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0 모든 것을 잃어버린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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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누구냐??”
파천황의 물음에 남자는 답했다.
“나는 왕유림(王維林. 왕웨이린)이라는 사람이오.”
“왕유림?? 너는 저 자들하고 아는 사이인가?”
“모르오.”
“그럼 왜 막는 거지??”
“나는 아까부터 저들의 행동을 지켜봐왔소. 보아하니 저들은 시민들을 학살하는 인민해방군을 막고 아마도 특수부대로 추정되는 요원들과 싸우고 있더군. 그러다 저들이 쓰러지고 전차의 포격이 개시됐길래, 나도 모르게 막으러 나온 것이오.”
“당신에게 저 포격을 막을 힘이 있나?”
“없소.”
“그럼 고위 공직자인가? 아님 그들하고 연이 있던가?”
“없소.”
“그렇단 말이지······. 그럼 자넨 평범한 시민이란 말이군.”
“그렇소.”
“······.”
잠시 파천황은 묵묵히 있더니 순간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이형환위!!!’
전차의 앞을 막아선 남자는 어리둥절해졌다. 자신과 말을 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지더니, 바로 눈앞에 나타났는데 뒤에 쓰러져있던 남자가 어느새 그 자를 막고 있었던 것이다.
퍽!!!
“큭!!”
“무슨 셈이지?? 설마 날 막으려는 건가??”
“너는 공안인데도 평범한 중국의 시민을 죽이려고 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어···!!”
“흠, 너는 조선족이 아니었나?? 조선족이 왜 그리 중국인들의 목숨에 관심을 갖는 거지??”
“조선족이 아니라 조선인이다!! 그리고 중국인이든 아니든 누구나 목숨은 소중한 거다!!!”
쾅!!!
원륭은 남아있는 모든 힘을 모아 파천황의 복부에 정권을 강타했다.
하지만 도리어 부러진 건 자신의 손목이었다.
“크아악!!!”
“쯧쯧, 내공이 없으니 자연스런 반탄강기만으로도 손목이 부러지지. 너와 나의 전력은 지금 그 정도의 차이가 있다. 가뜩이나 심했던 격차가 지금은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벌어졌지. 그런데도 더 싸우겠다는 건가? 응??”
쾅쾅!
쓰러진 원륭의 복부에 파천황을 발길질을 해댔다. 마치 가죽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그때마다 원륭의 몸은 힘없이 실 끊긴 연처럼 이리저리 나가떨어졌다.
갈비뼈가 다 부러지고 내장이 다 파열됐는데 아무리 혈귀라도 이대로 살아나기는 힘들 듯 보였다. 진룡은 피눈물을 흘리며 간신히 일어서려고 노력했다.
“그만둬, 그만둬······.”
그것은 저항을 계속하려는 원륭에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원륭을 제거하려는 파천황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산송장이 되어서도 싸우려는 원륭이나, 그런 원륭을 끝장내려는 파천황 모두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린 이미 패했다, 파천황!! 어서 신속히 숨통을 끊어라!!”
“감히 누구에게 명령하는 거지?? 생사의 여탈권은 승자에게 있다!! 패자는 죽는 것도 마음대로 못해!!”
쾅!!
“크흑!!”
마찬가지로 복부에 발길질 한 방을 맞고 나가떨어진 진룡은 잠잠해졌다. 죽었는지, 기절했는지, 도저히 그 상태를 알 수가 없었다. 파천황은 입을 열었다.
“그래, 왕유림이라고 했나?? 아직도 나를 막을 생각이 들었나? 응?”
“물론이오. 내가 죽는다 해도 살아있는 한 계속해서 당신의 앞을 가로막을 것이오.”
“호오, 그래???”
팟!!!
순간 왕유림은 엄청난 살기를 경험했다. 태어나서 살기를 경험한 것도 처음이지만, 이토록 치명적인 살기를 경험한 것도 마찬가지로 처음이었다.
파천황이 발한 것은 의기상인의 수법으로, 말 그대로 의지만으로 사람을 살상하는 수법이다.
무공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오르면 그 살기가 극에 달해 잘 벼리어진 살기만으로 자신보다 수준이 낮은 무림인이나 일반인을 살상할 수 있다.
보통 극의에 달한 무림인들끼리 싸우면 그 주변에 의기상인의 영역이 펼쳐져 하수들은 감히 다가가지도 못하는데, 파천황은 단독으로 일반인에게 그 살기를 쏘아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죽지 않았다.
“호오??”
그것은 기적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파천황은 100살을 넘게 사는 동안 이런 수법으로 사람을 죽인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과거 살문의 암살자였고 암살의 최고 경지는 흔히 무살(無殺), 소리도 흔적도 목격자도 없이 그저 의지만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의기상인은 최고의 암살법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이 자는 그것을 버틴 것이다. 심지어 무림인도 아니면서.
어지간한 무림인이라도 이 수법에 적중되면 단번에 격살될 수밖에 없었는데, 남자는 눈물을 찔끔 흘리고 다리를 덜덜 떨면서도 비키지 않았다.
그걸 보고 파천황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무림인도 아니면서 그걸 버티는 건가? 과연 대단하군. 하지만 이것도 버틸 수 있을까??”
탕!!
총알이 왕유림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뺨에서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래도 왕유림은 비키지 않았다.
“그래도 비키지 않는 건가??”
“죽어도 비키지 않겠다고 말했소.”
“그래? 그럼 이건 어떨까?”
파천황은 전차에 손짓하여 신호를 보냈다. 안에서 지켜보고 있던 전차병들이 그 신호를 보고 다시 포신을 돌렸다.
기이잉, 기잉.
포신이 목표를 포착하고 고정됐다. 목표는 진룡과 원륭 등 쓰러진 무림인들, 그리고 그 앞을 가리고 있는 왕유림이라는 남자다.
59식 전차 안에 있던 전차병들은 순간 우왕좌왕했다.
전차병들의 경우 보통 전차장이나 조종수는 하사 이상의 부사관이 담당하고, 포수와 탄약수는 일반 병사들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
지시는 전차장이 하지만 실제 사격은 포수가 하기 때문에, 이 포수를 맡은 병사도 순간 움찔하며 물었다.
“전차장님, 한 번 더 발사합니까??”
“발사하라고 하지 않나.”
“하지만 일반인을 상대로 그런······. 이미 진압은 끝이 났는데!!”
“이 자식!! 군대는 뭐 하러 들어온 거냐!! 군인은 명령을 수행하는 게 전부다!! 명령을 따르지 않는 군인은 필요 없어!!”
“하지만······.”
포수의 뇌리에는 순간 포탄을 맞고 산산조각 날 시민과 반란분자들의 모습이 보였다.
반란분자이기는 하나 그들도 사람이었다. 본래 전차란 보통 같은 전차를 상대하는 것이 일이다. 시민들에게 포를 발사하고 깔아죽이는 것은 거리낌이 있는 것이다.
그런 포수를 전차장은 노려보더니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이 자식!! 네 손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쏘지 않겠다는 거냐!! 어차피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너 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 죽은 목숨이야!! 그건 알고 있겠지?!”
“······.”
포수는 생각했다. 확실히 그렇다. 공문에 의해 공안의 특수부대에게는 최대한의 협조를 아끼지 말라고 병 차원까지 지시가 내려왔다.
만약 여기서 명령을 거부한다면 분명 작전이 끝난 후 그는 물론이고 이 옆자리에 있는 같은 승무원들에게도 문책이 이뤄질 것이다.
자신에게 내려오는 문책은 감당할 수 있다. 비록 불명예전역 당하더라도 어찌어찌 먹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로 인해 같이 전역당하면 동료들의 얼굴은 어떻게 볼 것인가?
중국이란 관대한 나라가 아니다. 인민해방군 역시 관대한 군대가 아니다.
그것을 직접 몸담고 있어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포수는 결국 고개를 떨궜다.
“사격 개시.”
“······.”
“사격 개시!!!”
“사격 개시!!!!!!”
결국 포수는 양심과 갈등 속에서 선택을 해버렸다. 그 선택이 옳았는지는 알 수 없다.
군인으로선 옳을지라도, 과연 인간으로서도 옳을 것인지.
콰앙!!!
59식 전차의 100mm 강선포가 발사됐다. 착탄의 순간, 굉음이 울리고 충격으로 인한 먼지가 사방으로 흩날리며 시야를 가렸다. 전차병들은 휘날린 먼지가 걷히고, 착탄지점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아무도 없었다.
······.
······.
·········.
“······.”
어두운 홍콩 골목을 한 남자가 걷고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그러나 남자는 다리를 절고 있었다. 다리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온 몸이 이상하다.
한쪽 팔 역시 힘없이 흔들리고 있는 게, 딱 봐도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그저 몸에 붙어서 덜렁거리고 있는 것 같다. 잘리지만 않았을 뿐이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차라리 없느니만 못할 것이다. 없으면 무게라도 줄어들지만,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팔이 덜렁거리고 있으니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다.
그 밖에도 남자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지만 그를 가까이서 본 사람이라면 한쪽 눈이 멀겋게 변하여 초점이 없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그는 외팔이이며, 절름발이이며, 애꾸눈이다. 그야말로 병신이었다.
그리고 이런 몸으로 홍콩 뒷골목을 걸어 다니고 있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그를 노리는 무뢰배 역시 순식간에 나타났다. 수는 다섯? 병신 하나를 조지기에는 충분하고도 남는 인원이다. 무뢰배 중 하나가 물었다.
“여어, 그런 몸으로 어딜 그리 바삐 가시나?? 장애인 협회에 등록이라도 하러 가시나? 아님 무료배식??”
“이 근처 구세군이 세운 학교에서 무료배식을 한다던데, 캬하하!!”
“······.”
남자는 고개를 들어 무뢰배들을 쳐다보았다. 확실히 그가 구세군이 세운 학교에 가고 있는 것은 맞다. 이 구룡성채에서 학교는 오직 구세군이 세운 그 학교밖에 없다.
그 외에는 구룡성채 내에서 의무교육이 제공되지 않고, 교육이 제공되지 않는 것처럼 구룡성채의 대부분은 암흑이었다. 단순히 햇빛이 들지 않아서 암흑이 아니다.
사기, 매춘, 강간, 살인, 강도, 폭행. 하루에도 수도 없이 이 구룡성채 곳곳에서 범죄가 이루어진다. 이곳은 마굴이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마굴.
그런 구룡성채의 뒷골목을 장애가 있는 몸으로 혼자 걷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도 왠지 비싸 보이는 선글라스까지 끼고서. 그러니 무뢰배들이 꼬이지 않을 수 없다.
범죄가 곧 생활인 이곳에서 장애인 한 명이 번지르르한 선글라스를 끼고 혼자 다리를 절며 걸어가고 있다는 것은 나 잡아줍쇼 하는 것을 의미했다.
범죄자들에게 그것은 발가벗고 돌아다니는 미녀보다 더욱 매력적이다.
아니, 미녀 쪽이 더 매력적일까?? 미녀는 강간하고 매음굴에 팔아넘기면 꾸준히 수입을 얻을 수도 있으니.
만약 그런 상황이 일어나면 어느 쪽이 더 이득일까, 하며 무뢰배 중 하나는 속으로 상상하며 키득거렸다. 그들에게 있어 범죄는 운명이다. 인생이다. 생활방식이다.
이 어두운 구룡성채 안에서 태어나서 태어날 때부터 범죄에 노출되고 익숙한 그들은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범죄를 저지르는 법을 배웠다. 그것은 본능이다. 즐거움이다.
그때 절름발이 남자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비켜라.”
“어??”
“??”
무뢰배들은 어리둥절해졌다. 눈 앞의 남자가 지금 ‘비켜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건 무슨 어이없는 상황인가?? 장애인 남자가 빌어도 모자랄 판에 비켜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 자는 정신병자인가?? 무사히 지나갈 수 있게 빌어도 모자랄 판에 ‘비켜라’고??
무뢰배들은 웃기 시작했다.
“푸흡!”
“푸흐흡!!!”
“캬하하하하하!!”
무뢰배 생활을 하면서 이렇게 웃긴 것은 처음이었다. 이토록 웃어본 적이 얼마만일까. 처음 여자를 강간했을 때? 강도짓을 하고 그 돈으로 배를 채웠을 때??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암흑처럼 어두운 구룡성채 내에선 웃음도 사치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뢰배 중 하나가 말했다.
“아아, 감사하지. 이처럼 웃어본 것은 처음이다. 정말 얼마 만에 웃어보는지 모르겠군. 대가로 너에게 원하는 죽음을 선사해주지. 총? 칼? 어떤 것을 원하나? 아님 맨 주먹??”
“······.”
절름발이 남자는 가만히 있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주먹으로 하지.”
“그래? 맞아죽고 싶은가? 히힛!!”
“주먹이 좋지. 물론 맞아죽는 건 네놈들이지만 말이다!!!”
유일하게 움직일 수 있는 오른손으로, 남자는 무뢰배 중 하나의 턱을 강타했다.
콰앙!!!
“컥!!”
무뢰배는 그 즉시 눈을 뒤집으며 즉사했다. 남자의 주먹에 담긴 힘이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턱을 부수고, 이를 박살내고, 부서진 이가 입천장에 꽂힐 정도로 심하게 강타했다.
하지만 남자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마찬가지의 정권으로 다른 무뢰배 하나의 가슴을 강타했다.
무쇠 같은 주먹이 심장을 보호하는 흉골을 부수고 단번에 심장마저 파열시켜버렸다.
“커헉!!”
무뢰배는 단번에 가슴을 움켜쥐고 토혈을 하더니 죽어버렸다.
순식간에 두 사람이 죽어버리자 남은 세 명은 잠시 멍하니 있더니 이내 달려들어 버렸다.
“이 개자식이!!!”
“무슨 짓을 한 거야!!!”
콰콰쾅!!!
그러나 남자는 단 세 번의 주먹질로 남은 세 명을 모두 죽여 버렸다. 남자에게는 이들 정도의 인간이면 두 번의 주먹질도 필요 없다. 1인당 단 한 번의 주먹이면 된다.
물론 이들은 인간이 아니지만.
저벅, 저벅, 저벅.
남자는 다시 다리를 절며 걷기 시작했다. 인간쓰레기들을 상대한 덕분에 어쩌면 약속에 늦을지도 모른다. 남자는 원륭이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원륭이었다.
- 작가의말
이번화에 등장하는 왕유림은 실존인물로, 천안문사태때 시민들을 짓밟으려는 탱크를 혼자 몸으로 막은 인물입니다. 그래서 속칭 탱크맨이라고 불리우지요.
압제에 저항한 상징적 인물로 타임지가 선정한 20세기의 인물 100명에도 들어갔는데, 왕유림이라는 이름은 가명이고 실제론 다른 이름이 있다던가, 살아서 대만으로 망명했다던가, 죽었다던가, 감옥에 갇혀있다던가, 모습을 감추고 중국에서 잘 살아있다던가 하는 썰이 끊이지 않습니다.
본작에서는 그런 탱크맨이 실제 역사와는 조금 달리, 탱크 뿐만이 아니라 파천황이라는 공안 무림맹의 최고수를 상대로 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저항한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본작에서도 탱크맨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모릅니다. 아무튼 계속해서 읽어주시는 독자분들에게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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