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
제주도.
박철의 도움으로 전투복을 입은 신기는 심판의 검을 왼손에 꼭 쥐고 소식을 기다렸다. 심한 상처가 아니었다면 감각을 넓혀 저들의 위치를 확인하련만, 초월자들이 신기의 접근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약해졌다.
'어떻게든 둘을 죽이고 D도 처리해야 한다. 엘프 여왕까지 처리하면 모든 구멍이 봉합되고 두 세상을 구하는 것이 된다.'
타이탄은 두 눈과 가슴을 동시에 공격하면 쉽게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데빌은 도드라진 약점이 없어 힘으로 눌러야 한다.
"백두산에서 셋이 발견되었습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박철과 제이크 그리고 박영광은 전선을 지휘해야 하기에 신기를 따라갈 수 없다. 최영웅과 가가와가 신기와 함께 출발했다. 설마가 자폭한 반동이 서서히 사라지며 간단한 얼음 마법부터 사용할 수 있게 변했다.
몰래 접근하기 위해 헬기는 꽤 먼 거리에서 셋을 내려놓았다. 셋은 무전을 통해 효천과 두 초월자의 위치를 지속하여 확인하며 빠른 속도로 움직였다.
"가가와, 기력탄 두 개를 정확히 날릴 수 있어?"
"하나밖에 못 날려."
"영웅 형은?"
"나는 기력은 못 날리고, 대신 망치에 기력을 담아 던질 수 있어. 그러나 정확하게라면 역시 하나밖에 날릴 수 없어."
"그럼 이렇게 하자. 타이탄이 우리와 마주 서있잖아. 그때 영웅 형이 왼쪽 눈을 공격하고 가가와가 오른쪽 눈을 공격하는 거야. 왼쪽 오른쪽은 우리를 기준으로 해. 타이탄 기준이 아니고. 무슨 말인지 확실히 알겠지?"
가가와와 최영웅은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공격이 동시에 적중해야 함을 거듭 강조한 신기는 효천과 약속한 장소에 매복한 후, 효천에게 신호를 보냈다. 효천이 곧 두 각성자를 유인하여 신기가 매복한 곳으로 달렸다.
효천이 가까이 다가왔고 타이탄과 데빌이 효천을 바짝 뒤쫓았다. 효천만 죽이면 인류는 괴물에 대항할 힘을 대부분 잃는다. 바로 힘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각성자들이 스킬을 서서히 잃어갈 것이다. 스킬이 사라진 각성자는 그저 힘센 인간에 불과하다.
심판의 검에 기력이 아롱아롱 맺혔다. 기력이 형태를 잡자 최영웅과 가가와는 데빌보다 키가 훨씬 더 큰 타이탄의 두 눈을 공격했다. 신기 역시 짜낸 기력을 타이탄의 가슴을 향해 던졌다.
효천의 잡힐듯 말듯 하는 연기에 모든 정신을 빼앗긴 타이탄은 셋의 공격을 너무 늦게 감지했다. 셋의 힘이 강하지 않아 죽음에 이르지 않았지만, 타이탄은 바닥에 쓰러져서 오작동을 일으켰다. 체내에서 작은 로봇들이 기어나왔지만,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성거리기만 했다.
도망치기만 하던 효천이 갑자기 몸집을 키웠다. 거의 베히모스 정도의 크기로 몸집을 키운 효천은 데빌을 팔 하나를 물고 거칠게 흔들었다. 신기는 순식간에 판단을 내리고 최영웅과 가가와에게 명령했다.
"가서 타이탄을 공격해."
데빌은 효천의 뒤를 쫓으면서도 사람을 죽이는 걸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사람이 모인 곳을 지날 때마다 광역 공격을 펼쳤다. 그래서 지금 힘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 효천의 이빨을 털어내지 못했다.
최영웅과 가가와는 퀭한 눈에 억지로 힘을 주며 타이탄에게 달려갔다. 타이탄의 얼굴을 밟고 선 둘은 주먹과 망치로 타이탄의 눈을 계속 내리쳤다. 신기 역시 타이탄의 가슴에 올라가 심판의 검을 꽂아넣었다.
타이탄의 표면에서 흐르는 강전류가 셋을 연신 감전시켰지만, 셋 모두 의지로 버텨냈다. 피해가 누적되다가 한계치를 넘자 타이탄이 작동을 멈췄다. 타이탄의 몸에서 기어나온 작은 로봇들도 타이탄이 죽자 움직임이 사라졌다.
"효천이, 놈을 쓰러뜨려."
효천이 강한 힘으로 데빌을 바닥에 쓰러뜨렸다. 데빌의 이마에 난 뿔 하나가 유난히 붉게 변하더니, 불줄기 하나를 신기에게 토해냈다.
"가서 공격해. 날 상관 말고."
효천이 데빌의 팔에 박은 이빨로 적대적인 마나를 체내에 계속 주입했다. 기력이 남지 않은 가가와와 최영웅은 망치 하나씩 사이좋게 나눠들고 데빌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망치로부터 강한 반탄력이 몰려왔지만, 둘은 생사도 도외시하고 데빌의 머리를 때리는 데 집중했다.
신기는 머리를 다리 사이에 넣고 왼팔로 감쌌다. 심판의 검을 품에 꼭 안고 데빌의 불길을 버텨냈다. 기력은 회복되는대로 재생 능력이 끌어다 써서 모일 겨를도 없다. 데빌은 자신만 남은 걸 알아차린 듯 필사의 힘을 다해 신기를 죽이려 했고, 신기는 셋이 데빌을 해치우기를 기다리며 그저 버티기만 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치유 각성자를 포함한 특별팀이 일행을 도우러 도착했다. 그러나 치유 각성자는 데빌의 불길 때문에 신기에게 접근할 수 없어 아무 도움도 되지 못했다. 전투 각성자들은 신기를 돕는 걸 포기하고 데빌을 공격하는데 전념했다.
신기가 돌아온 지 24시간 정도 되는 때에 데빌이 죽었다. 데빌은 끝까지 자신을 공격하는 각성자들을 무시하고 신기만 공격했다. 데빌이 죽은 후 신기를 치료하려고 몸에 손을 댄 치유 각성자가 화상을 입을 정도였다.
"지체할 시간이 없다. 빨리 비행기를 띄워라. D가 있는 곳으로 가자."
아프리카와 아이슬란드를 제외한 땅이 모두 인간의 영역이 되었다. 그러나 법칙이 순식간에 바뀌는 게 아니어서 괴물의 땅에서는 전화도 무전도 터지지 않는다. 인공 위성도 모조리 추락했지만, 다행스럽게도 비행기는 하늘을 날 수 있다. 신기와 특별팀 그리고 치유 각성자들을 실은 비행기가 아이슬란드를 향해 출발했다.
"아우, 살아있는 게 참 용해."
팔 하나 사라졌고 등에 커다란 구멍이 하나 있다. 데빌의 불에 겉은 물론 속까지 바삭하게 익었고 숨도 쉬지 못했다. 그런데 신기는 여전히 말을 하고 몸을 움직일 수 있다.
"법칙을 초월했거든."
떨어진 팔에서 느껴지는 환각통, 등에 난 구멍에서 오는 통증, 몸 전체의 화상으로부터 오는 작열통이 신기를 괴롭혔다. 그러나 이러한 통증 때문에 사고에 어려움을 느낀다든가 기절한다든가 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후지산에서는 기절하기도 했었는데 이젠 익숙해졌는지 늘 달고 다니던 고질병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놈들을 처리할 방법이 있어?"
"상황을 봐가면서 처리해야지. 차분히 생각하고 결정할 거야."
급하게 출발하느라 기름이 부족해 중간에 급유기로 기름을 한 번 보충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전부 붉고 검고 푸른 안개로 가득 덮인 풍경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인류가 살기 적합한 환경으로 바뀔 것이다. 신기는 살아남은 인류가 1억도 되지 않는 걸 느끼자 마음이 아팠다.
'내가 실패해서 신에게 소원을 빌지 못한다면 지금 남은 사람들이 다시 문명 사회를 세워야 한다. 미리 준비를 해 놓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비행기가 아이슬란드 상공에 도착했다. 이미 초월자가 죽어 인간의 영역으로 된 지역들보다 훨씬 인간에게 적대적이다. 전원 각성자여서 버티고 있지만, 이런 환경에서 모든 실력을 발휘하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
'내게 죽은 자들은 이런 환경에서 나랑 싸웠겠지? 죽은 자들도 억울하겠군. 지은 죄도 없는데 D 때문에 불려와서 나같은 멍청이한테 죽었으니.'
그때 효천이 신기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해왔다. 아이슬란드에서 괴물의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기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콩고로 비행기를 돌리라고 지시했다.
### DUAL SYSTEM ###
콩고.
화산구에서 엘프 여왕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신기는 마음 속으로부터 솟구치는 불안을 억누를 수 없었다.
"D는 이미 떠났다. 그리고 지구와 나의 세상을 연결한 구멍은 내가 봉합했다. 이제 모든 게 끝났다."
다른 일곱 종족은 종족 지도자가 모조리 죽으며 구멍이 저절로 봉합되었다. D가 일방적으로 뚫은 구멍을 초월자들이 건너오면서 '점령'했다. D가 뚫은 구멍은 주인이 없었는데 주인이 생겼고, 그 주인이 죽자 구멍이 자연스럽게 봉합되었다.
"네 종족은 뱀파이어 드래곤에게 넘겨준 모양이군. 내가 힘을 회복하면 구멍을 다시 뚫어 D와 뱀파이어 드래곤을 불러다 죽여버리지."
솔직히 신기의 손에 죽은 초월자들은 불쌍하게 죽은 셈이다. 무관한 자들이 전부 죽고 원흉인 엘프 여왕과 D가 살아있다. 신기는 이대로 끝내면 소원을 이룬다 해도 불공평하다고 여겼다.
"너는 D의 이름을 모르잖아. D를 불러낼 방법이 너에게 없다."
"D랑 너는 무슨 상관이야? 왜 이렇게까지 D를 보호하는 건데?"
"D는 예전에 우리 종족의 지도자였다. 왜 D가 되었는지 나도 잘 모른다."
'운명인가?'
마지막 남은 두 심장 중에서 신기는 드래곤 모습의 심장을 남겼다. 아마 그 심장이 엘프 여왕의 종족 지도자였고, 그래서 엘프 여왕이 D를 그렇게 보호했을 것이다. 만약 그때 다른 심장을 남겼다면 또 다른 진행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구멍을 뚫으면 어떻게 되지?"
"두 세상이 결국 하나로 합쳐지고 초월자만 살아남겠지. 내 종족도 네 종족도 모조리 다 죽고 초월자만 살아남을 수 있는 마나가 흘러넘치는 세상이 되겠지. 네가 갖춘 힘으로는 절대 구멍을 봉합할 수 없다."
'진실이군. 정보 단말, 도움을 줘.'
- 엘프 여왕을 처단하면 의뢰가 완성됩니다.
'그렇게 되면 시간을 돌린 후에 D가 여전히 살아있는 게 아닐까?'
- 신에게 D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해달라고 조건을 걸면 됩니다.
신기는 받아들이기 싫었다. D가 단일 초월자가 아니라 수많은 초월자의 집합임은 신기도 이젠 명확히 알고 있다. 원래부터 많은 초월자를 삼켰고, 구멍을 뚫은 후 더 많은 초월자를 삼켰다. 결국 많은 초월자가 공생하는 공생체가 되었다.
그래서 딱히 누구에게 책임을 묻기는 그렇다. 그러나 자신을 다른 세상으로 보내버리고 수많은 음모를 꾸민 장본인이 버젓이 살아있는 걸 좀체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다른 방법이 없어? 난 D를 꼭 죽이고 싶은데. 운명의 대적자라는 게 그런 존재 아니야?'
- 내 지식과 당신의 능력 범위에서는 전혀 방법이 없습니다.
신기의 몸이 간질거리더니 빠르게 회복되었다. 신기는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치료하는 엘프 여왕을 쏘아봤다.
"나도 초월자다. 이 정도로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내 사과의 표시라고 해두지. 그리고 너를 돕고 있는 '여와'의 말을 듣는 게 좋을 거야."
'정보 단말, 네가 예전에 자신을 희생하여 구멍을 막았다는 초월자인가?'
- 그렇습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B급 정보 단말 여와입니다. 원래 C급 이었는데 당신 덕분에 현재 B급이 되었습니다.
'신성을 얻었다고 들었는데 왜 이렇게 되었어?'
- 힘을 버리고 정보만 관리하며 신성을 키우고 있습니다. 당신 덕분에 신성을 한 번 획득했습니다. 무척 보람찬 경험이었습니다.
'내가 구멍을 뚫으면 어떻게 되지?'
- 당신의 힘으로는 봉합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두 세계가 하나로 합쳐지고 마나가 넘치게 됩니다. 그러면 초월자를 제외한 모든 생명체가 말라죽습니다. 전 세계에 당신과 저 SSS급 초월자 효천만 남을 겁니다.
-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신의 의뢰에 실패하게 됩니다. 신이 말한 세상은 당신의 세상뿐 아니라 엘프 여왕의 세상도 포함됩니다.
"제기랄. 시발. 화가 난다아~~~"
신기는 심판의 검으로 엘프 여왕의 목을 잘랐다. 엘프 여왕은 저항도 하지 않고 그대로 죽음을 받아들였다. 인간의 시간으로 수만 년 혹은 수십만 년이 흐르면 엘프 여왕은 다시 부활한다. 그러나 신기는 어차피 신에게 소원을 빌 생각이기에 굳이 '소멸'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 조금 기다리십시오. 신이 강림할 것입니다.
"형, 어떻게 됐어요?"
"원흉은 도망쳤지만, 모든 게 해결되었다. 박철, 너 혹시 소원이 뭐냐?"
"갑자기 물으니까 대답이 궁하네요."
"내 말은 말이야. 만약 괴물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네 소원은 뭐였어?"
"대기업에 입사해서 쭉 한 직장 다니다가 정년퇴직하는 거요."
"제길. 애들이 꿈이 사라졌어. 영웅이 형은?"
"사장 되는 거야. 거창한 거 말고, 직원 십여 명 둔 정비소 사장."
"제이크?"
"래퍼가 되는 게 꿈이었어. 지금 생각해보면 말이야."
"난 축구선수가 꿈이었어. 그런데 소아비만 때문에 어릴 때 운동하기 힘들었어. 청년이 되며 매우 날씬해졌지만, 때는 이미 늦었지."
가가와는 신기가 질문하기도 전에 대답했다.
"난 명문대 갔다가 대기업 가는 게 꿈이었지. 부모님은 대기업 취직을 최고로 아시거든. 효자가 되고 싶었어."
공우진의 꿈은 부모님의 꿈이었다.
"난 친일파 척살. 남북 통일. 일본 멸망."
'형, 그 소원은 이번에 다 이뤘으니까 다음 생에는 다른 꿈을 꿔봐.'
"나는 유리가공사 사장이 꿈이었어. 세계 최고의 유리 가공 및 조각사가 되는 게 내 목표였지. 물론 그럴려면 술을 끊어야 하는데, 난 8살부터 아빠 술을 몰래 훔쳐 마시기 시작했어."
- 신이 떠났습니다. 당신의 소원은 이뤄질 것입니다.
'난 아무말도 안 했는데?'
- 신은 당신의 모든 걸 알고 있습니다.
- 작가의말
중간중간 웃음 폭탄을 심었습니다. 그런데 잘 터지지 않는 폭탄입니다.
Commen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