공 수준을 가지고 백주대낮에 용감하게도 홍위병들에게 덤벼들었는데, 제정신으로는 그리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다른 의미로 미친 것 같았다.
그때는 오히려 대만 음양당 소속 요원이라는 것을 밝히자 자신의 흐름에 말려 당황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농락한다.
게다가 숙녀가 울고 있는 것을 보고도 이렇게 무표정하게 농락할 수 있다는 말인가??
홍청서는 순간 자신이 원륭을 잘못 보았나 의심했다.
‘그래, 그렇겠지. 한평생 보고 산 가족도 어떨 땐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는데, 고작 17년 전에 한번 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건 무리겠지······.’
그제서야 홍청서는 자신이 환상에 빠졌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렸을 적부터 무공을 익히고 국민당에 들어가 첩보조직인 음양당에서 활동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한 번씩 상상으로만 그리던 백마 탄 왕자님을 만났다.
그 소년은 너무나 어설펐지만 열심히 배운 듯한 무공으로 자신을 곤경에서 구해주었다.
그러니 호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 그 환상이 와장창 부서졌던 것이다.
‘차라리 안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
그렇게 홍청서가 속으로 극심한 낙담을 하고 있는데, 원륭이 여전히 싱긋싱긋 웃으며 태연하게 물었다.
“그래서, 대만으로는 언제 떠나는 거지??”
“3일 후요······. 그런데 정말로 갈 생각인가요?”
“가려고 한다면 못갈 것도 없지. 때마침 그 강호육이라는 자에게도 다시 한 번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었고.”
“준비는 안 해도 되요?”
“그저 몸뚱아리 하나만 가면 되지 뭐 그리 챙길 게 있겠나. 그래서, 가는 수단은 뭐지? 배로 밀항이라도 하는 건가? 그 편이 가장 현실성 있을 것 같은데.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기본적으로 난 중국 정부의 특급 수배범이거든. 고향과 출신이 다 까발려져서 육로나 항공로로는 극히 국경을 넘기가 힘들어.”
“비행기를 타고 갈거에요.”
“비행기를??”
“얼마 전 우리 음양당에 첩보가 들어왔어요. 몇몇 중국 정부에 반대하는 인물들이 자유를 위해 대만으로의 망명을 준비한다는 소식이었죠. 그들이 요녕성 심양 공항에서 상해 홍교 공항으로 가는 여객기를 하나 납치할 거에요. 우리는 그들의 계획을 이용만 하면 되요. 계획이 성공만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며칠 후 대만에 도착하게 되겠죠.”
“항공기 납치사건을 이용한다고? 그건 너무 대담한 것 아닌가??”
“왜, 겁이 나나요.”
“너무 불확실한 요소가 많을 것 같아 그럴 뿐이야. 임표의 최후를 모르나?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고 있을 텐데??”
“······.”
항공기 사고로 죽은 임표의 얘기를 꺼내자 과연 이 대담한 홍청서도 순간 조용해졌다.
게다가 하필이면 임표가 타고 도망가던 비행기와 이번에 이들이 탑승할 비행기도 홍청서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같은 트라이던트 기종이었다.
그러니 순간 임표 얘기에 어떻게 섬찟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일반인들은 모르지만 이들은 모두 각자의 정보 루트로 임표의 사망에 파천황이 관련돼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최악의 경우, 파천황이 올지도 모른다고?라고 말하는 듯한 원륭의 표정에 과연 이 홍청서도 머리가 아찔해졌다.
쪽방촌의 무림인들뿐만 아니라 대만 음양당에게도 파천황은 공포의 존재였다.
자신의 수장인 강호육과 마찬가지의 무공을 갖고 있는데 실제로 그는 휘하의 대원들과 함께 금문도에 상륙하여 쑥대밭을 만들어놓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정보를 미리 입수한 강호육이 그의 음양당 요원들과 함께 미리 가서 준비하고 있다가 요격한 적이 있는데,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대만의 최우선 전략적 요충지인 금문도는 하루아침에 파천황에게 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 수많은 포격을 받고서도 버틴 금문도가.
그리고 위기에 빠지자 부하들을 모두 탈출시키고 자신이 있는 섬으로 무차별 폭격을 지시한 파천황을 보고 대만 음양당 요원들은 모두 한 가지 생각만이 들었던 것이다.
‘저 자는 공포다. 그리고 괴물이다.’
파천황은 공포를 주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냥 공포 그 자체다.
상식적으로 자신이 있는 곳을 향해 무차별 폭격을 지시하는데 그 자가 괴물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자는 죽음이다. 신이다. 괴물이다.
그렇게 대만 음양당 요원들에게는 파천황에 대한 공포가 뼛속 깊이 박혀있었다.
물론 그건 공안 무림맹의 대원들도 마찬가지였지만. 한 자루 중식도에 붉은 화염을 두르고 마친 듯이 웃으며 적들을 태워버리는 강호육은 염왕의 화신으로 보였던 것이다.
금문도에서 있었던 비상식적인 이 결전은 결국 양측의 무승부로 끝났다.
대만 본토에서 급하게 수송선을 타고 온 지원군을 보고 파천황이 물러서긴 했지만, 대만 음양당이나 공안 무림맹이나 그 피해가 막심하긴 마찬가지였다.
얼음에 얼어 죽고, 불에 타죽고, 미처 빠져나가지 못해 포탄에 가루가 되고 총에 맞아 죽은 자들이 한둘이 아닌데 과연 금문도는 지옥이 따로 없었던 것이다.
그 당시 금문도에 있지는 않았지만, 본토에서 정보를 전해들은 것만으로 홍청서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것이 홍청서가 원륭을 비롯한 쪽방촌의 무림인들을 하루빨리 영입하려는 이유였다.
‘파천황 같은 괴물을 우리만으로 당하기엔 너무 부족해. 고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아. 반드시 그들을 영입해야해.’
쪽방촌의 무림인들은 말하자면 제3세력이다. 실력도 있고 그 강함은 보증할 수 있지만 문제는 이들이 워낙 반골기질이 심해서 조그만 부정도 용납을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극좌인 공산당도, 극우인 국민당도 용납하지 못한다.
그들의 부정을 모두 규탄하고, 어느 한쪽의 세력이 되려는 것을 거절한다.
그것이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의 고민거리였다. 자기 휘하로 넣기만 하면 상대편 진영에 대한 우위가 확실히 점해지는데, 이들 골칫거리인 쪽방촌의 무림인들이 어느 세력으로 정해지지 않고 모두를 적대한다는 것이다.
‘차라리 완전히 적이나 되면 모르겠건만······.’
이것이 양측 진영 수뇌부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차라리 완벽히 적이라도 되면 총공격해서 쓸어버리겠는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니 함부로 쓸어버리기도 애매한 것이다.
만약에 국민당이든 공산당이든 명백히 적의를 가지고 그들을 총공격한다면, 그때는 정말로 반대 진영에 붙어 이쪽을 적대할지도 모른다.
쪽방촌의 무림인들은 양측을 모두 경계했지만 그래도 생존의 위기가 달린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을 거라는 관측이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쪽방촌 무림인들이 지금까지 버티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만약 그들이 어느 진영으로 합류한다면, 그때는 전면전이 벌어질 것이다.
우위에 선 진영은 자신들의 우위를 절대 놓치지 않겠지. 그리고 전면전이 벌어지면 당연히 최우선 투입되는 것은 쪽방촌의 무림인들인 것이다.
그들은 파천황이든 강호육이든 완벽히 쓰러트릴 수 있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상당히 힘을 빼놓고 고전시킬 수는 있다.
신과 같은 무공을 지닌 그 둘이라도 고수인 이들 여덟 명을 순식간에 죽여 버리기는 힘들다.
만약에 해치우더라도 그 후엔 상당한 소모를 피할 수 없겠지.
그리고 그동안 힘을 비축하고 있던 쪽이 난입하면 제 아무리 신과 같은 무공을 지닌 파천황이나 강호육이라도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쪽방촌의 무림인들은 그 양쪽 모두를 경계하기 때문에, 어느 한쪽 진영에 들어가도 서로 경계하고 의심할 것이다.
그러니 공산당이든 국민당이든 그들이 자기 진영으로 들어오더라도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고, 당면한 가장 큰 문제인 적대세력의 수장을 상대하는 임무를 최우선적으로 맡기겠지.
결과는 양패구상. 어찌됐든 쪽방촌의 무림인들에게 미래는 없는 것이다.
그 점을 생각해본다면 차라리 지금처럼 제3세력으로서 균형을 지키는 것이 그들에게는 나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 점이 확실하다.
‘그것까지 생각하고 버티고 있는 건가······. 확실히 대단하군.’
홍청서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 쪽방촌의 무림인들은 보통내기가 아니다.
그들은 단순히 무공이 강해서 살아남은 것은 아닌 것이다.
그 판단력, 처세술, 모든 것이 합쳐져서 그들의 생존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한편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홍청서를 보고, 원륭은 말했다.
“뭘 생각하고 있지?”
“아뇨, 아무것도······.”
“어쨌든 가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자세한 계획이나 털어놔. 급박한 상황에 대응할 수 있게.”
“정말로 가려는 건가요?”
“가자고 제안한 건 너 아닌가?? 왜, 가지 않아도 될까?”
“아뇨, 가주세요! 가보면 좋을거에요!!”
그러나 애원하는 태도와는 달리, 홍청서의 마음속에선 정말로 분노가 싹트고 있었다.
‘진짜로 데려가지 말까, 휴우······. 슬슬 화딱지가 나서 못 참겠구나. 예전의 그 순수하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이런 뺀질이가 되어서······.’
홍청서 역시 무림인이라 기본적으로 성질이 좀 있었다. 그런데 원륭이 이렇게 쥐락펴락하며 자신을 농락하자 첩보조직의 요원으로서 쌓은 수련도 다 부서지고, 어느새 분노한 표정이 은연중에 얼굴에 드러났던 것이다.
원륭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빙긋 웃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아~ 대만 여행이 기대되는군. 대만은 처음 가는데 얼마나 재밌을까??”
그렇게 홍청서가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복장이 뒤집어질 때, 원륭은 아무 말 없이 그저 싱긋 웃으며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아무튼 계획은 진행되었다. 계획대로 심양에서 상해로 가는 비행기에 위조한 신분증을 통해 탑승한 건 좋았고, 입수한 첩보대로 납치범들이 비행기를 납치한 건 좋았는데 엉뚱하게도 당초 대만으로 방향을 틀어야 할 비행기가 평양, 그리고 다시 대한민국으로 향한 것이다.
이걸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무튼 비행기는 1983년 5월 5일, 춘천 미군기지 활주로에 착륙했다. 원륭이 처음으로 고국인 대한민국 땅을 밟는 순간이었다.
“아아, 이것이 고향의 향기인가. 매우 싱그럽구만.”
펼쳐진 계단을 밟으면서, 원륭은 싱긋 웃었다.
- 작가의말
아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이 중국민항 296편 불시착 사건 역시 실제 있었던 사건입니다.
거기에 약간 소설적 조미료를 뿌리고자 하오니, 재밌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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