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 정보
그런 원륭을 보며, 임소교는 아까 사령관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엾은 사람이라······.’
사령관은 그저 자신의 생각일 뿐이라며 말을 다 해놓고 내가 무슨 얘길 한 거지, 하면서 돌아가 버렸다. 그런 얘기를 듣고 원륭을 보고 있으려니 임소교는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원륭이 불쌍한 사람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하지만 몇 년 전 처음 봤던 때에 비해 왠지 모르게 측은한 느낌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왜인지는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임소교가 원륭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시선을 견디다 못한 원륭은 일어섰다.
“어디가요??”
“부동산업자들이나 만나러.”
“그 양아치들을요??”
“다른 데선 개새끼인지 몰라도 내 앞에선 순한 양들이지. 뭐야, 따라올 거야??”
“어차피 당신이 나가면 여기서 할 일도 없잖아요.”
“······.”
그 말은 맞는 말이기는 한데, 굳이 왜 따라 오냐고 할려다가 원륭은 그만두었다.
이 소녀는 예전부터 영화를 보여 달라고 한다던가, 밥을 사달라고 한다던가 지 멋 대로였다.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나쁘거나 예의가 없는 건 아닌데, 왠지 모르게 임소교랑 같이 있으면 그녀의 분위기에 휩쓸려서 원륭은 조금 껄끄럽기도 했다.
누군가의 분위기에 휩쓸리는 건 아주 사양이다. 원륭은 바라지 않았다.
아무튼 집을 나서 부동산업자의 가게로 가는데, 임소교는 정말로 따라왔다.
“후우······.”
원륭은 한숨을 쉬다가, 어차피 임소교도 부동산업자들의 신세를 지고 있으니 같이 오랜만에 인사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얼마 안가 근처에 있는 부동산업자들의 가게로 들어갔다.
딸랑.
“어서옵, 히이익!!!”
“뭐야, 내 얼굴에 귀신이라도 붙었나?? 왜 그렇게 기겁을 하고 난리야??”
“그게 아니라 갑자기 들어오니 깜짝 놀라서······.”
“손님이 그럼 갑자기 들어오지 무조건 예고하고 들어오리??”
“······.”
확실히 맞는 말이라 부동산업자들은 반박하지 못했다. 이들은 세 명이서 함께 일을 하는데, 말이 부동산업자지 그냥 동네 양아치들이나 다름없었다.
부동산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도 없고, 그저 이 구룡성채 내에서 오래 살아서 익숙하기 때문에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보통 소유권이라든지, 등기의 문제가 생기면 확정일자라든지 저당 잡힌 게 있나 등에 대해서 따져봐야 할 텐데, 이들은 집을 소개해서 소개비를 받아놓고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주먹으로 해결하는 게 일쑤였다.
사실 이게 구룡성채의 방식이다. 병원이든, 매음굴이든, 이 구룡성채 내에서 뭔가 문제가 생기면 일단 경찰을 부르는 것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는 게 상식이다.
주먹과 총이 지배하는 세계. 이것이 바로 1990년의 구룡성채였다. 90년대라고 해서 딱히 뭐 선진시민의식을 기대하면 안 된다.
치안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는 하층민들이 사는 세상은 일반인들이 사는 곳과는 차원이 다르니까. 그런 양아치들을 원륭은 왜 찾은 것일까.
“너희들하고 안지도 좀 오래됐는데 가끔은 얼굴을 봐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리 좋은 첫 만남은 아니었지만 그것도 인연 아니겠나??”
“예, 예, 말씀하신대로입지요.”
부동산업자 중 한 명이 손이 싹싹 닳도록 비비며 말했다. 이들 부동산 업자는 세 명이 같이 일을 하는데, 각각 그 이름이 아삼, 아칠, 아원이었다.
보나마나 부모가 대충 붙여주거나 부모도 없어서 지들끼리 어릴 때부터 그렇게 불리다보니까 굳어진 이름 같은데, 그런 연원에 대해선 원륭은 물어보지도 않았다.
홍콩이건 중국이건 하층민들 가운데 그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흔한 것이다.
태어난 순서대로 아일, 아이, 아삼, 뭐 이런 식으로 이름을 붙이는 것도 흔했는데, 그러니 놀랄 일도 없다.
“그래도 너희들 덕분에 구룡성채 내에선 호텔 급이나 다름없는 집을 싼 가격에 얻을 수 있었으니까 말이야······. 이건 사례비다. 용돈이라고 생각해도 좋고.”
스으윽.
원륭의 품에서 나온 봉투가 기묘한 움직임을 보이며 허공을 날아 아삼의 손으로 들어갔다.
“!!”
“!!!”
그 모습을 본 부동산 업자들과 임소교는 당황했다.
‘대체 뭐지??’
‘순간 잘못본 건가??’
방금 원륭이 봉투를 던진 수법은 암기술의 일종으로, 물체를 오히려 느리게 던져 목표의 감각을 어그러트리는 수법이다.
암기가 날아올 때 목표물은 당연히 빠르게 날아올 목표물에 대한 대비만 하는데, 도중에 느린 걸 몇 개 섞어주면 박자감각에 혼란을 줘서 도리어 피격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리고 이 수법은 중(重)의 묘리를 살린 것이라 원래보다 날리는 물건의 무게를 더 무겁게 하는 효과도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충격량이 더 커졌는데 그렇다고 해서 원륭이 방금 전 살상을 위해서 던진 건 아니기 때문에 죽일 정도의 힘은 없었지만, 아삼은 실제 무게보다 좀 더 묵직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즉, 돈이 실제 양보다 더 들어간 느낌이 난다. 그런 것과 더불어 이런 기묘한 수법을 보여주니 아삼을 비롯한 부동산 업자들은 비록 몸이 불편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원륭을 우습게 보지 못할 것이다.
이 뒷골목의 세계도 무림과 같다. 조금이라도 얕잡아 보이면 바로 습격당하고, 그동안 쌓았던 업보를 철저하게 돌려받는다.
원륭은 이들과 앞으로도 계속 거래할 생각이 있었기에 얕잡아 보일 생각이 없었다.
과연 부동산업자들도 굽신굽신하며 되려 봉투를 내밀었다.
“아이고, 대협. 소개비는 그때 받은 것으로 족한데 뭘 또 주려고 하십니까. 그때 받은 것으로 충분합니다.”
“맞습니다요, 대협. 이런 건 상도덕에 어긋납니다.”
고객이 집이 마음에 들어서 사례비를 더 주겠다는데, 이 업자들은 한사코 거부했다.
그들로서는 원륭과 첫 만남 때 얻어맞은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기 때문에 섣불리 큰 대가를 받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이다. 어디든 그렇지만 뒷골목에서도 의무없는 대가가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이 부동산업자들은 부담스러워한 것인데, 원륭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이건 순수한 대가야. 내 집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최근에야 깨달았거든.”
“······.”
확실히 그랬다. 처음부터 좋은 집을 얻어서 원륭은 몰랐는데, 정말로 그의 집은 호텔 급이었다.
넓이는 열 평 정도밖에 되질 않지만, 이 홍콩에는 집이 부족해서 세 평짜리 집에 3인 가족, 4인 가족이 사는 지옥도가 흔했다.
2층 침대는 당연한 일이고 허구헌날 애기 울음소리, 부부간의 싸우는 소리, 온갖 잡다한 생활 소음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런 건 사양이었다.
세 평 짜리 집은 솔직히 말해서 혼자서 살아도 비좁은 것이다.
최소한 열 평은 되야 숨통이라도 트고 살 수 있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원륭은 이 업자들이 얼마나 좋은 집을 구해준 것인지를 깨달았다.
중국에서도 계속 동료들과 함께 쪽방촌에서 생활했지만, 홍콩의 쪽방촌은 중국의 쪽방촌과 그 격이 다르다. 그 이상이었다.
계속해서 원륭이 권하자 결국 마지못해 이 업자들은 봉투를 받으려 했는데, 그걸 임소교가 쏙 채어갔다.
“계속 안 받을 거면 내가 받을게요. 그래도 되겠죠?”
“응?”
“어??”
업자들이 움찔했다. 돈을 못 받게 돼서 그런 것도 있지만, 감히 원륭의 돈을 채어갔다는 점 때문이었다.
둘이 같이 붙어다니는 걸로 봐서는 상당히 친한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해도 저런 행동까지 해도 되나 싶었던 것이다.
마누라나 여자 친구라 해도 살짝 꺼려지는 행동이었는데, 과연 원륭의 얼굴이 굳어졌다.
“무슨 짓이지?”
“저들은 안 받는다고 하잖아요. 그럼 내가 가질게요.”
“네가 왜?”
“그야······. 에잇! 내가 당신 밥해주고 깨워주고 세탁해주고 그런 게 한두 번이에요?? 식성은 더럽게 까다롭고!! 깨워도 일어나지도 않고, 옷에는 맨날 피인지 뭔지 모를 시뻘건 액체를 묻혀 다니면서!!”
“난 한 번도 부탁한 적이 없는데.”
“······.”
원륭은 무심한 얼굴로 임소교를 쳐다보았다.
“전부터 말하려고 생각했지. 그건 다 네 멋대로 한 거잖아. 전부터 말하려 했어. 앞으로 그런 건 하지 마. 안 해도 돼. 그리고 가능하면 내 집에도 멋대로 안 들어왔으면 좋겠군. 솔직히 귀찮아.”
“이이익!!!”
임소교는 손을 들어 뺨을 후려치려 하다가 결국 참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순간적으로 화가 나서 뺨을 후려치려고 했지만, 원륭은 그런 걸 당해주는 성격이 아니었다.
여자라고 해서 절대 봐주지 않았는데, 만약 임소교가 뺨을 후려쳤다면 원륭은 곧바로 되갚아주었을 것이다. 아마 애초에 맞지도 않겠지. 도리어 분노만 살 것이 틀림없다.
그렇게 임소교가 뛰쳐나갔는데, 아칠이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습니까?”
“괜찮다. 돈은 이미 회수했으니까.”
“응?”
“어어??”
아삼과 아원의 눈이 동그래졌다. 임소교는 뺨을 후려치려는 것처럼 하다가 봉투를 품속에 넣고 나갔는데, 어느새 그 봉투가 원륭의 손에 도로 들려있었던 것이다.
“언제?? 아니, 그보다 어떻게??”
“뭘, 나가는 그 순간 옆을 지나갈 때 도로 빼내면 그만이지.”
“아니, 품속에 넣었는데 그걸 안 들킵니까??”
“그게 기술 아니겠나.”
“······.”
셋은 그저 입을 다물었다. 그들도 원륭이 장애를 얻은 것을 딱 봐도 알 수 있었는데, 5년 전이면 모를까 장애가 생긴 몸으로 대체 어디서 돈을 벌어오는지 항상 궁금해했었다.
그러다 오늘 이것을 보고 원륭이 소매치기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의심된 것이다.
“저기, 대협. 혹시 소수 일을 하시는 건 아니죠??”
“내가 그런 얄팍한 일을 할 것 같나??”
“그건 아니겠죠······. 예······.”
그러나 그 수법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이 세 사람은 믿기지 않았다. 소수란 말 그대로 작은 손(小手)을 의미하는데, 중국에선 그 외에도 소매치기나 쩨쩨한 수단이라는 뜻도 있었다.
아마도 도둑질 따위는 그런 작은 손을 가진 소인배나 하는 짓이라는 뜻에서 소수라고 부르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원륭은 봉투를 다시 주었다.
“뭐 아까는 집 소개에 대한 사례비라고 했지만······. 그 외에도 너희들은 내가 없는 수 년 동안 내 집을 잘 관리해주었으니까.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다. 왜 내가 없는 5년 동안 집을 계속 관리해 준 거지??”
그 점이 항상 원륭은 궁금했다. 그가 홍콩에 머문 건 5년 전 당시 불과 몇 달에 불과했다.
그와 이 업자들의 첫 만남이 그리 우호적인 것도 아니었는데, 그런 상대를 위해 집을 계속해서 관리해줬다는 게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아, 그건 말이죠. 솔직히 홍콩 내에서 그런 집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나 다름없습니다. 그건 아시죠??”
“그건 그렇지.”
원륭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엔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대체 그 집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오작 10평짜리 집이었지만 다른 집을 보고 오면 거의 호텔로 보일 지경이었다.
다시 보니 선녀가 따로 없다.
“솔직히 대부분의 집이 고작 세, 네 평 하는 쪽방들이고, 수요도 공급도 대부분 그런 것들입니다. 즉 그런 집은 거의 귀빈용이라는 말이죠.”
“그렇군······.”
이제야 원륭은 납득했다. 어차피 그런 집을 누군가에게 소개시켜줘도 그와의 인연이 그걸로 끝나면 집을 이용하는 가치가 없다.
이 험난한 구룡성채 안에서 살아가려면 그런 집은 좀 더 힘과 권력이 있는 유력자에게 바쳐야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 그 집을 소개시켜주고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계속 관리해준 건가. 솔직한 놈들이군.”
“이 구룡성채 안에서 살아가려면 그런 건 당연한 거지요. 언제 시체가 될지 모르니 말입니다.”
아삼이 다시 손을 싹싹 비비며 말했다.
“과연, 나쁘지 않군.”
원륭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부동산 업자들은 첫 만남 때 그를 우습게보고 시비를 걸었다가 벽에 처박힐 정도로 호되게 얻어맞았다.
그리고 나서 한동안은 몸도 제대로 못 가눌 정도였는데 오히려 그 순간 그들은 생각한 것이다. 이 자를 구워삶자! 그리고 대우하자! 그러면 언젠가 보상이 돌아올 것이다!
그들이 봤을 때 원륭은 대화가 통하는 자들이었다. 애초에 원륭은 그저 집을 구하러 갔을 뿐인데 시비를 건 것은 자신들이었고, 이후에도 집만 구해주니 원륭은 만족하고 돌아갔던 것이다.
필요이상으로 시비를 걸거나 구타를 하지 않았는데, 그런 걸 보고 그들은 깨달았다.
이 자는 말이 통할 뿐만 아니라 매우 강하다. 이런 자를 같은 편으로 두면 구룡성채 안에서 사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유력자는 아무리 많이 알아놔도 부족하다.
그래서 일반인들에겐 어차피 줘도 의미가 없는 좋은 집을 준 것인데, 그 사실을 알고 원륭은 생각했다.
‘이 정도로 머리가 돌아가는 놈들이면 그 얘기를 꺼내도 되겠군.’
“사실 오늘 찾아온 건 다른 용무가 있어서이다.”
“다른 용무요??”
“저희들은 집구하는 것 말곤 재주가 없는데요??”
“그리고 선량한 집구하러 온 사람을 삥 뜯는 재주도 있지.”
“아니, 대협 그건······. 이미 그만뒀습니다. 저희들은 예전의 저희가 아닙니다, 헤헤.”
멋쩍은 웃음을 보이는 업자들이었는데, 원륭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했다.
“뭐 그거야 내가 알 거 없고, 너희들은 앞으로 소문을 좀 물어와 줬으면 좋겠다.”
“소문??”
“그래. 아무거나 좋으니 소문 말이다. 즉 정보. 그런 소문들이 모이면 의외로 정보가 되지. 그리고 너희들을 내 정보원으로 써야겠다.”
“정보원 말입니까??”
업자들의 눈이 동그래졌다. 갑자기 무슨 소린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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