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
제주도.
머릿속에 울리는 소리에 신기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좋은 분위기로 흐르다가 신기가 갑자기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효주도 무척 놀랐다.
'정보 단말?'
- 반갑습니다. 다시 만나게 되어 다행입니다.
"효주, 어서 집에 돌아가. 나 중요한 일이 있어."
신기는 훌쩍 날아서 제주도 근처의 작은 바위섬에 착지했다. 그대로 드러누운 신기는 정보 단말에 정보를 요청했다.
'정보 좀 줘.'
정보 단말이 진실을 알려주었고 신기는 절망에 빠졌다.
- 그때 만난 건 신이 아닙니다. D입니다. 시간을 돌린 게 아니라 당신의 DPP를 소모해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고 원래 세상의 운명을 복사했습니다. 지금 원래 세상은 그대로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 가짜라는 건가?"
- 가짜는 아닙니다. 과거의 어느 시점을 그대로 복사한 후 조금만 변화를 준 다른 세상입니다. 복사하지 못한 건 당신과 D뿐입니다.
"그래서 D가 서양 드래곤 모습으로 보인 건가? 심장이 그것밖에 남지 않아서?"
- 현시점에서 D는 두 개의 심장이 있습니다. 시체용을 D가 삼켰습니다.
"좀비 드래곤을 처리한 게 D라고? 그럼 D와 엘프 여왕의 계약을 알아낸 건 그 때문인가?"
- 그렇습니다. D와 엘프 여왕은 원래 세계에서도 계약을 맺었습니다. 원래 세상과 지금 세상이 연결되어 있기에 이 세상에서도 그 계약 관계가 이어졌습니다.
엉켰던 실타래들이 모두 풀렸다. 신기가 새로 만들어진 세상에서 고군분투할 때, 원래 세상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시간을 돌린 게 아니라 새로 세상을 만들어서 신기를 던져버린 것이다.
"D는 어떻게 두 세상에 존재하지? 그리고 다른 초월자들도 말이야."
- 복사한 시점에 이미 두 세상이 연결되었기에 함께 복사되었습니다. 다만 해골용과 시체용만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시점에 이미 지구에 현신했기에, 당신과 D와 마찬가지로 운명이 뒤틀렸습니다.
"그럼 두 명의 D를 다 죽여야 하는 거야?"
- 당신이 의뢰를 받은 건 저쪽 세상입니다. 이쪽 세상이 어떻게 되든 당신과는 상관없습니다.
머리가 다시 복잡해졌다. 어려운 말이 아닌데 어렵다.
"저쪽 세상에도 내가 여전히 존재하는가?"
- 당신은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당시 초월자가 아니었기에 당신의 영혼을 이쪽 세상으로 옮겼습니다.
"그럼 왜 성휘 스킬이 없고 정보 단말 너도 함께 오지 않았지?"
- 성휘 스킬로 당신의 육신이 죽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과 저쪽 세상의 연결이 끊어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습니다.
신기는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지만, 알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질문만 거듭했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 오게 되었지?"
- 이 세상과 원래 세상은 처음 하나의 연결만 있었습니다. 성휘 스킬로 그 연결을 D가 끊지 못하도록 성휘로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 그러다 이쪽의 D가 원래 세상으로부터 힘을 빌리며 새로운 연결이 생겼습니다. 런던의 심장 조각이 원래 세상으로부터 힘을 전달받는 걸 확인했을 겁니다.
신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계의 D와 연결된 줄 알았는데, 정보단말의 말을 듣고 보니, 원래 세상의 D와 연결된 것이었다.
- 마지막 연결은 효주입니다. 당신이 진화 스킬을 사용하였고 효주의 영혼과 연결된 효천이 초월자가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 효주와 효천의 정신 연결이 더 강해지며 세 번째 연결이 생겼습니다.
- 셋은 매우 의미 있는 숫자입니다. 연결이 총 셋이 되면서 드디어 당신과 내가 다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D가 신으로 사칭했잖아. 신벌을 받는 게 아니야?"
- 당신이 개미가 어떤 일과를 보내는지 관심 없는 것처럼, 신도 누군가가 사칭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D는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래서 D의 행위는 정당합니다.
"무슨 계약? 계약 따위는 맺은 적이 없어."
- 당신은 시간을 되돌려 가족을 만날 수만 있다면 어떻게 되어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덕분에 D가 당신이 모은 모든 DPP를 소모해 새로운 세상을 복사하고 당신의 영혼을 이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제길. 불공정 계약이었군. 그런데 D는 어떻게 갑자기 똑똑해졌지?"
- 당신이 D가 소화하지 못하고 있던 심장들을 모조리 처리하면서 힘이 줄었습니다. 덕분에 억눌려 있던 지혜를 되찾은 겁니다. 지금의 당신도 마찬가지로, 과한 힘은 지혜를 누르고 과한 지혜는 힘을 갈구하다 파탄에 이르게 합니다. 힘과 지혜의 균형이 가장 중요합니다. 만약 당신이 두 세상을 오가며 3/4의 힘을 잃지 않았다면, 당신도 언젠가는 파탄을 일으켰을 겁니다.
신기는 과정을 정리했다. D는 심장이 적어질수록 똑똑해졌다. 그리고 자신의 승리 조건을 찾아냈다. 인류를 멸망의 운명으로 만든 후 다시 구하려고 방해꾼이고 위협적인 신기를 속여서 새 세상을 만들었다.
신기를 쫓아낸 후, D는 엘프 여왕과 계약을 맺었다. 신기 혼자만의 추측이지만, D가 지구를 차지하고 엘프 여왕이 이계를 차지하는 시나리오를 둘이 짠 듯하다. 그리고 원래 세상이 아닌 이 복사된 세상에서 둘이 목적을 이뤘다.
"D가 종족을 만든 게, 설마 저쪽 세상에서 죽은 후 이쪽에서 부활하려는 생각인가?"
- 정확합니다. 복사된 D는 능력이 부족하여 종족을 만들 수 없습니다. 원래 세상의 D가 엘프 여왕의 도움으로 열세 명의 권속을 만들었습니다. 저쪽 세상에서 D는 겨우 버티고 있습니다. 적당한 시기에 D가 죽고 이쪽 세상에서 바로 부활할 생각입니다. 심장 조각과 열셋의 권속이 있기에 부활 시간을 줄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건 나 때문인가?"
- 그렇습니다. 당신이 소멸의 빛 마법을 얻으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D의 행위는 신의 벌을 받지 않지만, 불공정한 계약의 반동으로 운명은 당신에게 유리하게 흘렀습니다.
머리가 복잡하다. 핵심만 말하자면, D는 원래 세상에서 무척 불리해졌다. 이쪽 세상으로 넘어올 생각인데, 그러려면 이 세상에 D가 없어야 한다. 그래서 새 세상의 D는 엘프 여왕과 함께 이계로 넘어갔고, 심장 조각과 열세 명을 통해 D는 이 세상에 부활하려 했다. 그런데 신기가 소멸의 빛 마법을 얻는 바람에 감히 건너오지 못하고 있다.
"난 어떻게 해야 하지?"
-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서 신의 의뢰를 완수하십시오. 그리고 신의 힘을 통해 세상을 바로잡으십시오.
"안돼. 내가 넘어가는 즉시 D가 이곳으로 넘어올 거야."
- 이 세상이 어떻게 되든 당신과 상관없습니다.
"이 세상도 가짜는 아니라며? 여기 내 가족이 있어. 다른 방법 없을까?"
- 연결을 전부 끊어버리면 됩니다.
"그러면 돌아갈 수 없는 거 아냐?"
- 재주 추방이 있습니다.
### DUAL SYSTEM ###
제주도.
신기는 꿈에서 봤던 장면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 되었다. 신부인 효주의 곁에 있는 사람은 대통령 강유성이다.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효주가 무표정으로 신기를 향해 다가왔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알지 못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혼례식이 끝났다. 신혼여행을 함께 할 전용기가 밖에 준비되어 있다. 부모님은 환하게 웃고 계셨고 동생은 이미 아내와 함께 전용기 안에서 둘을 기다리고 있다.
첫 목적지인 푸켓으로 가는 전용기 안에서 신기와 효주는 대화를 전혀 하지 않고 조용히 음악을 감상했다. 저녁에 이별이 예정되어 있다. 신기는 이미 정보 단말의 조언을 받아들여 새 세상과 원래 세상의 연결을 끊었다.
저쪽 세상에서 끊기 어렵지만, 이쪽 세상에서 신기가 끊는 건 매우 쉬웠다. 가장 먼저 D의 연결을 끊은 다음 심장 조각에 마법진을 새겨 바다에 던졌다. 마나가 가장 많은 곳이 바다여서 각성자 시스템이 꽤 오랜 시간 유지될 것이다.
다음 효주와 효천의 연결을 끊었다. 정보 단말이 알려준 방법대로 하니 무척 쉬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보 단말이 최초의 연결을 보호하던 성휘 스킬을 거뒀다. 신기가 최초의 연결까지 끊자 두 세상은 격리되었다.
그리고 신기는 효주를 찾아가 자신을 상대로 추방 스킬을 써 달라고 요구했고, 효주는 결혼식을 조건으로 걸었다. 결혼식만 치러주면 원하는 대로 해준다고 말했다. 그래서 신기는 효주와 결혼식을 올렸다.
'이대로도 좋지 않은가?'
D는 저쪽 세상에서 곧 소멸될 거라고 했다. 엘프 여왕이 보호하고 있지만, 기껏해야 수십 년 버틸 수 있다. 원래 세상의 D는 죽으면 부활할 수 없고, 이계로 간 D도 뭔가 수작을 부릴 힘이 부족하다.
'이 세상에는 가족도 있고 효주도 있고, 평화를 찾았고 나는 왕이 되었고.'
아무리 생각해도 원래 세상으로 꼭 돌아가야 하나 싶기도 하다.
'저쪽 세상에는 동료들이 있겠군. 누구 하나 죽지 않았다고 했지. 그러나 내가 돌아가면 누군가 죽을지도 몰라. 지금은 다른 초월자들이 엘프 여왕이 보호하는 D를 죽이려고 가만 놔두는 거라고 했어. 내가 돌아가면 다시 싸워야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또 누군가가 죽겠지.'
신기가 이대로 있는 게 두 세상에 모두 좋다.
'D가 죽은 다음 건너갈까? 효주가 늙어서 죽기 전에 나를 추방해 달라고 할까? 이 세상에서 최대한 행복한 삶을 즐기다가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신기는 효주의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무표정하게 있던 효주가 미소를 살포시 지었다. 그 미소가 너무 아름다워 신기는 오랫동안 그대로 있었다.
### DUAL SYSTEM ###
푸켓의 왕궁.
푸켓에는 신기의 왕궁이 있다. 푸켓의 왕궁을 돌보는 집사와 고용인들은 푸켓의 왕궁이 신기의 첫 신혼여행지가 된 것을 무상의 영광으로 느꼈다.
백 가지가 넘는 음식을 맛보고 푸켓의 아름다운 풍경을 질리도록 감상했다. 밤이 되어 왕궁에 돌아왔다. 정성스러운 마사지를 끝으로 방에는 둘만 남았다.
"삼촌, 가야 할 시간이네요."
"아냐, 급한 거 아냐. 며칠 더 있다가 가도 돼."
"아니에요. 얼른 가야 해요. 오래 있으면 둘 다 행복하지 못해요. 추억이 많을수록 나는 더 힘들 것이고, 삼촌도 힘들 거예요."
처음에는 신기가 돌아가고 싶어 효주에게 사정했는데 지금은 반대가 되었다.
"효천이 통해 저쪽 세상의 효주랑 대화했어요. 저쪽 세상의 효주도 삼촌 좋아하니까, 가서 꼭 효주랑 결혼해야 해요."
"내가 갑자기 사라지면 혼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삭초제근하러 갔다고 할게요. 왕이 비운 자리는 왕후가 잘 채울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떠나요."
신기는 핸드폰을 꺼내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사랑한다는 문자를 보냈다. 신구에게도 보낼까 하다가 포기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어요."
신기는 역할이 바뀐 게 아닌가 생각하다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생각을 비우지 않으면 너무 견디기 힘들다. 칼로 살을 갈기갈기 찢어도 이 정도로 아플까 싶다.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입술이 신기의 이마에 닿았다.
"추방."
신기의 모든 감각이 사라졌다. 어둠과 고독을 버무린 까만 공간이 신기를 반겼다.
### DUAL SYSTEM ###
제주도.
미지근한 느낌이 얼굴을 지났다. 그 느낌은 목과 팔 겨드랑이를 이어 배와 옆구리로 이어졌다. 그 느낌이 사타구니에 이르렀을 때, 신기는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
갓 이별한 효주가 신기의 사타구니에 손을 넣은 채 입을 크게 벌렸다. 그러나 너무 놀랐는지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신기가 눈을 밑으로 내리깔자, 효주는 급하게 손을 빼냈다. 그러다 실수를 깨닫고 다시 손을 넣어 신기의 몸을 닦던 수건도 꺼냈다.
"효주, 우리 결혼하자."
효주는 몸을 닦던 수건을 신기의 얼굴에 던진 후 몸을 돌려 밖으로 달려나갔다. 빨갛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보며, 저쪽 세상에 두고 온 효주가 생각났다. 저쪽 세상의 효주는 무척이나 당찼는데 여기 효주는 아직도 부끄럼쟁이였다.
- 귀환을 환영합니다. 전승을 시작하겠습니다.
이젠 느낄 수 있다. 허공에서 미지의 힘이 신기의 정수리를 통해 신기의 영혼에 뭔가를 자꾸 새겼다. 그 과정에 신기가 보유한 얼음 마법이 점점 늘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얼음 마법이 사라졌다.
그러고도 뭔가를 계속 새기더니, 신기는 이마에 뿔 하나 달린 얼음용과 연결되었다. 얼음용이 신기에게 반갑게 인사했고, 신기는 얼음용이 가진 거대한 힘에 압도되어 미처 응답을 못 했다.
이게 끝인가 싶었지만, 미지의 힘은 계속 뭔가를 새겼다. 제이크, 최영웅의 반가운 얼굴이 앞에 나타났지만, 신기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요코와 아즈미 그리고 효주가 한쪽 구석에서 '에?'를 연발하며 신기를 훔쳐봤지만, 신기는 그저 기다리기만 했다.
- 전승이 끝났습니다. 모든 스킬이 사라집니다. 지혜를 키우십시오. 과한 힘은 당신을 언젠가 파탄으로 몰아넣을 겁니다.
'걱정할 필요 없어. 세상을 구하면 이 모든 힘을 다 버릴 생각이거든.'
신기는 몸을 일으킨 후 가슴에 놓인 칼자루를 잡았다. 부러진 검은 자루가 칼날보다 더 길어 이상했지만, 신기는 이 '심판의 검'이 얼마나 격이 높은지 느껴졌다.
"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구를 구원하러 내가 돌아왔습니다."
밝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신기의 마음에는 슬픔이 가득 찼다.
- 작가의말
오늘 완결 내겠습니다.
푸켓을 푸껫으로 적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러면 어딘가 궁금해하실 분들이 더 많을 것 같아 그냥 푸켓으로 적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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