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지론
“원망? 아니. 갑자기 왜 그런 얘기를 하는 거지??”
당화가 술을 마시며 웃었다. 그러자 원륭은 어두운 얼굴로 말한 것이다.
“어찌 됐든 내가 너의 손자들을 죽인 건 틀림없는 일. 원망을 해도 이상하진 않지.”
“아니, 이상한 건 너다 원륭. 애초에 그 애들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세계에서 일을 해왔어. 겉으로는 영화사 일을 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우리와 같은 어둠의 세계의 인간들이었지. 게다가 그 애들이 죽게 된 계기는 무고한 시민을 납치, 감금, 협박한 것이다. 그렇지 않나??”
“그건 그렇지.”
원륭도 술을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원륭은 그들이 당화의 손자라는 것을 알고 죽인 것이 아니었다.
배우 유가령을 납치한 그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죽이고 그 피를 빨아 기억을 흡수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들이 당화의 손자이자 사천당문의 일족이라는 것을 알아채긴 했는데, 그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혈귀의 기억흡수는 기본적으로 산 자보다 죽은 자에게 더 잘 듣는다.
만약 살아있을 때 당화의 손자인 당건이나 당령의 기억들을 완전히 흡수할 수 있었다면, 굳이 죽일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인질로 삼아 교섭을 유리하게 진행할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것이 되지 않으니 죽인 것이다. 원륭은 말했다.
“그들에게 섭혼술을 써서 너의 정보와 거처, 정체를 알아낸 것은 좋았는데 문제는 처음 죽인 당건은 너의 대한 거처를 몰랐고, 당령은 알긴 했지만 그에게서 정보를 빼내기 위해서는 거의 죽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난 그 둘을 죽이고 만 것이지.”
“그런가. 그렇게 된 거였군. 확실히 나에 대한 정보는 내 손자들이라고 해서 모두 아는 것이 아니야. 어떻게 네가 나의 손자들에게서 실낱같은 나의 정보를 빼내었는지는 나도 궁금한 참이었는데 그렇게 된 것이었군. 네 섭혼술은 상대를 빈사상태로 몰아넣어야 쓸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
원륭은 혈귀인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혈귀의 권능 중 하나인 기억흡수를 섭혼술 정도로 얘기했다. 사실 그것은 틀린 것은 아니다.
섭혼술이란 즉 영혼을 다스리는 기술(攝魂術)이라는 뜻인데, 정말로 그에게 물린 자들은 산채로 유체가 이탈하는 듯한 고통을 겪는 것이다.
생피를 빨리면서 기억까지 흡수당하는데 고통스럽지 않을 리가 없다.
그리고 아무래도 정신이 온전한 상태보다 타격을 받아 빈사상태에 빠졌을 때 이런 정신계 공격에 대한 내성 또한 내려가므로 빈사상태에서만 쓸 수 있다는 말도 전혀 틀린 것은 아니었다.
실제론 멀쩡한 상태에서도 쓸 수는 있지만 다만 그러면 상대는 격렬히 저항할 것이다.
그러면 그 성공률도 떨어지겠지. 그런데 당화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뭘, 신경 쓸 것 없다. 만약에 내가 그놈들의 행태를 알아차렸으면 내 스스로 벌했을 테니까. 당문이 독과 암기라는 비겁한 수단을 쓴다고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여전히 무림에 남아있을 수 있었던 까닭은 그 행위는 비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지. 항상 정도를 지키며 무림에 남아 있으려고 했는데 그런 범죄를 저질렀으니 용서받을 길이 없다. 어떻게 보면 네가 잘 죽인거야. 고맙군.”
“당문이 정도를 지킨다고?? 내가 만난 당갈이란 자는 그렇지 않았는데??”
“아, 당갈?? 그 자는 우리 당문의 사생아 같은 존재다. 재능도 없고 성격도 그다지 좋지를 않아 진작에 가문에서 추방해버렸지. 가문에서 추방되기 전엔 가문의 비전절기를 익히지 못해 자기만의 무공인 무슨 요독공인가를 만든다고 했는데······. 덕분에 그 녀석의 주변에만 가면 소변 냄새가 엄청났지. 본래는 배출되어야할 소변의 요소를 체내에 축적해 그것을 독으로 쓰는 무공이라니, 참으로 발상은 엄청났다만. 그런데 그 자를 만났다고??”
“응, 내가 쓰러트렸지.”
“······결국 너는 나까지 포함해 당문의 인물을 네 명이나 쓰러트렸군. 참으로 많이도 쓰러트렸다. 최근 100년간 당문의 인물을 네 명이상 쓰러트린 사람은 너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도.”
“방금 당갈은 당문의 사생아라며??”
“아, 그렇게 생각하면 셋이군. 아니, 당건이나 당령도 그렇게 보면 해서는 안 되는 짓을 저지른 거니 어떻게 보면 똑같은가······. 듣자하니 당갈은 공안 무림맹에 들어갔다는 소문이 있던데.”
“아, 그래서 내가 죽였지.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내가 죽인 게 아닌가.”
“무슨 소리야??”
“당시 무림초출이었던 나는 필사적으로 그의 요독공에 피부가 녹아가면서 상대하고 있었는데, 기연을 얻어 어떻게 어떻게 요독을 해독하고 오히려 내공이 늘었다.”
“요독을 해독한 것 까지는 이해가 가는데 어떻게 그걸로 내공이 늘었지??”
“알지 모르겠지만 요독은 배기가스랑 만나면 중화가 되거든. 그의 요독에 중독되자마자 나는 근처에 시동이 걸려있던 자동차 배기구로 가 매연을 미친 듯이 마셨지.”
“호호호, 설마하니 독을 중화시키기 위해 매연을 마실 줄이야!! 너 같은 자는 무림사 수천 년 동안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호호호!!”
“뭐 자동차라는 개념이 생긴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니까.”
“그런 게 아니라 그 발상 말이다. 어떻게 요독에 중독됐는데 스스로 매연을 마실 발상을 한단 말이냐??”
“화학식을 조금 알고 있었거든.”
원륭이 매연을 마신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과거 의화단 운동 때 서구의 화기에 압도적인 패배를 겪은 진룡 등 쪽방촌 무림인들은 서구 과학을 공부하는 것에 열심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화학식이라 해봤자 중학교나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수준의 것이고, 쪽방촌의 무림인 중에는 의사이자 지식인인 제갈의 같은 자들도 있었기 때문에 학교를 다니지 않은 원륭은 그들에게서 최소한의 지식과 상식을 배울 수 있었다.
그래서 운 좋게 요소와 매연이 만나면 깨끗한 물로 바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질소산화물인 매연에 요소수가 만나면 화학반응을 통해 물과 질소로 바뀐다.
그래서 나중엔 디젤 차량에 매연 감소를 위해 요소수를 넣는 것이 의무가 되었는데, 그런 천운을 통해 원륭은 살이 녹아내릴 정도로 독한 당갈의 요독공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때를 떠올리며 원륭은 쓴 웃음을 지었다.
“지금이야 그냥 웃으며 넘어갈 수 있지만 그때 당시엔 정말 절박할 지경이었다. 난생 처음 맛보든 독공인데다 그 위력이 어마무시했지. 당시 공안 무림맹의 요원들도 제 살이 녹을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할 지경이었다.”
“냄새가 나서 그런 건 아니고??”
“뭐, 그런 것도 있었지. 그래서 자효진이 그를 죽였는지도.”
“자효진? 화산파의 자효진 말인가?”
“알고 있는가??”
“뭐, 그는 화산파의 차기 장문인 소리를 듣던 기대주였으니 말이다. 화산파 100년 내에 나온 최고의 천재소리를 들었으니 이곳 홍콩에까지 소문이 들릴 만도 했지. 그런데 자효진이 당갈을 죽였다고??”
“아. 그런데 그 과정에서 당갈이 최후의 저항을 하는 바람에 자효진은 무인으로서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오른팔이 녹아버렸어. 그 후에 무슨 독수검법인가 뭔가를 익히고 돌아오긴 했는데 아무래도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터라 어찌어찌 쓰러트릴 수는 있었지.”
“너도 참 파란만장한 인생을 겪었군. 그때가 몇 살이었지??”
“18세이었나······. 24년 전의 일이다.”
“그 정도 나이에 그 정도 고수들을 연거푸 쓰러트린 자들은 아마 기나긴 무림사에서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 내가 듣기로는 의화단 운동의 참가자들도 당시 상당히 젊은 나이였다고 들었는데. 주축이 된 백련교주를 비롯해서 나와 같이 행동을 함께한 진룡 대협이나 다른 이들도 그 당시 20대 초반이라고 들었다.”
“그래. 나도 그랬지. 우리는 함께했고, 싸웠다.”
“······.”
당화는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끝은 좋지 않았던 것이다.
“의화단 운동은 서구 열강 연합군의 공격, 이홍장과 원세개 등을 비롯한 중국 군벌들의 공격, 그리고 의화단 내부의 문제로 인한 삼중고로 실패했다고 하더군. 듣자하니 식인 행위도 저질렀다고 하던가.”
“아아, 그것은 사실이다. 당시 의화단은 무림인들의 모임으로 시작했지만 나중에 가서는 일반 민초들이 훨씬 더 많아졌지. 그들이 보기엔 한 번의 도약으로 몇 장을 날고 바위를 부수는 무림인들의 무공은 이해를 할 수 없는 것이었어. 그러자 그들은 평소 가지고 있던 서양인들에 대한 미움으로 식인을 저질렀고, 한편 우리들의 무공의 비결이 부적에서 나오는 것이라 믿고 부적을 만들고 지니고 다니면 바위도 부수고 총알도 침범하지 못하는 금강불괴의 몸이 된다고 믿었지. 그들은 그것을 의화권이라 불렀다. 그리고 마교인인 진룡이나 기타 어엿한 격식 있는 무림인들은 그런 미신을 믿지 않았지만 참가한 사파 무림인들도 그런 미신에 부화뇌동하여 걷잡을 수 없이 사태가 커졌다. 의화단 운동은 초기엔 성과를 좀 거뒀지만 그마저도 힘없는 서양 양민들을 상대해서 얻은 것이고, 그 결과 진정한 서구 열강의 연합군이 모이자 오합지졸처럼 격파됐지. 그 후의 얘기는 알겠지??”
“으음······.”
그 다음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서구 열강의 공격으로 와해되어 가는 의화단의 앞에 한빙신공을 얻은 파천황이 나타나 마무리를 지었고, 한빙신공을 훔친 파천황을 쫓아 강호육이 나타나는 바람에 두 신공의 대결로 대결장은 황무지가 되었다.
사흘 밤낮으로 불과 얼음이 사라지지 않았는데 지금도 그곳은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것이다.
잡초란 매우 생명력이 강해 어지간하면 화재가 난 장소에서도 잘 자랐는데, 거의 100년이 다되어가는 지금도 자라지 않는 것을 보면 그 자리에 남은 두 고수의 기운이 어마어마해서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두 절대강자의 대결 앞에 의화단원들을 뿔뿔이 흩어져 그저 도망가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화는 쓰디쓴 얼굴로 술을 들이켰다.
“아까까지만 해도 달았던 이 커피 칵테일이 너무나 쓰게만 느껴지는군. 돌이켜보면 아무 일도 아닌 것 같지만 그 당시에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하늘 높이 치솟은 불기둥. 그 기둥을 감싸고 지천을 뒤덮는 얼음. 우리는 그저 얼굴에 숯 검댕을 묻힌 채로 미친 듯이 도망가는 수밖에 없었지. 그 누가 사천당문과 마교, 제갈세가의 후계자들이 그렇게 부리나케 도망칠 줄 알았겠는가, 호호.”
당화의 말은 사실이었다. 당화나 진룡, 제갈의 등은 그 당시 손에 꼽히는 후기지수들 중에서도 후기지수들이었지만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두 강자 앞에서는 도망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당화가 물었다.
“이봐, 원륭. 파천황은 더 강해졌나? 강호육도 더??”
“그래. 더 강해졌다.”
“그래, 절망적이군······.”
당화는 웃었다.
“호호! 호호호호호호!!!”
원륭은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두려움, 그리고 공포. 만천화우를 익힌 당화도 그 절대강자들 앞에서는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렵나??”
“그래, 두렵다. 미친 듯이 두렵지.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 날의 열기와 한기를 느낄 수 있다. 흩날리는 재, 그리고 날아오르는 눈꽃. 너무나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그것들이 날아오를 때마다 순식간에 사람이 죽어갔지. 하지만 그때보다 더욱 강해졌다니, 절망적이지 않은가, 호호.”
그렇게 미친 듯이 웃는 당화였으나, 원륭은 침착하게 말했다.
“뭐 그런 그들을 상대로 진룡 대협 등과 우리들은 25년 동안 버텼다. 무려 25년 동안.”
“하지만 이기진 못했지.”
“그런 자들을 상대로 버티는 것만 해도 대단한 거야.”
“그건 그럴지도.”
당화는 솔직하게 긍정했다. 한빙신공과 열양진경은 본디 이 하늘의 섭리를 열었다고 알려진 근원의 무공 음양혼돈공의 반쪽들이었다.
도로 합치면 신의 영역에 발을 들일 수 있다고 알려진 신공들을 익힌 자들을 상대로 25년이나 살아남다니, 그것은 정말로 대단한 것이다. 원륭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확실히 이기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의 저항에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 만약 우리가 패배하고 다 죽으면 쇠퇴한 무림에선 더 이상 그들을 막을 수 있는 자들은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어디 심산유곡에 숨어있는 절대고수들이 나타나지 않고서야 말이야. 하지만 우리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역사에서 사라지진 않는다. 아무리 중국 공산당이 날조를 하고 은폐하더라도 그것은 틀림없는 진실이다. 역사의 궤적에 새겨진 우리들의 무용(武勇)은 영원하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당화??”
“그래. 아마 그럴 것이다.”
원륭은 당화와 잔을 마주치고 술잔을 쭈욱 들이켰다. 쓰디쓴 커피 칵테일의 맛은 어느새 달콤한 끝 맛으로 변해있었다.
그러나 암울한 현실을 생각하니 다시 한 번 쓴 맛이 올라왔던 것이다.
하지만 원륭은 포기하지 않았다.
‘언제나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항상.’
그것이 원륭의 지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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