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시대
울릉도 화산구.
박철은 미끼 스킬을 사용하다 감이 오자 곧바로 중단했다. 화산구에서 덩치가 커다란 회색 피부의 괴물들이 기어 나왔다. 자료에는 3미터라 적혀있는데 아무리 봐도 4미터는 더 되어 보였다. 물론 잡고 나서 재어보면 확실히 3미터 정도가 맞다.
신기는 검으로 구울 한 마리를 때렸다. 신기의 힘과 체력은 B급이 되면서 인간이 아닌 맹수라고 할 정도로 강해졌다. 물론 육체의 단단함은 여전히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기에 주먹으로 돌을 깨면 본인도 무척 아프다.
'강화 스킬이 그립다.'
B급이 될 때까지 신기는 간파 스킬만 새로 얻었다. 시스템과 호환성이 낮아서 F급부터 시작해서 스킬을 쉽게 얻지 못하는 거로 판단했다. 검은 구슬로 각성한 각성자 중에 스킬을 얻은 비율이 3%도 안 되는 걸 생각하면 나름대로 이해되는 일이다.
구울은 엎드려서 손발을 다 이용해 달리다가 신기가 공격하자 멈추고 일어섰다. 구울이 다리보다 더 긴 팔을 휘두르자 신기는 뒤로 훌쩍 물러섰다. 팔을 강하게 휘두른 구울은 몸을 휘청였다.
좀비와 해골을 상대하던 검과는 다르게 길이가 더 길고 검신이 더 두꺼운 검이다. 구울은 머리와 심장 모두가 약점이다. 그러나 심장은 구울의 긴 두 팔을 피해서 정확히 찌르기가 힘들고 머리도 역시 3미터의 체고 때문에 쉽게 공격할 수 없다.
신기의 검은 휘청이는 구울의 발목을 때렸다. 좀비와 해골보다는 낫지만 구울 역시 멍청해서 한쪽 발목만 끊으면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인간이나 동물이라면 발 하나를 사용하지 못한다 해도 달릴 수 있는데 구울은 그러지 못하고 기동력을 상실한다.
"앗싸, 성공."
신기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커다란 도끼를 든 최영웅이 환성을 질렀다. 용감함을 넘어 무모함이 어울리는 최영웅은 구울의 팔에 한 번 맞아주고 대신 무거운 도끼로 발목을 찍었다. 구울은 발목 하나를 잃자 제자리에서 허둥거렸다. 차라리 바닥에 앉거나 손으로 땅을 짚으면 되는데 그런 생각을 아예 안 하고 있다.
치유 능력자가 갈고리로 최영웅의 전투복을 걸어서 쭉 잡아당겼다. 어깨 부분에 갈고리를 쉽게 걸 수 있도록 장치를 해놓았다. 최영웅에게 치유를 사용하며 각성자가 툴툴거렸다.
"덕분에 스킬 숙련도가 쭉쭉 올라갑니다. 영웅 씨 참 감사하네요."
만약 남은 발목까지 찍으면 구울은 두 팔로 긴다. 가까운 사람을 공격하기도 하니 발목 하나만 찍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발목 하나만 잃은 구울은 허둥대며 각성자의 공격에 반응할 뿐 도주도 발악도 선택하지 않는다.
총을 든 각성자가 3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제자리에 멈춘 구울의 머리를 조준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소음기를 달았지만 소리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저 총소리를 다른 소리로 바꿔줘서 사람을 놀라게 하지 않을 뿐이다.
세 발을 쏘니 구울이 털썩 쓰러졌다. 그렇게 대부분 각성자는 팀을 이루거나 총기의 도움을 받아 구울을 처리했다. 그리고 또 신기만 남았다.
"구울을 스킬 수련 상대로 삼다니. 신 팀장은 참 대단한 사람이야."
신기에게 발목이 완전히 잡힌 구울을 버려두고 사람들은 다른 등대로 위치를 옮겼다. 장애물이 많이 설치되어 있고 지형이 복잡해서 좀비를 처리하기 편한 곳이다. 그리고 또 한 곳은 벽 높이 1미터의 미로를 만들어서 해골을 처리하기 무척 편하게 만들었다.
'느낌이 온다. 구울을 상대하면 확실히 스킬 경험치를 더 주는 것 같다.'
발목 하나를 잃고 제자리에서 샌드백이 된 구울을 상대로 신기는 검술을 수련했다. 구울의 두 팔이 너덜너덜해져서 공격에 제대로 반응도 못 할 지경이 되어서야 신기는 구울의 머리를 검으로 부숴서 마무리했다.
신기는 천천히 걸어서 좀비 등대로 향했다. 각성자들이 농담 삼아 좀비 방지턱이라고 이름 지은 발목 높이의 장애물들이 좀비들을 쓰러뜨렸다. 그러면 대가 3미터에서 4미터가 되는 기다란 무기로 각성자들이 멀리서 좀비의 목을 찍었다. 갈퀴와 비슷한 무기는 촘촘한 이빨로 좀비의 목에 구멍 몇 개씩 냈다.
일어서서 다시 돌진하던 좀비는 무릎 높이의 좀비 저승턱에 부딪힌 후 머리와 몸이 분리되었다. 단두파라고 이름 지은 무기에 의해 목이 약해진 좀비는 돌진하다 목이 부러져 제풀에 쓰러졌다.
신기는 좀비 등대에 도착한 후 바로 성휘를 펼쳤다. 구울의 시체는 가져다 연구해야 하기에 성휘를 펼치지 않았다. 좀비들의 동작이 한결 느려지자 각성자들은 더욱 빠르게 청소했다. 간혹 위험한 상황이 발생하면 신기가 정화로 좀비를 단숨에 쓰러뜨려서 동료를 지켜줬다.
좀비의 처리가 끝나자 효주의 개와 곰들이 구슬을 물어왔다. 효천과 다르게 다른 개와 곰들은 스킬을 얻지 못하거나 물어뜯기나 몸통 박치기 같은 스킬을 얻었다. 그러나 효주는 훈육 스킬로 이들에게 탐지 스킬을 임시로 부여해 구슬을 찾아오게 했다.
좀비가 사라지자 해골로 넘어갔다. 해골들은 미로를 이용해 편하게 머리를 부숴서 처리했다. 스킬이 없는 각성자들도 해골의 처리에 참여했다. 육체 능력이 뛰어나고 괴물에 대한 공포가 없어서 각성자로서는 아쉽지만 일반인보다는 훨씬 낫다.
그렇게 오전 내내 순회를 하자 점심이 가까워지고 괴물이 수십 혹은 수백 마리씩 나왔다. 박철과 일부 각성자를 남기고 남은 사람은 철수했다. 박철은 스킬의 수련을 위해 화산구에 남았다. 신기를 비롯한 많은 각성자가 있을 때와는 달리 화산구에 지어진 등대 안에 들어가서 미끼 스킬을 사용했다.
"비행기가 준비되었습니다. 바로 출발하시죠."
### DUAL SYSTEM ###
서울 미술관 지하.
강 회장과 김 비서 그리고 박영광과 신기가 묵묵히 TV 화면에 집중했다. 아랍인으로 보이는 자들이 신에게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경건한 기도가 끝난 후 이들은 검은 구슬을 삼키기 시작했다.
구슬을 삼킨 후 이들은 무릎을 꿇고 뭐라고 입속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시간이 지나자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자들이 속출했다. 수백 명의 사람 중에서 환호를 지르며 일어선 사람은 스물도 되지 않았다.
"신 전무 덕분에 우리가 저런 꼴이 나지 않았겠군."
신기를 통해 각성한 자들은 100% 각성에 성공했고 몸의 병까지 싹 나았다. 물론 신기가 치유 스킬을 수련하기 위해 공짜로 해준 서비스지만 대부분 사람은 구슬을 통한 각성의 작용으로 알고 있다.
이어지는 장면에 신기는 솜털이 곤두섰다. 날카로운 비수를 든 사내들이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의 배를 가르고 구슬을 다시 꺼냈다. 그리고 이들의 시체는 한쪽에 쌓은 후 석유를 뿌려 태워버렸다.
"저런 식으로 각성자를 늘인다고 합니다. 신의 시련이라 여기고 통과한 자들은 신의 전사로 귀한 대접을 받고 실패한 자들은 구슬을 다시 빼내고 시체를 불태웁니다. 저들의 말로는 신을 향한 믿음이 부족한 자들을 정화하는 거라고 합니다."
영상을 구해 온 박영광이 설명을 곁들였다. 강 회장이나 김 비서도 나름 야만의 시대를 헤쳐 온 맹수라 자처했지만 몰래 숨어서도 아니고 대낮에 훤한 곳에서 저런 짓을 하는 자들과 비교하면 온순한 양에 불과하다.
"중국, 북한, 아프리카, 심지어 미국에서도 벌어지는 일입니다. 물론 미국은 철저한 계약을 통해 모든 책임을 각성자에 지원한 개인에게 부담시킨다고 합니다."
"한국이라고 예외가 아니겠죠."
태운 그룹이야 신기가 있으니 걱정 없지만 다른 그룹들이나 정부 혹은 군부는 장담하지 못한다. 추측뿐이지만 각성자에 대한 인체 실험도 어디에선가 진행했거나 진행하고 있을 것이다.
"이 영상은 곧 퍼질 걸세. 어떻게 대응하는 게 좋은지 상의하세나. 아마 우리에게 도덕적인 비난이 몰릴 가능성도 있네. 검은 구슬로 안전하게 각성하는 방법을 토해내라고 여론으로 압박할 수도 있고."
박영광은 아직도 군에 있던 습관이 남아 있어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자유롭게 토론하고 상의하는 분위기에 여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침묵을 고수했다. 신기는 저런 비인간적인 짓을 어떻게 하면 없앨 수 있을지 고민했다.
"구슬을 받고 각성시켜 주는 건 어떻습니까?"
"자세하게 말해보게."
신기는 홍차로 목을 축인 다음 말을 이었다.
"각성에 필요한 구슬은 상대가 제공합니다. 각성에 성공하면 구슬 하나씩 받는 것이죠. 전 세계를 상대로 장사하면 적지 않은 소득입니다. 구슬로 각성시키는 데 평균 10개 정도 필요하니 대충 전 세계의 9% 정도의 구슬이 우리 손으로 들어온다고 보면 됩니다. 물론 실제로는 4%에서 5% 정도가 되겠죠."
신기는 아차 싶었다. 강 회장과 김 비서는 옛날 사람에 배움도 짧고 박영광 역시 문과 출신이다. 내용이 쉽고 어렵고를 떠나서 구체적인 수치가 들어가면 머리가 이해를 거부한다. 얼마나 이득인지는 천천히 따지고 어떤 이득이 있는지만 헤아리기로 했다.
"이 방식으로 구슬을 모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안정을 명목으로 구슬로 각성한 자들을 일정 시간 제주도에 머무르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하현주 부장이 제주도의 화산을 봉인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레벨업을 시켜주는 비용을 받아낼 수 있을 뿐 아니라 훌륭한 스킬을 얻은 각성자가 있으면 우리가 스카우트할 수도 있습니다."
"이름이 똑같은 스킬도 그 효용이 각각 다르다고 하는데, 본인이 입을 열지 않으면 어떻게 알아낼 수 있다는 말인가."
"저는 같은 파티에 소속된 모든 각성자의 스킬을 알 수 있습니다. 저만 가능하죠."
물론 동떨어져 있으면 불가능하다. 파티라는 거미줄로 이어져야만 한다. 강 회장이 고민에 잠긴 틈에 박영광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전무님, 제 스킬은 왜 발현이 안 되는 겁니까?"
"스킬 숙련도가 고급에 달해야 합니다. 울릉도에 임시 지휘부를 설치하고 당분간 스킬 수련에 몰두하시죠. 하현주 부장의 봉인 스킬도 고급부터 효력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박 이사님 스킬도 무척 대단한 게 아닐까 짐작합니다."
둘의 대화를 들은 강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업무가 안정되었다고 하니 당분간 신 전무 말대로 울릉도에 가서 개인 수련에 힘을 쏟게."
하현주 역시 신기의 제안에 따라 스킬 수련에 몰두하게 했다. 결과 파티 정보가 공개되며 위기에 처할 뻔한 상황을 하현주와 박철 둘로 극복했다. 물론 잡음과 비난이 없는 건 아니지만 뒤에서 밀어주는 힘이 부족해서 큰 파도를 만들지 못했다.
신기가 넌지시 박영광에게 수련을 권유하자 강 회장은 두 손 들고 찬성했다. 고급에야 발현하는 스킬이라니 하현주의 봉인처럼 중요한 스킬일 확률이 무척 높다. 무기가 많아서 낭패 볼 일은 없으니 백익무해한 결정이다.
지금 제주도에도 등대 설치 작업을 하고 있다. 제주도는 울릉도보다 괴물이 많이 나오기 때문에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아서 시간이 좀 더 걸린다. 그리고 제주도를 봉인하기 전에 울릉도에서 충분한 데이터를 뽑아내서 봉인이 가져올 영향력을 계산해야 하기에 아직 미루고 있다. 그래서 박영광은 요즘 한가한 편이다.
"우선 이 동영상을 풀고 우리 결정을 발표하게. 수수료로 얻은 구슬은 불치병에 걸린 어린아이들을 구하는 데 사용하도록 하지. 의료기술로 절대 어쩔 수 없는 아이들을 각성시켜서 건강하게 만들어 주자고."
"그 아이들은 일반 아이들과 다른 교육을 받으며 살아야겠군요. 그게 서로에게 좋을 것 같습니다."
박영광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효주는 몸무게가 또래와 비슷하지만 힘은 성인보다 더 강하다. 물론 힘만 강하고 싸우는 기술은 몰라서 전투력은 기대할 수 없다. 타격 거리도 무척 짧고 무기를 들었다 해도 회전 반경이 작아 힘을 제대로 싣지도 못한다.
그러나 육체 능력이 어른에 비견되는 아이들이 일반 아이들 무리에 끼면 괴물 취급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그래서 차라리 각성자 아이들은 따로 모아서 키우는 게 낫다.
"제주도에 각성자를 위한 학교와 여러 시설을 지어야겠네."
잠시 주저하던 강 회장이 결국 신기에게 질문했다.
"혹시 이 결정을 내린 건 더 강한 괴물이 출현할 것을 대비한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러니 중국과 연합하여 해저 화산을 봉인하는 프로젝트도 빠르게 추진해야 합니다."
중국의 잠수함 기술로 해저에서 화산을 찾아낸 후 하현주가 봉인하며 한국을 완전히 안전한 땅으로 만들 계획이다. 그리고 그 범위를 주변으로 차츰 넓혀서 언젠가는 괴물이 어디서도 기어 나오지 못하게 만들 생각이다.
- 작가의말
저는 기승전결을 꽤 중요시하는 편입니다. 그래서 초반에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글에 너무 임팩트를 주지 않으려 합니다. 이 글에서 그걸 극복하려 했는데 어느새 똑같은 길을 가고 있군요. 어쩔 수 없이 다음 글에서 제대로 시도해야겠습니다.
Comment ' 9