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9 무언
“이건 말도 안 돼······.”
“있을 수가 없는 일이야······.”
헐크G와 태사향은 자신도 모르게 일어선 채 시합장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원륭은 철저하게 일화를 유린하고 있었다. 일어서면 처박고, 일어서면 처박기를 반복한다.
그 결과 일화는 이미 정신이 혼미해져 일어서도 비틀거리고 있었다.
“차마 못봐주겠군······.”
VIP룸에서 진흑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그때 마침 천만홍이 들어왔다.
“여어!! 몸은 좀 괜찮나??”
“의사들 말로는 복근이 갈기갈기 찢어졌다는군. 덕분에 한동안 좀 정양을 해야 할 듯싶다.”
묘한 눈으로 천만홍이 쳐다보자, 진흑창은 피식했다.
“이봐, 그게 왜 내 탓인가? 평소 복근 단련을 제대로 하지 않은 자네 탓이지. 기술만 연마하지 말고 기초적인 체력단련을 좀 하라구.”
“개소리······라고 하고 싶지만 졌으니 할 말이 없군. 고견에 따르지. 네 실력 잘 보았다.”
“뭘, 솔직히 이기긴 했지만 피해를 받은 건 내 쪽이 더 크니까 말이야. 네놈의 검에는 상당히 좀 신세를 졌지.”
이번엔 진흑창이 묘한 눈으로 천만홍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마지막 절기로 진흑창은 역전을 하기는 했지만 그전까지는 상당히 몰린 것이다.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을 경기였는데, 그런 시합이었으니 진흑창이 천만홍을 우습게 보지않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좀 경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 설마 저런 광경을 상상이라도 했나?? 같은 홍콩4대 고수인 일화가 저렇게 당하다니 말이야.”
“그래······. 나조차도 상상도 못한 일이다······.”
천만홍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로서는 자신이 당한 것은 아니지만 같은 홍콩4대 고수인 일화가 저렇게 처참하게 당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생겼던 것이다.
아니, 홍콩4대 고수 이전에 무림인으로서 연민이 생겼다. 무릇 무림인이란 자존심이 무척 강해, 세상에 지지 않기 위해서 극단적인 무(武)를 추구하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무(武)가 폭력에 가까운 주먹에 깨지다니. 무림인 이전에 한 사람으로서 참을 수 없는 굴욕이다. 만약 자신이 당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온 몸의 털이 곤두선 것이다.
“후우, 솔직히 말해서 말이다, 진흑창. 난 어찌 보면 너에게 진 게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으응??”
“비록 지긴 했지만 나는 너를 상대로 제법 호각의 승부를 보였지. 하지만 저 꼴을 봐라. 만약 저렇게 당하면 나는 내 조직원들 앞에서 무슨 수로 낯짝을 들고 있겠는가?? 부끄러워서 살 수가 없을 것 같다.”
“······.”
천만홍의 말에 진흑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역시 그랬을 것 같았던 것이다.
평생을 자존심 하나로만 살아온 그들인데, 나이 100살에 가까운 상태에서 그렇게 개망신을 당한다고 생각해보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비록 그들의 겉모습은 많이 보여 봤자 중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들의 정신연령은 확실히 노년의 그것이었다. 그런데 수만 명이 보는 앞에서 저렇게 망신······.
참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천만홍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경기가 끝나도 문제군. 이렇게 경기가 끝나면 일화는 반드시 원륭에게 앙심을 품게 될 거야. 오랫동안 봐온 일화의 성격을 보면 그렇지.”
“아니, 만약에 이긴다 해도 그건 마찬가지일 걸. 때로 무림의 시합은 결과보다 그 과정이 더 중요할 때가 있지. 사파가 천시 받는 이유가 뭐겠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려 하기 때문에 이겨도 인정을 못 받는 게 아니겠나? 사파 입장에서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절박한 상황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지만, 정파나 마도의 입장에서는 그냥 비겁한 쓰레기들일 뿐이지······. 솔직히 말해서 정과 마, 사의 기준에서 보면 원륭의 행동은 사파에 가까워. 자신의 체면을 신경 쓰지 않고, 상대의 체면도 신경써주지 않는다는 점에선 사파에 가깝지.”
“그건 그렇군······.”
천만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 사, 마의 기준에 대해선 이견이 있지만, 결국은 실리주의냐 명분주의냐 그 차이다. 만약 갈등이 발생하더라도 정파의 경우는 가급적 싸우려 하지 않는다.
일단은 대화로 풀고, 만약에 대화로 해결되지 않으면 무력을 사용하지만 그래도 정도를 벗어난 살수나 상대에게 모욕을 주는 것은 금한다는 주의다.
그것을 벗어나면 사파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파인들은 급할 때 바닥에 몸을 구르는 나려타곤조차 꼴사납다고 하여 그걸 쓰느니 그냥 맞아 죽겠다고 하는 어리석은 자들이 있을 정도로 융통성 없는 자들이 많은 반면, 사파의 인물들은 철저하게 실리주의자가 많았다.
나려타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 그것도 다 초식이다. 삼재검도 초식이고, 육합권도 초식이다. 하급 무공이든 비겁한 무공이든 이겨서 사는 게 중요한 것이다.
그곳에는 어떠한 비겁도 꼴불견도 없었다. 있는 것은 오직 생존의 문제.
다만 원륭은 정파인들과 함께 생활을 했지만 거기엔 마도의 인물도 있었고, 불사왕 같은 사파의 인물도 있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중국 정부에 대항하느라 이것저것 체면을 가릴 여유가 없어 초실리주의적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바로 박살내버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것은 무림인임에도 불구하고 총기와 폭약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파천황과 닮았을지도······. 싫은 대상은 서로 닮는다고 했던가.
서로 증오해마지않는 두 사람은 어쩌면 닮은 구석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천만홍이 입을 열었다.
“아무튼 나는, 원륭이 좀 더 융통성 있게 할 수 있지 않았냐 생각하는 거다. 그의 실력을 보면, 아마 좀 더 신사적이고 부드럽게 일화를 제압할 수도 있었을 거다. 저렇게 수많은 대중 앞에서 개망신을 주지 않았어도 될지도 모르지.”
“아냐, 나는 잘됐다고 본다. 일화 저 계집년은 옛날부터 상당히 띠꺼웠어. 같은 재벌 총수들조차 아래로 보고 자신이 홍콩의 식(食)을 모두 관리한다고 해서 안하무인이 따로 없었지. 오히려 통쾌한 기분이야. 솔직히 그렇지 않은가? 하하하! 하하하하하하!!!”
“그건 그렇지만······.”
천만홍이 거리끼는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그도 오만하고 건방진 일화가 처참하게 박살나는 장면을 보면 가슴이 시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로인한 후폭풍이 걱정되었던 것이다.
“사실 이 대회의 목적은 결국 우리 4대 고수 및 원륭간의 서열정리, 그리고 대결을 통한 단합이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개망신을 당했으니, 일화가 순순히 말을 들을 리가 없어. 아마 딴 생각을 품을 거다.”
“아무리 그래도 일화 역시 홍콩에 기반을 둔 자인데 어찌 그리 딴 생각을 품었다고 해도 감히 실행에 올리겠는가?? 일화의 힘은 홍콩에서 나오는 거야.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지. 현재 중국 GDP 4분의 1이상을 혼자 감당하는 이 홍콩 말이다. 영국의 지배 이후 양국일제를 거치면서도 홍콩은 아시아 최대의 금융 허브로 성장했다. 그리고 세계 곳곳에서 불야성 홍콩의 화려한 밤을 즐기기 위해 불나방처럼 달려오지. 너무 걱정하지마라, 천만홍. 일화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해. 이 홍콩을 기반으로 한다면 말이다.”
“그렇다면 좋겠지만······.”
천만홍은 여전히 근심어린 기색을 떨치지 못했다. 홍콩을 기반으로 했을 때 딴 생각을 못한다는 말은, 다른 수단이 있다는 말도 되었던 것이다.
“헉! 헉!!!”
일화가 거친 숨을 내쉬고 있었다. 두 눈은 충혈 돼있고, 단정하게 입고 왔던 옷은 어느새 엉망이 되어 있었다.
머리마저 헝클어져 있었는데 긍지 높은 홍콩4대 고수의 모습이라고는 믿기 힘들었던 것이다.
천만홍과 진흑창의 경기 역시 두 사람은 끝난 후 초췌해진 모습이었지만, 상당히 호각의 대결을 펼친 탓에 두 사람의 모습은 비슷했다. 하지만 이 꼴이라니······.
원륭이 담담한 표정으로 멀쩡한 신색을 유지하는 반면, 일화는 완전히 넝마나 다름없는 옷차림이 되어있었다. 원륭은 천천히 물었다.
“계속할 텐가?”
“헉, 헉! 해봐라! 나를 쓰러트려 봐라!!!”
콰앙!!!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원륭은 번개같이 다가가 일화의 머리를 다시 바닥에 처박았다.
그리고 물은 것이다.
“계속할 텐가?”
“죽여라······.”
콰앙!!!
원륭은 또다시 머리를 처박았다.
“계속할 텐가?”
“죽이래도······!!!”
쾅! 쾅! 콰앙!!!
같은 일이 몇 번이나 계속되었다. 그러자 말을 잇지 못하고 있던 관중석에서도 비난이 쏟아진 것이다.
“이게 무슨 짓이냐, 원륭 이 개자식!!!”
“시합에도 정도가 있지!! 주최 측은 뭐하나!! 당장 시합을 중지시켜!!!”
그들 대부분은 일화의 조직원들이었다. 그들로서는 당연히 일화를 지지하는 것이지만, 그 외에도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한 다른 조직의 자들이 원륭을 비난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욕에도 정도가 있지!”
“당장 홍콩4대 총수 중 하나인 일화님을 놓아드려라!!!”
평소에는 적대 그룹의 조직원들에 대해서 살의를 가지고 있을 정도로 치열한 경쟁을 하는 그들이었지만, 어디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어중이떠중이가 나와 홍콩4대 총수 중 하나를 농락하고 있으니 그들로서는 홍콩인으로서의 소속감이 살아난 모양이었다.
그러자 원륭은 고개를 들어 쳐다본 것이다.
파앗!!!
“저 눈!!!”
“괴물이다!!!”
심약한 관객들이 겁에 질렸다. 지금 원륭은 혈사마공의 본능을 폭발시킨 터라 눈이 흉흉히 빛나는 마안(魔眼)이 되어 있었다. 그 눈은 사람의 것이 아닌 것이다. 원륭은 천천히 말했다.
“웃기는군. 평소에 죽일 듯이 서로 싸워왔던 자들이 외부의 적이 나타났다고 단결한 것이냐?? 웃기는 자들이군. 버러지 같은 놈들······.”
“뭐라고???”
“우리를 버러지라고 했냐!!!”
항의하는 관중들이었으나, 원륭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자후의 초식으로 말했다.
“웃기지마라! 쓰레기 같은 놈들!! 네놈들은 작년에 일어난 천안문 사태를 알지 못하는가!! 수많은 시민들이 탱크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 무저항의 시민들이 인민해방군의 총 앞에 싸늘한 시민이 되었지. 그런데 네놈들은 이 좁은 홍콩에서 서로 아웅다웅하다가 나 같은 외부인이 나타나니 비난을 쏟아내는군!! 이 여자가 당한 이유가 뭐냐! 힘이 없으니 당하는 거다!! 당한 게 이 여자 같은가?? 만약에 이대로 단합하지 못하면 네놈들은 이 여자 꼴이 나는 거다!! 네 부모! 네 자식! 네 친구, 친척들이 말이다!!!”
“······.”
관중석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천안문 광장에서 일어난 민주화 시위와 그것을 무참히 탄압한 중국 정부와 인민해방군에 대해서는 그들도 잘 알고 있었다.
중국은 땅덩이도 넓고 언론 통제가 철저하여 아직 지방 구석구석까지는 모르는 곳도 있었으나, 홍콩은 중국 바로 옆에다 영국과의 공동 통치가 이루어짐으로 정보를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중국의 천안문 학살은 홍콩의 증시에도 영향을 줄 정도였다. 바로 옆인 중국에서 일어난 대학살······. 그런 문제가 홍콩 경제와 정치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원륭은 계속해서 외친 것이다.
“이 여자가 당하는 게 그렇게 분한가!! 그러나 이것은 시합이지 살육이 아니다! 나도 딱히 이 여자를 죽일 생각이 없다! 하지만 인민해방군이 밀고 들어오면 너희는 다 죽는 거야!! 처음엔 최루탄을 쓰고 물대포 정도만으로 너희들을 진압하겠지!! 하지만 너희가 중국 정부가 중국에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압제에 대항하여 불만의 목소리를 표출한다면 그 물은 곧바로 총알로 바뀔 것이다. 그래도 좋다는 말이냐!!!”
“······.”
관중들이 침묵하고 있는 가운데, 원륭은 쐐기를 박았다.
“천안문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당했을 때 네놈들은 뭘 하고 있었나!! 이곳 좁은 홍콩에서 쥐꼬리만한 이권을 얻기 위해 서로를 죽이고 구렁텅이로 몰고 있었나!! 비록 지금의 홍콩이 중국 GDP의 4분의 1이상을 차지한다지만 중국이 성장하고 지방 도시가 부흥하면 홍콩의 영향력은 급속도로 추락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 대부분은 빈민층이 되어 하루하루 일해도 먹고 살기가 어려운 일하는 빈민층이 되겠지!! 집값은 천정부지로 뛸 것이고 식료품은 물론 생필품의 가격도 상당히 부담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천안문에서 사람이 죽어갈 때에는 관심도 없고 아무런 반응도 없던 자들이 고작 여자 하나 죽는 것 같다고 이 아우성이라니! 부끄러운 줄을 알아라!!!”
원륭의 대노에 관중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무 말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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