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0 실력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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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음과 함께 연기가 걷히고 나자 그곳에 있는 건 널브러진 시체들과 육편(肉片)밖에 없었다.
곧이어 원륭은 눈을 감은 채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흐으읍······.”
시체와 피 웅덩이가 증발해 붉은 연기가 되어 원륭의 몸 안으로 들어왔다.
잠시 후 원륭은 눈을 뜬 채 조용히 말했다.
“오늘도 덕분에 하루를 연명하는군. 이 저주받고 불우한 생에 말이다.”
뚜벅뚜벅 원륭은 걸어 나갔다.
잠시 후 원륭이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또다시 헐크G가 찾아왔다.
“또 있군.”
“또 너냐······. 하아······.”
원륭이 반가운 건지 귀찮은 건지 묘한 기세를 풍기고 있는데 헐크G는 아랑곳하지 않고 옆에 앉았다. 그런데 좀 있다 손님이 하나 더 들어왔다.
“옆에 같이 앉아도 되겠나??”
“산동꼬마까지······. 내게 진 녀석들은 나에게 찾아와야 된다는 전통이라도 생겼나??”
“후후, 말이 참 독하군. 굳이 패배한 상처에 그런 쓰린 소금까지 뿌리지 않아도 되는데 말이야.”
“그렇게 들었다면 미안하군. 옆에 앉지. 아 이쪽은 아나? 헐크G라고 하네.”
“잘 알고 있어. 둘이 싸우는 모습을 보기도 했고 경기장에서 그렇게 떠드는 걸 못 본 척할 수도 없으니 말이야.”
“후후, 나도 꽤 유명인이군.”
원륭이 헐크G를 소개하자, 자연스럽게 산동꼬마와 헐크G도 인사를 텄다.
원륭은 두 사람에게 술을 한잔씩 따라주며 물었다.
“그래, 왜 또 찾아온 거지?? 산동꼬마는 그렇다 치고 헐크G 자네는 왜 찾아온 거야??”
“그렇게 말하니 섭하군. 우린 술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건가? 하지만 그 이유뿐으로??”
“솔직히 말하면 자네가 마지막에 이 산동꼬마의 그 초식을 피한 방법을 모르겠군. 경기장에서는 나도 이러쿵저러쿵 떠들었지만 어차피 가설일 뿐이야. 진실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지.”
“아하, 그런 건가······. 산동꼬마, 당신도 그걸 알고 싶어서 왔나??”
“그래. 나의 역수 사일창법은 실전에서 몇 번 펼쳐본 적은 없지만 그때마다 상대의 심장을 관통했지. 단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어, 단 한 번도. 그렇다고 해서 그게 무적의 절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분명히 심장을 터트리는 감촉이 있었거든. 몇 번이나 터트려봐서 그건 익숙해. 그런데 자넨 멀쩡히 일어났단 말이지. 그게 이해가 가지 않아.”
“과연 그렇군······.”
원륭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도 반대로 자신이 그런 절기를 펼쳤는데 상대가 그걸 맞고도 일어난다면 어처구니가 없을 것이다. 그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생사를 건 비무에서 모든 걸 다해 상대를 쓰러트렸는데, 상대가 ‘헤헷, 속았지?? 그런 건 나에게 안 통해!’라고 한다면 그처럼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나마 원륭이 죽이지 않아서 다행이지 만약 죽었다면 산동꼬마는 그 억울함에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것이다. 원륭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대답했다.
“이해가 안 가는 심정은 이해가 가. 나도 반대로 당했다면 그렇게 생각했겠지. 하지만 말이야, 이건 내 밥줄과 같은 것이거든. 어떻게 내가 헐크G의 공격을 초반에 그리 많이 허용하고도 멀쩡히 일어섰는가, 어떻게 내가 산동꼬마의 창술에 심장을 관통당한 것처럼 보였는데도 멀쩡히 일어섰는가. 그건 자네들이 풀어야 할 숙제야. 그리고 내 밥줄과 관계된 것을 솔직히 가르쳐 줄 수는 없지. 솔직히 말해서, 자네들은 아직 그 정도 관계는 아냐.”
“!!”
“!!!”
산동꼬마와 헐크G가 움찔했다. 그러나 헐크G는 히죽 웃었다.
“그렇군. 생각해보니 그렇군. 분명 우리 사이는 아직 그 정도 관계였지. 고작 안 지 며칠 되고 술 한 잔 같이한 정도로 자기 무공의 비밀을 알려줄 관계는 아니야. 상기시켜줘서 고맙다.”
“뭘, 그냥 당연한 소리를 했을 뿐이야.”
원륭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고 다시 술을 한잔 마셨다. 기분 나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정이 그렇다.
그와 헐크G, 산동꼬마는 아무 관계도 아니고, 그저 싸움 한번을 하고 술을 한잔 마셨을 뿐이다. 그걸 가지고 자신의 무공의 비밀을 알려줄 수는 없는 것이다.
혈귀의 신체는 강력하지만 딱히 무적은 아니다. 몇 가지 약점이 있었고 그런 약점을 고작 이 정도 관계로 알려줄 수는 없었다.
예전에도 그가 혈귀인 것을 알고 있는 것은 그 변모과정을 옆에서 보아 알고 있는 쪽방촌 무림인들과 그를 직접 상대해본 파천황이나 강호육 정도였다.
그리고 원륭이 유체화를 통해 핏빛 연기가 되어 자신들의 본거지를 빠져나가는 것을 직접 눈앞에서 본 강순도 아마 알겠지. 그들의 눈은 옹이구멍이 아니다.
그 외에 알고 있는 건 당문의 가주 당화 정도다. 그녀는 진룡 및 쪽방촌 무림인들의 의화단 시절 옛 동료였던 데다 원륭과 직접 붙어봄으로 인해 그의 사정을 대충 알아차렸다.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알려지면 모를까······굳이 제 입으로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정도로 혈귀의 비밀은 가벼운 게 아니다. 그런 건 제살 깎아먹기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원륭으로부터 얼핏 차가운 대답을 들은 헐크G는 오히려 납득했다.
“생각해보니 우리가 무례를 범했군. 본래 사문의 절기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는 건 예의가 아니지. 사죄의 의미로 이 술 한잔 따라주겠네.”
“어이, 이 술은 원래 내거잖아. 내가 시켰는데.”
은근슬쩍 남의 술로 공치사를 하려는 헐크G를 어처구니없는 눈길로 원륭이 쳐다보자, 헐크G는 어깨를 두드리며 껄껄 웃었다.
“뭘, 그리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마.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나, 하하.”
“하아······.”
사실 이런 성격의 인간은 원륭이 그리 좋아하는 성격이 아니다. 왜냐하면 원륭 본인이 보통 자기에게 시비를 거는 자들이나 하수들을 이렇게 농락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헐크G는 빈정거리는 게 아니라 진짜로 악의가 없이 호탕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그걸 아는 원륭은 어쩔 수 없이 그 술을 받아들였다.
“자, 자, 산동꼬마 자네도 한 잔 하지.”
“어이, 내 술을 가지고 어디까지 생색내려는 거야?!”
“하아, 고작 싸구려 술 한 잔 가지고 이러다니. 누가 보면 이게 최고급 홍주인 줄 알겠군.”
“뭐, 싸구려 술?!?”
“좋아, 큰맘 먹고 내가 한잔 쏘지. 주인장. 여기 술중에 괜찮은 게 뭐가 있지??”
“수정방이 있습니다. 공부가주도 있구요. 연태고량주도 괜찮죠.”
“좋아, 있는 대로 다 갖고 와!!”
“어이, 헐크G. 정말로 괜찮겠어?? 모두 다 시키면 그 가격이 상당할 텐데.”
“후후, 기껏해야 술 몇 병 값. 남자들의 우애를 다지기에는 싼 가격이지. 오늘은 내가 살 테니 마음 놓고 마시게!!!”
“훗, 그럼 신세 좀 지지.”
그때까지 거의 말없이 듣고만 있던 산동꼬마가 처음으로 웃었다.
곧이어 술이 한 병씩 차례대로 왔다.
“처음에는 수정방인가.”
헐크G는 병을 살펴보고 마개를 열었다. 곧이어 달콤한 과일향기가 물씬 풍겨져 나왔다.
“수정방의 향기를 두고 사과 향기 같다, 배 향기 같다는 사람들이 있지. 자네들은 무슨 향기라고 생각하는가??”
52도짜리 수정방을 따르며 헐크G가 말했다. 수정방이라고 해도 어떤 단일한 술이 아니라, 거기에는 여러 가지 도수의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52도짜리가 가장 일반적이며, 기본적이다.
그런 수정방의 향기를 두고 약간의 견해차이가 있었는데, 원륭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술 향기가 술 향기지 뭐. 사과니 배니 해도 실제 배나 사과의 향기와 완벽하게 대응하는 것은 아냐. 그저 그런 비슷한 향기가 난다는 것뿐이지. 품주사(品酒师. 술을 감별하는 사람. 소믈리에)들도 포도주에서 흙과 체리, 살짝 스모크한 담배향기가 난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런 비슷한 향기가 난다는 것 아닌가? 그저 우리는 배로 그것을 비우면 돼.”
“자네 생각은 그렇군. 산동꼬마는 어떻게 생각하지?”
“나도 동일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무림인이지 품주사가 아냐.”
“하하, 뭐 틀린 말은 아니지만 멋없는 녀석들이로군. 자고로 무림인도 시와 술, 음과 풍류를 알 수 있는 법이거늘.”
“프로레슬링을 하면서 풍류를 논하다니 묘하군, 헐크G.”
“프로레슬러는 풍류를 논하면 안 되나??”
“그리고 내 이름은 산동꼬마가 아니라 태사향(太史享)이다.”
“태 사향??”
“태사 향이다, 이 어리석은 녀석. 태사자는 태씨가 성씨가 아니라 태사라는 복성인 걸 모르느냐.”
“어렸을 때부터 미국으로 건너가서 난 몰랐다고. 그런 걸 어떻게 아나?”
“삼국지만 읽어봐도 아는 것을······.”
“그러니까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삼국지를 어떻게!!”
“자자, 그만들 하고. 술이나 마시지. 모처럼 산 술이 미지근해진다.”
허공중에 술이 잔 없이 둥실둥실 떠서 왔다. 헐크G와 산동꼬마는 그걸 보고 잠깐 움찔하더니 이내 잔이 같이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 손으로 술을 받아마셨다.
그 와중에도 술 한 방울 흐르는 일은 없었다. 한편 경기장 내에 있는 이 주점에는 아까부터 다른 무림인 손님들도 제법 있었다.
그러나 원륭이 잔 없이 허공섭물로 술을 떠서 보내고, 그것을 다른 둘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연스럽게 받아먹자 그들은 수군거렸다.
‘과연 원륭, 8강전 진출자답군.’
‘산동꼬마는 어떤가. 그가 마지막에 저 원륭의 가슴에 창을 박아 넣었을 때는 누구나 다 그의 승리를 확신했겠지. 어떤 기묘한 수로 살아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상대가 원륭이 아니라 다른 자였다면 산동꼬마는 분명 8강전에 진출했을 거야.’
‘그리고 저 헐크G. 대진운이 나빠서 그렇지 원륭만 만나지 않았다면 저 자도 과연 64강보다는 더 위로 갔을 거라고 하더군. 오늘 보니 그 말이 과연 허언이 아님을 알겠네. 저 수준을 보아하니 분명 32강이나 16강에는 진출했을지도.’
“이 자식들이, 다 들린다······.”
헐크G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예민한 그의 청각에는 술집에 자리한 이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다 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자꾸 64강, 64강 이러자 매우 기분이 나빠졌던 것이다.
애써 웃고 있었지만 그의 관자놀이 옆으로 힘줄이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그걸 보고 원륭이 한 마디 했다.
“그만해, 헐크G. 또 술집에서 난장판을 피울 셈이냐. 그것 때문에 대회운영위로부터 나에게 한 소리가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너를 찾으면 한 마디 해달라더군. 술집의 수리비도 내놓으라고 하고 말이야.”
“흥, 먼저 시비를 건 것은 그놈들이 아닌가. 뭐였더라?? MC쌍검이었나, 뭐였나??”
“MC쌍칼. 쯧, 무림인이 이렇게 기억력이 안 좋아서야.”
“그날은 술을 잔뜩 마셔서 어쩔 수 없었다고. 무림인도 술에 면역은 아니지. 어디까지나 주기(酒氣)를 최대한 내보내는 수준이니까 말이야.”
“그렇다고 해도 가게를 깨부순 건 네놈이라 변명의 여지가 없어. 나처럼 끌고 나가 처리했어야지.”
“아, 그놈들한테 배상을 하라고 하지 그러나. 아무튼 난 책임 없어.”
“그놈들은 이미 행방이 묘연하다더군. 그러니 배상을 시키려 해도 찾을 길이 없어.”
“자네가 처리했나??”
갑자기 헐크G의 표정이 의미심장해졌다. 그런 헐크G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원륭은 무심히 말했다.
“아니, 난 자네가 처리한 줄 알았는데. 홧김에 그냥 다 죽여 놓은 거 아냐??”
“그럴 리가 있나. 술 취한 상태였지만 딱 반 죽을 정도로만 패놓아서 술집을 나가는 순간까지도 그놈들이 꿈틀거리는 건 파악하고 있었다고. 그런데 행방불명이라니. 참 이상하군.”
“······.”
헐크G가 정말로 술기운에 자신이 죽였나??하고 생각하고 있는 가운데 옆에서 듣고 있던 산동꼬마, 안니 태사향이 한마디 했다.
“뭐,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수로운 일은 아닌 듯 하군. 모처럼 헐크G가 산다고 하니 술이나 한번 코가 비뚤어지도록 마셔보지.”
“호오, 태사향. 술을 좋아하나??”
“나의 일화를 들었으면 알 텐데. 나는 소련과의 국경지대에서 근무했지 않나. 그곳은 술을 아무리 마셔도 모자라. 마시는 족족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사용되기 때문에 절대 취할 일이 없지.”
“과연 그렇군. 그럼 오늘은 승리자와 패배자의 우애를 다지기 위해 한잔 마셔볼까??”
“헐크G, 그런 식의 자조적인 말은 하지 말라고. 내가 이긴 건 어디까지나 종이 한 장 차이니까.”
“훗, 거 참 두꺼운 종이 한 장이로군. 네 종이 한 장은 무슨 1m정도의 두께는 되나?”
“하하하하하하!!”
헐크G의 말에 원륭과 태사향 모두 웃었다. 그러나 농담이었지만 헐크G가 느낀 원륭과의 체감적인 실력차이는 그 정도였다.
그것은 산동꼬마도 마찬가지였는데 그 끝을 알 수 없는 원륭과의 실력차이를 그들은 대략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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