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6 어둠의 비상
1989년 4월 17일, 북경 내 시민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원륭과 쪽방촌 무림인들은 고층 빌딩 꼭대기에서 그렇게 사람들이 모이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니까 저게 다 결정적으로 호요방(후야오방. 胡耀邦) 총서기의 죽음 때문이란 말입니까?”
“결정적으로는 그렇지. 하지만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네. 먼저 등소평이 개혁개방 정책을 펼친 이후 실업자가 증가하고 물가가 상승하며 부정부패가 늘어나는 등 오히려 부정적인 문제도 매우 커졌지. 거기에 모택동이 살아있던 시절만 해도 어찌됐든 중국은 지금보다 더욱 공산주의 국가에 가까웠기 때문에 대학의 등록금이나 기숙사비, 식비가 모두 무료였네. 뭐······. 그 당시에는 무려 폭동을 일으키는 홍위병마저도 국가에서 먹이고 재워줬지만. 아무튼 그런 시대였었는데 모택동이 죽고 나서 어찌됐든 그런 혜택이 없어진 데에 대한 불만, 옆 나라인 소련에서 고르바초프가 공산당뿐만이 아닌 다른 당의 존재도 보장하는 등 자유를 확대하는 조치를 취하자 그걸 보고 불만이 더욱 가중되었지. 결국 빈부격차, 일당독재, 이런 문제들이 쌓이고 쌓여서 터진 것이야. 그리고 호요방 총서기는 이런 민주화 요구에 적극적이었기에 그가 죽으니 저렇게 추모의 분위기에 휩싸인 것이지.”
“마치 주은래가 죽었을 때와 같군요.”
“그렇지······.”
그들은 주은래가 죽었을 때를 떠올렸다. 이름 높은 총리였던 주은래가 죽자, 사람들은 지금 이상으로 그를 추모하는 분위기가 강했다.
그래서 그때도 사람들은 천안문 광장에 모였는데, 강청을 비롯한 4인방이 주은래를 비난하고 공안을 동원해 추모를 방해하자 사람들은 더욱 분노하여 건물과 자동차 등을 부수는 등 폭력시위를 전개하게 되었다. 이들은 그때의 생각이 난 것이다.
“이번에도 그때처럼 될지도 모르겠군요.”
“이번에는 막아야지······. 솔직히 그때는 우리가 파천황의 공안 무림맹을 상대하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였네. 그래서 공안이 사람들에게 폭력을 휘둘러 해산시킴에도 불구하고 그를 막지 못했지. 하지만 이제는 달라. 우리 모두의 무공이 더욱 늘었고 파천황의 공안 무림맹은 한동안 그 움직임이 없네.”
“하지만 분명히 나올 텐데요.”
“그렇겠지······.”
원륭의 말에 진룡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대체 공안 무림맹이 왜 이토록 지금까지 그렇게 조용히 지내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물론 지금과 같은 대규모 사태가 일어나지 않아서 일수도 있었다.
하지만 공안 무림맹은 여전히 건재하다. 원륭이 6년 전 마지막으로 고향인 흑룡강성을 들렀을 때, 그는 마을을 나오다 여섯 명의 공안 무림맹 소속 요원들과 마주쳤다.
그들의 합격진은 생각보다 까다로운 것이었다. 결국 격퇴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내공이 생각보다 강해 하마터면 큰 낭패를 볼 뻔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내공을 늘려주는 마약성 물질을 사용한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쪽방촌 무림인들은 줄곧 경계하고 있었다.
이제 6년이나 흘렀으니 공안의 새로운 무림인 군단도 지금쯤 완성됐을 것이다.
“우리가 시민들을 탄압하는 일반 공안들을 막기 시작하면 공안 무림맹 소속 요원들이 투입될 걸세.”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진룡은 고개를 돌려 쪽방촌의 일원들을 둘다보았다.
상인관, 제갈의, 소형승, 사휘령, 하홍휘, 원륭, 그리고 불사왕······. 모두 제각기 장단점은 있지만 결국 자신을 믿고 끝까지 따라와 준 고마운 인물들이다.
“고맙네. 이런 나를 믿고 수십 년 동안이나 따라와 줘서.”
“아닙니다. 해야 할 도리를 했을 뿐이지요. 무림인이 되어서 무공을 익히고 어찌 그릇된 행동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진룡의 포권에 불사왕을 제외한 모두는 포권을 하는 것으로 답례했다. 그리고 예의 그 불사왕은 특유의 짜증나는 말투로 모두의 신경을 긁었던 것이다.
“지랄하지 말고 사태나 지켜보자고. 공산당 정부가 이번에 어떻게 나올진 모르니까.”
“······.”
짜증나긴 했으나 말은 맞는 말이었다. 중국은 지난번 천안문광장에서의 집회를 폭력적으로 대응했지만, 이번은 모를 일이었다.
소련을 비롯해서 전 세계의 공산국가들이 어느 정도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 유화적인 분위기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틀렸다. 그들은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버렸다.
공산주의의 종주인 소련을 넘어, 그들은 폭주기관차가 되어 출발해버렸다.
아무도 막을 수 없는 그 길을······.
4월 22일 시위가 점점 확대되고, 4월 26일 등소평은 이 날을 기점으로 이번 시위를 반혁명 폭도들의 난으로 규정했다.
5월 13일부터 천 여 명의 학생들이 천안문 광장에서 단식을 시작했는데, 5월 15일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방중했으나 천안문 광장이 시위대로 가득 차 정상적인 예우는커녕 고르바초프가 북경 뒷골목을 돌아 조어대로 향하는 일이 벌어졌다.
회담을 하는 동안에도 시위대가 내는 소리가 조어대까지 들려와, 등소평을 비롯한 공산당 수뇌부들은 모두 분노하고 당황스러워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게다가 얼마 전까지 중국은 소련과 국경분쟁을 하고 베트남과 전쟁을 치른 터라 같은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관계가 엉망이 된 터라 이번 고르바초프의 방문은 그 문제를 다루고 중국과 소련의 우호를 재확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 자리에서 개망신을 당하니 등소평은 극도로 분노해서 이번 시위를 다시 한 번 난동이라 재확인하고 진압에 들어갔다. 등소평은 분노해 소리쳤다.
“이 폭도들을 모조리 제압해! 문화대혁명을 재현시키지 마라!!”
문화대혁명 때 폭도들의 난으로 인해 실각당하고 지방의 트랙터 공장으로 좌천된 뒤 그곳에서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는 손바닥의 상처도 입은 등소평은 이런 종류의 시위에 매우 예민했다.
정부국가체제를 뒤엎을 수 있는 시위는 모두 반란이자 폭동으로 보았던 것이다.
근본적으로는 등소평 본인의 개혁개방정책이 낳은 부작용과, 그를 포함한 공산당 수뇌부의 독재, 부정부패, 빈부격차가 그 원인이었고 그것이 호요방 총서기의 죽음으로 인해 터져 나온 것인데, 마치 13년 전의 천안문 사태와 같았다.
그러나 그때 당시와 다른 점은 1차 천안문 사태는 등소평의 정신적 스승이자 지도자였던 주은래를 추모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정작 그 계승자인 등소평이 이를 탄압하게 된 것이라는 점이었다.
등소평의 이 같은 진압 지시를 듣고 쪽방촌 무림인들은 물론 대학생, 양식있는 지식인들은 모두 경악했다.
“그의 스승인 주은래가 인민들을 잘 이끌어 죽은 후에도 그 같은 추모의 분위기가 일어나게 했거늘 후계자인 등소평이 이렇게 나오다니, 이건 인민과 스승에 대한 배반이다!!”
그러나 등소평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군통수권 역시 쥐고 있던 등소평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인민해방군 출동명령서에 서명했다.
인민해방군 장성들 중에선 오직 중장이었던 서근선(쉬친셴. 徐勤先)만이 상부의 명령을 거부했다.
“시위는 정치 문제에 속하고 따라서 대화와 협상을 통하여 이를 해결해야 합니다. 무력을 동원해서는 안됩니다!!”
서근선이 그렇게 주장했으나 대장도 쉽게 숙청당하는 인민해방군에서 일개 중장의 주장이 먹힐 리가 없었다. 그대로 서근선은 직위해제 되고 가택연금에 들어갔다.
이후 한동안 그의 소식이 들리지 않아, 서방에선 사형되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한편 당총서기 조자양(자오쯔양. 趙紫陽)은 17일 평양을 방문하고 돌아왔는데, 20일 계엄령이 발효되는 것을 막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자 전날 시민들에게 눈물로 호소하며 이렇게 말했다.
“시민 여러분, 우리가 너무 늦게 왔습니다. 상황이 매우 안 좋습니다. 제발 광장을 떠나주십시오!!”
그러나 그의 호소는 너무 늦어버렸다.
바로 다음날 계엄령이 선포됐고, 차마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지켜볼 수 없던 조자양은 병을 이유로 사임장을 제출하고 공산당을 떠났지만 결국 체포되어 서근선과 마찬가지로 가택연금 되고 말았다.
5월 20일 계엄령이 선포되고 중국 당국은 5만 명의 인민해방군을 투입하였으나, 의외로 시민들의 저항이 너무 거세 한동안 교외에 머물렀다.
인민해방군은 대중을 진압하기 위해 신문이나 TV등을 보거나 들을 수 없었고, 오직 공산당의 사설만을 볼 수 있었다.
자신들이 진압하는 게 무고한 시민이 아닌 성난 폭도라고 알아야했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인민해방군을 포위하여 자신들의 무고를 호소했고, 시민들이 오히려 포위된 병사들에게 인도적인 차원에서 물과 식량을 지원해주었다.
반대로 오랜 단식으로 인해 쓰러진 시민들을 군의관이 돌보기도 했고.
이렇게 흘러가는 분위기를 보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쩌면 상황이 좋게 흘러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등소평은 개의치 않았다.
계속된 강요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이 해산하지 않자, 당 내에서는 등소평을 비롯한 강경 무력진압파가 득세하게 되었다.
5월 23일 모택동 초상화에 페인트를 뿌리고 ‘독재는 종식되어야 한다.’ ‘개인 우상화는 종식되어야 한다.’등의 현수막을 걸어놓은 사람들이 공안에 연행되었다.
5월 30일 북경의 예술대학 학생들은 공동 제작한 민주주의의 여신상을 천안문 광장에 세우고 있었는데,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시위대 학생 지도부 왕단(王丹)은 소름이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야, 너무 조용하지 않아??”
“뭐가? 새벽이라 당연히 조용하지.”
같은 시위대 지도부인 채령(차이링. 柴玲)이 말했다. 그러나 왕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동안 5만 명의 인민해방군이 모여 있는데 조용할 수가 없었잖아. 아무리 규율에 맞게 철저히 입을 닫고 있었어도 그 5만 명이 내뿜는 기세와 잡다한 소리는 막을 수 없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이게 뭐야? 조용해도 너무 조용해. 새소리 하나도 들리지 않아.”
“새벽이라 잠을 자는 거겠지. 군대도 최소한의 불침번만을 남기고 밤에는 모두 자잖아.”
“그러면은 좋겠지만······.”
“네 생각은 착각이야. 너무 과민한 반응 보이지 말고 가서 잠이나 자. 단식운동으로 가뜩이나 체력도 떨어진 상태인데.”
“그럴까······.”
왕단은 그 말대로 단식운동으로 인해 극도로 배가 고픈 상태였기에, 고픈 배를 쓰다듬으며 돌아섰다.
그때 그의 눈에 민주주의의 여신상이라는 작품이 갑자기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어?!?”
그러나 다시 한 번 눈을 비비고 보니 그런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제야 왕단은 자신이 극도로 피로한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죽하면 자신이 그러한 모습까지 보게 된 것인가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환상인가······.”
“······.”
등을 돌리고 자러 가는 왕단의 뒤에서 민주주의의 여신상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환상은 4일후 일어날 참사를 보여준 것일지도 몰랐다.
6월 3일, 대참사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중국 공산당은 6월 4일 새벽 여섯시까지 시민을 천안문 광장에서 해산시키라 명령했고, 그 어떤 수단을 써도 상관없다고 지시했다.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밤 열시부터 인민해방군이 발포를 시작했다.
이 세상 모든 압제로부터 인민을 자유롭게 하고 해방시킨다는 인민해방군이, 인민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악!!!”
“그만둬!!!”
“우리는 일반시민들이다!!!”
시민들이 인민해방군에게 직접 간청해보았으나, 호소는 통하지 않았다.
명령을 받은 인민해방군은 마치 기계처럼 흩어지지 않는 시민들을 학살해버렸다.
심지어 도망가는 시민들마저 그 등 뒤에 대고 발포하고, 탱크로 쫓아가 밀어버렸다.
곧 탱크마다 캐터필러에 사람 시체의 고기조각이 가득 끼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탱크는 아무런 문제없이 다음 희생양을 찾아 달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진압에 나선 군인들은 북경 출신들이 아니었다.
북경 출신의 군인들이 북경 시민들을 진압하면 반드시 저항이 나오고 그러다 군부대까지 돌아서서 공산당에 총부리를 겨눌지도 모른다.
이런 점을 고려한 공산당은 진압부대마저 철저히 타 지역의 부대로 편성했다.
그 중 대부분은 그동안 중국 당국에게 반란의 땅으로 찍혀 아예 핵무기 실험장으로 전락한 위구르 지역 병사들이었다.
중국 당국은 위구르인들을 차별하면서도 그들을 군대로 징집했고, 다시 그들을 북경 시민들을 학살하는데 이용했던 것이다.
탄압받는 자들끼리의 대결······. 중국 정부는 그 차별받은 집단 둘을 충돌시키면서 자신들은 뒤로 쏙 빠져 시위가 진압되는 것을 기다렸다.
그들이 기다리는 것은 오직 ‘시위대 해산완료’라는 보고뿐이었다.
그 어떤 참사도 그들에게 보고가 들어갈 때 즈음에는 그저 한건의 짤막한 문서뿐이겠지······.
그들에겐 진상도 중요하지 않았다.
문서로 작성한다면 아무리 길게 써도 모자랄 일을 그들은 실무진들에게 넘기고 그저 한 줄의 짤막한 보고로 받길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길게 온다면 대충 보다가 집어던지겠지······.
그 보고서는 곧 비서가 정리하여 쓰레기통으로 집어넣을 것이고, 원본은 한부가 낡고 먼지 쌓인 자료실에 처박혀 수십 년 후에야 진상이 알려질 것이다.
아니, 영원히 알려지지 않을 지도 모르지······. 어쩌면 당시의 정확한 내용이 담긴 진상은.
그렇게 탱크가 진군하고 총 든 인민해방군이 다가오자 시민들은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 개중엔 성공해서 전차를 폭파시키고 전차병을 끌어낸 곳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했다. 운 좋게 약한 부위가 터진 전차도 있었으나, 대부분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시민을 향해 진군했다. 분위기는 절망적이었다.
그때 쪽방촌 무림인들이 나섰다.
“우리가 나서야겠군.”
여덟 명의 쪽방촌 무림인들이 나섰다. 그들은 대로를 통해 진군하는 인민해방군 부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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