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최종화)
성환을 바라보는 여자아이와, 승도와, '누군가'.
성환이 말한다.
"이제 열차가 멈출 때까지 7분 뿐이야. 다시 시간 계산해서 우리가 있는 위치를 알아내려면 7분도 넘게 걸릴 거라구."
여자아이가 걱정스럽다.
"그럼 . . . 어떻게 해야돼?"
승도는 말없이 어떻게든 해결방법을 찾으려 골똘히 생각 중이지만 답이 없다.
이때 ‘누군가’.
"11시 40분, 44분. 이렇게 두 번이 마지막 기회다."
성환과 여자아이와 승도가 '누군가'에게 얼굴을 돌린다.
'누군가'의 목소리는 이제 그저 차분하다.
"40분, 44분이다. 시간이 읍따. 빨리 나갈 준비해라."
승도가 '누군가'의 도움에 놀란다.
"정 . . . 정말이야?"
‘누군가’가 답했다.
"돌아가라. 승도야, 니는, 돌아가야 된다."
사건은 다시 급박하게 진행된다.
열차의 출입문 앞에 서는 4명.
승도가 성환에게.
"누가 먼저 갈까?"
성환은 장유유서.
"아저씨가 먼저 나가세요."
이 둘에게 여자아이.
"11시 40분까지! 이제 1분 남았어요!"
마주보는 성환과 승도 사이의 정적.
승도가 성환에게, 마지막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또 무슨 일이 생기라구요."
승도가 이번에는 '누군가'를 바라본다.
여자아이는 바쁘다.
"카운트! 카운트! 20초 남았어요!!"
승도가 '누군가'에게.
"넌 계속 여기 있을거니?"
승도를 바라보는 ‘누군가’가 미소짓는다.
"꼭 행복해야된다. 내가 보고 있을 테니까."
여자아이.
"10! 9! 8! 7!"
승도가 문의 뒤에서 조금 떨어져 뛰어나갈 준비를 한다.
"6! 5! 4!"
승도가 출입문을 향해 뛰어나간다.
'누군가'에게 외친다.
"꼭 다시 찾으러 올게!"
출입문으로 뛰어나가는 승도의 모습이 사라진다.
91.
2호선 어느 역의 열차 플랫폼이다.
막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이 서둘러 역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다.
막 역을 떠나려는 열차의 닫혀진 문에서 갑자기 승도가 튀어나오며 역바닥을 구른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떠나가는 열차를 바라보는 승도.
주변의 사람들이 승도를 신기한 듯 쳐다본다.
92.
현재시각 저녁 11시 42분.
이제는 열차 안의 사람들도 별로 없다.
여자아이가 다시 시간을 잡는다.
"이제 2분 남았어!!"
마주보는 성환과 여자아이.
여자아이가 성환에게.
"이제는 더 이상 이유도 없이 만날 일 . . . 없겠다 . . . 그지?"
성환은 말없이 여자아이를 쳐다만 본다.
여자아이가 성환에게 말했다.
"옛날 아저씨가 웃는 모습 . . . 보기 좋았어."
여자아이가 쑥스럽게 미소를 보낸다.
지켜보던 ‘누군가’가 시간을 확인한다.
"1분 남았다. 빨리 나갈 준비해라!!"
문앞에 서서 뛰쳐나갈 준비를 하는 성환.
갑자기 무언가 생각났는지 다급하게 '누군가'에게 질문을 던진다.
"아까 말한 '또 다른 윤'은 누구야!"
'누군가'의 표정이 굳어진다.
여자아이는 다시 급하다.
"20초 남았어!!"
'누군가'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성환의 얼굴만 바라본다.
그러다 멈칫하며 성환의 어깨 너머 다음칸의 멀리를 바라본다.
여자아이 계속.
"10초 남았어!!"
성환이 '누군가'가 바라보는 곳으로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 성환의 여자친구가 서있다.
성환을 바라보는 멍한 표정의 여자친구의 '윤'의 얼굴이,
열차의 '덜컹' 소리와 함께 점점 크게 성환의 눈동자에 다가온다.
여자아이 카운트!
"9! 8! 7!"
성환은 여자친구의 윤에게 다가가려 하지만,
이제 시간이 없다.
여자아이 라스트 카운트!
"6! 5! 4!"
이빨을 깨물며 성환은 여자친구의 윤을 뿌리친 채 출입문을 향해 뛰어나간다.
사라져가는 성환을 바라보는 여자아이의 얼굴.
그 아쉬운 눈망울의 잔상이 묘한 여운을 남기며.
93.
또 다른 2호선 열차역의 플랫폼.
막 열차에서 튀어나온 성환이 바닥을 구르다 자세를 잡는다.
탈출한 열차가 빠른 속도로 역을 떠나가고 있다.
숨을 고른다.
무언가 이상하다.
주위를 둘러본다.
이번 역의 플랫폼에 아무도 없다.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시선을 느낀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여자친구의 윤이 성환을 바라보며 서있다.
떨리는 마음으로, 아련한 눈동자로 여자친구를 향해 걸어가는 성환.
여자친구를 바라보는 성환의 눈이 몹시도 떨리고 있다.
성환이 힘들게 입을 열어 말을 건다.
"너도 후회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 넌 . . . 끝까지 바보로구나."
여자친구는 멍한 표정으로 말없이 성환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다.
성환이 조금 울먹인다.
"너 . . . 작년에 . . . 내가 무슨 선물 샀는지 . . . 안 물었지 . . . 결국은 못줬잖아 . . . 그날도 . . . 나 주머니에 . . . 넣고 있었거든 . . . 너 . . . 크리스마스에 눈 내리는 거 보고싶다고 해서 . . ."
성환을 바라보는 여자친구의 윤의 표정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다.
성환은 어색하게 눈물을 조금 닦는다.
"잘 가. 너도 이런 곳에 있지말고 . . . 주인에게 돌아가 . . . 내 곁에 있어줬던 거 . . . 고마웠어 . . ."
다시 흐르는 정적.
성환과 여자친구의 시선의 교차.
여자친구는 이제 성환에게 등을 돌린 채 멀어지기 시작한다.
멀어져가는 여자친구의 기억을 바라보는 성환의 눈앞에 눈송이 하나가 떨어져 내린다.
하나 . . . 둘 . . .
곧이어 새하얀 함박눈이 지하철 역안의 플랫폼에 내린다.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보는 성환.
그 곳에 보이는 것은 지하철역의 천장이 아닌,
별이 빛나는 겨울하늘이다.
"이봐요!! 거기 뭐하세요!!"
성환이 소리나는 곳으로 고개 돌린다.
플랫폼의 저 멀리에서 경비원이 호각을 부르며 성환에게 밖으로 나오라고 손짓하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는 성환.
여자친구의 기억도, 눈도, 겨울하늘도 사라졌다.
이곳은 막차 떠난 지하철 2호선역.
멍해진 성환의 얼굴과 함께,
[내가 그 날 겪은 일이 무엇이었는지 . . . 나는 지금도 알 수가 없습니다.]
94.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이브의 즐거움의 정점 뒤, 이제는 한산해진 크리스마스 아침의 거리.
그 거리의 모습을 보다, 땅속 지하철 역으로 내려간다.
지하철 2호선.
그 역의 풍경들이 흐른다.
[그해의 12월 25일. 나는 그 아이를 마지막으로 만났습니다.]
95.
어제와 다름없이 열차칸 안에 서있는 성환.
이어폰에서 새어나오는 음악이 들린다.
랩이다.
"Who is it? Who is it? For what the hell are you calling me? Who is it? Who is it? For what the hell . . ."
성환의 옆에 누군가 다가와 선다.
이어폰을 벗으며 음악을 끄는 [여자아이].
둘의 사이에 말이 없다.
성환이 엷게 미소를 지으며 여자아이에게 묻는다.
"여기에도 있니? 또 다른 윤들이?"
여자아이는 성환을 한 번 바라보았다가 열차 안을 주욱 훑어본다.
"있어. 이 세상 사람 누구나 자신만의 윤을 남겨놓으니까."
안경쓴 엘리트 회사원이 열심히 책을 보고 있는 초등학생의 옆에 앉아있다.
둘의 얼굴이 묘하게 닮았다.
"어떤 이들은 공부 잘 한다며 칭찬 받으며 살던 초등학교 시절에 갇혀있고 . . ."
빵모자 쓴 노인의 옆에는, 노인의 시선을 따라 함께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옛날 교복입은 중학생 한 명이 앉아있다.
둘의 인상이 묘하게 닮았다.
"또 어떤 이들은 마음껏 꿈꾸던 사춘기 시절에 갇혀살아.
윤은 누군가의 인생 중에서 가장 중요했던 순간,
슬펐든 기뻤든 바로 그 순간에 갇혀버린 당신의 망령이야."
성환이 물었다.
"그럼 너는 어느 순간에 갇혀있는 윤이니?
너는 왜 나와 만나게 된 거니?"
잠시 생각에 빠진 여자아이의 표정이 잠시나마 재밌다, 를 보여준 후 말했다.
"어제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어 . . ."
여자아이가 엷은 미소를 띄며 고개를 돌려 성환을 바라본다.
"나는 어느 곳에도 갇혀있지 않아.
아니, 나는 다시 보러 온거야.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순간을 . . ."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성환이 여자아이에게 다시 고개를 돌리면,
여자아이의 모습은 사라져 있다.
96.
언제나 처럼 지하철을 타고 회사로 출근하는 승도.
이리저리 일자리를 구하러 바쁜 성환.
옥탑방을 향해 혼자 골목길을 걸어올라가는 성환.
하루의 일을 끝내고 또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친 승도.
겨울이 가고 돌아온 또 다른 봄의 풍경.
집에 오는 길의 문구점에서 무언가를 보는 승도.
가게에 들어갔다 나온 승도의 손에 들린 건 포스터 칼라 세트와 붓이다.
다리 위에 서서 한강에 6mm 테입을 던져버리는 성환.
승도 가족의 단란한 모습.
두 남매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승도.
두 남매가 보는 앞에서 승도가 그리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만화 캐릭터>,
'몽글이'다.
막차에서 가장 늦게 내리는 승도가 여기저기 눈치를 살피다,
문구점에서 산 포스터 칼라 세트와 붓을 객실 안의 자리에 놓고 내린다.
잠시뒤, 까까머리의 어린 승도가 다가와 포스터 칼라 세트와 붓을 집어간다.
어둠 속의 2호선 지하철로.
어린 승도가 붓에 포스터 칼라를 발라 철도의 벽에 색칠을 시작한다.
자신의 방문 앞에 쌓인 우편물들 중 "00 프로덕션"에서 온 봉투를 집어드는 성환.
떨리는 손으로 봉투를 열자 면접시험을 보러 오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2월의 어느날, 성환의 졸업식이다.
여기저기 꽃다발을 받으며 즐거운 졸업식의 장면 속에,
꽃다발 하나를 든 채 별 재미없다는 듯이 학교문을 나서는 성환.
97.
지하철역으로 내려온 성환은 손에 든 꽃다발이 쑥스러운 듯 쓰레기 통으로 가서 버리려한다.
그러다, 잠시 멈칫, 꽃다발을 버리지 못하고 도착한 열차에 탄다.
98.
좌석 앞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는 성환.
창밖의 풍경은 어둠뿐이다.
이어폰에서 새어나오는 음악이 들린다.
랩이다.
"Who is it? Who is it? For what the hell are you calling me? Who is it? Who is it? For what the hell . . ."
성환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다.
자신과 조금 떨어진 곳에 교복입은 [여자아이]가 같은 창밖을 보며 서있다.
여자아이는 막 이어폰을 꺼내 자신의 귀에 꽂는다.
한 손에는 방금 막 졸업식을 마치고 나온 듯 꽃다발 하나가 들려있다.
마지막으로 나눴던 [여자아이]의 대사가 들린다.
"나는 어느 곳에도 갇혀있지 않아.
아니, 나는 다시 보러 온거야.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순간을 . . ."
성환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돌려 다시 창밖을 바라본다.
[내가 그 아이의 마지막 말을 이해하게 된 건 또 조금의 시간이 더 흐른 뒤 였습니다.]
[여기 지금 일상을 바라보는 내가 있고, 나를 바라보는 과거의 윤이 있으니 . . .]
[또 어딘가에는 나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의 윤 또한 있다는 걸 . . .]
열차에 서 있는 성환과 교복입은 [여자아이],
각자의 꽃다발을 손에 들고 창밖의 지하철로 속 어둠을 바라보는 그 둘의 뒷모습과 함께.
[당신도 언젠가는 다시 만나게 될 지 모릅니다.]
[그 옛날 당신이 보았던 . . . 햇빛 찬란했던 그 숲속길을 . . .]
열차의 깜깜한 창문 너머로 갑자기 환한 빛이 들어오더니,
햇살이 새어드는 초록색 숲길이 스친다.
[. . . 나는 지금 보고있습니다.]
열차 안의 사람들이 모두 놀라며 창을 향해 모여든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놀란 [여자아이]의 얼굴.
그 아이를 바라보는 성환의 미소 띈 얼굴.
99.
방금 막 초록색 숲길을 향해 지하철 열차가 사라지려 한다.
그 환한 숲길이 시작되는 곳은 분명히 지하철 2호선의 지하철로다.
그 철로의 한켠에 붓을 들고 서서,
자신이 그린 숲길의 그림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는 까까머리 '누군가',
어린 승도가 서있다.
[IN MEMORY of JEJU,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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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총수]님의 강평이 있겠습니다."
. . .
"이 '기억'들이 . . . 지구로 돌아온 '거인'들이 깨워낸 그 '고스트'들하고 같은 건가?"
"맞습니다, [총수]님. 그 '고스트'들과 동류라고 저희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 . . 이미 '고스트'들은 '거인'들의 귀환을 여기저기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던 게로군."
"그 부분에 관해서는 . . . 아직 판단을 유보 중입니다."
"아니면 . . . 살아가는 재미조차 잃어버린 인류가 . . . 스스로 누구인지도 의미가 빛이 바래졌을 때 . . . 돌아온 창조주가 가장 사람다웠던 '기억'들을 거두어 다시 지구로 돌려보냈을지도 . . ."
"하지만 그 만남들이 너무 처참해져 버렸습니다. 그 부분과 관련해서는 . . . '거인'들의 모종의 '조작'이 있었을 거라 추측합니다."
. . .
"그래도 오늘 본 '기억'들 만큼은 . . . 서로에게 찾아준 의미 그대로 . . . 남아있으면 좋겠군."
[윤 끝]
Mysti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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