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4 반가운 자와 불청객
“아, 이거 헐크G 선수 죽었나요?! 의사!! 지금 당장 올라가보쇼!!”
“안 그래도 가고 있는 참이야!!”
비틀거리며 나이 든 의사가 다시 시합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륭의 오지연화포의 장력에 의해 사방의 바닥이 부서진 터라 걷는 것마저 힘들어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화구는 중얼거렸던 것이다.
“아, 이러다 송장 하나 더 치우는 것 아냐??”
“다 들린다, 이놈!! 네놈이 죽어도 넌 안 고쳐 줄 거야!!”
“그런 섭한 말을!! 아니, 그보다 죽으면 어떻게 고쳐줍니까?!”
“다 고치는 수가 있지. 그건 그렇고 어디 보자······.”
노의사는 청진기를 꺼내더니 여기저기 헐크G의 불탄 몸에 대고 그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손을 휙휙 흔든 것이다.
“노 프러블럼~! 전혀 문제없네.”
“살아있습니까?!”
“살아있다마다. 생각보다 굉장히 쌩쌩해. 그러니 생사는 걱정말라구!”
“오오!!”
“헐크G 멋졌다!!”
“오늘부터 네 팬이 되어주마!!”
“홍콩에도 프로레슬링을 전파해보라구!!”
관객들의 열화와 같은 성화가 이어졌다. 우스꽝스러운 모습과는 달리 헐크G는 생각보다 멋진 활약을 보여준 것이다.
헐크G는 여전히 등을 돌린 채 온 몸이 불타버린 상태로도 양손을 치켜들고 당당히 일어선 채였다. 그 모습을 보고 원륭은 피식 웃었다.
“훗, 곧 죽어도 프로레슬러라 이건가. 잘 봤다구 프로레슬러 양반. 다음엔 좀 더 실력을 길러서 붙을 일이 있기를 바라지.”
뚜벅뚜벅 원륭은 걸어서 시합장을 내려왔다.
그날 밤 원륭이 자신한테 걸어서 딴 소소한 돈을 바탕으로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누군가 들어왔다.
뚜벅뚜벅.
“뭐야, 헐크G인가. 생각보다 정말 터프한 놈이로군.”
“후후, 발소리만 듣고도 알아맞히는 건가?? 당신도 참 대단하군.”
“그런 말은 됐고 앉지. 한 잔 하겠나??”
“이제 막 병상에서 일어난 부상자에게 술을 권하는 건가??”
“자네 몸이면 못 마시지도 않을 텐데.”
“그건 그렇지.”
헐크G는 원륭이 건넨 술을 곧장 마셨다. 원륭이 퉁 쳐서 날려 보낸 술잔은 허공을 날아 헐크G의 손에 도달했고, 헐크G는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그 모습을 보던 주점 주인은 경악할 만큼 놀랐다. 그도 명색이 무림인이었기 때문이다.
보안을 위해 이 경기장 내에 출입하는 사람들은 모두 무림인으로 제한됐고, 화장실 청소를 하는 사람도, 하다못해 이런 술집 주인도 모두 무림인이다.
썩어도 무림인이니 방금 그 수법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알 수 있었다.
‘가볍든 무겁든 술잔을 저렇게 느리게 날려 보내는 건 정말 대단한 수법이지!! 그건 중력과 관성에 저항해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자의 공력운용이 저 정도라니. 우리 그룹의 승리가 절대 쉽지 않겠구나!!’
이 경기장은 물론 홍콩내의 식(食)은 모두 일화의 순홍 그룹, 즉 홍화회가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 이 모습도 곧 일화에게 보고 될 것이다. 그러나 원륭은 그딴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마실 만하나??”
“이건 황주로군.”
“술에 대해서 잘 아나??”
“정통한 건 아니지만 최소한의 구분 정도는······. 홍주와 백주, 황주를 구분 못하는 건 얼간이가 아닌가.”
“그건 그렇지.”
헐크G의 말에 원륭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의 술은 크게 색깔을 기준으로 세 가지로 분류되는데, 그것이 바로 홍주와 백주, 황주다.
홍주는 포도주를 의미하고, 백주는 곡물을 발효한 밑술을 가열, 증류해 만든 무색의 증류주다.
한국에서도 유명한 공부가주(孔府家酒)나 수정방(水井坊), 이과두주(二鍋頭酒) 같은 것도 모두 백주인데, 이것들이 한국에서도 유명하고 나름 중국술들 가운데 인기가 있는 이유는 한국 증류식 소주와 비슷한 면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황주는 누런 빛깔이 도는 쌀과 곡물을 원재료로 하는 발효주로, 당연히 쌀이 주로 생산되는 곳에서 주로 음용되며 양쯔강 인근이나 그 이남에서 주로 생산되었다.
황주는 상하이나 홍콩 등지에서 흔히 볼 수 있었지만, 특유의 발효 냄새가 나서 한국 사람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술이었다. 그런 술을 원륭과 헐크G는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헐크G는 말했다.
“황주는 호불호를 많이 타지······. 하지만 난 좋아하네. 그 특유의 냄새가 마시다보면 중독이 되거든.”
“나도 마찬가지야. 우린 통하는 데가 있군.”
둘은 마주보더니 순간 웃었다.
“하하하하하하!!”
“이봐, 헐크G. 사실 황주는 내 고향에선 거의 마시지 않는 술이야. 내 고향에선 주로 백주를 많이 마시지.”
“자네 고향이 어딘데?”
“흑룡강성.”
“아하······. 동북삼성중 하나군. 확실히 그곳은 농업이 유명하다던데. 본래는 너무 추워서 벼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이었는데 조선인들이 북방한계선을 올리고 거길 개척했다더군. 자네 혹시?”
“그래. 난 조선인이다.”
“그런 조선인이 왜 여기까지 와 있지? 게다가 고향의 술이 아닌 황주 같은 걸 마시고 말이야.”
“고향의 술은 너무 써서 마실 수가 없거든.”
“뭐라??”
원륭은 구구절절 이야기했다. 자신의 과거, 공산당에 대항해 투쟁한 흔적, 어째서 백주를 마시지 않는지 까지도.
“확실히 내 고향에선 백주를 많이 마셨어. 부모님을 비롯해 고향 사람들이 점점 농토를 개간해 쌀 생산량이 늘어나자 처음엔 종자로 쓸 것도 모자랐던 쌀이 나중엔 쌀밥을 먹기에 충분해지고, 결국은 술을 빚을 정도로 풍부해졌지. 하지만 그런 고향도 더럽혀졌단 말이야······.”
그 후의 일은 떠올리기 싫은 과거였다. 원륭의 약점을 잡기 위해 파천황 등의 공안 무림맹은 그의 부모와 형을 인질로 잡았고, 그 과정에서 그들 셋 모두가 사망했던 것이다.
그리고 오랜만에 돌아간 고향은 마환단의 재료로 쓰일 마약의 생산단지로 변해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변해있었다. 원륭은 그런 고향 마을을 제 손으로 불태우고 나왔다.
“참 구질구질하지 않나? 내 인생사가 말이야.”
“의외로군.”
“뭐가? 내 인생이?”
“아니. 당신 같은 인물은 보통 속내를 말하지 않는데. 어째서 오늘 처음 본 나에게 그런 걸 다 말하는 거지?”
“글쎄 술기운일까, 아님 프로레슬링 불모지인 고향 홍콩에 프로레슬링을 전파하고 싶다는 자네 말을 들어서일까. 잘은 모르지만 그런 건 쉬운 게 아니지. 어떤 문화라는 것은 누군가 혼자 이끈다고 전파되는 것이 아냐. 자연스럽게 전파되는 거지. 그런 의미에서 자네는 가시밭길을 걷고 있는 거지.”
“그럴지도. 하지만 누군가 시작하지 않으면 영원히 그 시작도 되지 않는 것 아니겠나.”
헐크G는 웃으며 가면을 벗었다.
“아니?”
“놀랐나? 자네 같은 사람도 놀라다니 의외로군.”
원륭이 놀란 이유는 헐크G의 얼굴에 난 상처 때문이었다. 온 얼굴이 흉터로 가득해 거의 맨살은 보이지도 않는 것이다.
“그런 흉터를 가리기 위해 가면을 택했나?”
“아니, 흉터는 자연스럽게 생긴 거야. 프로레슬링은 매우 위험한 운동이지. 겉보기엔 쇼로만 보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운동 중 하나야. 자넨 미식축구를 아나?”
“대충 어떤 운동인지 정도는······.”
“미식축구와 마찬가지일세. 공을 가지고 골을 향해 뛰기만 하는 미식축구도 현재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스포츠들 중에 가장 뇌손상이 일어나기 쉬운 운동이지. 그만큼 몸싸움이 격렬하단 말이야. 그러니 프로레슬링의 위험성은······. 말 안 해도 알겠지.”
“과연······.”
미식축구나 프로레슬링에 대해서 정통하진 않았지만 무림인으로서 원륭은 그것들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 수 있었다.
격투기들 중에 사지를 다 사용하는 킥복싱이나 주짓수 같은 것과는 달리, 복싱이 오히려 더 위험한 것은 두부(頭部)에 대한 공격이 집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식축구나 프로레슬링도 모두 그런 머리에 대한 공격이나 충돌이 허용되므로 무척 위험한 것이다.
100kg를 가볍게 넘나드는 인간흉기들이 상대방을 죽일 듯이 치는데, 후유증이 없을 리 없었다.
“나야 무림인이라 내공을 익혀서 그런 뇌손상에 대해선 강한 편이지만, 사실 프로레슬링이라는 게 그리 안전한 스포츠는 아냐. 아무리 조심해도 항상 위험부담은 존재하지.”
“그런 걸 왜 전파하려는 거지??”
“재밌기 때문이다.”
“재밌어??”
“즐겁기 때문이지. 상대와의 합, 그걸 보고 환호하는 관객들의 환호성. 그것들을 들어보면 온 몸에 끌어 오르는 고양감. 그것은 경험해보지 않은 자는 모르는 감각이지.”
“그럴지도······.”
원륭은 그 감각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공감할 수 없다. 원륭은 언제나 어둠의 인간이었다.
아무리 원륭 등이 저항해도 대외적인 입장은 중국 정부가 정의고, 원륭 등은 악이다.
그저 중국 정부의 정당한 행사를 방해하는 테러리스트일 뿐이었는데, 그런 어둠의 주민인 원륭으로선 빛의 무대에서 환호성을 받는 헐크G의 감각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추측은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공감능력이니까. 인간이 인간으로 있기 위해서,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솔직히 말해서 정확히 모든 걸 공감할 순 없지만 너의 하고 싶은 말은 대충 알겠다, 헐크G. 아무튼 자신이 믿는 바를 향해 노력하는 자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언젠가 이 홍콩에 네가 바라는 대로 프로레슬링이 자리를 잡기를 바라지.”
“고맙네.”
둘은 잔을 부딪치고 그 독특한 냄새가 나는 황주를 들이켰다.
“그런데 가면을 쓰고 대결하면 답답하지 않나?? 가끔 나도 인피면구를 쓰고 싸움을 하지만 분명 그 거슬리는 건 어쩔 수가 없는데.”
“후후,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지. 프로레슬링에 있어서 가면은 필수가 아니지만 분명 캐릭터성의 한 가지이기도 해. 그리고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인종차별 때문이다.”
“과연······.”
“미국에서 나는 톱스타는 아니지만 주요 무대에는 꼬박꼬박 불릴 정도로 나름 인지도를 쌓았어. 하지만 만약 내가 홍콩인이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밝혔다면 아마 프로레슬링 세계에 끼어들기는 어려웠겠지. 실제로 지금도 동양인 선수가 참가하는 게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그 벽을 깨기는 무척 어려워. 중국이나 홍콩과는 달리 한국이나 일본에선 나름 프로레슬링이 인기가 있지만 결국 자국 선수들은 자국에서 주로 활동하고 있지. 그건 당연한 면도 있지만······타 스포츠에 비해선 프로레슬링의 국가간 벽이 좀 더 두텁다는 게 내 생각이야.”
“하긴, 같은 스포츠인데 축구나 농구, 야구 같은 건 해외리그 진출이 좀 더 자유로우니. 네 생각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고충을 토로했다. 가면을 사이에 두고 만났지만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가끔 살다보면 이렇게 눈빛만 봐도 뭔가 통하는 자들이 있는데 원륭과 헐크G가 바로 그랬던 것이다.
중국에서 테러리스트이자 이방인인 원륭과, 미국에서 어쩔 수 없이 가면을 쓰고 프로레슬러 생활을 해야 하는 헐크G는 서로의 고충을 이해했다. 가면을 쓰고 있는 건 원륭도 마찬가지니까.
그렇게 두 사람이 한창 부어라 마셔라 하고 있는데, 누군가 나타났다.
“뭐야, 이거 2회전 탈락자인 떨거지와 3회전 진출한 그 원륭이라는 자가 아닌가? 너, 원륭 맞지??”
“으응??”
원륭이 술 취한 눈으로 게슴츠레 돌아보니, 그곳에는 닭 벼슬 머리를 한 건달들 여러 명이 서 있었다. 그 중에는 흉기를 든 자들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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