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5 금시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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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화는 마지막 침착함은 잃지 않았다. 그녀는 대기업 총수다운 극도의 절제심을 발휘하여, 그대로 돌아갔다. 돌아가려했다.
“가자.”
“예? 예, 예!!”
비서는 어리둥절해하다 일화를 따라갔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일화가 힘을 합쳐도 원륭 하나 당할 수 있을까 없을까 모르는 것이다.
게다가 이곳은 지금 원륭 뿐만 아니라 다른 3대 그룹 총수를 비롯해서 무려 아홉 명의 고수가 모여 있는 사지였다. 그러니 돌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때 원륭이 불렀다.
“이봐, 이건 들고 가야지.”
“······.”
일화가 돌아보니 그것은 자신이 타고 온 휠체어였다. 일화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됐다. 그건 너에게 선물로 주지. 언젠가 네가 탈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야.”
“그래? 하지만 이건 나에게도 필요 없어.”
찌릿!! 원륭이 바라보자 휠체어가 저절로 박살이 났다.
‘허공섭물!! 그것도 엄청난 경지의!!!’
비서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보통 상당한 고수라도 해도 저런 의지만으로 일으키는 무공인 허공섭물은 가벼운 물체를 나른다든가, 종이나 수수깡 같이 약한 물체를 찢고 부수는 수준에서 그칠 뿐이다.
만약 지금의 원륭이 보여준 것과 같은 그 이상의 경지를 어지간한 무림인이 보여줄 수 있었다면, 지금까지의 무림인들의 싸움은 눈빛 싸움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권과 검을 맞대는 것이 아닌, 의지와 의지가 맞서는 염력 대결이 되었을 것인데, 그것은 극도로 상단전이 발달해야 가능한 것이다.
상단전이 발달하면 방금 전의 염력, 흔히 허공섭물로 알려진 그 기술 등에 익숙하게 되고, 하단전이 발달하면 일반적으로 아는 그 내공이 늘어난다.
중단전은 그런 상단전과 하단전에 비해서는 비교적 중시되지 않지만, 실제론 그 두 단전을 잇는 가교역할을 한다.
내공이 심맥과 요혈, 혈도를 따라 움직이듯 그런 역할을 하는데 다른 두 단전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중단전의 역할도 중요해지는 것이다.
아무튼 중단전은 언뜻 중요해보이지 않지만 그런 중책을 맡고 있었고, 아무튼 원륭이 방금 보여준 것은 그가 극에 다다른 상단전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도 그럴만했다. 원래 혈귀란 것은 안개로 변한다든가 박쥐로 변한다든가 물위를 걷는다든가 온갖 기이한 행위를 선보이는데, 그에 비하면 허공섭물이라 불리는 염력을 사용하는 것 정도는 아무 일도 아닌 것이다.
아무튼 또한 단순히 혈귀라고 해서 아무나 그런 능력을 선보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 원륭의 성취가 극에 이르렀기 때문이었는데, 그러니 그가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지 알만했다.
어쨌든 원륭이 휠체어를 박살내며 일화의 제안을 거부하자, 일화는 이를 악물더니 그대로 돌아가려했다. 그러자 원륭은 그 뒤에 대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봐, 일화.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묻는 건데 정말로 앞으로도 너의 순홍 그룹의 자금 지원이나 우리들이 결정한 방침에 대한 협조적인 태도는 변함이 없는 거지?? 그러다 너희 그룹에 불리한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고, 하하!!”
일화는 치를 떨더니 말했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앞으로 내가 당분간 너희들의 앞에 나타나는 일도 없을 터이니.”
“······.”
당분간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일화와 그녀의 비서는 떠나갔다. 그리고 정말로 향후 수년간 이들은 일화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것 같군.”
헐크G가 회의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꼭 그렇게 했어야 했나, 원륭??”
“그래, 어쩔 수 없었어.”
“흐음······.”
원륭의 말에 헐크G는 납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뭔가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일화는 단순한 그들 그룹의 일원이 아니라, 홍콩을 지배하는 4대 재벌 총수의 한 사람이다.
그녀가 협조한다고 해도 진심으로 그 열과 성의를 다해 협력하는 것과 아닌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원륭은 괘념치 않았다.
“신경 쓰지 마. 오히려 잘된 것일 수도 있으니까.”
“잘된 일이라니??”
태사향의 물음에 원륭이 답했다.
“그녀가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녀가 무얼 하는지 우리가 모르지만 그녀도 우리가 무얼 하는지 제대로 모른다는 뜻이지.”
“그녀를 잠재적인 적으로 보는 것인가??”
“너는 아닌가??”
“······.”
태사향은 말을 잃었다. 확실히 이중에 누군가 배신한다면 그것은 가장 먼저 일화일 가능성이 컸다. 심지어 천만홍도 입을 열었던 것이다.
“확실히. 지금은 원륭 당신에게 협조하고 있지만 본디 우리들의 끈은 중국 정부였소. 우리들은 중국 정부와 상부상조하며 우리 자신들의 배를 불렸지. 우리에게 저렇게 비협조적이고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는 순간 그녀가 어디로 향할 진······.”
그 다음 말은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홍콩 4대 그룹 총수는 결국 원륭의 손을 들어 중국 정부에 대항하고 자신들만의 자유를 향해 투쟁하든지, 아니면 지금까지처럼 중국 정부의 더러운 일들을 홍콩에서 대신 처리하고 그 잔반을 받아먹든지 해야 했다.
둘 중에 하나는 무조건 선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원륭에게 우호적이면 모를까, 그렇지도 않은데 앞으로 무슨 선택을 택할진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나 원륭은 말했다.
“만약 그녀가 대놓고 중국 정부를 편들어 우리에게 적대하고 아주 사소한 거라도 우리들의 정보를 중국 정부에 넘긴다면, 중국 정부는 행동에 나서겠지. 대외적인 시선이 신경 쓰여 인민해방군은 투입하지 못할 지라도, 공안 무림맹 특수부대 정도는 투입할 가능성이 많아. 그들은 사복경찰이나 마찬가지니까. 고도로 훈련된 그들은 어디에도 숨어들 수 있고 누구든 암살할 수 있지. 하지만 그와 별개로 자유에 익숙해진 홍콩과 중국 정부의 대결은 언젠가 일어날 거야. 그러면 그 대결에서 우리는 시민들을 보호하고, 우리들 나름의 행동도 실제로 옮겨야겠지.”
“······.”
모두가 알아차렸다. 만약 원륭을 비롯한 이들 무림인과 중국 정부 간의 분쟁이 발생한다고 해도 그것이 공안 무림맹을 통한 암중에서 일어나는 대결이면, 일반 시민이나 국민들은 모를 가능성이 컸다. 그러면 누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없어져도 모르는 것이다.
쪽방촌의 무림인들이 패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은 인민해방군과 공안 무림맹의 압도적인 전력에 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패인은 시민들을 자신의 편으로 삼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숨어 다니는 와중에 그런 공작까지 하기는 힘들었고 보안을 위해 함부로 그런 짓을 할 수는 없었지만, 쪽방촌의 무림인들이 쓰러지고 나서 원륭은 깨달았다.
국가를 상대로 한 투쟁에서 몇몇 개인들의 저항으로는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천안문 사태에서 우리 무림인들이 쓰러지고 나서 나는 깨달았지. 결국 투쟁은 모두가 하는 것이라 말이야. 천안문 사태 이후 중국 정부의 각종 민주화 시위 탄압에 진정한 중국인은 모두 죽었다는 말들이 많아. 하지만 그들 중에 정말 자유를 바라는 자들이 없을까? 오히려 대다수가 아닐까?? 고르바초프가 취임하고 나서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은 오히려 냉전을 축소시키려 노력하고 있지. 하지만 중국의 공산주의, 패권주의, 통제주의는 갈수록 심해질 뿐이야. 우리들만으론 안 돼. 시민들의 힘이 필요해.”
“······.”
그 말에 모두들 동의했다. 결국 민주주의란 시민들의 힘으로 이루는 것이다. 그러나 그를 위해서는 당연히 희생이 필요하다. 심지어 저항을 하면 오히려 폭력시위란 낙인이 붙는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는 말이 있었던 것이다. 일지흔이 물었다.
“얼마나 많은 시민들의 힘이 필요한 거요??”
“되도록 많이. 많을수록 좋겠지.”
“하지만 천안문 사태를 봐도 아마 그들은······.”
“남김없이 죽겠지.”
“······.”
천안문 사태를 보지 못한 자들도 암중으로 속속 정보를 들어서 대충 그 참사는 파악하고 있었다.
등소평의 명령으로 탱크에 깔려 죽은 자, 총에 맞아 죽은 자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는데 홍콩의 자유, 그리고 더 나아가 홍콩의 그런 불씨가 중국 본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악무양이 입을 열었다.
“무식하지만 나도 당신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잘 알겠소. 하지만 다른 방법은 없소??”
“다른 방법은 없다.”
딱 잘라 말하는 원륭에게, 악무양은 따졌다.
“시민들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니, 그런 건 예정된 참사이지 않소??”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렇다고 볼 수 있다니. 당신은 지금 남 말을 하고 있는 것이오??”
악무양은 원륭의 눈을 똑바로 노려봤다. 그러자 원륭 역시 그의 눈을 똑바로 노려본 것이다.
“내가 지금 남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은가??”
“그렇소. 당신은 지금 숫제 남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소. 높으신 분들은 항상 나 같은 일반 시민들의 일은 신경 쓰지 않지. 그들은 사람이 죽어도, 무슨 일이 생겨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데 마치 지금의 당신 모습만 같소. 당신은 지금 그저 숫자놀음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오??”
뭐라도 된 기분에 그저 사람들의 죽음을 가벼운 숫자놀음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니냐는 악무양의 물음에, 모두들 침을 삼켰다. 원륭이 뭐라고 말할지 궁금해졌던 것이다.
그때 원륭의 눈빛이 변했다. 평상시에 무공의 수련이 더딘 악무양을 갈구고 구박하던 때와는 달리, 희미하고 좀 더 흐리멍덩해졌다. 누가 봐도 지친 표정이 되었던 것이다.
“이봐, 악무양. 자네는 대약진운동 때문에 중국 정부에 투쟁하기로 결심했다고 했던가?? 나무꾼 집안에서 태어난 자네인데, 대약진운동으로 인해 온 산의 나무가 씨가 말라서 말이야.”
“그렇소. 나무는 우리 집안의 보물이자 신이오. 그런 신성한 존재를 싸그리 마르게 한 모택동과 그의 중국 정부를 나는 용서할 수 없소.”
대약진운동때 모택동은 경제성장을 이룬답시고 마을마다 토법고로라 부르는 소규모 수제 용광로를 만들게 했는데, 그 완성도와 품질이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이후 그저 생산량만을 달성하기 위해 멀쩡한 철을 거기에 던져 넣어 쓰레기 철로 만드는 지경에 이르게 됐고, 그 과정에서 막대한 땔감과 화력이 있어야 하므로 온 산의 나무가 다 벌채된 것이다.
“처음에 아버지는 가난하던 살림에 나무를 많이 베게 되니 좋아하셨소. 하지만 그것이 곧 실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지. 산의 나무가 없어지자, 야생동물들의 보금자리도 없어지고 사라진 산의 나무는 돌아오지 않았소. 그리고 산사태나 수해를 막을 나무가 없어지니 그 피해도 고스란히 증가했지. 아버지는 산을 홀대한 인간들의 잘못이라고 한탄하시며, 그대로 시름하다 돌아가셨소. 그것이 내 어릴 때였소.”
이들 내에서는 막내 취급을 받지만 악무양도 딱히 나이가 적지 않다.
악무양과 일지흔, 궁요의 경우는 30대로 비교적 젊은 편이었고, 원륭이나 태사향, 헐크G는 40대, 당화와 진흑창, 천만홍 등은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였다.
하지만 어리다고 해서 모르는 것은 아닌 것이다. 30대도 알만큼 다 알 나이였다.
아버지가 죽고 어린 악무양은 나무꾼의 길로 나섰다. 그러나 그가 벌목할 나무는 없었다.
결국 그는 온 산을 돌아다니며 볼썽사납게 베인 나무들로 가득한 산을 관리하고, 야생동물들을 보살피며 자랐는데 그 과정에서 뒤늦게 중국 정부는 나무 심기 운동을 벌였고, 수년이 지나자 차츰 그가 나무꾼으로서 벨 나무들이 자라났다.
산엔 녹음이 돌아오고, 야생동물들의 보금자리도 생겨났다. 산사태와 홍수를 막을 나무들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는데, 그러자 산의 정기로 가득한 그곳에서 악무양의 내공은 저절로 자라났다.
그 결과 무공은 일천하지만 정심한 산의 정기로 가득한 악무양의 내공이 탄생했던 것이다.
그래서 불가나 도가의 계열도 아니면서 악무양의 내공은 정심하기가 짝이 없었는데, 산에서만 자라 사람을 별로 상대하지 않아 어리숙한 악무양이지만 가끔씩 이렇게 핵심을 찌를 때가 있었다.
사람의 죽음을 숫자놀음으로만 보는 게 아니냐는 악무양의 말에, 원륭은 지친 얼굴로 말했다.
“나 역시 대약진운동의 고통을 잘 안다. 오히려 너보다 더욱 잘 알겠지. 대약진운동 당시 너는 너무 어려 솔직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당시엔 잘 모르겠지??”
“······그렇소······.”
그 말엔 악무양도 부정할 수 없었다. 고통스러워하다 죽은 아버지의 기억, 그리고 벌거숭이가 된 산과 그런 황량한 산의 기억만이 그의 어린 시절 기억으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원륭은 말했다.
“우리 마을에서는 식인이 일어났다. 먹을 것이 없어 사람들이 서로 자식을 바꿔 잡아먹고 남의 집 아이를 납치해 잡아먹고 그랬지.”
“뭐라고???”
악무양은 경악했다. 설마 그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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