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을 말해봐
어둠.
시간이 출렁였다.
'시간이 얼마나 흐른 거지?'
신기는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자신이 살아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다. 심장이 뛰고 폐가 팽창과 수축을 반복하며 코와 입을 통해 기도로 산소를 들이켜고 이산화탄소를 뱉는 것이 살아있는 거라면, 아마 신기는 살아있다.
그러나 팔다리의 감각은 물론, 오줌이 마렵거나 엉덩이가 가렵다는 등 감각이 전혀 없다. 눈동자를 돌릴 힘도 없으니, 자기 상태가 어떤지 '객관적'으로 살필 여력도 전혀 없다.
'오케이. 시발 새끼.'
시간의 흐름을 잊고 지내다 보니, 한 가지 감정만 강하게 머리를 드는 일이 많다. 그래도 이번에는 증오로 불타올라 쉬울 것 같다. 슬픈 감정이나 자기 비하 혹은 측은지심이 강해질 때는, 거기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
몸을 일으킨 신기는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누려 했으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D를 조롱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심상 방뇨를 하려 했지만, 몸은 수분의 유출을 허락하지 않았다.
"아아, 시발 새끼야. 듣고 있어? 내 너를 꼭 조져버린다."
기린을 닮은 심장과 서양의 드래곤 형상을 한 심장이 다가왔지만, 신기는 침을 퉤 뱉고는 무시로 일관했다.
"큰 심장을 부수면 오랜 시간 공격받아야 하고, 그러면 내가 흔들려서 실수할 수도 있지. 난 꼬봉들부터 조진다."
굳이 입으로 소리 내어서 말을 꺼내는 건, D에게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들려주는 말이다. 신기는 자신의 정신 상태가 불안한 것을 똑똑히 알고 있다. 마치 자신이 미친 걸 아는 미친놈, 자신이 취한 걸 아는 주당과 같다고 할까. 혹시라도 자신이 실수로 큰 심장을 건드릴까 봐 조심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토끼 너다."
이 짓도 반복하다 보니 어느 심장이 작은 것인지 쉽게 구별이 되었다. 신기가 소환한 눈사람 거인이 토끼를 꽉 잡았다. 토끼의 몸보다 더 길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은 커다란 두 귀를 손으로 잡고, 토끼 꼬리라고 하기에는 무척 긴 꼬리를 발로 밟은 거인은 신기가 손쓰기를 기다렸다.
"설마(雪魔), 잘하고 있어. 돌아가면 까까 사줄 거야."
신기는 소환한 눈사람 거인에게 눈 마귀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아무 소리도 없이 조용했지만, 신기는 귀로 스걱 하는 환청을 들었다. 검으로 목을 베니 토끼의 형상이 서서히 흐릿해졌다. 막이 살짝 열리더니 그곳으로 마나가 새 나갔다. 봇물 터지듯 콸콸 쏟아지는 게 아니라, 모래에 물이 스며들 듯 서서히 사라졌다.
"협상하자."
"거절한다."
지금은 증오의 감정이 가장 강하기에 바로 거절했다. 전에 마음이 약해졌을 때 협상이랍시고 제시하는 조건을 들었는데, 그 내용이 가관이었다.
침입해 온 괴물들을 물리치려면 D와 인류가 협력해야 한다. 그러나 D가 DPP를 얻지 못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 그래서 우선 인류를 일정 숫자 이하로 줄여서 멸망하게 만든다. D가 DPP를 얻은 후 인류와 손잡고 괴물을 물리친다. D는 DPP를 얻고, 인류는 생존을 이룩하는 것이다. 거기에 D는 심장에 영구 마법진을 새겨 헌터 시스템이 영원하도록 하여 인류의 진화를 돕겠다고 했다.
초월자인 D로서는 정말로 후한 조건인 셈이다. 구성원을 갈아치우며 단체로밖에 생존을 이어가지 못하는 저급 생명체를, 개개인의 자격으로 살 수 있는 보다 높은 격의 생명체로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그 과정에 많은 구성원이 사라져서 집단을 이루기 부족한 숫자까지 줄어야 하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초월자가 될 자격을 얻을 수 있다.
신기를 비롯한 고등급 각성자들의 '방관'으로 인류가 멸망의 운명에 이르면, D의 도움으로 강해져서 침입자를 물리친다는 시나리오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바로 D가 살아있다면 인류의 운명은 멸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D가 현신하지 않았다면 몰라도, 이미 현신한 이상 운명의 흐름에 동참했다. 침입자를 다 물리치고 구멍을 막아도 D가 있기에 인류는 여전히 멸망할 운명이다.
"인류는 멸망하지만, 개개인의 인간은 살아갈 수 있다. 내가 부여하는 힘으로 이 세상에서 모여서 살 수 있다."
D의 말은 거짓이 아니라고 느껴졌으나 신기는 거부하기로 했다. 신기가 그저 자신과 주변인들의 생존만 바란다면 마음이 흔들렸을지 모르지만, 세상을 구원해 신으로부터 소원을 빌려는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
멸망의 운명이 바뀌지 않으면, 인간들은 적대적인 환경에서 어렵게 살아야 한다. 현대인의 정신이 강인한지 나약한지 신기는 모른다. 그러나 전 세계가 적대적인 환경에서 불굴의 의지로 삶을 이어 갈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다. 신기만 해도 D와의 싸움에서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 DUAL SYSTEM ###
어둠.
막이 출렁였다.
"어때? 네가 없으니까 인류가 속절없이 밀리고 있어. 인류의 운명이 멸망으로 바뀌는 순간, 내게는 막대한 DPP가 생길 것이고 나와 네가 적대하는 운명을 바꿀 것이다."
"첫째, 넌 지금 인류의 편에 선 게 아니라 적대하고 있다. 그러니 막대한 DPP가 생성되지 않는다."
"둘째, 너와 나의 운명은 DPP로 바꿀 수 없다. 둘 중 하나가 죽어야만 사라지는 운명이다."
"셋째, 내가 살아있는 한, 인류의 운명이 멸망으로 바뀔 가능성이 없다. 다양한 DNA가 보존되어 있기에, 인류는 종이 줄어서 멸망할 가능성이 1도 없다."
"넷째, 너는 DNA가 뭔지도 모르는 멍청이다. 유치원도 다닌 적이 없지?"
신기는 지금 휴식을 취하며 D가 보여주는 화면을 감상하고 있다. 신화에 나오는 미노타우로스를 닮은 괴물이 거대한 주먹으로 중국의 각성자들을 유린하고 있다. 철벽과 강화를 익힌 각성자들이 근근이 버티고 있지만, 사태 초반부터 마력 각성자들이 득세하는 바람에 제대로 된 고등급 기력 각성자가 드물다.
몸이야 D의 공격이 멈출 때마다 회복되지만, 정신은 쉽지 않다. 신기는 또래 중에서도 정신이 그렇게 성숙하고 강한 편이 아니다. 보호는 그저 외부의 부정적인 자극으로부터 오는 문제만 해결할 뿐, 신기의 성숙하지 못하고 강인하지 못한 정신으로 발생하는 문제는 속수무책이다.
그래서 신기는 지금 심장의 처리를 미루고 느긋하게 휴식하고 있다. 극한 상황에서 정신이 강해진다는 건 다 개소리다. 그저 그 상황에서도 정신을 놓지 않을 정도로 단련해주는 것일 뿐, 정신력은 태어날 때 타고나는 것이다.
"간섭자의 운명이 아니었다면, 네 나약한 정신은 애초에 부서졌을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너와 나의 운명 연결이 끊어질 것이고, 그때 너는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결국, 내 승리다."
"아냐, 정보 단말은 내가 이긴다고 했어. 아마 그때쯤 되면 정보 단말이 해결책을 알려줄 거야. 유치원에서 이런 걸 가르치는데, 네 부모님은 맞벌이 아니셨나 보다."
과하게 '냉정'하고 '조롱'적이던 감정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신기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일어섰다. 중국 각성자들의 비명이 바로 곁에서 지르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려왔지만, 신기는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설마, 누구를 잡을까요?"
신기의 마음을 알아챈 설마가 육중한 몸을 가볍게 움직여 눈이 여러 개 달린 양인지 염소인지 구별이 어려운 짐승을 붙잡았다. 양인지 염소인지 구별이 어려운 건, 괴물의 생김새가 난해한 게 아니고 그저 신기가 양과 염소가 어떻게 다른지 모르기 때문이다.
신기의 검이 양의 목을 자르고, 마나가 서서히 밖으로 빠져나갔다. 신기는 검을 품에 안은 후, 성휘를 펼치고 보호와 치유를 고정했다. 예전과 달리 시간제한이 사라지고, 신기의 명확한 의사에 따라 중단할 수 있다.
"오호, 성휘 스킬이 9레벨이 되었네. 이거 마스터하면 우리 사랑하는 D 씨를 한 방에 보내버리는 게 아닌지 몰라. 그간 무척 즐거웠는데. 데헷."
### DUAL SYSTEM ###
어두움.
신기는 성휘를 넓게 펼쳤다. 처음에 이 심상에 들어왔을 때는 심장을 하나밖에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오래' 거주하다 보니 익숙해져서 숨어있는 심장들을 모두 찾아내 소멸했다.
"아이고, 우리 멍든 도마뱀 씨랑 강시 기린 씨만 남았네그려."
똑같은 색이지만, 느낌은 달랐다.
"내가 보던 날개 달린 뱀은 이미 끌어냈고, 기린 씨는 맥이 보았던 거고 도마뱀 씨는 에릭이 보았던 거였지."
맥은 마력 각성자 중에서 최고라고 할 수 있고, 에릭은 비공식적으로 최초의 각성자다. 마력 각성자인 맥이 보는 기린과 기력 각성자인 에릭이 보는 서양 드래곤 사이에서 어느 놈을 먼저 처리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허공으로 침을 뱉기로 했다. 침이 날리는 방향의 심장을 처리하기로 하고 허공을 향해 퉤 했는데, 침이 나오지 않았다.
"목이 길어 슬픈 짐승아."
신기는 목이 길어 베기 좋은 기린을 처리하기로 했다. 검에 기력을 모으던 신기는, 갑자기 자신이 미친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아닌 사건의 진행으로만 뭔가 변화를 느낄 수 있어, 신기의 감정은 롤러코스터를 타고 오르락내리락을 수천 혹은 수만 번을 했다.
"얼음 상자."
얼음 상자로 기린을 가둔 후, 검으로 막을 찢었다. 수백만 개의 촉수가 상자를 끌어당겼다. 목을 베려다가 갑자기 변덕을 부린 건, 정보 단말의 적절한 개입 때문이다.
"미안. 둘 중 하나를 처리하고도 여기에 남아 있으면 내가 죽을 거라고 들었어. 그간 즐거웠다."
막을 찢고 밖으로 나가면서 기린 심장을 휙 끄집어냈다. D의 심상에 있을 때보다 더 깊은 어둠이 신기를 반겼다.
### DUAL SYSTEM ###
심한 어둠.
"소원을 말해봐."
"소시세요?"
"신이다."
"끝난 겁니까?"
"운명이 고정되었다. 현재 각성자들이 아이슬란드에서 D를 공격하고 있는데, 심장이 하나뿐인 D는 곧 죽을 것이다. 그리고 해골용과 시체용이 이미 처리되었다. 불사족의 구역은 인류의 영지가 되었기에, 멸망의 운명은 사라졌다. 인류 전체가 죽을 수는 있지만, 인류의 운명이 멸망으로 바뀌지 않았기에, 너는 임무를 완성한 셈이다."
"신은 되게 친절하시네요."
"너와 대화하기 위해 격을 수없이 낮췄다."
"설마 제 소원에 글자 수 제한이라든지, 한 문장에 다 표현해야 한다는지 그런 제한이 있는 건 아니죠?"
"최대한 길고 자세하게 말하거라.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네가 말한 것은 이루어지지만, 네가 말하지 않은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오래 생각해도 되죠?"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신기는 소용돌이치는 감정을 가라앉혔다. D와 대치하면서 받은 고통을 다 합치면 바위도 아파서 부서질 정도다. 그 탓에 신기는 지금 온갖 감정들이 난리 치고 있다.
"세계 평화도 이룰 수 있나요?"
"그게 소원이냐?"
"장난입니다."
여전히 제정신이 아닌 걸 깨달은 신기는 두 손으로 자기 입을 꽉 막았다. 온갖 잡생각이 떠올랐다가 가라앉고, 수많은 환각과 환상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습니까?"
"죽을 운명이어서 죽은 자는 살리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운명에 휘말려 죽은 자는 DPP를 사용하여 살릴 수 있다."
"DPP를 써야 한다고요? 설마 제 DPP를 소모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소비자 협회에 고발하면 신을 처벌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거 부당 계약 아닌가? 지금까지 사대보험도 없이 열심히 일했다고.
"네 DPP는 한 명 정도 살리기에는 충분하구나. 누구를 살리고 싶으냐?"
어머니는 전업주부셨다. 아버지가 출근할 때 늘 문 앞까지 바래다주었고, 돌아오면 허리 숙여 '오늘 하루 고생하셨습니다.'라고 인사했다. 신기나 동생이 아프면 늘 밤새 손을 잡고 곁을 지켜주었다.
아버지는 말수가 적은 분이시다. 신기가 명문대 경영학과에 차석으로 입학했을 때, 친구들의 축하 전화를 많이 받았다. 아버지는 친구들에게 '애가 잘 나서 그렇지, 내가 한 게 뭐 있다고.'라며 말을 아꼈다. 그러나 신기는 통화를 마치고 혼자 방에서 아자를 외치는 아버지의 모습을 몇 번이나 훔쳐보았다.
신기가 고등학교에 가서 학업 성적이 선두를 다투기 전까지는, 동생과 꽤 사이가 좋았다. 물론 중학교 때도 잘했지만, 그때는 공부가 쉬워서 다른 아이들과 큰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가서 공부가 어려워지자, 신기는 그대로인데 다른 애들이 나가떨어졌다.
그래도 밖에서 친구들 만날 때는 형 자랑을 자주 했다. 신기의 대학 입학이 확정되고 아버지가 게임기를 선물했을 때부터 동생과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었다. 게임기의 위력은 치킨을 시켰을 때 닭 다리 하나 양보하는 것의 위력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내가 지금까지 한 일이 얼만데, 왜 고작 한 명밖에 못 살려요?"
"네가 간섭자의 운명이기에 DPP가 상대적으로 적게 모였다."
"좀 더 생각해 보겠습니다."
정보 단말을 불렀지만, 신이 왕림해서 쫄았는지 응답이 없다. 응답하라, 정보 단말.
"제 가족들은 제 운명에 휩쓸려 죽은 겁니까?"
"그렇다. D가 구멍을 뚫었고, 그 여파로 네 운명이 바뀌었다. 네 운명의 변화에 가족들이 휩쓸린 것이다."
"DPP는 운명의 힘에 저항하려고 소모하는 것이죠?"
"그렇다."
"신은 무척 대단해서, DPP와 관련 없으면 뭐든 다 해줄 수 있죠?"
"그렇다."
"그럼 이렇게 해주세요. 시간을 되돌려 주세요. 제가 모은 DPP는 전부 소모해 우리 가족들이 죽지 않게 해주세요. 어차피 시간만 되돌리고, 모든 사람의 운명은 그대로니까 문제없는 거죠?"
"네 소원은 이루어졌다."
- 작가의말
일부 비문이 있는데, 일부러 그렇게 쓴 겁니다.
혹시 뒤통수가 얼얼하시다면, 큰소리로 저를 욕하세요. 그러나 댓글로 욕하진 말아 주세요. 전 소중하거든요.
몇 편 전에, 글 얼마 남았냐는 댓글에 매우 조심스럽게 답글 달아 드렸습니다. 보시면 거짓은 하나도 없다는 걸 느끼실 겁니다. 물론 진실도 없었습니다.
1부 끄읏.
2부 읏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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