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의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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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원륭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야 일지흔······. 아니, 척지강이라 해야 하나?? 너를 어떻게 불러야 하나??”
“······.”
일지흔은 잠시 가만히 있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나는 일지흔이면 되오. 아니 일지흔이 아니면 안 되오. 적어도 파천황을 쓰러트릴 때까지는 척지강의 이름을 칭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오. 그날 불타는 집과 부모님과 함께 인간 척지강은 죽었소. 어쩌면 파천황이 죽어도 그 이름은 영원히 쓰지 못할 지도 모르지.”
“그런가······. 하나만 더 묻지. 파천황은 어떻게 너의 가문이 척계광의 후손인 것을 알았을까?? 심지어 고향인 산동성에 그대로 계속해서 살고 있던 것도 아닌데 말이야.”
“글쎄······. 나는 이렇게 생각하오. 공안 무림맹을 발족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하고 있었던 파천황은 인재영입 및 잊혀진 무림의 보물들을 얻기 위해 그 중 하나인 기효신서를 가지고 있는 우리 가문을 찾아 나섰을 거라고 말이오.”
“하지만 기효신서는 중국 정부에 남아있지 않을까?? 청나라 시점까지만 해도 실제로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데 사용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뭐, 그때의 문서가 계속해서 남아있으리란 보장은 없으니 말이오. 그리고 우리 가문에서도 조상님이신 척계광 장군이 모함당하여 좌천당하신 후 기효신서의 뒷부분을 더 추가하셨다는 말이 있소. 즉, 만약 중국 정부에 명, 청을 건너 여전히 기효신서가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완전한 서책이 아니라는 말이오. 파천황은 아마 중국 정부가 기효신서를 분실했거나 혹은 있더라도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그 원본을 찾으러 왔을 것이오. 그리고 나도 구절만 외우고 있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기효신서와 그 절강병법은 실제로 구절만 보고 사용하기에는 매우 까다롭다고 하오. 그래서 임진왜란 때 절강병의 위력을 본 조선은 이여송의 부관을 매수해 몰래 절강병법의 내용을 빼갔고, 너무나 암호처럼 간략하게 적혀 있어 해독이 어렵자 다시 낙상지라는 이여송의 부관을 매수해 그 구체적인 사용법을 터득했다고 알려져 있소. 제아무리 파천황이라도 거의 400년 전 고문서를 해독하는 건 매우 어려웠을 것이오. 그 뜻의 문제가 아니라, 표기방식이라든가 약자 같은 것이 말이오.”
“그렇군······.”
원륭은 납득했다. 전문직일수록 어떤 문서의 필기를 매우 간략하게 적어놓는 경우가 있는데, 주로 자신만 보는 문서일 경우 그렇다.
남이 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용어와 약자, 심지어 악필로 대충 휘갈겨 써놓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기효신서 역시 그런 편이었다.
실제로 기효신서 역시 척계광이 병법에 정통한 자만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매우 간략하게 적어놓은 형편이었고, 파천황은 무공의 천재였지만 무공과 병법은 또 다르다.
무공의 달인이라고 해서 반드시 병법의 달인은 아닌 것이다.
게다가 400년 전의 장군이 병법을 아는 사람만 알아볼 수 있게 매우 간략하게 적어놓은 기효신서는 해독하기가 매우 까다로웠을 것이다.
실제로 조선 역시 그리하여 이여송의 부관들을 매수하여 겨우 해석했으니까.
일지흔은 말을 계속했다.
“이건 내 추측이지만, 산동성에 이름 높은 무인이나 세가, 문파 등을 모두 뒤지다 척계광 장군의 흔적을 찾지 못한 파천황은 척계광 장군이 가장 명성을 드높였던 절강성으로 온 것이 아닐까 싶소. 그리고 실제 우리 가문은 꽤나 옛날부터 산동성을 떠나 절강성으로 이주해있었소. 그 이유는 모르겠지만 말이오······.”
“글쎄. 기효신서는 실제로 그 효과가 입증된 엄청난 병법서이다. 그 효과는 명, 청나라 뿐만 아니라 조선에까지 그 영향을 미쳤지. 만약 척계광 장군이 그 기효신서의 뒷부분을 추가했는데 그 사실이 알려졌다면 그걸 노리는 자들은 수도 없이 많았을 것이다. 실제로 조선에서 기효신서의 내용을 빼간 것처럼 말이야. 그리고 이건 내 추측인데······. 척계광 장군의 용행검법도 실은 그 기효신서 안에 들어가 있지 않나??”
“······그렇소. 기효신서는 단순한 병법서가 아니오. 대 왜구 전문 특수병법인 절강병법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절강병법 중에는 왜구용 검술로 만들어진 용행검법 또한 포함되어 있소. 척계광 장군의 절강병법이 효과를 거둔 데에는 병법 그 자체의 효과도 있지만 용행검법의 위력도 있소. 제 아무리 전략이 뛰어나도 그를 뒷받침하는 건 전술······. 그리고 전술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병사 개개인의 능력 또한 필요하오. 척계광 장군의 절강병들이 그 명성을 떨친 데에는 당연히 그 용행검법 또한 이유가 있었소. 용행검법을 익히고 척계광 장군의 절강병법을 통해 운용된 절강병들은 무수히 많은 왜구들을 도륙했지.”
“······그렇군······.”
원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중국인은 아니었지만 조선인으로서 그의 뿌리는 조선에 있었다.
그리고 척계광 장군 본인이 직접 참전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절강병법을 익힌 병사들이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크나큰 공을 세운 것이다. 원륭으로서는 그에게 감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튼 협력에 감사하네, 일지흔.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만약 중국 정부에 대항하기 위한 군대가 조직된다면 너는 그 절강병법을 병사들에게 지도해줄 수 있을까??”
“······.”
일지흔은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조용히 쳐다보았다. 가문의 비전인 기효신서의 절강병법을 전수해달라는 것은 보통 부탁이 아니었다.
실제로 일지흔의 아버지는 그 비밀을 지키려다 목숨을 잃고 가문은 풍비박산이 났던 것이다.
그러나 일지흔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어차피 아무리 좋은 병법이라도 쓰지 않으면 무용지물. 본래 그 기효신서와 절강병법은 중국을 좀 먹는 왜구들을 퇴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중국을 좀먹는다는 점에선 지금의 중국 정부와 공산당도 같소. 대의를 위해서는 그들을 퇴치하는데 쓰는 게 맞겠지. 그 편이 돌아가신 척계광 장군이나 아버지, 어머니도 좋아하실 것이오.”
“그런가······. 고맙다······.”
원륭은 진심으로 고개를 꾸벅 숙여 감사의 인사를 표시했다. 그러자 일지흔이 당황하여 손을 세차게 흔든 것이다.
“왜 이러시오. 감사를 할 사람은 나요. 나 혼자서는 대적 불가능한 무소불위의 능력자, 파천황을 상대하는 것을 도와준다니. 오랜 세월 그에 대적해온 당신이 도와준다니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소.”
“무슨. 나 역시 25년 동안 그저 목숨만 부지하고 산 것 뿐이다. 그를 쓰러트릴지 어떨지는 장담 못해.”
“그러나 나 혼자 싸우는 것보다는 쓰러트릴 확률이 올라가는 것은 사실이오.”
“그 점은 나 역시 마찬가지지.”
“······.”
두 사람은 서로 눈을 쳐다보았다.
원륭이 일지흔보다 강하다고는 하지만 그 역시 파천황에 비하면 몇 수는 뒤지는 것이 확실하다. 제 아무리 혈귀가 되고 오랜 세월 무공을 익혔더라도 그건 확실했다.
그와 파천황은 아예 시작지점 자체가 다른 것이다.
파천황은 살문의 일원 중 하나로 처음부터 고급 무공을 익히고 있었고, 후에 한빙신공이라는 초절정 무공을 익히면서 아예 다른 사람으로 거듭났다.
무림에 알려진 살문의 위업을 들어보면 살문의 무공이나 그 암살자들 역시 절정이라 부르고도 남을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태초의 근원적인 무공 한빙신공에는 비할 수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원륭은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자네 이름은 왜 일지흔으로 정했나? 내가 보기엔 딱히 어디에도 큰 상처는 없는 것 같은데 말이야.”
“······그것은 내 마음에 남은 상처요. 그 상처가 낫기 전까지는 나는 일지흔이라는 이름 이외에 다른 것을 쓰지 않기로 한 것이오.”
원륭은 납득했다. 그 역시 마음에 크나큰 상처를 안고 있는 것은 똑같았던 것이다.
일지흔은 너무나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아련히 대답하고 있었다.
악무양, 일지흔, 궁요와 헤어지고 나서 방을 나오자마자 헐크G는 물었다.
“이봐, 원륭. 그런데 아까 그 세 사람에겐 왜 내력대결을 건 거야?”
“뭐야, 헐크G. 눈치 챘나?? 하지만 내력대결을 건 것은 아니야. 정확히 말하면 그들의 수준을 검사해봤지.”
“수준을 검사해? 아하, 본격적인 대결은 하지 않고 내력의 충돌을 일으켰을 때 그에 대항하여 일어나는 반응을 봤다는 말이군.”
“바로 그렇다, 헐크G.”
“그들의 수준은 어떻던가??”
태사향이 묻자 원륭은 힐끗 쳐다보고 대답했다.
“글쎄, 상당하더군. 일지흔이나 궁요 같은 경우에는 고강한 수준이고, 악무양의 경우도 그 무공수준에 비해선 내공이 정심해. 어디서 그런 내공을 수련했는진 모르겠지만 아마 나무꾼이었다니 심산유곡에서 수련에 몰두해서 그토록 정심한 내공을 가지게 됐는지도 모르지. 결국 내공의 근원은 자연이니까 말이야.”
“그렇군. 하긴 나도 대자연의 덕을 많이 봤지.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미국에는 아직 훼손되지 않은 대자연이 많아. 미국은 사람이 많지만 미처 다 훼손할 수 없을 정도의 광대한 대자연이 펼쳐져 있지. 어떻게 보면 현대에도 무림인이 계속해서 등장할 수 있는 건 아직까지 그런 대자연이 전 세계 곳곳에 남아있어서 그런 걸지도 몰라. 자연의 생명력은 끈질기니까 말이야.”
“그건 그렇지. 만약 지금 이상으로 내공을 익히기 어려워진다면 정말로 그때는 지구가 끝난 것일지도 몰라.”
“그럼 원륭. 내일 시합 잘하라구. 태사향과 같이 응원할 테니 말이야.”
“고맙다.”
원륭은 손을 흔드는 헐크G와 태사향에게 같이 손을 흔들어 인사를 해주고 돌아섰다.
드디어 내일은 결승전인 것이다.
결승전 날. 경기장은 유례없는 흥분과 환성으로 가득 차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도 이 시합들에 걸리는 막대한 돈으로 인한 도박꾼들의 광란은 장난이 아니었지만, 오늘만큼은 다르다.
오늘은 홍콩에서 가장 강한 자를 가리는 날이기도 한 것이다.
홍콩제일고수. 무림이 쇠퇴한 시대이지만 그 명성은 여전히 그 값어치가 있다.
제일고수라는 명칭은 결코 허명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면서 각자 다른 가치를 찾아 나선다. 돈, 명성, 혹은 여자??
그렇게 각자 다른, 그것도 수많은 가치를 찾아 헤매는데 무공에 모든 것을 바친 자들은 다른 가치에 몸을 바친 자들과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법치가 지배한 시대에서도 계속해서 힘을 추구한 이들. 자력구제가 허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그것은 쓸모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허나 실제론 가치가 있다.
경찰의 손길은 모든 자에게 미치지 않는다. 때론 경찰, 혹은 그 윗선의 권력이 지켜야할 일반 시민과 민중을 탄압하기도 한다. 그래서 사적인 무력을 가진 자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화구도 이를 강조했다.
“자, 오늘은 드디어 대망의 결승전입니다!!! 경찰이 사회의 치안을 유지하는 세상에서도 우직하게 자신의 힘과 주먹을 갈고 닦은 사나이들!! 누군가는 주먹패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힘과 논리가 있습니다!! 자고로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법!! 어둠이 있어야 빛이 있는 법!! 궤변이라고요?! 하지만 실제로 그 논리는 성립합니다!! 자, 나오십시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힘과 정의를 관철하기 위해 그 주먹을 갈고닦은 용사들이여!!!”
콰앙!!!
폭죽이 터지며 출입구가 빛났다. 출입구는 총 네 개가 있고 각각 그 문은 사방신의 이름을 따 청룡문과 백호문, 주작문과 현무문이라 했다.
그리고 오늘은 백호문과 청룡문에서 두 사람이 걸어나온 것이다.
“좌청룡!! 흑사 진흑창!!!”
“우와아!!!”
“총수님 만세!!!”
“홍콩제일고수는 너다, 진흑창!!!”
진흑창을 향해 환호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흑창은 홍콩 4대 그룹의 하나인 흑룡 그룹의 총수.
그 대재벌로서의 위엄이나 홍콩4대고수로서의 위엄이나 어느 쪽이나 보통이 아니다.
홍콩의 무력과 재력을 다스리는 최고 고수 네 명 가운데 하나. 그것이 바로 흑사 진흑창이었다.
“자, 다음은 어디에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희대의 초신성!! 우백호! 무명 원륭!!!”
“잘 해라, 원륭!!”
“난 네놈에게 걸었다고!!!”
“돈 꼴으면 가만 안둘 거야!!!”
“하아······.”
그 소리에 원륭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진흑창이 웃으며 다가온 것이다.
“시작부터 참 김빠지게 하는 소리로군. 이러니 도박꾼놈들은.”
“네가 할 소리냐, 진흑창. 따지고 보면 그런 도박꾼놈들의 돈을 빨아 먹고 사는 게 너잖아.”
“후후, 부정하진 않겠다. 하지만 도박 사업은 우리 그룹의 사업 중 아주 작은 부분일 뿐. 우리 그룹의 진면모는 거기에 있지 않다. 그리고, 너도 오늘 그동안 보지 못했던 내 무공의 진면모를 보게 되겠지.”
“뭐야, 감추어둔 재주가 또 많이 있었나??”
원륭은 새삼스럽다는 눈으로 진흑창을 쳐다보았다. 솔직히 여기서 더 이상 뭔가가 나올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작가의말
최근 기사를 하나봤는데 중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TOP3에 각각 산동성 연태, 마카오, 하문 시가 꼽혔다고 합니다.
산동성 연태는 연태 고량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고, 산동성은 예로부터 무술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며 본문에 등장한 척계광이나 태사향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마카오는 그렇다치고 3위인 하문 시 역시 본문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 기억하시겠지만 하문 시는 대만 영토인 금문도와 매우 가까운 도시입니다.
두 도시는 서로 몇 km밖에 떨어지지 않았을 정도로 매우 가깝고, 그로 인해 국공내전 당시 금문도를 지키려는 대만 국민당군과 이를 차지하려는 중국 공산당군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습니다.
금문도 하나에 무려 수십만 발의 포탄이 떨어졌고, 그로인해 섬의 높이 자체가 수 미터 낮아졌다는 것 역시 언급했었죠.
금문도 역시 전쟁 당시 병사들의 공포감을 잊게 하고 사기를 충전시키기 위해 특별히 도수가 높은 고량주를 지급했는데 이것이 금문 고량주라고 하여 지금은 금문도에 떨어진 포탄으로 만든 식칼과 함께 금문도 특산품이 되었습니다.
이 식칼은 이연복 쉐프의 식칼 중 하나이기도 하죠. 지금은 종영한 냉장고를 부탁해 촬영당시 한동안 슬럼프에 빠진 이연복 쉐프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직접 금문도의 장인에게 부탁해 만든 금문도 중식도를 사용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사소한 지식이지만, 이런 배경지식을 알고 이 글을 보시면 더욱 재미를 느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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