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0 패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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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악무양은 신음을 내뱉으며 깨어났다.
“헉!!”
“정신이 드나??”
악무양이 올려다보니 그곳엔 헐크G가 서있었다. 그러자 악무양은 멍청한 얼굴로 물어본 것이다.
“난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쯧쯧, 딱밤을 맞더니 정신이 나갔군. 넌 딱밤을 맞고 기절한 것이다.”
“내가 딱밤을 맞고 기절했다고?? 고작 딱밤에??”
쾅, 쾅!!
그 말에 헐크G는 허공에 딱밤을 날려 무려 공기를 때리는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악무양은 납득한 것이다.
“허공을 때려 파공음을 내다니······. 내가 기절한 것도 납득이 가는군.”
“결국 상대를 쓰러트리는 수단이란 상대적인 것이다. 상대가 약하면 약한 수단을 써도 상관없지만, 강하면 강한 수단을 써도 이기지 못할 때도 있지. 그런 것이다.”
“내가 약하다고? 하하하! 우하하하하하!!!”
악무양은 미친 듯이 웃었다. 그도 자신이 이들 아홉 명 중 가장 약한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새삼 그것을 계속해서 듣다보니 웃음이 나온 것이다.
“왜 웃나??”
“아니. 자신이 한심해져서. 하지만 약하다는 것은 강해질 수 있다는 거겠지.”
그 말에 원륭은 말없이 악무양을 쳐다봤다.
‘그래, 악무양. 살아있기만 한다면 노력하는 만큼 얼마든지 더 강해질 수 있다, 얼마든지. 넌 더욱 강해질 수 있어.’
그러나 원륭은 그 말을 하지 않았다. 이미 말을 하지 않아도 악무양은 더욱 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오, 아무리 깨지고 있기는 해도 나 역시 악무양과 마찬가지로 다른 쟁쟁한 고수들인 당신들이 헐크G에게 레슬링으로 깨지고 있는 걸 보니 참 기분이 묘하군. 대단하다고 해야 할까, 착잡하다고 해야 할까.”
묘한 표정의 일지흔이었는데, 그런 그를 향해 헐크G는 팔짱을 끼고 말했다.
“뭘, 역사적으로 봐도 타격기의 고수가 그래플링의 고수에게 지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인류 최초의 이종격투기 대회인 기원전 고대 그리스의 판크라티온을 비롯해서, 불과 100 여 년 전에도 비슷한 시도가 있었지. 결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비슷하거든. 1887년 헤비급 복싱 챔피언인 존 설리번과 레슬링 챔피언인 윌리엄 멀둔이 붙은 적이 있었는데, 결국 사람들이 생각하는 건 하나지. 종목과 체급을 넘어서 ‘진짜’ 최강자를 보고 싶다. 복싱이든 레슬링이든 삼보든 무에타이든 말이야.”
이종격투기가 본격적으로 현대에 들어 활성화된 것은 1990년대 초였지만, 그 전에도 가끔 이종 간의 격투시합은 실현되어왔다.
복싱의 챔피언과 레슬링의 챔피언이 맞붙으면 누가 이기는가?? 심지어 당사자들도 그것을 궁금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실현된 것인데 헐크G는 말했다.
“하지만 결과는 영 싱거웠어. 이노키-알리 전에서는 태클이나 레슬링 기술이 금지되자 곤경에 몰린 이노키가 드러누운 자세를 취하는 바람에 알리도 섣불리 달려들지 못했지. 하지만 1887년 일어난 이 대결에서는 불과 2분 만에 경기가 끝나버렸어. 윌리엄 멀둔이 2분 만에 존 설리번을 바닥에 처박고 승리를 가져가버렸지. 이와 비슷한 대결이 그 후 두 번 정도 더 있었는데 1890년에 일어난 대결에서도 레슬링 챔피언이 펀치를 허용해 광대뼈가 골절을 당했지만 그걸 버티고 복싱 챔피언을 바닥에 메쳐 쓰러트린 뒤 팔을 꺾어 이겨버렸다. 1936년에 일어난 경기에서도 프로레슬러인 레이 스틸이 헤비급 복서 킹피쉬 레빈스키를 무려 35초 만에 쓰러트려버렸고.”
“35초 만에 지다니 대체 어떻게 당한 거요??”
“너무 빨리 져서 자세한 시합 내용도 알려지지 않았네. 전해져 내려오는 건 그저 킹피쉬가 35초 만에 당했다는 것 뿐이지.”
“······.”
“시시한 시합이라는 건 그런 거야.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그저 역사의 한 줄에 짤막하게 남을 뿐이지. 그나마 그 대결이 기록으로 남겨지기라도 했다는 건 이종간의 격투가 드문 비교적 근대에 일어난 일이라는 것 때문일까?? 아마 안 봐도 뻔하다. 잽이나 날리는 레빈스키의 공격을 레이 스틸이 가드를 취하고 뚫고 들어가 태클을 걸어 쓰러트린 후 관절기나 기타 기술로 마무리 지었겠지. 대충 그림이 그려지지 않나??”
“······.”
그 말에 일지흔은 반박할 수 없었다.
그도 다른 이들처럼 헐크G에게 무수히 많은 패배를 당했는데 그 중 대부분이 관절기 따위에 걸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태클 단계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멧돼지 같은 악무양의 전술이 주로 쌍도끼를 들고 돌진하여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인데, 레슬러나 기타 그래플링 선수들의 복서 등 타격가를 상대하는 주 전법이 바로 팔로 얼굴을 가린 뒤 가드 자세를 취하고 미친 듯이 돌진하여 상대의 허리를 잡고 쓰러트리는 것이었다.
복서들도 엄청나게 몸이 단련되어 있지만, 복싱 기술을 막는 것과 그래플링 기술을 막는 것은 그 종류가 다르다. 창술과 검술의 방어법이 다르듯이, 이것도 그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상대의 태클을 막는데 익숙하지 않은 복싱 선수들은 일단 거리를 허용하기만 하면 무조건 허리를 잡혀 자세가 무너뜨려진 뒤 쓰러졌다. 그 다음은 그저 유린.
능욕하고, 압살하고, 발라버린다. 쓰러진 다음은 그래플링 선수들의 세상이었다.
그대로 올라타 주먹을 날리든, 관절기나 기타 기술을 걸든 그야말로 마음대로인 것이다.
일단 쓰러진 순간부터 거의 졌다고 봐야했는데, 같은 그래플링 기술에 익숙한 선수면 모를까, 그래플링 기술에 익숙하지 않은 타격기만 익힌 선수들은 속수무책이라고 보면 되었다.
그때 천만홍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런 태클에도 약점은 존재하지. 그게 원륭이 보여준 것 그 자체이고 말이야.”
천만홍의 말에 모두는 얼마 전 원륭이 헐크G를 상대로 보여준 묘기를 떠올렸다.
원륭 역시 처음 당해보는 레슬링 기술에 고전하긴 마찬가지였으나, 한동안 당하더니 잠시 고심한 후 재대결을 신청했다.
“어이, 한판 붙지, 헐크G.”
“뭐야, 또 당하고 싶나?? 좋아, 한판 붙자.”
헐크G는 희희낙락하며 대결에 응했다. 그는 지난 대회 64강전에서 원륭에게 패배를 맞이한 터라 그에 대한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그의 주종목인 레슬링 기술로 원륭을 비롯해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패배를 안겨준 진흑창마저도 계속해서 쓰러트리고 있는 터라 그는 아주 신이 나있었던 것이다.
물론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 타격기를 사용하지 않고, 병기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그 힘과 육체, 레슬링 기술만으로 레슬링에 뼈가 굵은 자신을 이들 중에 이길 수 있는 자가 있을 리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승리는 승리. 이겼다고 해서 비겁하다거나 치사한 것도 아닌 것이다.
애초에 그들은 그저 공정한 레슬링 룰로 대결을 했을 뿐이고 헐크G가 이긴 것은 오랜 세월 레슬링을 수련해왔을 때문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한 번 더 원륭을 쓰러트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헐크G는 싱글싱글 웃으며 대결에 나섰다. 그때 그는 그런 낭패를 겪을 줄 예상하지 못했다.
슈각!!
헐크G가 시작하자마자 태클을 하며 상대의 허리를 잡기 위해 손을 내미는 순간, 원륭의 주먹이 불을 뿜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헐크G의 안면을 스쳤던 것이다.
헐크G는 그 순간 뭔가 잘못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뭔가가 스쳤다고 생각한 순간 시야가 반대로 돌아갔고, 땅이 갑자기 올라와 그의 안면에 부딪쳤다.
쾅!!!
육체의 컨트롤을 잃어 낙법도 취하지 못하는 그에게, 땅이 올라와 그를 강타했다.
헐크G가 느낀 것은 자신이 쓰러진다는 감각이 아니었다. 그 말 그대로 땅이 올라와 그를 강타한 것이다.
“······.”
잠시 후 일어난 헐크G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그는 입을 열었다.
“턱을 노렸군.”
“역시 눈치 챘나??”
“내 몸을 그렇게 스쳐서 날 쓰러트릴 수 있는 곳은 턱 밖에 없어. 역시 대단하군, 원륭.”
헐크G는 욱신거리는 안면을 쓰다듬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원륭이 노린 것은 뇌진탕이었다.
턱과 뇌는 밀접히 연결이 되어 있어서, 머리 그 자체를 치는 것보단 턱을 치는 게 더욱 뇌진탕을 노리기 쉽다.
아이러니하게도 머리가 뇌와 더 가깝지만 뇌는 인체에서 가장 단단한 부위인 두개골로 보호를 받고 있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머리를 친다고 해서 뇌진탕이 일어나지 않고, 그것보다 턱을 노리는 게 뇌진탕이 더욱 잘 일어나는 것이다.
더욱 희한한 것은, 그런 턱을 노리더라도 무조건 세게 친다고 해서 뇌진탕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정말 가볍게, 아주 가볍게 턱과 주먹이 스치면 그 순간 턱과 주먹 사이에서 발생한 미세한 진동이 순식간에 뇌로 타고 올라가버린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또 가볍게만 때리면 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정말로 가볍게 친다면 턱은 그저 아무런 타격이 없이, 스친 듯 스치지 않은 듯 미세한 감촉만을 느끼고 말겠지.
턱을 노린 타격으로 뇌진탕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친 듯 치지 않은 듯, 치지 않은 듯 치는 미묘한 감각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정말 고도의 기술이라 주먹으로 먹고사는 복싱의 달인들도 언제나 이것을 노리고 행하긴 힘들었다. 그야말로 운 좋게 일어나면 좋고, 아니면 말고의 기술이다.
자신보다 하수에게는 그나마 먹이기가 쉽지만 그런 하수라면 그냥 잽만으로도 실신을 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정작 강자에게는 이런 기술을 노리기 힘들어 정말 운과 기술이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헐크G는 순식간에 모든 상황을 깨닫고 한숨을 쉬었다.
“후우, 정말로 너는 괴물이라니까. 대충 무슨 생각을 했는진 알겠는데 노린다고 해서 이렇게 실전에서 한방에 성공시킬 수 있을 정도로 턱을 노린 뇌진탕이 쉽지는 않아. 오늘은 그만하련다. 뭔가 맥이 빠지는군.”
“······.”
헐크G는 말없이 터덜터덜 돌아갔다. 헐크G가 누차 강조하는 대로 레슬링을 비롯한 그래플링 기술은 노력의 산물이다.
복싱을 비롯한 타격기가 재능의 영향을 좀 더 많이 받는다면, 그래플링은 역시 재능의 영역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보다 노력의 비중이 좀 더 큰 것이다.
복싱의 경우 감옥이나 소년원에게 어설프게 아마추어들에게 복싱을 배운 천재가 어린 시절부터 복싱 엘리트 교육을 받고 자란 다른 천재들을 박살내는 경우도 흔치 않지만, 그래플링 기술에는 절대 그런 게 없었다.
고작 잠깐 레슬링을 익힌 자가 레슬링을 몇 년을 수련한 자를 요행으로라도 꺾는다든지, 유도든 유도든 삼보든 씨름이든 그래플링의 세계에서는 그런 게 절대 불가능한 것이다. 절대로.
태클이라고 해서 단순한 돌진인 것도 아니고, 상대의 허리를 잡기 위해 손을 내미는 순간은 그래플링 선수가 가장 취약해지는 순간이므로 헐크G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태클을 하지 않으면 모를까 태클을 하는 순간은 무조건 언젠가 손을 내뻗어야 한다, 무조건. 즉 약속된 약점의 시간이 존재한다. 순간적으로 약해지는 순간이 드러나는 것이다.
아무리 가드를 잘하고 돌진하더라도 잡는 순간만큼은 반대로 그래플링 선수가 그만큼 취약해지는 것이었는데, 원륭은 그 틈을 노려 실전에서 단 한방에 헐크G의 턱을 흔들어 뇌진탕을 일으켜버렸다.
턱을 치는 듯 안치는 듯 미묘한 손놀림. 그 비결은 ‘비껴 치기’에 있다.
만약 정통으로 턱을 친다고 해도 보통 턱이 깨지면 깨지지 뇌진탕은 오지 않는다.
하지만 턱을 비껴 치면 어느 정도의 수준만 들어간 힘으로도 충분히 뇌진탕은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원륭이 그것을 행한 순간 진흑창과 천만홍, 당화와 같은 절정의 고수는 모두 그것을 깨달았고, 태사향이나 악무양, 일지흔이나 궁요 등 그보다는 조금 못하지만 그래도 상당한 고수들인 이들은 원륭의 주먹은 완전히 포착하지 못했어도 저렇게 미묘한 주먹으로 상대를 쓰러트리기 위해서는 턱을 노린 비껴치기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마다 순위는 다르지만 썩어도 홍콩 최고의 비무 대회에 모인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다음 날 나타난 헐크G는 그답지 않게 약간 현자타임이 온 것 같았지만, 그래도 강건한 무인답게 곧바로 정신을 바로 잡았다.
“자, 바로 시작해볼까??”
쾅, 쾅!!!
그날의 헐크G는 다른 날보다 더욱 적극적이었다. 그 결과 나머지 여덟 명의 무림인들은 모두 쉴 새 없이 바닥에 내팽개쳐져야 했던 것이다.
콰앙!!
“크윽!!”
이들 중 가장 신법이 뛰어나고 몸이 유연한 당화마저도 헐크G의 메치기에 넘어가 바닥에 처박힐 정도였는데, 그 정도로 헐크G는 자비가 없었다.
마치 전 날 원륭에게 진 것에 대한 분풀이라도 하듯이.
“거, 헐크G. 좀 너무한 것 아니오?? 아무리 그래도 저런 할머니까지······. 당신은 정말 노인공경이라는 개념을 모르는군!!”
간이 배밖에 나온 악무양이 오늘도 또 헛소리를 해버렸다. 그러자 당화와 헐크G의 미간에 둘 다 핏줄이 선 것이다.
빠직!!
“호오, 누가 할머니라고?? 네놈이 홍콩 앞바다에 콘크리트 안에 묻혀 가라앉아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무림인인데 노인공격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보니 아직 힘이 남아도나보군??”
눈치 없는 악무양에게 짜증이 난 두 명이 소매를 걷고 다가왔다. 그제서야 악무양은 뭔가 싸늘한 기운을 느낀 것이다.
“내, 내가 잘못한 건가??”
아직까지도 눈치가 없이 옆자리에 있던 일지흔에게 묻는 악무양이었는데, 일지흔은 대답도 없이 시선을 피하고 있었고 심지어 궁요도 한숨을 쉬고 있었다.
“후우······.”
쾅! 쾅!!!
그 후로 오늘의 수련은 악무양의 독무대였다. 당화와 헐크G는 평소부터 거슬리던 악무양을 바닥에 자국이 남을 정도로 처박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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