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드라의 선택
칠레.
미국이 제공한 수륙공 전천후 헬기는 등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최영웅과 제이크가 조종 기술을 배웠지만, 사실 목적지만 입력하면 웬만해서는 혼자 잘 이동한다. 그래도 가끔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도 있기에 정기적으로 들여다봐야 한다.
신기는 박철과 박영광 그리고 최영웅까지 세 명의 기력 각성자와 맥과 제이크만 데리고 움직였다. 다른 각성자들은 모두 남미의 각 소각장에서 괴물을 지우는 데 열중하고 있다. 지금 신기 일행은 칠레에 새로 등장한 규격 외 괴물을 처리하려고 이동 중이다.
"와이번이라. 날아다니는 괴물이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목이 길고 등에 날개가 다섯 장이 있다. 네 장의 큰 날개는 비행하는 데 사용하고, 꼬리에 난 하나의 작은 날개는 방향을 바꾸는 데 사용한다. 입으로 푸른 불을 내 뿜는데, 뜨겁지 않지만 생명체를 태우는 속도가 무척 빠르다. 물론 각성자들은 저항력 덕분에 쉽게 타죽지 않았다.
"선루프 오픈."
헬기의 천장이 열리자 신기는 상체를 밖으로 드러냈다. 시속 300킬로미터에 가깝게 움직이는 헬기에서 상체를 밖으로 드러내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헬기에 탑승한 누구도 신기를 걱정하지 않았다.
"죽음의 빛."
여섯 가지 마법을 합쳐서 만든 궁극기다. 가까운 화산을 향해 열심히 날갯짓하던 와이번이 그대로 추락했다. 박철이 입을 열 필요도 없이, 신기는 와이번이 작고했음을 알았다.
"대박, 구슬이 있어. 빨리 내려가자."
길이가 30미터나 되는 와이번의 시체는 꽤 멋있었다. 그러나 저 총알도 박히지 않는 튼튼한 가죽이 며칠만 지나면 휴지처럼 쉽게 찢어진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박제할 수 있으면 참 좋으련만, 모두가 안타깝게 생각했다. 신기는 시체에 다가가서 손가락으로 가죽을 쭉 쨌다. 구슬을 염력으로 끄집어낸 신기는, 잠깐 살피고 바로 맥에게 넘겼다.
"파이어 드래곤 마법을 강화해 줄 거야. 빨리 먹어."
구슬을 먹고 잠든 맥을 최영웅이 업었다. 헬기에 오른 후 신기는 예측 스킬을 사용했다.
"하루 안에는 고등급 괴물이 안 나와. 휴식할 곳을 찾자."
어느 화산에서 괴물이 나오는지 알 수 없지만, 괴물이 나오는 시간은 대략 알아낼 수 있다. 24시간 동안 강한 괴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한 신기는 가까운 도시를 검색해 이동했다. 헬기로 이동하며 신기는 콜롬비아 통령에게 전화했다.
"나 신긴데, 이 도시로 불고기랑 스시 좀 배달해 줘."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어버린 신기는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겼다. 같은 이름의 스킬이라도 각성자마다 다른 효과를 보인다. 스킬 자체는 수십 개밖에 안 되는데, 그 용도는 무궁무진하다. 그리고 스킬과 스킬을 결합하면 예상외의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시간만 나면 스킬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남미 다음은 어디야?"
"북미."
"왜?"
"지멋대로 마지막이니 뭐니 했잖아. 미국을 거짓말쟁이로 만들 거야."
모든 일이 다 끝난 후 D를 소멸하면 각성자들은 모두 힘을 잃게 된다. 현재 최강인 미국이 각성자를 모으려고 많은 자원을 소진한다면, D를 소멸한 후 국력이 급락할 것이다. 신기는 욕심이 많은 나라가 오히려 손해를 보게 할 계획을 세웠다.
"북미 다음에는 아시아와 러시아, 다음 유럽, 마지막에 중동이야."
중동으로부터 석유 채굴권을 넉넉히 얻어낼 생각이다. 아시아의 석유왕이 되어 휘발유 가격을 아주 싸게 내릴 계획을 꾸미고 있다. 아버지가 기름값 때문에 고통받았던 시간을 보상해드리고 싶다.
"그런데 초월자랑 싸우는 거 꼭 생중계해야겠어?"
"내가 잠든 사이 더러운 소문이 퍼졌더라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똑똑히 보여줘서 주둥이를 싹 다물게 할 거야."
시간을 되돌린 후 지금 30에 가까워가는 나이인데도 신기는 아직 총각이다. 생물학적 총각인데 로리왕 같은 더러운 별명을 얻다니 억울해 못 견딜 지경이다. 신기는 다리 길고 허리 잘록하고 어깨 넓고 가슴 크고 얼굴이 이쁜 여자가 이상형이다. 어린아이에게 변태적인 욕구를 한번도 느껴본 적이 없다.
며칠 휴식하다가 삼두사가 출현하여 한 번 더 잡았다. 게으름을 피운 남미 각성자들은 박영광이 PT 체조를 밤새 시켰다. 체력적으로 잘 지치지 않는 각성자들이지만, 박영광은 교묘하게 희망 고문으로 이들의 정신을 괴롭혔다. 마지막 숫자를 외치거나 외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인데, 어떻게든 꼭 틀리는 사람이 한둘이 나왔다. 연대책임이기에, 모든 각성자가 밤을 새워야 했다.
그리고 모든 괴물이 에콰도르의 코토팍시 화산으로 몰려가자, 신기는 바로 미국으로 이동했다. 한 달 동안 미국의 화산을 봉인하며 북미 대륙을 '해방'할 준비를 시작했다.
### DUAL SYSTEM ###
에콰도르.
해골용과 시체용 그리고 뱀파이어 드래곤과 엘프 여왕과는 달리, 두 초월자는 함께 나왔다. 머리가 아홉 개인 히드라와 온몸이 독인 포이즌 드래곤이다. 히드라의 머리는 리자드맨과 비슷하고 포이즌 드래곤은 말만 드래곤이지 악어를 수백 배 확대한 모습이다. 눈이 여섯 개여서 좀 기괴하지만, 체형은 지구의 악어를 닮았다.
신기가 포이즌 드래곤을 상대하고 남은 사람들이 히드라를 상대했다. 먼저 김태풍과 하현주가 천둥바람으로 히드라를 공격했다. 보기에는 무척 좋지만, 사실상 별 피해를 주지 못했다. 심지어 괴물의 주의력도 끌지 못했다.
공우진의 불바다와 쥐불놀이의 합체기 '쥐불바다'는 그나마 괴물을 귀찮게 했다. 제이크의 흙 거인은 가까이 다가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멀리서 빙빙 돌며 흙덩이를 가끔 던졌다. 맥의 엘리멘탈 드래곤이 그나마 강한 공격을 퍼부었지만, 입은 피해보다 회복되는 속도가 더 빠르다.
최영웅은 불멸의 안개를 두르고 철벽을 펼친 채 히드라의 원거리 공격을 수비했다. 입에서 불타는 도마뱀을 밖으로 뱉어냈는데 공격하면 폭발하는 엄청 성가신 스킬이다. 도마뱀의 폭발을 몸으로 막아낼 사람은 최영웅밖에 없다.
박철이 히드라를 멈출 때마다, 박영광의 소환체가 검으로 발가락을 조금씩 베냈다. 마법사들의 공격과 달리 소환체가 벤 상처는 아무는 게 조금 더뎠다. 이들이 공격에 집중하면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지만, 안전하게 시간을 끌라는 신기의 당부대로 무리한 시도는 하지 않았다.
포이즌 드래곤은 온몸에 찐득거리는 액체가 가득했고, 몸 주변에 보기만 해도 역겨운 안개를 둘렀다. 시체 조종사의 것은 스킬이지만, 포이즌 드래곤의 것은 수많은 독이 서로 반응하며 자연스럽게 생긴 독안개다. 그리고 포이즌 드래곤을 상대하는 신기도 무척 난감했다. 육체는 손상을 입지 않을 자신이 있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옷이 전부 녹아내릴 것이다. 생중계 중에 알몸을 보인다면 변태 가면과 로리왕에 이어 노출왕 같은 별명이 생길지도 모른다.
먼저 기력으로 검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검에 태풍을 두른 다음 최대한 넓게 퍼지도록 했다. 태풍을 앞으로 방출하니 포이즌 드래곤의 독안개가 바람에 밀려 흩어졌다. 태풍이 사라지며 다시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올랐지만, 신기는 그사이에 포이즌 드래곤의 요해를 찾아냈다.
'나에게도 요해가 있을까? 각성자들도 요해가 있을까?'
괴물은 그저 보기만 해도 요해를 알 수 있다. 간파 스킬은 패시브다. 그러나 각성자를 볼 때는 요해가 어디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 물론 포이즌 드래곤은 요해가 어디인지 바로 알 수 없어서 태풍으로 독안개를 날렸다. 그리고 엘프 여왕의 요해도 알아내지 못했다. 뱀파이어 드래곤은 가슴 중앙에 있는 핵을 파괴하면 되는데, 엘프 여왕의 요해는 생명의 막을 거둔 후에도 보이지 않았다.
'계약을 맺은 후 생명의 막을 치웠지. 그래서 요해가 안 보이는 건가? 그렇다면 각성자들도 계약으로 묶인 존재라는 뜻인가? 파티 기능이 사실 계약?'
신기의 격이 낮은 건 힘보다 지혜가 부족해서다. 힘은 종족의 지도자가 되어 A급의 격을 얻은 엘프 여왕도 경계할 정도다. 물론 갖춘 힘의 크기보다는 죽이는 기술이 다양해서 경계한 것이다.
신기는 허공에 아홉 개의 태풍을 소환했다. 검에 두르는 태풍이 아니라 마법으로 소환한 태풍이다. 아홉 태풍은 커다란 흡력을 발휘하여 길이 60미터나 되는 포이즌 드래곤의 몸을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사람으로 치면 배꼽 정도의 위치에 있는 요해가 드러나자, 신기는 기력으로 검을 만들어 날렸다.
대략 30%의 기력을 담은 검은 요해를 가격하여 포이즌 드래곤을 두 동강 냈다. 칼바람 마법으로 구슬이 있는 곳의 가죽을 베어낸 신기는 염력으로 구슬을 뽑아냈다. 극독을 함유한 액체가 잔뜩 묻은 구슬을 조심스럽게 닦은 후 전투복 주머니에 넣었다.
카메라를 향해 밝게 웃으면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린 신기는 히드라에게 다가갔다.
"아홉 머리를 다 베야 해. 하나라도 남으면 남은 머리가 재생해."
히드라의 머리를 벨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각성자는 셋, 신기와 박영광 그리고 맥이다. 맥은 와이번의 구슬을 먹고 파이어 드래곤 마법의 위력이 강해졌다. 덩달아 엘리멘탈 드래곤도 강해졌고, '자폭'을 사용하면 히드라의 머리 하나 정도는 날릴 수 있다.
박영광이 소환한 장군님은 안정적으로 머리 하나 베어낼 수 있고, 박철이 멈춰준다면 둘에서 셋까지 벨 수 있다. 차이는 바로 소환체의 방어력에 있다. 공격을 받으면 역소환되기에, 박철이 멈춰주면 공격할 시간이 늘어 머리를 더 벨 수 있는 것이다.
"박철, 오른쪽 머리 두 개를 멈춰. 맥, 가장 왼쪽 머리를 노려. 영광이 형이 오른쪽 두 개를 맡고, 남은 건 내가 해치울게."
안타깝게 첫 시도는 실패했다. 맥은 머리 하나를 해치웠지만, 신기는 다섯 개만 베어냈고 박영광 역시 머리 하나만 베어냈다. 남은 두 개의 머리 때문에 잘린 머리들이 빠르게 재생했다. 대략 5초 사이에 아홉 머리를 다 베야 한다.
"머리 사이 거리가 너무 멀어서 한꺼번에 벨 수가 없어."
제이크의 말이 정답이다. 적대적인 환경에서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는 히드라는 신기의 공격력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러나 신기 역시 덩치가 무척 커서 멀리 떨어져 있는 히드라의 아홉 머리를 동시에 베어낼 실력이 부족하다. 부지런히 베어도 꾸준히 재생하기에 서로 어쩌지 못했다.
"형, 태풍 아주 크게 만들어서 한 번에 다 없앨 수 없어요?"
박철의 제안은 일견 타당해 보였지만, 신기를 너무 과대평가했다.
"범위가 너무 넓으면 위력이 떨어져. 혹시 머리를 한곳에 모을 수 없을까?"
"저는 멈추라는 명령밖에 해보지 못했는데요."
상대의 덩치가 너무 커서 신기나 박철 혼자서는 머리를 많이 감당하지 못한다. 특히 박철은 단일 상대에게 명령하는 건 꽤 숙달했지만, 여러 대상에게 명령을 내리는 건 미숙하다. 비록 히드라는 한 개체로 치지만, 머리마다 각자의 생각이 확실하기에 아홉을 상대하는 거나 다름없다.
"스킬 명이 명령이 아니고 미끼야. 이 스킬은 강제 명령과 유혹이 함께 있는 거야. 즉 채찍과 당근이 둘 다 있는 거지. 채찍 말고 당근으로 아홉을 모두 유인해 봐."
신기는 이치를 알지만, 안타깝게도 5초 안에 하나하나가 트럭보다 더 큰 히드라의 머리 아홉 개를 베어내야 한다. 혼자서 두 가지 일을 다 해낼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영웅이 형, 날 지켜줘요."
박철의 요청에 최영웅은 물론 제이크 역시 흙 거인을 불러서 박철의 옆에 세웠다. 박철은 정신을 집중하여 미끼 스킬을 사용했다. 상대에게 목줄을 거는 느낌이 아니라, 유혹하는 느낌으로 사용했다. 히드라의 아홉 머리가 동시에 박철을 향해 짓쳐왔다.
신기는 젖먹던 힘까지 다해 빠르고 강하게 히드라의 머리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7개의 머리만 베어냈다. 맥의 엘리멘탈 드래곤은 아까 자폭했기에 당분간 쓸 수 없고, 장군님 역시 머리 하나 베고 역소환 당했다.
"저거 뭐야?"
머리 하나만 남은 히드라가 갑자기 화산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5분 정도 기다려도 히드라가 나올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자, 신기는 전화를 걸었다. 전화음이 울리기 바쁘게 엘프 여왕이 전화를 받았다.
"머리 아홉짜리 괴물이 도망쳤어. 어찌 된 일이야?"
"기분 나쁘니까 괴물이라 부르지 마. 알아보고 전화할게."
2분 정도 지나서 엘프 여왕이 전화했다.
"히드라가 저쪽 세상으로 돌아갔어. 다시 이 세상으로 오려면 다른 종족의 통로를 이용해야 할 거야. 히드라가 도망친 통로를 내가 봉합했어."
전화를 끊은 신기는 화산을 향해 탐구와 봉인 그리고 예측 등 여러 스킬을 사용했다. 결과 엘프 여왕의 말이 진실임을 알아냈다. 얼굴을 보고 대화하면 진실 여부를 더 쉽게 가릴 수 있지만, 전화로 통화하면 상대의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전혀 알아낼 수 없다. 초월자끼리 대화할 때, 계약과 관련된 사항이 아니면 얼마든지 마음먹고 거짓말을 할 수 있다. 신기는 비록 엘프 여왕과 계약을 맺었지만, 완전히 믿지는 않는다.
'계약 완수하려면 저쪽 세상으로 가서 히드라를 꼭 죽여야 하는구나. 계약 조건을 잘못 설정했어. 내가 그때 배신당해 제정신이 아니었어. 나는 왜 자꾸 후회할 짓을 하는 걸까. 나는 힘보다 지혜가 필요하다.'
- 작가의말
신기는 커다란 힘을 얻었지만, 지혜가 부족하고 일반인과 다름없이 감정이 날뜁니다. 물론 시간만 흘러도 나아질 겁니다. 지금은 갓 로또 1등에 당첨된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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