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1 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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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렇게 늦었어요. 안 오는 줄 알았잖아요.”
“아, 미안. 도중에 무뢰배들을 만나서 말이야.”
“안 다쳤어요??”
“좋게 말하니까 물러가더군.”
“그래요······.”
소녀는 원륭의 손에 아직도 묻어있는 핏자국을 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녀는 3년 전 원륭이 홍콩 구룡성채 안에서 만났던 임소교였다. 그런 임소교도 이젠 소녀, 아니 숙녀가 되어있었다. 아가씨라고 해야 할까.
물론 험한 구룡성채 안에서 사는 처자라 요조숙녀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지만.
생활력이 넘치는, 입이 거칠고 털털한 여자의 느낌이다. 원륭은 의자에 털썩 앉으며 물었다.
“배급은 시작했나?”
“아니요. 당신이 안 왔잖아요.”
샐쭉한 표정으로 임소교가 노려보자, 원륭은 무심히 그 시선을 받았다.
지금 이들이 있는 이 학교는 홍콩 구룡성채 내에 있는 유일한 학교로, 구세군이 세운 것이다.
구세군은 1865년 런던에서 당시 감리교 목사였던 윌리엄 부스 부부가 시작한 것인데, 처음에는 선교조직이었지만 이후 자선사업 부분이 크게 확대되었다.
이 지옥 같은 구룡성채에도 단 하나 학교가 있고 하필 그 학교가 구세군이 세운 것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홍콩이 다시 중국에 반환되어 중국령 홍콩 특별행정구가 되는 것은 1997년의 일이므로, 90년인 이 시점에서는 아직 먼 얘기였다.
중영공동선언, 일국양제로 인해 영국의 색깔이 짙은 이곳에 영국의 구세군이 들어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리라.
구세군은 종교조직이지만 군대식 제도를 가지고 있었기에 최고 책임자를 신부나 목사, 교황 등이 아닌 ‘대장’이라 불렀다.
초대 대장은 당연히 창시자인 윌리엄 부스였는데, 그 외에도 구세군이 진출한 각 국가마다 사령관을 두고, 각 지역마다 다시 지역사령관, 지방장관, 사관 등의 직책을 가진 자들이 업무를 수행했다.
심지어 각 구세군 사령부의 경비원도 경비원이 아니라 병사라고 한다.
이들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 세상의 죄악과 싸운다는 거창한 포부를 가지고 있기에 스스로를 각기 대장, 사령관, 병사 등으로 부르고 사명감을 가지고 싸우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있는 원륭에게 이 홍콩 지역을 담당하는 사령관이 찾아왔다.
이 사령관은 영국계 홍콩인으로, 혼혈이라 영어와 광동어를 모두 유창하게 하는 인물이다.
사실 홍콩 사람쯤 되면 대부분 어느 정도는 영어를 유창하게 하지만······.
아예 중국식 이름과 영어로 된 홍콩식 이름을 따로 지어 놓는데, 브루스 리 같은 이름이 그런 식인 것이다. 사령관이 입을 열었다.
“어서 오시오, 원륭. 오늘도 당신 덕분에 식량배급을 원활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소. 모두 당신 덕분이오.”
“어디 내 덕분뿐이겠소. 이 지옥 같은 마굴에서 열심히 봉사활동을 수행하고 있는 당신들 덕도 크지.”
사령관의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무심한 얼굴로 대답하는 원륭을 보고, 사령관은 쓴 웃음을 지었다.
“본래 구세군은 인류의 최전선에서 싸우는 것이 일이오. 이곳은 최전선이오. 그렇게 부르기에 충분하오. 날마다 살인, 약탈, 방화가 이루어지지. 이곳은 지옥이오. 그래서 우리 구세군은 이곳으로 사령부를 만들기로 결심한 것이오.”
“과연 대단하군.”
비꼬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무심한 원륭의 태도에, 사령관은 더욱 애가 달았다.
그는 진짜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원륭이 홍콩에 돌아온 지 1년, 원륭은 천안문사태 때 입은 부상을 추스린 뒤 곧바로 이 구룡성채 유일한 보루인 구세군을 찾았다.
그러면서 달마다 상당한 금액을 기부했는데, 겉보기엔 남루한 이 장애인 남자가 어디서 그런 거금을 매달 구해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자산가라고 하기에는 딱 봐도 풍기는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매달 말일마다 원륭은 지치고 힘든 표정으로 거금을 투척하고 갔는데, 사령관과 그를 돕는 임소교가 어디서 난 돈이냐고 물어봐도 절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온 몸에 여기저기 묻은 핏자국과, 감출 수 없는 싸움의 흔적 때문에 아마 뒷세계 어디에선가 구해온 게 아닌가 하고 추측할 뿐이었다. 사령관은 입을 열었다.
“원륭, 내 제안은 생각해보았소?? 사령관 보좌를 맡아달라는 이야기.”
“그 얘기는 거절했을 텐데.”
여태까지 사령관을 쳐다도 보지도 않던 원륭이 시선을 돌려 빤-히 사령관을 쳐다보았다.
사령관은 당황했지만 이내 입을 열어 준비된 말을 쏟아냈다.
“당신밖에 없소!! 물질적 후원은 그렇다 치고 당신이 온 후로 이 구세군 학교의 안전이 확립됐지 않소!! 아님 내 보좌를 해달라는 게 싫은 거요?? 정녕 그렇다면 난 사령관을 그만두고 당신에게 넘기겠소!!”
“아니오. 그게 아니오.”
“??”
원륭은 쓴웃음을 지으며 사령관에게 차근차근 설명했다.
“사람에게는 각자 어울리는 일이 있소. 난 자금을 구해오고, 그걸 효과적으로 집행하는 건 당신 일이오. 무료배식 외에도 구세군에겐 할 일이 많지······. 그런 일을 하기에는 난 너무 바쁘오. 할 일이 많소. 당신이 보기에는 한량 같아 보여도 나름 다 할 일이 있지······.”
“그런 생각은 한 적 없소······.”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고맙겠군. 그리고 난 종교에 관심이 없소. 물론 구세군은 훌륭한 조직이지만 어디 소속되는 것부터가 왠지 꺼려져. 어디 소속되면 그 집단을 좀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거든.”
“······.”
“사령관, 그렇게 나에게 뭘 맡기고 싶다면 날 외부감사나 고문으로 생각하시오. 보좌는 말고. 그리고 내가 그동안 당신에게 준 돈은 공짜가 아니오.”
“뭐라고??”
“그렇다고 대가를 받겠다는 것도 아니오. 아, 정확히 말하면 대가를 받긴 받는 건가. 내가 원하는 대가는 그 돈의 정확한 ‘집행’이오. 어디 쓰고 있는지, 정확히 쓰고 있는지, 어디 이상한데 쓰고 있지 않는지, 그 정도면 충분하오. 내가 당신에게 돈을 맡긴 건 이 구세군 학교가 이 지역 유일한 자선단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당신이 청렴한 인물이기 때문이오. 하지만 당신의 마음이 변하는 순간, 이 학교도 당신도 끝일 거요. 그렇게 알아 두시오.”
“······명심하겠소······.”
사령관은 더 이상 시선을 떨구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그것은 그에게 부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편한 지역을 놔두고 굳이 이 구룡성채에 학교를 세우고 관리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훌륭한 인간이었다. 과연 악에 대항하는 최전선의 병사라 할만 했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원륭은 감히 감당하기 힘든 어둠의 인물이었다. 뒷세계의 인물이다.
이 구룡성채 내에서 숱한 범죄자를 겪어보며 사령관은 인간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생겼다.
이 원륭이란 자는 악한 자는 아니지만 이제는 어둠에서 살며 어둠 속을 벗어나지 못하는 어둠의 주민이다. 그것을 깨달은 사령관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앞으로 당신에겐 무리한 부탁을 하지 않겠소. 당신 말대로 사람에게는 각자의 사명이 있는 법이지.”
“알아주니 고맙소. 자, 그럼 배식을 시작하겠소?”
“그러지요.”
원륭은 사령관을 비롯해 옆에서 듣고 있던 임소교를 데리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그곳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배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왜 이제 나와요!! 기다리다 목 빠지는 줄 알았는데!!”
“하하, 미안합니다, 미안해. 다들 오래 기다리셨죠??”
“누군 시간이 남아도는지 알아요??”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던 아낙네들이 일제히 불만을 쏟아냈다. 그러자 사령관은 연신 웃으며 사과를 계속했다. 그리고 서 있던 아이들도 보채기 시작했다.
“빨리 주세요, 배고프단 말이에요!!”
“빨리 먹고 놀러가야 되요!!”
“하하, 알았다, 알았어, 기다리거라.”
사령관은 웃으며 직접 밥과 반찬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한편 그 옆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임소교는 흘낏 원륭의 눈치를 살피며 미간을 찡그렸다.
‘아, 이거 안 좋은데······.’
원륭의 성격상 이런 것들을 보고 가만히 넘어갈 리 없었다.
원륭은 평소엔 조용했지만 한번 화가 나면 모든 걸 다 때려 부술 때까지 앞이 보이지 않는, 거의 분노조절장애 수준의 화를 내는 남자였다.
그것은 원륭과의 첫 만남 때부터 익히 보아 알고 있었다.
임소교와 원륭의 첫 만남 때, 원륭은 시비를 거는 불량배들을 단번에 박살내어 전치 몇 달의 부상을 입혔던 것이다.
다행히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죽이지는 않았지만, 임소교는 원륭이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임소교는 조용히 원륭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원륭은 사령관의 옆에서 조용히 반찬을 나눠주며 묵묵히 일만 하고 있었다. 임소교는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늘은 그냥 넘어갈려나??’
그러나 역시 그렇지 않았다. 누군가 다시 잠자는 원륭의 성미를 깨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봐요, 아저씨. 왜 앞사람은 많이 주고 난 적게 줘요??”
“난 똑같이 줬는데.”
“거짓말!! 누가 봐도 내게 적잖아요.”
“재볼까??”
찌릿, 하고 원륭이 노려보자 시비를 걸던 아낙네는 조용해졌다. 원륭은 무림인이기 때문에 일반인들과는 감각의 수준이 달랐다. 눈대중으로 재도 거의 저울 수준의 정밀함을 가지고 있다.
수십 년간 요리를 한 달인들은 저울 없이도 손끝의 감각만으로 수 그람, 혹은 수십 그람의 분량을 정확히 재곤 하는데, 비록 요리는 하지 않았지만 20년 넘게 무공을 익힌 원륭 역시 그 정돈 가능했다. 그런 원륭에게 지금 이 아낙네는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다.
원륭의 눈빛에 아낙네는 잠시 움찔했지만, 이내 다시 입을 열었다. 사람들 중에는 가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성질이 더러워지는 자들이 있다.
주로 거칠게 밑바닥에서 살아온 자들이 그런데, 이 아낙네도 그랬다. 이 아낙네에겐 모든 것이 전투다.
시장에서 흥정을 할 때도, 남편과 갈등이 생겨도, 이렇게 무료배식을 받으러 와서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것이 전투다. 드세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는데, 오늘은 잘못 걸렸다.
이 아낙네는 임자를 만났다. 원륭은 조곤조곤 말했다.
“만약 양이 다르다고 해도 말이야, 그게 무슨 상관이지? 당신들은 받는 입장이잖아. 주면 주는 대로 조용히 받는 게 도리가 아닐까?”
“그런 건 불공평하잖아요!! 차라리 안주면 모를까 왜 주면서 사람을 차별해요!! 그건 도리가 아니죠!!”
“도리, 도리, 하는데 그럼 무료배식을 받으러 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건 도리인가? 뒤를 돌아봐.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
아낙네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확실히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아낙네는 개의치 않았다. 살면서 사람들과 싸워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거의 매번, 매일 싸우는 것이 이 아낙네의 습성이었는데, 역시나 이 여자는 개의치 않고 말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죠? 난 나의 ‘권리’를 찾기 위해 말하는 거라구요!! 무료로 배식을 하면 이렇게 사람을 무시해도 됩니까? 아이고, 참 잘나셨네요. 동네사람들!! 여기 이 사람들이 무료로 배식 좀 한다고 사람을 무시해요!!!”
“······.”
“······.”
“·········.”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대체 왜 저러나, 싶은 눈빛으로 모두들 쳐다보고 있었고, 얼른 이 사태가 끝났으면 좋겠다는 마음들이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눈빛과 반응이 호의적이지 않자, 여자는 결국 해선 안 되는 행동을 저질러버렸다.
“흥, 거지새끼도 아니고 이런 밥 쳐먹을 줄 알고!! 애초에 받을 마음도 없었어!! 이런 건 너희들이나 처먹어!!!”
결국 여자는 눈앞에 있던 음식이 담겨있던 쟁반을 후려쳐 쏟아버렸다.
와장창!!!
그 순간 원륭의 눈빛이 달라졌다.
“주워.”
“싫은데?”
“주워.”
“싫다고!! 어째서 내가 주워야하는 거야!!!”
원륭을 따라 여자도 이젠 숫제 반말을 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주워.”
“헉!!!”
여자는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며 뒤로 한걸음 물러섰다. 원륭의 눈빛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요사스런 마안, 혹은 사안?? 여자는 정확히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불길한 마안에 저도 모르게 쏟아버린 음식을 도로 주웠다.
“갖고 가.”
“예??”
“갖고 가란 말이다. 먹든 버리든 그건 네 알아서 해라. 당장 그 더러운 음식과 네 면상을 내 눈앞에서 치우고, 다시는 이곳에 나타나지 마라. 다시는.”
“······.”
붉게 빛나는 원륭의 시선에, 여자는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지시대로 음식을 챙겨 사라졌다. 여자는 가면서도 뒤로 흘끗, 흘끗 계속해서 돌아보며 부리나케 걸음을 옮겼다.
잠시라도 눈을 떼면 원륭이 쫓아와서 죽여 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눈빛이었다.
그 정도로 원륭의 살기는 엄청났다. 그리고 임소교가 돌아보니 줄을 선 사람들 모두가 자신도 모르게 떨고 있었던 것이다.
덜덜덜.
원륭은 좌중을 한 바퀴 돌아본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 이곳은 식사를 배급하는 구세군의 학교요. 물론 식량을 배급한다고 해서 딱히 거들먹거릴 생각은 없소. 하지만 이곳에 지금 줄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지금 식량을 받지 않으면 며칠 동안 먹을 것이 없어 굶을 사람도 있소. 여러분, 자신만 생각하지 마시오. 우리도 모두를 위해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식량의 배급에 불만을 가질 수 있소. 양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소. 하지만 모두들 배고프고 식량을 원하오. 그 점 양해해주시오. 그리고 양에 의혹이 있거든 언제든지 저울로 재어보시오. 만약 앞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더 내어드리겠소.”
“······.”
아까부터 시끄럽던 여자들과 아이들이 조용해졌다. 이후 배급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따지는 자도 없고, 시끄러운 자들도 없자 진행에 막힘이 없었다.
모든 식량을 나눠주고 사람들이 돌아간 후 원륭은 웃으며 조용히 생각했다.
‘역시 인간은 쓰레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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