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어둠의 계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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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악!!”
“아아악!!!”
파천황이 살황을 살해하고 나오는 순간까지 살문의 일족들은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무공에는 사자후나 육합전성처럼 소리를 증폭시키는 것도 있지만, 반대로 감소시키는 것도 있다. 특히나 살문의 암살공은 그런 소리를 감소시키는 데는 최적화돼있는 것이다.
만약 외적이 그들 살문의 일족에 영역에 발을 디뎠다면 불과 얼마 지나기도 전에 그들은 이미 싸그리 정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설마 내부의 동료가 적이 될 줄이야······.
살문의 일족 수천 년 역사에 배신자는 없었다. 아무리 강한 살문의 일족이라도 ‘배신’이라는 낯선 공격에 면역이 없는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해 쓰러졌다.
“파황, 어째서 네가, 파황!!!”
쓰러진 자들 중 하나가 울부짖었다. 그녀는 난화(蘭花). 이름 그대로 난초와 같이 고고하고도 고매한 기상을 가진 여인이었다. 본래 파황이 태어나기 전 살문의 제1후계자는 그녀였다.
그러나 난화는 자신보다 더 큰 자질을 갖고 태어난 파황에게 기대를 걸고 순수히 그에게 제1후계자의 자리를 넘겨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화가 될 줄이야······.
똑같은 살문의 후계자나 일족이라도 그 자질에 따라 배울 수 있는 무공의 수준은 다르다.
난화가 계속해서 살문의 제1후계자 자리를 유지했다면 늙은 살황과 달리 젊음과 노련함이 조화된 절정의 무공으로 파천황을 막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일.
파천황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그에게 후계자의 자리를 넘겨준 여인의 목을 짓밟았다.
“컥! 커헉!!”
“누님. 누님이 저에게 후계자의 자리를 넘겨준 것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님이 주지 않았더라도 저는 언젠가 살황에게 인정을 받아 제 능력으로 그 자리를 차지했겠지요. 어설픈 자비를 베풀고 그에 자기 만족하지 마십시오. 예전부터 그건 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 나는!!”
누가 어설픈 자비를 베풀었냐고 난화는 외치고 싶었다. 그녀로서는 순수하게 아끼는 동생의 앞날에 일족의 미래를 맡기고 싶었던 것이다.
살황도 그렇고 난화도 그렇고 파황은 역사상 가장 강한 살황 중 하나가 되어 여전히 선인들이 남긴 숭고한 사명을 계승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틀렸다.
파황은 20년 세월 동안 일족의 눈을 모조리 속이고 그의 흑심을 증명하는데 성공했다.
수천 년 역사상 단 한 번도 배신자가 발생하지 않은 살문의 일족. 그런데 어디서 이런 개 같은 종자가 탄생했단 말인가. 난화는 무어라고 외치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파천황이 짓밟은 발에 조금만 더 힘을 주자 가녀린 그녀의 목은 순식간에 부러졌다.
뚝!!
살황과 난화를 해치운 다음에는 그야말로 일사천리였다. 살황과 난화는 인간 같지 않은 파천황이 그나마 유이하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주었던 자들이었다.
후계자의 자리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잘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목적을 이룬 파천황은 더 이상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그는 어제까지 친하게 지낸, 아니 친하게 지내는 척 했던 자신의 가족, 일족, 친척, 친구, 그야말로 살문의 일족에 있는 모든 자를 죽여버렸다.
“아아아!!!”
원통한 비명이 구천에 울려 퍼졌다. 수천 년 사명을 지키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가게 된 살문의 일족의 비통을 알 수가 있으랴.
그들이 원통해하는 까닭은 자신이 죽어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날 때부터 태초의 선인들이 맡긴 자신들의 책무와 그러한 가문에서 태어난 자신들의 사명을 자랑스러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명은 깨졌다.
이제는 더 이상 강씨 세가가 타락한다고 하더라도 막을 자가 없고, 심지어 암살공을 익힌 파천황이 한빙신공마저 익힘으로 인해 강씨 세가마저 그를 막을 수 있을지 불투명해졌다.
세상은 이제 파천황과 강씨 세가가 벌일 추악한 투쟁의 소용돌이로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나마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들이 버티고 있어 파천황과 강씨 세가가 각각 중국과 대만의 이면에서 군림한다고 하더라도 지금 이 상태로는 그들이 무언가 세계를 파멸로 몰아갈 수는 없었다.
허나 그들이 싸우기만 한다면 다행이지만 누군가 패해 어느 한쪽의 신공이 다른 한쪽에게로 넘어간다면 그야말로 대참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음양혼돈공을 완성해 걸어 다니는 핵폭탄이 된 그 자는 세계의 섭리를 다시 쓰겠지.
기후를 마음대로 조종하고, 대지를 뒤흔들 것이다. 인류는 지구를 수십 번 멸망시킬 핵무기의 더미를 수도 없이 만들어냈지만, 그마저도 음양혼돈공의 소유자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무공이라고는 모르는 권력자들도 물자가 비축된 지하 벙커에 숨으면 수십 년 수명이 다할 때까지 버티는 것은 일도 아니었는데, 지형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음양혼돈공의 소유자가 고작 핵 따위에 죽을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러자 원륭은 물었다.
“그래서 원혼이 됐단 말인가?? 너무도 원통해서??”
“그렇다. 우리는 어느 개개인이 아니라 수천 년 살문의 일족이 가진 원한의 결정체다. 이 분함을 알 수 있겠느냐!!”
“으음······.”
다른 건 몰라도 그 비통함만큼은 진짜인 것 같았다. 원혼인데도 불구하고 이 영혼은 마치 피눈물 비슷한 것을 흘리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원혼이란 현상인 것인데, 결국 현상이란 관념을 따라간다고 원륭은 예전 진룡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원륭은 진룡의 말을 떠올렸다.
‘내공이란 무엇일까?? 내공을 익히지 않은 자는 내공을 지닌 자들을 거짓말쟁이라고 몰며 허황된 망상이라고 꼬집는다. 하지만 내공은 실존한다. 그것은 익히고 있는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럼 내공을 지닌 자와 내공을 지니지 못하는 자가 가지는 가장 큰 차이는 뭘까?? 자질? 성정? 재능?? 나는 그것을 믿음의 차이라 보네.’
‘믿음의 차이요??’
‘그렇네. 구하고자 하면 구하고, 구하고자 하지 않는다면 못 구한다는 말이지. 무공이 정체되고 말년에 이르러 나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네. 정말 내공은 실존하는 것일까?? 그 답은 실존한다. 그러나 내공이 없는 자들이 내공을 지닌 자와 달리 익히지 못하는 까닭은 그 내공의 존재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일세.’
진룡이 말했던 것은 관념론이었다. 실존하기 때문에 내공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설령 실존하지 않더라도 그것이 있다고 믿는다면 실존하는 것으로 바꿀 수 있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무림인으로선 당연하게만 느껴지는 내공에 존재에 대한 고찰을, 말년에 이르러 진룡은 관념론, 즉 나는 믿는다, 고로 내공은 실존한다와 같은 마치 데카르트와 같은 사고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런 진룡이 영혼에 대해서도 언급한 적이 있었다.
‘무림에 있다 보면 온갖 해괴한 일들을 다 만나게 되네. 그 중엔 영혼과 관련된 일도 있지.’
‘진 대협은 영혼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있네. 의화단 운동 때 죽은 내 동료들이 영혼이 되어 날 찾아온 적이 있지.’
‘······.’
‘그것은 내 망상일지도 모르네. 그저 꿈일지도 모르고. 그러나 그저 한여름 밤의 꿈같은 그런 덧없는 기억들도, 내가 실재(實在) 했다고 믿는다면 그저 나에게 있어선 실존하는 일이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네.’
결국 진룡의 말은 현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자신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이었다.
실존하지 않아도 실존한다고 믿는다면 그 자신에겐 실존하는 것이고, 그 자신에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어차피 다른 사람의 반응은 중요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그 자신만의 일이니. 세상 모든 일은 남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제 마음대로 망상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영혼이 존재한다면 영혼이 피눈물을 흘리는 것 따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사실 본인이 전설적인 존재인 혈귀인데, 영혼의 존재나 그가 피눈물을 흘리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무얼 믿겠는가. 원륭은 속으로 쓴 웃음을 지었다.
“그래. 너는 파천황이 밉겠군.”
“밉다. 모든 것이 밉다!! 지금에 와서는 우리를 배신한 파천황도, 수 천 년 사명에 얽매이게 한 선인 나부랭이들도!! 그리고 강씨 세가들도!!”
원혼이 되어 아무래도 이 영혼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런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하면 애초에 원혼이 안 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미쳐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상태였는데, 말은 이것저것 하고 있었지만 원륭은 그 안에서 침착하게 미친 광기를 엿보았다.
때론 그냥 미친 것보다 이성적으로 미친 것이 더 무서운 법······.
말이 전혀 통하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말이 통하는데 자신만의 광기에 물들어 만행을 저지르는 자들은 더욱 통제가 어려운 것이다.
원륭은 그를 어지간한 논리로 설득시키는 것은 힘들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 여기서 너를 붙잡은 김에 소멸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아니 된다!! 나는 기필코 파천황과 그 수족에게 복수를 가할 것이다!!”
“아니. 그래서는 복수를 행할 수 없다. 너의 궁극적인 목적은 뭐지?? 파천황이냐? 아니면 그 수족이냐!!”
“그야 당연히 파천황이다!! 그 수족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파천황 본인에 비하면 당할 수 없다!!”
“만약 네가 파천황의 수족을 정리한다면 그는 순식간에 눈치 채고 그에 대한 방비를 하겠지. 그래서야 본말이 전도되지 않나?? 분명 너의 계획은 실패할 것이다.”
“······.”
원혼은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미친 원혼이었지만 이 원혼은 침착하게 미친 원혼이었다. 언뜻 광기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는 치밀한 사고가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썩어도 살문, 죽어도 살문의 일족이라 그들이 살아생전 가지고 있던 오성은 아직 발휘되고 있었다.
“그러면 어쩌란 말이냐??”
원혼의 대답이 한결 누그러졌다.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원륭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한 것이다.
“나를 습격해라.”
“뭐라고??”
“내가 아무리 파천황의 수족이 아니라고 해봤자 너는 믿지 않겠지. 더군다나 한빙신공의 자취가 느껴지는 나를 믿고 말이야. 그러니 습격을 하라고 하는 것이다. 너를 이 자리에서 놓아주겠다. 그 대신 너는 오늘부터 나를 아무 때나 습격해라. 자고 있을 때, 밥을 먹고 있을 때, 무엇을 할 때든 좋다. 다만 중요한 것은 나 혼자 있을 때 습격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왜지??”
“보안 유지 때문이다. 네가 믿든 안 믿든 나는 파천황에 대항하는 자로서 현재 동료를 모으고 그 수련에 힘쓰고 있다. 그러나 그들 중엔 배신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동료야 언제든 배신할 수도 있고 나는 그것을 감안하고 적과의 동침을 한다는 생각으로 그들과 함께 부대끼고 있다. 그러나 너라면 다르지. 그 정도 원한을 가지고 있다면 너는 배신할 존재로는 보이진 않는데 만일 네가 나의 지인들에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그 정체를 철저히 숨긴 뒤 파천황과의 결전에 나타난다면 너는 파천황을 찌를 비장의 한 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나??”
“음······.”
원혼은 고민하는 듯 했다. 그러자 원륭은 윽박지른 것이다.
“어차피 너에겐 선택지가 없다!! 주특기인 암살은 아니라지만 나와 대놓고 붙었다고 해도 이렇게 깨져서야 파천황에게 닿을 도리는 없겠지!! 너는 너를 상대하며 암살공을 익힌 파천황에 대한 비책을 찾겠다!! 그러니 너는 암살공을 통해 나를 언제든 암살할 기회를 노려라. 어떠냐? 손해 보지 않는 일이지 않나!! 최소한 너는 이 자리는 벗어날 수 있다!!”
“으음······.”
원혼은 잠시 더 고민했으나 확실히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는 그야말로 지금 원혼의 핵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원륭에게 붙잡혀 옴짝달싹도 못하는 것이다.
원륭은 도사나 부적술의 대가가 아니었지만 같은 어둠의 존재인 혈귀라 두루뭉술한 원혼의 중핵을 파악하고 곧바로 붙잡을 수가 있었다.
원혼이 보기에 원륭의 성질은 한다면 하는 자의 그것. 만약 그가 거부한다면 정말로 핵을 터트려 원혼을 붕괴시킬 것이다. 그러면 강제로 성불이 되는 것이다.
삼도천을 건너 지옥 염라대왕이나 만나러 가야할 텐데, 그러면 복수를 꿈꾸는 건 요원한 길이었다. 자의 반, 타의 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원혼은 승낙했다.
“좋다······. 하지만 이제부터 편안히 잠들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버려라. 정면 대결이 아닌 암살공을 펼치는 살문의 일족의 공격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원혼이 되어서도 그건 마찬가지지······. 네가 말한 대로 언제든 노려주겠다. 밥을 먹을 때, 잘 때, 여자를 안을 때도 말이다. 네 인생 가장 행복하고 가장 편안해야 할 순간에 노려지는 고통, 충분히 맛보도록 해라······.”
“어차피 내 인생에 행복은 없다. 모든 인생을 무(武)와 복수에 바친 몸이니. 그보다 궁금한 것이 있다. 살문의 일족은 중국 본토에 있던 것이 아니었나?? 왜 그 원혼이 홍콩에 있는 거지??”
“······홍콩의 구룡성채는 온갖 마가 다 끼어있는 곳이다. 이곳은 현재 원혼이 된 나도 완전히 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마가 감돌고 있지. 인간이 만들어낸 원기. 원념. 그런 것들을 먹고 나는 영체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너도 편안히 죽을 거라고 생각하진 마라, 저주받은 존재여······. 언젠가 네 어둠의 영혼이 네 스스로를 처절히 짓밟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살문의 원혼은 사라졌다. 그러자 원륭은 조용히 생각한 것이다.
‘그런 건 이미 알고 있었다, 멍청한 놈. 편안히 죽을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어.’
그렇게 원륭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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