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계약
아프리카.
"구멍을 뚫는 방법을 알려달라."
"히드라를 먼저 처리해라."
"네가 기어 나온 구멍을 봉인해라. 그리고 나에게 구멍을 뚫는 방법을 알려달라. 그럼 남미에 가서 구멍을 뚫어 히드라를 끄집어내 처리할 것이다. 다음 내가 저쪽 세상에 건너간 후 네가 구멍을 막아라. 내가 저쪽 세상에서 구멍을 뚫으면 네가 건너오고, 나에게 D를 불러내는 방법을 알려달라. 그럼 우리 계약은 완료다."
"네가 저쪽 세상에 가서 히드라를 처리해라. 그러면 내 종족이 너에게 구멍 뚫는 법을 알려줄 것이다. 다음 내가 구멍을 봉인하면 네가 구멍을 뚫고 이 세상으로 돌아와라. 그럼 난 돌아가서 구멍을 봉합하겠다. D를 불러내는 방법은 네가 이 세상에 돌아왔을 때 알려주지."
"내 방법이 더 성공률이 높지 않을까?"
"그건 네 사정이고, 나랑은 상관없다."
"계약을 어기면 어떤 벌을 받는지 참 궁금하군. 내가 여기서 너를 죽이면 어떻게 되지?"
신기의 협박에 엘프 여왕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히드라처럼 원래 세상으로 돌아간다면 힘을 절반 이상 잃는다. 소모하여 단기간에 회복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라, 잃어버린 힘을 회복하는 데 무척 긴 시간이 걸린다. 시간의 흐름에 둔감한 초월자마저 고개를 저을 정도의 긴 시간이다.
"네가 지금 비록 F급까지 격을 억지로 끌어올렸지만, 그래도 계약을 어긴 반동이 작지 않을 것이다."
"너는 부활하지 못할 정도로 소멸할 것이고."
"설마?"
"강신사제의 소멸의 빛을 얻었다. 허신이라고는 하지만, 초월자 따위가 버틸 수 있는 건 아니지."
"강신사제는 거짓되었다고 해도 신성을 얻었다. 너 따위가 소멸의 빛을 사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소멸하여도 부활이 어려울 뿐, 부활하지 못하는 건 아니다."
"그럼 한 번 버텨보든가.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소멸의 빛으로 널 지우겠다. 절대 이룩할 수 없는 업적을 세우면 신성이 생겨나는 거 너도 알고 있지? 그때 짧은 시간 나타나는 신성을 수습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더라고."
"생각할 시간을 달라."
"D하고 맺은 계약 때문에 고민하는 거야?"
만약 엘프 여왕이 인간이었다면 몸속의 적혈구가 한꺼번에 사라지는 기적을 보였을 것이다. 신기는 엘프 여왕으로부터 전해지는 파동으로 매우 놀랐음을 알아챘다.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지만, 큰 파동이 느껴질 정도로 엘프 여왕은 경악했다.
"어떻게? 초월자 사이의 계약은 신성이 보호하는데."
"그런데 감히 이중 계약을 맺어?"
"이중 계약이라도 모두 완성하면 된다. 내가 맺은 두 계약은 전혀 모순되지 않으니까."
"나와 D는 서로 상대의 죽음을 바라는데, 어떻게 둘과의 계약을 모두 완성한다는 거지?"
엘프 여왕은 침묵했고 신기는 기다렸다. 무척 복잡한 계산을 거친 엘프 여왕은 입을 열었다.
"나와 너의 계약은 조건부 계약이다. 네가 다른 초월자들을 전부 소멸하는 것과 내가 너에게 구멍을 뚫는 걸 알려주는 게 계약 성립의 조건이다. 물론 네가 모든 조건을 완수하면 나도 반드시 내 조건을 완수해야 한다. 계약이 성립되면 나는 내 세상으로 돌아가고 너에게 D를 불러내는 방법만 알려주면 된다."
"나와 D가 맺은 계약은, 너를 내 세상으로 데려가는 것이다. 내가 너를 내 세상으로 데려가면 D가 현신하여 구멍을 막는다. 그리고 D는 다시는 구멍을 뚫지 않을 것을 계약으로 약속했다."
신기는 엘프 여왕의 말을 듣고 헛웃음이 나왔다.
"초월자들은 다 D처럼 멍청한가? 너에게도 구멍을 뚫지 말라고 조건을 걸어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A급이고 상대는 D급이다. 공평한 계약을 맺을 수 없지. 그리고 D처럼 멍청한 놈이 이렇게 오래 살아남은 것도 신기하구나. 어떻게 다른 초월자를 다 죽이고 홀로 살아남았는지 나로서는 절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신기는 그제야 D가 왜 그렇게 많은 심장이 있었는지 알아챘다. 그리고 자신이 삼킨 다른 초월자들의 구슬이 사실은 심장 같은 게 아닐까 고민했다. 설마 자신도 D처럼 멍청해지는 게 아닌지 걱정하다가, D는 초월자로서 멍청한 것이지 인간 기준으로는 멍청하지 않다는 생각에 시름을 놓았다.
"그럼 네 계획은 뭐였는데?"
"네가 이중 계약을 어떻게 알아냈는지 솔직히 말해주면, 나도 내 계획을 말해주지."
계약이 성립되었다. 신기는 좀비 드래곤이 알려줬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이해가 안 되네. 좀비 드래곤이 어떻게 알아냈지? 네 답변이 조금 부족한 것 같구나."
더러운 불공정계약. 신기는 속으로 욕을 뱉었다. 신기의 격이 여전히 낮기에 계약은 엘프 여왕에게 유리하다. 엘프 여왕이 신기의 정보에 의문을 품었기에 신기는 계약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것으로 판정 났다.
"D는 힘을 얻으려고 자기 종족을 희생했다고 했어. 그것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그거랑 이거랑 상관없어. 물론 너와 전투기계의 싸움은 종족 없는 초월자의 싸움이라서 모두에게 알려지긴 했지. 그러나 나는 종족이 있단 말이야. 많은 초월자가 힘보다 종족을 선택하는 이유가 이거야. 보호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격을 높여주고 많은 편의를 주는 게 종족이다."
"그럼 나도 모르겠어. 내가 아는 이유가 있다면 계약의 벌을 받도록 하지."
계약 조건을 충족했다. 엘프 여왕은 신기가 확실히 이유를 모름을 깨닫고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내 계획은 이래. 너와 함께 내 세상으로 돌아가는 거야. 그럼 D가 현신해서 이 구멍을 막을 거야. 네가 히드라에게 죽으면 계약은 성립되지 않은 거고, 네가 히드라를 처리하면 난 너에게 구멍을 뚫는 방법을 알려줄 거야. 물론 구멍을 뚫는 방법은 무수히 많고, 난 너에게 가장 어려운 방법을 알려줄 거야. 그렇게 되면 나는 D의 계약과 너와의 계약 모두 완수하는 것이지. 남은 부분은 너와 D의 몫일 뿐이야."
"D가 현신할 수 있다고?"
"격이 무척 떨어질 거야. 초월자가 한 말은 거짓이라도 진실이 되는 힘이 있어. D가 자기 입으로 현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면, 현신하지 않으면 그게 진실이 돼. 현신해서 거짓말을 입증하는 순간 격이 떨어지게 되어 있어."
"그러니까 법칙에 어긋나더라도 그걸 말하고 이루어내면, 새로운 법칙이 생긴다는 뜻이네?"
엘프 여왕은 침묵했다. 초월자가 힘을 얻는 방법을 눈앞의 애송이가 알아내 버렸다. 이 애송이가 D를 처리하고 지구의 초월자가 된다면, 무척 무시무시한 상대가 될 것이 분명하다.
법칙에 알맞지 않은 선언을 하고 그걸 이루는 것으로 초월자는 세상의 법칙을 조금씩 수정한다. 법칙을 완전히 뒤엎는 건 불가능하지만, 초월자 자신에게 조금 더 유리하게 바꿀 수 있다. 그렇게 세상의 법칙을 조금씩 바꾸면서 세상의 법칙과 자신의 법칙을 일치시키면 세상이 영지가 된다.
지금 엘프 여왕을 비롯한 초월자들은 그저 힘으로 법칙을 강제 집행하는 방식으로 영지를 만든다. 모든 초월자를 다 처리하고 엘프 여왕이 해야 할 일이 바로 세상의 법칙과 자신의 법칙을 같게 만드는 일이다. 시간의 흐름이 아닌 사건의 진행으로 기록해야 할 정도로 오래 산 엘프 여왕이 겨우 깨우친 것을 엘프 여왕의 유아기보다 더 짧은 시간을 산 이상한 놈이 깨달아버렸다.
만약 이대로 D가 현신하지 않는다면, 초월자의 현신에는 DPP가 많이 필요하다는 새로운 법칙이 생긴다. 현신하면 DPP가 필요 없다는 법칙이 생기고 D는 격이 떨어지게 된다. 초월자는 세상의 법칙을 주무를 수 있는 권한을 얻은 격 높은 존재다.
'죽은 사람을 어떻게든 살려내면, 부활의 법칙이 생기겠구나. 그러면 제이크도 영웅 형도 다시 살릴 수 있어.'
엘프 여왕에게는 안타깝게도, 신기는 제이크와 최영웅을 살릴 생각에 골몰하다 보니 생각이 이쪽으로 흘러버렸다. 의도치 않게 엘프 여왕의 천분의 일도 살지 못한 신기에게 커다란 진리를 선물한 셈이다.
"내 방식대로 해도 계약이 완성되는 거 아닌가? 어차피 너랑 나랑 함께 저쪽 세상으로 건너간 후 네가 구멍을 막으면 되잖아."
"그건 나도 몰라. 계약의 완성은 우리끼리 정하는 게 아니야. 계약이 맺어지면 신성이 개입하고 판단도 신성이 하는 거야. 그래서 격이 낮은 초월자들은 계약을 잘하려고 하지 않아. 신성이 격이 낮은 계약자에게 유독 엄격하거든."
"하지만 너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어."
"알았어. 그럼 우선 여기부터 봉합할게."
엘프 여왕은 생명의 막을 둘렀다. 생명의 막으로부터 누에고치에서 실이 풀려나오듯, 파란 실이 풀려 나와서 화산 안으로 들어갔다. 꼬박 사흘이 지난 후 엘프 여왕은 생명의 막을 거두었다.
신기는 봉인과 탐지 등 스킬을 이용해 구멍이 완전히 봉합되었음을 확인했다. 신기는 전화하여 박철을 에콰도르의 히드라와 싸우던 화산으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신기가 직접 불러내도 되지만, 재능은 박철이 훨씬 뛰어나다. 신기가 부르면 히드라뿐 아니라 그 수하들도 불러올 가능성이 무척 크다.
"혹시 히드라에게 도망치라고 알려준 게 너였어?"
"아니야."
"여기 오면 멍청해진다고 들었는데, 히드라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멍청하지 않은데?"
"우리 세상에서는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있는 존재들이니까. 난 여기 사는 종족이 우스워. 초월자도 없이 종족을 이룬 주제에, 같은 종족끼리 서로 죽이고 미워할 수 있어. 자유의지라는 이름 아래 방종을 거듭하면서도 종족 체제가 무너지지 않아. 그리고 가끔 이 종족이 머리를 굴리는 걸 보면 초월자 못지않아.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인류가 똑똑한 게 아니라, 너희가 종족을 멍청이로 만들어서가 아닐까? 몇 안 되는 초월자들끼리 힘 싸움만 하다 보니 머리가 굳어버린 거로 생각하지 않아?"
둘은 하늘을 날며 대화했다. 엘프 여왕은 물론 신기마저 하늘을 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이 장면은 위성에 촬영되어 많은 채널과 매체들이 앞다투어 방송했다.
"D가 구멍을 뚫은 게 이번이 두 번째라지?"
신기는 좀비 드래곤의 정보를 확인하는 걸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미 좀비 드래곤의 말을 믿기로 마음먹었지만, 하나라도 더 검증할 소중한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때 우리는 수천 명의 초월자가 있는 세상이었어."
예전에 엘프 여왕의 세상에는 수천 명의 초월자가 있었다. 매일 초월자가 죽었지만, 새롭게 부활하는 초월자도 있고 새롭게 초월자의 반열에 발을 들이는 초월자도 있다. 수천의 종족을 이룬 이들이 경쟁하여 최후의 하나가 남으면 세상의 지배자가 된다. 그리고 그 지배자는 격과 힘이 모두 A급에 어울리는 초월자가 되고, 언젠가 신성을 얻어 더 높은 격을 이룰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인접한 신기의 세상은 저쪽 세상에 흡수된다. D는 그걸 알아차리고 구멍을 뚫었을 수 있다.
"D가 그렇게 똑똑한 것 같지는 않은데."
"본능적으로 알아차렸을 수도 있지. 가까운 세계가 강해지는 걸 알고 구멍을 뚫어 우리를 약화하려 했을 거야. 우리는 그때 매일 많은 힘을 소모했거든. 아마 그래서 이쪽 세상의 마나를 빨아왔을 거야. D는 그것을 알고 구멍을 뚫어 빼앗긴 마나를 다시 찾으려 했을 거고. 구멍을 뚫는다는 게 그렇게 단순한 일은 아니라는 걸 D는 몰랐을 거야. 지혜가 부족한 놈이니 본능으로 결정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
"그럼 이번에는 왜 또 구멍을 뚫었을까?"
"D만 알겠지."
"그럼 첫 번째로 구멍을 뚫었을 때는 어떻게 끝난 거야?"
"당시 지구는 D의 영지였지. 우리에겐 적대적인 환경이었고 D에게는 호의적이었지. 우리는 일부가 희생하여 이쪽 세상에서 구멍을 봉합했어. 그리고 미처 건너가지 못한 자들은 이곳에 남아 무리를 지어 D와 싸웠지. 결국, D의 승리지만 말이야."
엘프 여왕의 표정이나 목소리는 전혀 변함없지만, 신기는 아련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 여와가 남아서 봉합을 지휘했어. 자기 종족을 히드라에게 넘기고 말이야. 초월자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희생이었지. 그 덕분에 여와는 신성을 얻었어. 제우스나 아테네 등이 살아남아 D와 오랜 시간 싸웠다고 들었어. 나름 자기 종족도 만들고 힘을 합쳐서 D에게 대항했는데, 많은 초월자가 모여 있으니 법칙의 충돌이 너무 심해 결국 파탄 났다고 했어."
"다른 세상에서도 서로 소식을 주고받고 그랬나?"
"초반에는 서로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었지. 그러나 D가 종족을 소멸하고 힘을 얻은 후에 이 세상의 법칙이 바뀌었어. D가 지배하는 종족에 호의적이던 법칙이 사라지고 새 법칙이 생긴 거야. 그때부터 소식을 주고받기 힘들었어. 아마 D가 자기 종족을 소멸한 것 역시 세상의 법칙을 바꿔 저항하는 초월자들의 힘을 약화하려 했던 게 아닐까 생각해. 물론 대가리를 굴린 게 아니라 그저 본능적으로 한 행동이겠지. 내가 본 초월자 중에서 가장 멍청한 놈이거든."
- 작가의말
강호정담에 보니 표절 시비가 있군요. 다음 글은 저도 뻔한 글 쓰려고 하는데 조심해야겠습니다.
D를 재조명하는 시간입니다. 무려 세상을 구했습니다. 본의는 아니지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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